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23.01.15 박경민글
친정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사실 친정 엄마라고 못 박을 필요가 없다.
애들아빠가 조실부모 하였기에 나한테는 애초부터 시어머니가 안 계셨다.
엄만 사흘이 멀다하고 눈 뜨고도 코 베간다는 서울 한복판에 우리 세 모녀가 살고있는게 여간 불안 하셨던지 낮이고 밤이고 전화를 하셨다.
애들 용돈 넉넉히 주라는 거였다.
애들이 돈이 없으면 딴짓을 하니 애들 용돈 떨기지 말라는 당부셨다.
애들 아빤 이 다음에 내 부모님을 우리가 모시자고 할 정도로 내 부모님께 잘했다.
내 부모님도 사우 셋중에 막내 사우를 젤루 예뻐 하셨었다.
애들아빠가 죽고 난 한번도 꿈에서 조차 생각도 안 해본 버스를 끌게 되었다.
사실 애들 용돈을 줄 형편이 못됐었다.
왕초보에 버스를 끌고 나가다 보면 여기저기 옆구리며 뒷범퍼며 빽미러며 매일 깨 먹고 긁혀 들어오는데 어떻게 애들 용돈을 넉넉히 줄수있단 말인가,,!!
여고시절이 떠올랐다.
우린 동아전과만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정석 2도 다 풀수있는 요술단지였다.
동아수련장을 풀다 막히면 동아전과를 찾아 답을 쓰면 다 해결됐기 때문이였다.
난 동아전과를 가져보질 못했다.
어려운 문제를 낑낑거리며 풀다 못풀면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로 달려가 애들 전과를 빌려서 베끼곤 했다.
양구읍에는 양구여고와 양구종고가 있었다.
양구종고는 송청리를 지나 양구시내 초입에 넓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양구여고는 서천을 건너 공병대가 있는 야산을 깍아 양지바른 언덕에 있었다.
양구읍에 사는 애들은 양구초, 비봉초를 나오면 여자애들은 양구여중, 남자애들은 양구중으로 나누어지고 중학교를 졸업하면 또 남자 여자 각각 종고와 여고로 나누어졌다.
양군군에는 5개 읍면으로 되어있고 각 면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면 양구읍내 여고나 종고로 통학을 해야만했다.
덜컹거리는 만원 버스에 매달려 책가방은 차창 밖에 붙들어 있고 남학생들은 창문으로 기어 들어가 간신히 붙잡아 타고 오는 그런 기히한 풍경을 우린 아무렇치도 않게 보면서 신나게 여겼다.
양구여고에 입학을하니 면 소재지에서 버스로 통학하는 애들이 엄척 부러웠다.
그 애들은 아침으로 저녁으로 만원 버스를 타고 다니느라 항상 주머니엔 용돈이 두둑했다.
난 도보로 걸어서 다녔기에 용돈이 필요없었다.
아예 용돈이란 자체가 없었다.
한 친구가 부모님께 아리스토텔레스를 산다며 용돈을 타 왔다고 자랑을했다.
발음이 생소하니 부모님 속이는데 안성마춤 이라고 했다.
나도 잔 꾀를내서 엄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길래 새벽같이 일어나 일손을 거드는척 작은 목소리로 엄마, 오늘 아리스토텔레스 사야해 했더니 그게 머냐고 하시길래, 그런거 있어 선생님이 오늘까지 가져오래 했더니 엄마가 앞주머니에서 뒤적거리더니 천원짜리 몇장을 꺼내 주셨다.
때마침 아버지가 기침을 하시더니 먼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사냐며 호통을 치셨다.
엄만 이북에서 피난을나와 학교 공부는 거의 못하셨고 아버진 법대를 나오신 수재셨다. 엄만 이노므 간나가 애미를 속인다며 부지깽이로 내 등짝을 한대 내리치고는 겨우 천원 짜리 한 장을 받는데 그나마 성공을 했다.
난 아픈것도 잊은채 꽁돈이 생겨서 아침도 안먹고 학교로 내빼갔다.
그리하여 그날 하교길에 학교밑에 구멍 가게에서 누가바 하나를 입에 물수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듯이 우리가 다들 재잘거리며 우루루 가게 안으로 밀물이 몰려 들듯이 왕창 들어가면 아주머니는 정신이 없다며 소리를 치시곤 했다.
양구 읍에는 두개의 서점이 있었다.
겨울이되면 신광서점엔 무수히 많은 새학기 전과와 수련장이 펼쳐져 있었다.
양일서점은 양구 버스터미널 근처에 있었고 신광서점은 양구 명동 중앙통에 있었다.
우리집은 중앙통에서 옆골목으로 쭉 내려 오면 상1리에 있었다.
자야는 나랑 같이 양구초 양구여중 양구여고를 다녔고 중간에 서울로 전학을 갔다.
자야는 부자집 신광서점 딸이였다.
그애가 부러웠다.
맛있는 빵으로 가득찬 고려당 옆에 커다란 신광서점은 내가 갖고 싶은 모든게 다 있었다.
양일서점은 우리 양구여고 1년 선배네 가게 였는데 쌍둥이였다.
너무나 똑같아 매일 누가 누군지 햇갈렸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연하장, 형형색깔의 카드가 서점앞에 줄비하게 꽂혀져 있었다.
그중에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가 그려진 카드가 내 눈에 띄였다.
천경자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지만 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꼭 용돈을 모았다가 미인도가 그려진 카드를 사서 담임 선생님이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성탄 카드를 정성껏 써서 크리스마스 실을 붙여서 우체국에 갖다 부치곤 했었다.
엄만, 왜 그때 나 한테는 용돈을 안 줬으면서 내 애들한테는 용돈을 주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비가 오면 난 비료 푸대를 쓰고 학교에 갔다.
다른 애들은 빨강, 노랑 예쁜 우산을 쓰고 다니는데 난 한번도 우산을 쓰고 폼나게 빗 속을 걸어보질 못했다.
난 창피해서 아예 비료 푸대를 집어 던지고 골목 골목 처마 밑으로 뛰면서 국민학교를 다녔다.
우산도 없고 용돈도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산다고 결국 들켜서 욕만 바가지로 먹고 자란 내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겨울비가 추덕추덕 내렸다.
인사동을 갔다 오는데 비가 내렸다.
핑크색 우산을 폼나게 쓰고 빗속을 걸어갔다.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몇자 적어본다.
어떠한 학문도 남기지 않은 소크라테스는 제자 플라톤으로 하여금 유명해졌다.
제자를 잘둔 덕에 소크라테스는 세세토록 명성이 끊이질 않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다.
소크라테스가 죄없이 사형을 선고 받고 독배를 마셨던 것과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시민이 두번 다시 철학에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떠난다 라는 말을 남기고 칼키스로 망명을 해버렸다.
그는 현실의 감각 세계를 초월한 이데아가 따로 있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개개의 사물이야말로 참다운 의미에서 실제이자 실체라는 것이다 라고 했다.
학창시절 철학이 먼지도 모르고 낄낄거렸던 그것이 결국 철학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