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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토결전'의 대비해 만든 제주의 동굴기지들!~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 제주.
제주 해안 곳곳엔 암벽을 뚫어 만든 동굴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일제의 특공해군병기가 숨어있다.
"미국 군함에게 직접 부딪혀서
그 군함을 침몰시킬 목적으로..."
태평양 전쟁 말기 폭탄을 싣고 적함을 돌진했던 가미카제.
제주에서 또 다른 가미카제가 준비되고 있었다.
제주도는 일제의 자살특공기지였다!
"1945년 봄, 태평양 전쟁은 말기로 접어들었고
일본은 이미 패전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미군의 본토상륙을 최대한 막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제주에 총력을 집중했습니다."
제주 한림 앞바다 비양도.
오래전부터 이곳 주민들 사이엔
바다 속에 무기가 산재한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다이버와 함께 바다 속을 탐사해보기로 했다.
10미터쯤의 수심에 이르자,
붉은색 기운의 쇠붙이들이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랜 세월 부식되어 형체조차 분간하기 어렵다.
모레를 거둬내자 다른 형태의 쇠붙이가 드러났다.
위협적인 타원형 물체, 포탄이다.
(이런 무기들이 자주 발견되고 있습니까?)
"예. 제가 지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해녀들한테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제가 직접 바다로 들어가서 다이빙 해보기도 하고
그리고 어부들의 그물에 걸리는 것을 이야기 들어보면,
거의 일본군이 사용하던 총알이나 대포도 많이 보이고
그리고 조천쪽에는 일본군이 쓰던 칼 같은 것도 보입니다."
- 김건태, 수중촬영
왜 제주 앞바다에 일본군의 무기가 있는 것일까?
미연방정부의 모든 문서를 기록하고 있는 국립문서보관소.
이곳에 제주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담은 사진들이 보관되어 있다.
1945년 8월 종전협약에 따라
일본군은 제주도 전역에 배치한 무기들을 모아 폭파하거나 바다에 던져 폐기했다.
미군에 보고된 무기는 총 60여 종, 9만여 점에 달한다.
99식 소총과 중기관총 총 3만 2천 점,
박격포와 각종 대포 457문,
탱크 12대와 다수의 비행기까지 있었다.
무기는 미군의 본토상륙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제주에 배치되었다.
수도 도쿄가 폭격당하고 미군의 본토상륙이 임박하자
일제는 이를 지연시키기 위해 총력을 집중한다.
이른바 '본토결전'이다.
일제는 전 영토를 일곱 개 구역으로 나누어서 최후의 저지선을 구축했다.
제주는 결7호, 본토 밖의 유일한 지역이었다.
결7호작전에 따라 제주엔 화력이 집중되었다.
제주 남서부에 위치한 단산.
능선 곳곳에 동굴이 있다.
단산은 산 전체가 단단한 해저분출물로 만들어진 퇴적층으로 이뤄져 있다.
일제는 이곳 암반을 뚫어 70미터에 달하는 지하갱도를 구축했다.
갱도의 한쪽끝에는 콘크리트로 된 토치카가 있다.
토치카의 총알은 해안을 향해 있다.
해안에 상륙하는 미군과의 일전에 대비한 것이다.
"저기서 계단 따라 내려오면 이 방이 만들어져 있고
이 방에서 보시면 앞에 총안구가 만들어져 있고
총을 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거든요."
- 오문필 교장, 한라산 등산학교
단산과 나란히 제주도 해안을 마주보고 있는 산방산.
이곳에도 동굴이 있다.
직경 2미터, 넓이 1미터 50센치미터, 길이는 50미터에 이른다.
단단한 용암석을 광부들까지 동원해 깍아 만들었다.
동굴은 남서쪽에서 동북쪽으로, 산방산 칠부능선을 향해 만들었다.
"저 앞에 저기가 어딘가요?"
"여기서 마주 보이는 곳이 월라봉 진지입니다."
산방산과 월라봉 진지는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곳은 제주 남서부 해안.
일제는 미군이 모슬포 해안으로 상륙할 것을 예산하고
단산에서 산방산, 월라봉, 군산에 이르는 남서부 해안 방어선을 구축해놓은 것이다.
"일본이 최종적으로 미국을 이길 수는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한 번 싸워 천황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 포기하겠다,
어디선가 한 번이라도 꼭 이기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해안 결전을 선택했습니다."
- 츠카사키 마사유키,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아시아연구소
1945년 7월.
일제는 마라도 반경 20킬로 내 일대에 1,200개의 기뢰를 설치했다.
그리고 제주도에 기동결전병력 제120사단 8천명을 추가 배치한다.
7월말 제주경비를 담당했던 58군 참모장은 17방면군에 전보를 보냈다.
"적의 본도 상륙을 8월 하순 경으로 예상,
도내에 모든 인적 물적 자원 확보에 매진"
제주 도민 23만 명에 일본군은 8만 5천 명.
일제가 본토결전에 대비해 만든 본부가 제주에 있었다.
2. 절대국방권!~
신의 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1943년 9월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본은 절대국방권이라는 것을 설정했습니다.
이름 그대로 국가의 유지상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방어선을 말합니다.
44년 6월.
그 거점이었던 사이판이 미군에 의해 무너집니다.
그리고 넉 달후엔 또 다른 한축이었던 필리핀의 레이테섬이,
그리고 이듬해엔 이오지마까지 점령당하고 맙니다.
동남아시아의 모든 거점을 미군에게 빼앗긴 일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오키나와였습니다."
일본 남서쪽에 위치한 오키나와.
이곳엔 태평양 전쟁의 상흔이 가장 처참하게 남아있다.
1945년 3월 26일.
1천 3백 척이 넘는 미군함이 오키나와 공격을 시작했다.
미군의 지상군은 18만 명,
해군과 보급병까지 합하면 54만 명에 달했다.
당시 일본군은 12만 명,
그 중 2만 명이 오키나와 현지에서 징집한 병력이었다.
일제는 남녀 중학생까지 동원해 옥쇄작전으로 맞섰다.
그것은 사상 초유의 참사로 이어졌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 - 이토만시 마부니 해안
3개월간
미군 1만 2천 명,
일본군 9만 명이 사망했다.
민간인의 피해는 더 컸다.
일본군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12만 명의 원주민들이 희생됐다.
일본군들은 주민들을 산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산 속에 동굴을 파 참호를 만들고
그 속에 주민들과 함께 들어가 끝까지 저항했다.
일제는 모든 군사시설을 지하로 이전했다.
구일본해군사령부호 - 도미구스쿠시
해군 전력의 사령부는 도미구스쿠시의 지하진지로 옮겼다.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마감한 지하갱도가 450미터, 1,500명의 병사가 이곳에 머물렀다.
일제는 미군의 공격을 피해 내륙 깊숙한 곳에 지하요새를 구축했다.
지하갱도엔 전력을 만들어내는 발전실과
부상자를 치료하는 의료실, 암호실 등 군 시설운영에 필요한 부속기관을 배치했다.
사령관은 이곳 진지에서 끝까지 시간을 끌며 미군에 저항했다.
전 군인과 주민의 '옥쇄'가 그들의 목표였다.
"신의 나라(일본)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천황의 깃발 아래 죽는 것은 군인으로서 살아온 보람이다."
"이곳에서 6명의 장교와 사령관의 시체가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사령관이 선택한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인접한 사무실에서도 장교들이 수류탄을 터트려 집단자결했다.
동굴 벽면엔 탄흔이 아직 남아있었다.
"오키나와전의 목적은 반격작전이라기 보다는
연합군의 일본본토 공격을 가능한 늦추는 것,
즉 지구전을 통해 적의 희생을 가능한 한 많이 초래하는 것, 그것이 목적이었습니다."
- 이케다 요시후미 교수, 류큐대학교
하에바루 일본육군병원호.
오키나와 섬에서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
하에바루 지하동굴은 당시 일본육군병원이었다.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한 부상병들이 이곳 동굴병실에 입원을 했다.
그런데 이곳 천정에서 조선인이 새긴 글씨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강(姜), 조선의 성씨였다.
"여기서부터 부상병들의 침대가 있었는데요,
이단 침대 윗단에 변상병이라고 하는 조선 반도 출신의 병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 우에치 카츠야 학예원, 하에바루 교육위원회
태평양 전쟁 당시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징집되어 오키나와로 끌려왔다.
그들에겐 어떤 명분도 없는 전쟁이었다.
일제는 그들을 지하참호에 집어넣고 굴을 파게 하거나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내세웠다.
"전쟁 때 일본군은 만 명 정도의 조선인들을 데려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천 명 정도 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9천 명 정도가 오키나와에서 죽은 것입니다."
- 치바나 쇼이치, 오키나와 요미탄촌 의회의원
오키나와에서 지하진지에서 전투 준비가 한참이었던 1945년 6월,
제주에서도 대규모 굴착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제는 가마오름에 주민들을 강제동원해 3층 규모의 지하요새를 구축했다.
제주에서 가장 길고 거대한 지하진지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일본군 11사단 223연대가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마오름의 지하진지를 중심으로
탱크부대, 기마부대, 수송부대, 탄환부대, 약부대 등 연결이 되어 있어서
이곳이 아주 전략적인 요충지로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 이영근 관장, 평화박물관
지하 깊숙한 곳에 미로형 동굴을 파고
전투에 필요한 모든 시설들을 마련한 점 등
가마오름의 지하진지는
여러 모로 오키나와의 구 일본해군사령부와 비슷하다.
일제는 왜 제주에 이런 동굴진지를 구축했을까?
"오키나와 전쟁의 진지는 전부 지하 구축을 추진했습니다.
전쟁 말기 제주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연합군 공격에 대배 지하진지를 만들었습니다.
미군공격에 대비한 방위 태세에서 아주 비슷한 진지 구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이케다 요시후미교수
3. 신요와 카이텐!~
자살특공부대를 조직하라!~
"구불구부하게 이어지는 갱도와 버팀목에서 가마오름 지하진지는 여러 면에서
그러니까 조성 시기와 구조와 부속시설에 이르기까지 구 일본해군사령부와 대단히 흡사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것처럼 모든 군사시설을 지하에 구축해놓고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놓고 있던 일본인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또 다른 특단의 준비를 하게 됩니다."
제주 십경으로 불리는 성산일출봉.
그런데 이곳 동굴에는 이곳 주민들조차 잘 모르는 18개의 동굴이 있다.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넓이의 동굴이 70~80미터에 뻗어있다.
동굴은 일자형과 H자형으로 구분된다.
동굴 입구 해안가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조물이 발견된다.
자갈과 시멘트를 섞어 만들어놓은 듯한 구조물.
파도에 씻겨 부서진 듯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다.
일본 남큐슈시 세이가우라 만에 이와 비슷한 구조물이 있다.
바다를 향해 나 있는 평평한 길.
자세히 보니 일출봉처럼 시멘트와 자갈로 만들었다.
"다른 사람한테 들은 얘긴데요
이곳에서 특공정 신요가 나갔다고 들었어요."
- 오사코 하츠오 주민
수 년전까지 이 구조물은 해안 동굴과 이어져 있었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해군특공정 신요가 출격했다고 말하고 있다.
신요는 무엇일까?
인근 박물관에서 신요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치란 특공평화회관 - 일본 가고시마현
신요는 베니어판으로 조립한 작은배에 자동차 엔진을 장착한 소형고속보트.
일제는 이 배에 폭탄을 실어 유례없는 특공무기로 돌변시켰다.
그것은 자살특공보트였다.
뱃머리에 250킬로그램의 폭탄을 장착한 신요는
적함을 향해 돌진해 자폭했다.
신요는 수레에 올려 이동했다.
그리고 간조시에 편리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콘크리트 유도로를 만들었다.
일출봉에 남아있는 길이 4미터, 높이 50센치미터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바로 신요의 유도로였던 것이다.
취재진은 또 다른 자료들을 입수했다.
일본군의 자살특공무기 신요와 그 조종사들의 사진을 담은 잡지였다.
그런데 이 책에 제주도가 등장한다.
'제주도 고산리 소학교 앞'
신요의 특공대들이 기념촬영을 한 장소가 제주도 고산리였던 것이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이곳에 또 하나의 자살특공부대가 있었던 것일까?
제주 남쪽 한경면에 위치한 수월봉.
이곳 해안가에도 십여 개의 동굴이 있다.
"오노부대라고 왜정시대에는 준위가 부대장이었어요.
준위가 부대장인데, 거기 부속 대원들은 해군들이고
그 특공대원들은 따로 한 40명 정도 되던가...."
- 좌정인(80세)
수월봉의 해안동굴은 특공정 신요기지였다.
일제는
이 동굴 지하를 파기 위해
제주도민들을 강제 동원하고
육지에서 광산기술자들을 끌어왔다.
"북한 탄광에 있는 우리나라 노무자 탄광기술자들을 징용해다가
여기에 한 200명 가량 투입했어요.
(그러면 그 사람들은 생활을 어떻게 했어요?)
생활은 여기서 막사를 지어가지고
아주 형편없는 대우를 하면서 노동을 시켰어요."
- 좌정인(80세)
그들은 해안기지에 신요를 숨겨두고
적함이 나타나면 돌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일본 해군의 자살특공은
1944년 필리핀 레이테 해전에서부터 본격화 되었다.
연료도, 뛰어난 비행사도 부족했던 일제는
전투상황이 급박해지자 인간폭탄 자살특공을 시작한다.
제주에는 1945년 8월 해군특공기지설정에 대한 지시가 내려진다.
네 종류의 자살특공부대를 설정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중 실제 제주에 기지가 구축된 것은 신요와 카이텐이었다.
카이텐은 무엇일까?
일본 야마구찌현 주난시 오츠시마에서 카이텐 모형을 볼 수 있다.
카이텐은 미사일처럼 생긴 소형배로
본체 추진장치와 탄약통 중간에
사람 한 명 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잠망경을 설치했다.
본래 어뢰는 자동장치로 발사되지만
카이텐은 사람이 직접 탑승해서 공격하도록 만든 인간어뢰였다.
"어뢰 안에 사람이 타고 잠망경, 특안경이라고 부르는데요,
이걸로 적의 배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적의 배에 부딪히는 것이죠.
이 어뢰에는 1.55톤의 화약이 실려 있습니다.
타는 사람은 한 명 뿐입니다."
- 마츠모토 도시유키, 카이텐 기념관 사회교육지도원
오츠시마는 카이텐의 발진기지이자 훈련기지였다.
일제는 이 섬 전체에 카이텐 기지를 구축하고 젊은이들을 어뢰에 실어 내보냈다.
전쟁 말기 카이텐 특공으로 145명의 젊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애국심이라는 미명 아래 인간어뢰에 몸을 실었다.
하늘을 돌이켜 전황을 역전시킨다는 그들의 꿈은 허망한 죽음으로 끝나고 만다.
일제는 제주에도 카이텐 기지를 구축했다.
제주 모슬포 송악산 기슭에는
카이텐 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뚫어놓은 열다섯 개의 동굴이 남아있다.
그것은 죽음을 담보로 하는 일제 최후의 작전이었다.
일제가 제주에 구축한 신요와 카이텐 진지는
송악산, 수월봉, 삼매봉, 성산일출봉, 서우봉까지 다섯 군데였다.
제주는 일제의 자살특공기지였다.
4. 제주에 만들어지는 소형비행장들!~
하늘에 자살특공기, 가미카제 히엔!~
"45년 봄, 궁지에 몰린 일본군은 제주 해안가에 굴을 파고 자살특공기지를 건설합니다.
실제로 특공대원 560여 명이 배치되기도 했습니다.
이들에겐 목숨을 바쳐서라도 미군 적함을 침몰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습니다.
일제 최후의 저항, 그것은 하늘에서도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는 제주국제공항.
이 공항의 원래 이름은 정뚜르였다.
정뜨르 비행장은 1941년 일제에 의해 건설됐다.
활주로 서쪽에 위치한 도두봉.
도두봉에는 네 군데의 동굴진지가 있다.
가장 긴 갱도가 90미터.
참호까지 갖추어져 있어 군사가 머물러 있을 수 있다.
"이쪽은 굴 파면서 등잔 올려놓던 곳이고,
이쪽은 곡괭이 자국이예요.
이쪽은 갱도 홈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있네요."
도두봉은 비행장을 경비하기 위한 진지였다.
이런 진지는 비행장을 마주보고 있는 사라봉에서도 관찰됐다.
"사라봉은 총길이가 900미터쯤 되고요,
도두봉은 총길이가 600미터쯤 됩니다.
이쪽 사라봉과 도두봉은 당시 일본인들이 많이 들어온
제주서비행장, 지금은 제주국제비행장인데요,
제주서비행장을 경비하기 위한 구조물로 보이고 있습니다."
- 이윤형 팀장, 한라일보 일제전적지 탐사팀
그런데 1943년 정뜨르 옆에서는 또 하나의 비행장이 건설되고 있었다.
일본 육군성은 진뜨르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수많은 제주도민들을 강제동원했다.
"여기 와가지고 평탄작업을 했습니다.
평탄작업은 어떤 거냐 하면
선로를 따라 도로꼬(운반차)라는 것이 있어서
거기에 흙을 퍼담아 낮은 곳에 가서 메우는 작업인데..."
- 김효종(82)
"허리를 펴서 서질 못했어요.
그 십장이란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몽둥이를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허리를 펴서 서 있는 사람은 무조건 두들겨 패는 거라
그러니 쉬어도 허리를 굽힌 채 쉬어야 돼요."
- 김자봉(81)
그런데 공사가 한참이던 1945년 4월 긴급지시가 내려왔다.
모든 공사를 즉시 중단하고 교래리 부근에 비닉(몰래 숨긴) 비행장을 건설하라는 명령이었다.
새로운 비행장은 두 개의 활주로를 갖추고
병사와 탄약, 격납고 등을 모두 지하화 할 것을 명시했다.
"본토 상륙 때에는 더욱 더 대규모의 공습이 예상되는 가운데
일본군은 특공비행장을 눈에 띄는 해안이 아니라
산 속에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공습을 피한다는 목적과 함께
함포사격을 피한다는 목적이었기 때문에
소규모 비행장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제주도 교래리 비행장은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보입니다."
- 츠카사키 마사유키 객원연구원
그것은 가미가제용 특공기지였다.
가미가제는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미군의 비행기에 돌진하는
일본의 자살특공대였다.
일제는 1945년 오키나와 전투에
2천여 대의 가미가제를 동원해 최후의 반격에 나섰다.
일제는 해안에 인접해 폭격 위험이 있는 기존의 비행장 대신
내륙에 깊숙히 교래리 비행장을 만들어 자살특공대를 준비했다.
제주 한라산 중산간지역에 있는 교래리.
이곳 어디에 비밀비행장이 있었을까?
주민에게 그 위치를 물었다.
"지금 정확한 위치는 안 나와 있습니다만
제동목장안에 훈련비행장이 있습니다.
그쪽에 있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제가 본 기억은 없고요 어르신들이 말씀하신 기억만 있습니다."
- 김삼범 이장, 조천읍 교래리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는 목장지역.
이곳은 녹산장이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예로부터 진상용 말을 키우던 곳이었다.
주민들은 이곳에 비밀비행장이 있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소형 비행장이 있었다고,
그게 언제 만들어진거냐고 하니까,
일제시대 때 일본놈들이 와가지고 만들어 놓은 게 있었던 자리라고만 들었습니다."
- 김봉칠 주민
정석비행장.
목장 주변에는 한 항공사의 훈련비행장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비행장 뒤편에 자리한 대록산과 소록산.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목장지대와 활주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전문가들은 이 일대를 일본군의 비밀 비행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교래리에서 지금 광활한 개활지가 있고
비행기가 이착륙하기가 좋은 앞뒤가 막히지 않는 곳은 유일하게 이 지역입니다.
지역 주민들 얘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현재 대한항공에서 훈련 비행장 활주로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이런 여러 가지 지형들을 감안할 때 여기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 강순원 연구원, 제주역사문화진흥원
대록산 곳곳엔 갱도가 뚫려 있다.
구부 능선에 있는 한 동굴에 들어서자 소이층을 뚫어 만든 갱도가 눈에 들어온다.
반대쪽엔 또 다른 출구가 있다.
갱도 중간쯤엔 산 정상과 연결되는 수직 갱도가 있었다.
외부와의 통신과 환기를 위한 통로로 보인다.
대록산 정상에선 이곳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교래리 비행장 인근에 1개 대대 병력을 배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실제 저희들이 탐사한 결과 일본군이 파놓은 7~8개 되는 갱도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볼 때
여기는 교래리 비밀비행장을 엄호하고 경비하는 그런 요새로 판단이 됩니다."
- 이윤형 팀장, 한라일보 일제전적지 조사팀
1945년 7월.
교래리 비밀비행장이 완공되자
육.해군 모두에 새로운 명령이 내려진다.
미군의 상륙이 시작되면
비행기를 이용한 특공을 펼치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제주엔 특공비행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미군이 촬영한 무장해제 사진.
거기엔 자살특공기 히엔이 있었다.
"특공비행기라고 하면 해군에서는 제로센과 시덴가이,
육군에서는 히엔이 유명합니다.
히엔은 당시 육군이 보유한 가장 우수한 전투기로
속도도 빠르고 작은 회전도 가능합니다.
이 전투기에 250kg의 폭탄을 싣고 특공에 사용한 것입니다."
- 츠카사키 마사유키
태평양 전쟁 말기,
제주도엔 가미카제, 자살특공 공격까지 준비되고 있었다.
5.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
'살아있으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라 그보다는 죽어라!~'
"지금 보시는 이것이 실제로 제주도에 배치되었던 가미카제 비행기 히엔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쟁 당시 해군특공병기 히엔까지 있었습니다.
전쟁 말기 이처럼
일제는 사람의 목숨을 무기로 하는 극단적인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미군의 인명 피해를 최대로 늘려서
종전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던 45년 5월.
미국은
해상봉쇄작전에서
공중폭격으로 바꿨다.
사이판과 필리핀 레이테 기지를 함락시키고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국은
한반도와 일본을 오가는 모든 선박을 공격했다.
제주에도 공습을 퍼부었다.
"그게 B29라. 프로펠러가 4개.
여기 스윽 오더니만 여기 화물선이 있으니까
화물선에다가 그 때 당시에는 소이탄이라고 말하더군요.
소이탄, 그러니까 화물선에서 불이 일어나..."
- 김대종(88)
"우리가 직접 폭격하는 것을 본 것은
우리 집 밖 동산에서 고산특공대 땅굴을 폭격했거든요.
지금도 그 굴이 많이 있어요."
- 임경재(75)
일본은 제주에 병력을 집중하고
지하진지를 구축하는데 총력을 다했다.
"전쟁이야 날 것 같은 분위기죠.
여기 바닷가에서는 일본해군들이 그 때 굴을 파고 뭐 하지,
산에서는 일본육군들이 굴을 파고 뭐하고 요란스럽게...
몇 명이 왔는지 모르지만은
그 당시 듣기로는 일본군인들이 손잡고 제주도를 두 바퀴 돌 정도의 인원이 여기 와서 주둔했다.."
다급해진 일제는 전시총동원체제를 가동한다.
조선국민의용대라는 이름으로
60세 이하의 노인들까지 동원했고
여자들도 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조선국민의용대는 말 그대로 전 국민의 군대화라고 보시면 될 것 같고요,
따라서 조선인을 군대화 한다라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쟁 막판에 최대한 조선인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겠다,
두 번째는 미군과 직접 싸울 때는 총알받이로 이용하겠다."
- 신주백 책임연구원,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일제는 미군이 상륙할 경우 주민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은 사람은
미군 상륙시에 신에 들어가
군과 행동을 같이 할 준비를 하고 있다."
- 일제종전기록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키니와 요미탄촌에 사는 오에츠카 할머니는
45년 미군이 상륙했을 당시 14살이었다.
할머니는 미군을 피해 이곳 요미탄촌 동굴로 들어왔다.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이곳은 비행기가 오거나
비행기 소리가 나면 공습경보라고 해서 공민관에서 전달이 왔어요.
그 때 여기로 달려와서 아이와 어른들이 숨는 곳이었어요."
- 우에츠카(78)
이 동굴에선 인근 주민 천 명이 함께 숨어지냈다.
미군들이 상륙하자
일본군은 주민들을 산으로 데려갔고
이곳에서 최후까지 저항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곳에 대피했던 주민들은
한 일본계 미군의 설득으로 투항했고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미군을 믿지 않았다.
인근에 있는 또 다른 지하동굴, 치비치리 가마(동굴)
45년 4월. 이곳 동굴에 숨어있던 주민 85명이 집단자결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그들이 피신했던 동굴엔 지금도 희생자의 유골이 그대로 묻혀있다.
이들은 미군이 접해오자 서로를 찌르거나 때려 죽이고 죽였다.
"당시 일본은 '살아있으면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라 그보다는 죽어라'라는 식의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시켰습니다.
어느 정도 있는가 하면 동물적 충성심이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한 군국주의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그로인해 여기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적에게 건네 줄 수 없다,
그래서 죽이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어머니들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칼과 낫으로 찔러 죽여서 85명이 여기서 죽은 것입니다."
- 치바나 쇼이치, 오키나와 요미탄촌 의회의원
이곳 요미탄촌에서만 아홉 군데에서 집단자살이 일어났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군과 운명을 함께 하라는 세뇌교육의 결과였다.
"군민일체, 군과 백성은 한 몸이다, 그러므로 백성 즉 일반인은 반드시 군에 협조해야한다.
그로 인해 오키나와에서 군과 함께 민간인이 자살을 하게 된 것이고
그 전에는 사이판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본토결전이 일어나면 큐슈나 제주도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 모릅니다."
- 야마다 아키라 교수, 메이지대학교 사학과
그러나 45년 8월 6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전쟁은 끝났다.
일본은 즉각 패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9월 28일 제주엔 별도의 항복 접수팀이 도착한다.
미 24군단 항복접수팀 로이 그린 대령은
일본 58군 도야마 노보루 중장에게 항복 서명을 따로 받는다.
제주는 당시 오키나와 만큼 무장되어 있었고
그만큼 58군은 위험했다.
종전협약에 따라 일본군은 자체 무기를 해제한다.
그들은 무기의 뇌관을 제거하고 폭파했다.
그리고 총과 탄약, 야포 등 나머지 무기들은 제주 앞바다에 수장했다.
남아있던 일본군 4만 8천여 명은 열 차례에 걸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제주는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일제가 이 땅에 남긴 수많은 상처와 눈물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의 흉터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지하 동굴에서 나오면 역시 제주는 굉장히 아름답고 이뻐요.
저로서는 조금이라도 제주도가 평화로운 섬으로 남을 수 있도록
옛날 일본군들이 저지른 일들을 철저히 밝혀서
조금이라도 반성의 계기로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츠카사키 마사유키
아름다운 섬 제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평화의 염원을 전한다.
"역사추적은 2회에 걸쳐 제주에 남아있는 동굴진지를 추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일제 식민시기 일제가 제주를 마음대로 헤집고 전쟁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려고 했던 역사의 증거였습니다.
헌데 우리는 반 세기 남짓 시간이 흘렸지만 그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치욕적이고 아픈 역사지만 우리가 그것을 기억할 때 제주도는 진정한 평화의 섬으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 한상권의 역사추적(늘 좋은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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