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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두개의 얼굴(1)
오후 9시25분. 서울발 도쿄행 JAL 219편기 안.
보잉 747기는 그 거대한 기체를
마치 고공 속에 떠받쳐놓은 것처럼
조금의 동요도 없이 조용히 비행하고 있었다.
서울 김포공항을 이륙한 지 40분이 지났기 때문에
승객들은 긴장을 풀고 주위를 둘러보기도 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하고 일행을 찾아
자리를 옮기기도 하는 등
조금은 산만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배창기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출발할 때부터 기침을 참으려고
애를 쓰면서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그의 옆 얼굴을 들여다보곤 했다.
그들은 서로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통로를 굴러오던 카트가
창기가 앉아 있는 열 옆에서 멎었다.
카트 위에는 음식이 담긴 플래스틱 용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저녁 식사를 내밀자
미치코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창기가 눈을 떴다.
그는 물을 한 잔 달라고 말했다.
미치코는 주스를 요구했다.
스튜어디는 물 한 잔과 주스 한 잔을 내려놓고 나서
다음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창기는 연한 잿빛이 나는 양복을 입고 있었다.
실내에는 시원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계속 땀을 흘리고 있었고
미치코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것을 닦아주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얼굴이 유난히도 희어 보였다.
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은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창으로 빗방울이 부딪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창에 부딪힌 빗방울은 산산이 흩어지면서
비산하고 있었다.
김포를 출발할 때만 해도 맑은 날씨였는데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얼굴을 돌려 미치코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만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가방을 들고 가만히 사라져.
아는 체하지 말고 사라지란 말이야."
일본 아가씨는 공포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해. 그렇게 하는 좋아.
시끄러운 일에 말려들 필요가 없잖아."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서 울음을 삼켰다.
눈물이 볼을 타고 소리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쿄에 도착하면......
어쩌면 수사관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없으면 다행이지만......."
그는 한숨을 내쉬고 나서
호주머니 속에서 약봉지를 꺼냈다.
봉지 안에는 빨간색의 캡슐과 함께
하얀 알약들이 들어 있었다.
그는 캡슐 두 개와 알약 한 개를 꺼내
그것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입속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플래스틱 용기에 담겨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약이 물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몸 안으로 흘러 들었고 다시 한번 물을 마셨다.
그것은 기침을 멎게 하고 열을 내리게 하고
폐 속에 들어차기 시작한 가래를 제거시켜 주는
역할 등을 하는 약으로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친구인 민원장이 지어준 것이었다.
그는 계속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민원장은 수시로 약을 바꾸어가며 조제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약을 지어주긴 했지만
그의 죽음을 시간 문제로 보고 있었다.
창기가 세 번째로 물을 마시기 위해 잔을 들어 올렸을 때
그의 손에서 잔이 굴러떨어졌다.
그는 잔을 들고 있던 손을 펴면서
갑자기 자신의 목을 움켜잡았다.
입이 벌어지면서 눈이 커지고 있었다.
"아니, 왜 그래요?"
그는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면서
두 손으로 가슴과 배를 쥐어뜯었다.
입에서는 신음 소리와 함께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거칠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도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당황한 미치코는 뛰쳐 일어나
앞쪽에 서 있는 스튜어디스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의사! 의사를 불러줘요!"하고 소리쳤다.
스튜어디스가 달려왔을 때 창기는 배를 움켜잡은 채
통로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내장을 뜯어내는 것 같은 고통에
도저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화장실 쪽으로 가서
물을 실컷 마시고 싶다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이게 바로 에이즈 환자의 말로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말로치고는 너무 갑작스럽고 고통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승객들이 놀란 모습으로 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사를 찾는 스튜어디스의
다급한 아나운스먼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아니야.
누군가가 약에다 극약을 넣은 게 틀림없어.
민원장이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그의 생각은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미치코가 쓰러질 듯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그는 무릎을 꺾었다.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추한 모습을 남에게 그런데.......
그의 생각은 이어지지가 않았다.
그는 몸을 한 바퀴 돌렸다가 뒤로 벌렁 쓰러졌다.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는 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치코......."
그가 마지막으로 부르고 싶은 이름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말도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들이 이를 드러낸 채
깔깔대며 웃는 것 같더니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데 뒤엉키는 것 같더니
마치 안개처럼 형체도 없이 그의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그는 자신에게는 마지막이 될 지상의 공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가 알고 있는 비밀마저도 마셔버린 것 같았다.
그 위에 상체를 구부리고 있던 의사가
몸을 일으키면서 머리를 흔들었다.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남자 승무원들은 승객들을 모두 쫓아 보냈다.
그리고 시체를 일단 뒤쪽으로 옮긴 다음 시트로 덮어 두었다.
비행기는 예정대로 비행하고 있으니
승객들은 동요하지 말라는
아나운스먼트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실례지만...... 사망한 승객분하고 동행되십니까?"
자리에 앉아 있는 미치코 곁으로 다가온 승무원이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아뇨."
"동행 같다고 하던데요?"
주위에 앉아 있는 승객들 말을
이미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승무원은 그렇게 물었다.
"비행기 안에서 알았을 뿐이에요."
냉랭한 어조에 승무원은
더이상 말을 붙여보지 못하고 물러섰다.
JAL 219편기는 예정대로 비행했다.
그리고 두 시간 후인 10시 45분에
정확히 나리타 공항에 착륙했다.
미치코는 선반에서 창기의 가방을 끌어 내렸다.
그것은 소가죽으로 만든 여행 가방이었다.
그는 죽으면서 그것을 그녀에게 선물로 남겼다.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것을 든 채
승객들 속에 섞여 비행기 밖으로 나갔다.
승객들이 앞문을 통해 내리는 동안 그들과 엇갈려
수사관들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 네 명이었다.
비행기 밑에는 이미 앰블런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앰블런스에서 흰 가운 차림의 남자들이 내리더니
비를 피해 비행기 밑으로 들어갔다.
먼저 비행기 안으로 들어온 일본인 수사관들은
죽은 사람의 신원을 확인한 다음
승무원들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로 그자 아니야?"
상급자인 듯한 사내가 담배를 뽑아 물면서 물었다.
그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올백으로 머리를 빗어넘긴
매끄럽게 생긴 수사관이 내려다보았다.
"제기랄, 오늘 밤 또 늦겠어."
"타살 같은데요."
뒷문이 열리자 비바람이 몰려들어 왔다.
사람들이 다니는 로딩 브리지를 피해
몰래 시체를 끌어내기 위해 뒷문 쪽의 계단에
갖다 붙여지고 그쪽으로 사람들이 올라왔다.
흰 가운 차림의 사내들이 올라오더니
시트에 덮인 시체는 들여다보지 않은 채
그것을 들것에 실어 밖으로 운반해 나갔다.
최형사는 일본 쪽으로부터의 전화가 오기를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웬일인지 전화가 오지 않고 있었다.
여권을 휴대하고 일본으로 도망친 것을 확인한 그는
즉시 그 사실을 상부에 보고,
비행기가 일본에 도착하는 대로 일본 경찰이
배창기를 체포할 수 있도록 손을 써줄 것을 요청했다.
배창기는 살인사건 용의자이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위조 여권을 휴대한 것만으로도
일본 경찰은 그를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일본 경찰로부터 범인을 인도받을 수
있을 것인지 하는 문제는 나중의 일이었다.
우선 배창기의 신병을 확보해두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경찰 상부는 마침내 일본 경찰에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자정이 지나자 최형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상호 연락을 취하기로 했기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갑니다. 물어보십시오."
그는 전화기를 계장 앞에다 같다 놓았다.
수사본부 안에서 구계장은
일본 말을 능숙하게 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성질도 급하군."
계장은 졸고 있다 말고 수화기를 귀에다 갖다 댔다.
계장은 일본 말을 지껄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생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그는 유난스레 몸을 움직여가며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시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걸려던 참이었습니다.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아서 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탁하신 건은 유감스럽게 됐습니다."라며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부탁하신 인물이 비행기 안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네에?"
"정말 유감입니다.
출발한 지 40분쯤 지나서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갑자기 배를 움켜쥐면서 쓰러졌다고 합니다.
의사가 있긴 했지만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서
손을 쓰지 못한 모양입니다.
비행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해 있었습니다.
정말 유감입니다."
"유감이군요. 사망 원인은 밝혀졌습니까?"
"독살 같습니다.
곧 결과가 나오겠지만 그렇게 보시는 것이......."
우리측에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사체도 인수할 겸......."
"수고가 많으십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정말 유감입니다."
전화를 끊고 난 구계장은 핏발선 눈으로 부하들을 노려보았다.
"배창기는 비행기 안에서 독살당했어!"
"아니, 뭐라구요?“
경악하는 부하들을 계속 쏘아보면서
계장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구계장이 허둥지둥 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도
수사관들은 한동안 얼빠진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거센 비바람에 창문이 유난히도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헛다리만 짚고 있었군요."
남형사가 자조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배사장이 살해될 줄이야 누가 알았나."
조형사는 말없이 눈만 굴리고 있었다.
"배사장까지 죽인 걸 보면
범인은 막판에 몰린 것 같은데요."
남형사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그는 최형사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나오미를 독살시킨 자가
결국 배사장도 독살시킨 겁니다.
광개는 제외시켜 놓더라도 말입니다."
점을 찍어놓은 것 같은 최형사의 조그만 두눈이
더욱 작아지면서 그 간격도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더니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배미화한테 전화를 걸어."하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어떤 결심이 서린 것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한참 신호를 보냈지만 배미화의 집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남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최형사를 쳐다보았다.
"받지 않는데요. 깊이 잠이 든 모양인데요."
그들이 알기로는 배미화의 집에는 이제 배미화와
그녀의 어머니 이렇게 두 모녀만이 남아 있다.
최형사는 이마를 짚고 있던 두 손을 내렸다.
그리고 아까보다 더 힘없는 목소리로
"가서 배미화를 데리고와."하고 말했다.
"체포할까요?"
"체포?"
그는 멈칫해서 남형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의 형사가 즉시 출동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배창기의 집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창기가 죽었으니 이제 그 저택은
미화의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한참 동안 초인종을 눌러됐지만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마치 빈 집처럼 아무런 기척도 없이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미친 듯이 무섭게 짖어대는 개소리만 아니라면
빈집으로 생각될 정도로
그 집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전에는 개가 없었는데."
그 집에서 개를 본 적이 없었음을 생각하면서
남형사가 중얼거렸다.
집은 큰데 실제 살고있는 사람이 적으니까
개를 키우는가 보다 생각했다/
개가 담을 올려다보았다.
담은 꽤나 높아 보였다.
조형사를 엎드리게 한 다음 그는 담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바로 담 밑에서 시커먼 개 한 마리가
그가 내려오기만 하면 물어뜯을 듯이
눈에 불을 켜고 무섭게 짖어대고 있었다.
그 기세가 하도 사나웠기 때문에
남형사는 감히 담 밑으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 방 갈겨버려!"
밑에서 염형사가 말했다.
남형사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주민들이 놀라 깰까 봐 신경이 쓰였지만
개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이 달리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개를 겨누는 대신 총구를
공중으로 향한 다음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는 어둠과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남형사 자신도 하마터면
담 위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총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시커먼 개의 모습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남형사는 담 밑으로 뛰어내린 다음 대문부터 열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현관 앞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려보았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현관문도 창문도 모두 잠겨 있었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들 중에 그래도 남형사가 제일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집 뒤로 돌아가더니 부엌으로 통하는
창문 하나를 거침없이 깬 다음 그곳을 통해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불을 켰다.
실내 등이 켜지면서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집안에는 예상했던 대로 아무도 없었다.
집안을 샅샅이 돌아 다녀보았지만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집안은 많이 어질러져 있었고
급하게 떠난 듯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남형사는 흥분해서 최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안에 아무도 없습니다.
배미화는 물론 그녀의 어머니도 보이지 않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개 한 마리뿐입니다.
급하게 떠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도망친 게 분명합니다.
당장 수배해야겠습니다."
최형사와 남형사는 도쿄행 첫 비행기를 탔다.
8시 15분에 출발하는 KAL기였다.
국내를 처음 벗어나 보는 남형사는 퍽이나
감동적인 의미와 새로운 생활 환경에 흥분해 있었다.
배창기의 시신을 인수해 오기 위해
그의 회사 쪽에 연락을 취해 간부사원과 함께
동행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일단 그들이 먼저 출발했다.
다음날 회사쪽 사람들은 출국에 필요한 서류를 갖춘 다음
오후 비행기로나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나리타 공항에는 사전에 연락을 받은
일본 경찰 관계자들이 나와 있었다.
최형사 일행과는 달리 일본 측
사나이들은 하나같이 매끈한 차림새였다.
"청산염에 의한 독살로 밝혀졌습니다."
시신이 안치되어있는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요시다라고 하는
코밑 수염의 사나이가 설명했다.
그에게서는 향수 냄새가 역겨울 정도로 풍겨오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바깥 풍경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
"피살자는 살인사건 수배자라고 하셨죠?"
"네, 그렇긴 합니다만...."
머리를 올백으로 빗어넘긴 사내가
한국말로 서투르게 통역을 해주었다.
그는 한국에서 얼마 동안 근무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수배자가 살해됐다면...... 문제가 복잡해지겠군요?"
"뭐 그렇지도 않습니다."
최형사는 심사가 사나워져 있었다.
그는 시종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참, 피살자와 동행한 사람은 없었습니까?"하고
남형사가 물었다.
그의 말을 제비족처럼 생긴 형사가 통역해
"그렇지 않아도 그쪽을 조사해 봤는데......
젊은 여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일본 아가씨인데......
본인은 한사코 부인을 하고 있어서
심증은 가지만 단정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일본 아가씨라면...... 혹시 미치코라는 여대생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그 아가씨를 아십니까?"
요시다가 놀란 표정으로 최형사를 돌아보았다.
"그 아가씨가 피살자의 연인이라는 거......
벌써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 관계는 특별하다고 할 정도로 깊었습니다.
보통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연인 이상의 관계였습니다."
"아하, 그래요?!"
그는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일본 아가씨가 한국 남자와 연인관계였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았다.
"그 아가씨를 만나보고 싶은데요."
"그거야 어렵지 않지요.
신병은 이미 확보되어있는 상태니까요."
병원에 도착한 그들은 곧장 시체 안치실로 향했다.
배창기의 시신은 냉동상태로
철제 박스 속에 들어가 있었다.
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고 발가락에 달려있는 꼬리표에는
"崔太錫 韓國人"이라고 적혀 있었다.
위조 여권에 적혀 있는 이름을 그대로 적어둔 것이다.
배창기의 얼굴은 살아 있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보였다.
안경도 끼어 있지 않고 천장을 향해 초점없이 열려 있었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생소해 보였다.
최형사는 한동안 시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잠자코 손을 뻗어 그 눈을 감겨주었다.
"이 사람...... 직업은 뭡니까?"
요시다가 물었다.
"호텔업 외에 서너 가지 사업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인가요?"
"네, 대단한 부자이지요."
"아무리 부자라도 죽었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리를 옮겨 검시의의 방으로 들어갔다.
검시의는 생각보다는 아주 젊어 보였다.
그는 서류를 들여다보고 나서
"위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검사해 봤더니
청산염이 검출됐습니다.
치사량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청산염은 이 속에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약봉지를 꺼내더니 그것을 그릇 속에다 놓고 엎었다.
흰색과 빨간색의 알약 몇 개가
그릇 속으로 떨어져나왔다.
젊은 검시의는 빨간색의 알약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캡슐이었다.
그는 그것을 두 조각으로 분리해냈다.
캡슐 속에는 하얀 분말이 들어 있었다.
"이건 진통제의 일종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 청산염이 섞여 있었습니다.
모두 섞여 있는 게 아니고 일부에 섞여 있었습니다."
"혹시 진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첨가한....
통역을 통해 최형사의 말을 알아들은 검시의는
멸시하는 듯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진통의 효과를 높이려면 헤로인 같은 마약을 쓰지
이런 독약을 쓰지는 않습니다.
이건 진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첨가한 게 아니고
사람을 죽이기 위해 첨가한 겁니다."
"민원장이 지어준 약입니다."
약봉지를 들여다보면서 남형사가 재빨리 말했다.
"민원장은 아니야.
배창기의 약봉지에 자연스럽게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이야.
배미화나...... 미치코 같은......."
최형사는 요시다쪽을 쳐다보았다.
"미치코양을 좀 만나볼 수 없을까요?"
한국인 형사들은 일본인 형사들을 따라 병원을 나왔다.
미치코는 경찰서에 임시로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이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는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한쪽에 간이 침대가 있었는데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요시다가 불러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상한데요."
남형사의 중얼거리는 말에
최형사는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 보았다.
그때 요시다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상체가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어지는 듯하다가
갑자기 몸뚱이 전체가 바닥으로
몸뚱이는 바닥 위로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 버렸다.
"미치코!"
요시다가 놀라 소리 지르면서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여자의 두 눈이 초점없이 떠 있는 것이 보였다.
옆으로 힘없이 기울어지는 머리를
손으로 받치면서 요시다는 머리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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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이고. 죽는사람이 많네요.
배창기에 이어 미치코 까지 죽는것이나요?
남은인물은 배미화뿐이구먼요.
죽고 죽이고
얽히고 설키고
그렇고 그런 세상이 돼 버렸지요?
이제 마지막만 남았습니다!
과연 범인은 누구인지 기가 막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