▲ 손가락 8개 절단 수술을 받을 예정인 박정헌(왼쪽)씨가 양손과 양발에 붕대를 맨 채 병원 휠체어에 앉아있다. 함께 조난당했던 후배 최강식(오른쪽)씨는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잘라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으나 수술을 거부하고 있다. (김창종기자 cj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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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산맥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남서쪽 17㎞ 지점 촐라체(Cholatse·6440m)봉. 국내 최정상급 ‘거벽(巨壁) 등반가’ 박정헌(34)씨와 고향(경남 진주) 후배 산악인 최강식(25·경상대3년)씨가 365일 햇빛 한줌 들지않는 북벽(北壁) 얼음 기둥을 등정한 기쁨은 불과 4시간30분만에 지옥 같은 고통으로 변했다.
1월16일 오후 4시쯤(현지시각). 정상에서 1100m쯤 내려간 해발 5300m 지점에서 후배 최씨가 갑자기 눈 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썩은 얼음’(등산용어로 녹은 얼음) 사이로 입을 벌리고 있던 깊이 50m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진 틈)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이다. 등반 전문가로서 발을 헛디딘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급경사에서 내려와 헬멧과 스크루 등 장비를 풀고, 서로를 연결한 자일만 남긴 상태였다.
얼음 벽에 온 몸이 부딪혔다. 1초나 지났을까? 길이 25m 자일이 팽팽하게 펴졌다. 1.5m 크기로 하늘이 몽롱하게 보였다. 호리병 같은 구멍이었다. 크레바스 20여m 밑에서 시체처럼 매달려 멍하게 5분….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꼭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치밀어 올랐다.
▲ 2005년 1월 16일 촐라체봉 5300m 지점 | |
크레바스 밖. 앞서 가던 선배는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몰아친 강한 충격에 정신을 잃었다. 크레바스에 빠진 후배 하중(몸무게 75㎏)에 못이겨 크레바스를 향해 끌려가던 선배(몸무게 71㎏)는 경사면에 충돌해 왼쪽 갈비뼈 7·8번이 부러졌다. 정신을 수습했을 때 후배의 생명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자일의 옥죄임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만큼 고통이 밀려들었다.
자일을 잘라 나라도 살 것인가? ‘꼭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크레바스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히말라야에서 다리를 못쓰는 동료 산악인과 함께 있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같으니까. 침묵이 흘렀다.
“형님, 살려주이소~.”
크레바스 안에서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후배의 투박한 절규가 울려퍼졌다. “다리가 부러졌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크레바스를 2m 앞둔 경사면에 벌떡 일어선 선배는 남은 힘을 열 손가락에 쏟아부어 자일을 움켜쥐었다. 후배는 감각이 사라진 다리로 필사적으로 자일에 매달렸다. 배낭 속 등강기(올라갈 때 이용하는 등반 장비)를 이용해 한 뼘 한 뼘 크레바스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부러진 갈비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온 몸에 고통을 전했다. 그런 사투의 구조작업 1시간. 햇빛이 비치는 크레바스 바깥으로 후배 최씨의 머리가 나타났다. “살았다!” 말이 없던 선배 박씨는 후배의 몸을 바깥으로 끌어낸 뒤 기쁨의 소리를 질렀다.
▲ 네팔사고지점 | |
지난 15일 서울 경희의료원 2508호실. 선배 박씨는 양손과 양발에 붕대를 두껍게 감고 있었다. 동상 후유증이다. 박씨는 18일 양손 엄지를 제외한 8개의 손가락을 잘라내는 수술을 받는다. 크레바스 위에서 후배의 자일을 쥔 손가락이다. 후배를 살린 대신 산악인으로서의 생명을 잃은 것이다.
후배 최씨는 손가락, 발가락을 모두 잘라야 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최씨는 수술을 거부하고 고향 진주로 내려가 경상대 병원에서 손가락, 발가락이 썩지 않도록 하는 치료를 받고 있다.
험한 거벽코스만 골라 8000m급 7봉 등정
▲ 촐라체 등반 직전 베이스캠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박정헌(왼쪽)씨와 최강식씨. 디지털카메라의 자동타이머 기능을 이용해 스스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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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헌(34)씨는 고산(高山) 거벽(巨壁) 등반가로 이름이 높다. 1989년 초오유(8201m) 남동벽을 필두로, 남에베레스트와 안나푸르나 남벽 등 8000m급 7곳을 등정했다. 그는 ‘노멀루트’(비교적 쉬운 등반로)보다는 험한 등로로 오르기를 고집해 왔다.
1992년 그는 고산 등반가들 사이에 ‘죽음의 산’이라 불리는 K2(8611m)를 산소통 없이 올라 한국 최초 ‘무산소 등정’ 기록을 세웠다. 2002년에는 시샤팡마(8026m) 남서벽을 정복, 한국 히말라야 원정사에 유일하게 새 루트를 만들며 주위를 놀라게 했다.
박씨는 1997년 삼천포산악회 동갑내기 회원인 정정엽(34)씨와 결혼해 현재 아들 성율(7), 딸 진희(5)를 두고 있다. 박씨의 고향 후배인 최강식(경상대 3년)씨는 2002년 인도 가로왈 히말라야를 박씨와 함께 등반했다. 이번 등반에서 선배 박씨와 함께 ‘촐라체 북벽 동계(冬季) 등정’이란 기록을 세웠으나, 정상에서 찍은 필름을 살기 위해 하산길에 버리고 왔다. 최씨는 “언젠가는 형과 함께 꼭 필름을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기적의 만남' 한국탐사대원들이 구출작전 100시간
장창락씨가 말하는 히말라야 조난 박정헌·최강식씨 후송기
▲ 장창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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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행방불명됐던 박정헌·최강식씨가 악전고투 끝에 야크 방목장 임시 숙소까지 내려 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카트만두에 전해진 것은 1월 19일 오후. 두 사람이 움막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해 피운 불로 인해 연기가 피어오르자 겨울을 나려고 산 아래 마을로 내려 갔던 움막 주인 ‘노인’이 이 연기를 보고 찾아온 것이 행운의 시작이었다. 이 노인은 이들의 메모를 받아 딸에게 전달, 중계함으로써 구조의 문을 열었다.
이후 촐라체 북벽 베이스 캠프를 지키고 있던 송성재(산악인)씨는 두 사람의 부상 정도를 알리고 구조헬기를 요청했다. 카트만두에선 한국 산악인들과 오랜 우정을 나눠온 앙도르지(산악인 전문 캠프 빌라에베레스트 대표)씨와 덴디(장비점 어드벤처 에베레스트 대표)씨 등 네팔인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카트만두에서 촐라체까지 가려면 루클라까지 비행기로 이동한 뒤 그후 5일간 걷는 것이 유일한 진입방법.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1주일 정도 더 걸린다.
셰르파 출신인 앙도르지씨는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만일의 사태에 대비, 이미 3000달러의 비용이 드는 헬기를 수배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날씨가 발목을 잡았다. 20일 하루 동안 강한 눈보라 속에 애를 태운 뒤 21일 새벽에야 구조헬기는 루클라로 향했고 오전 11시쯤에야 카트만두로 넘어 왔다. 네팔 의료진은 전문적인 동상 치료가 시급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마침 카트만두에는 충주와 청주지역 교사들로 구성된 ‘히말라야 오지학교 탐사대’가 랑탕히말 지역 학교 방문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있었다. 이들은 반도스포츠가 지원한 트레이닝복 100벌과 학교에서 수집해 선별한 헌옷 400벌, 여행경비를 절감해 마련한 학용품과 의약품(300만원 상당)을 해발 3000m가 넘는 오지 지역 학교에 전달하기 위해 1월 8일 네팔에 왔던 것. 탐사대 김영식 대장(충주 칠금중학교 교사)과 필자는 나머지 관광 일정을 중단하고 후송작전에 나섰다.
항공사측은 이들을 위해 1인당 4자리씩, 8자리를 비워 침상을 만들어주었으나 탑승장에서 이들의 심각한 부상 정도를 본 뒤에는 의사 동행 없이는 안 된다며 난색을 표명했다. 앙도르지씨가 다시 시내로 나가 의사의 소견서를 받아온 뒤에야 탑승이 허락됐고 후송팀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링거 주사를 꽂은 상태에서 방콕까지 3시간 비행 후 방콕에서 5시간 대기, 방콕에서 인천공항까지 다시 6시간의 긴 비행 끝에 23일 아침 박정헌·최강식 두 산 사나이는 동상 전문의가 있는 서울 경희의료원에 안착할 수 있었다.
움막에서 히말라야의 ‘산신령’이 보낸 노인을 만난 지 만 4일하고도 6시간 만의 일이었다
첫댓글 등반사고 당시에나 이후에도 굴하지않고 등반파트너간의 우정과 신뢰로써 꿋꿋하게 산악인답게 살아가는 이들이 너무나도 보여주는바가 큽니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나 안타까움에도 지금도 그들은 산에 갑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동료와 연결된 끈을 결코 놓지 않은 친구의 우정과 믿음이 진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사고당사자 박정헌씨가 실화를 바탕으로 직접 쓴 "끈" 을 읽어 보시면 각박한 세상에서 많은것들을 생각하게 해 줄겄입니다.찐한 감동의 드라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