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一山詩帖
김지하
외로울 땐
풀잎 하나도 정답다
하늘 가득 스모그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 개지
아
참새 지저귀고
아직도 꽃이 피고
하늘엔
흰 구름도 흐른다
아파트에 쭈그려 앉아
허공 한 쪽 볼 수 있으니
내 삶
아직도 괜찮다
고마워
눈물난다
42. 저녁 산책
김지하
숙인 머리에
종소리 떨어지고
새들이 와 우짖는다
숙인 머리에
바람이 와 소스라치고
가슴 펴라
가슴 펴라 악쓰고
숙인 머리에
별 뜬다
오늘밤은 무슨 꿈을 꾸랴
먼 하늘엔 새빨간
노을 쏟아지고.
43. 죽음
김지하
빛 밝은 삼월 아침
상여 소리 지나는데
황매꽃 지고
꽃상여 지나는데
산란하던 마음
이리 차분해
황토 한줌
황산 어디쯤 산이면 어디쯤
눈부실 황토 한줌
종이꽃 하나
내 목숨.
44. 중심의 괴로움
김지하
봄에
가만 보니
꽃대가 흔들린다
흙 밑으로부터
밀고 올라오던 치열한
중심의 힘
꽃피어
퍼지려
사방으로 흩어지려
괴롭다
흔들린다
나도 흔들린다
내일
시골 가
가
비우리라 피우리라.
45. 지리산 근처
김지하
가긴 가지만
근처까지만 가는 길
구름 도는
봉우리 저 푸른 빛
영기(靈氣)도 원한(怨恨)도
함께 서린 지리산 저기
안 간다
우러러볼 뿐
간다만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
화개(花開)까지만
강 건너가고
작은 폐활량에
헐떡이며 쉼없이 가고
다 가면
못 오리
가긴 가지만
근처까지만 가는 그 길
돌아서는 뒤꿈치가
유난히도 둥글고 하얗던 그 날
고달픈 아름다운
가며
가지 않는
이순(耳順) 근처 어느 날.
46. 쳐라
김지하
노을이여
나를 쳐라
내 마음을 쳐라
불타는 노을이여
새벽에나 겨우겨우 길 찾아나서는
둔한 내 마음을
잠든 내 삶을 쳐라
맑은 샘물에다 구원 청하는
산란한 내 마음
더욱 더 산란하게 쳐라
산란하여
아으
소리치며 벌떡 일어서게 쳐라
일어서 아무 때 아무 곳이든
뚜벅뚜벅 진흙길 나서게 쳐라
쳐라 쳐라
힘차게 쳐라
사그라드는 애잔한 끝만 남은
덧없는 노을이여
노을이여
쳐라 쳐라.
47. 초롱불 진달래
김지하
삭둑삭둑 키를 잘라낼 땐
피 한 방울 안 나던 진달래
오늘 아침 창문을 열고 보니
꽃분홍 선혈을 뒤집어쓰고 있네
조금씩 가지를 쳐낼 땐
신음소리 한 마디 안 내던 진달래
오늘 아침 물주다 보니
빨갛게 켜든 초롱불 속에
마디마디 아픔이 웅크린
눈물을 감추고 있네
초롱불 한 잎 한 잎 만지작거리다
돌아선 나의 등뒤에서
진달래 아픈 비명소리가
딸,딸,딸, 신발을 끄을며 따라오네
48.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속 목마름이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국 소리 흐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49. 틈
김지하
사랑은
틈
내안에 벌어지는
꽃이파리 하나
해살 비쳐들고
바람 불어오고
벌이 오고 또 나비가 오고
흰 구름 흐르다 흐르다
밤이면
푸른 별자리들 기울어
이슬 내리고
사랑은
틈
거리에서도
아아
너로 하여
나
우주에 살고
50. 푸른 옷
김지하
새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여윈 알몸을 가둔
옷 푸른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나마 있다면
가슴에 꽂히어 아프게 피 흐르다
굳어 버린 네모의 붉은 표지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 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 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던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푸른 옷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어지지만 않는다면.
51. 황톳길
김지하
(1)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삿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2)
밤바다 오포산에 불이 오를 때
울타리 탱자도
서슬 푸른 속이파리
뻗시디뻗신 성장처럼 억세인
황토에 대낮 빛나던 그날
그날의 만세라도 부르랴
노래라도 부르랴
(3)
대샆에 대가 성긴 동그만 화당골
우물마다 십년마다 피가 솟아도
아아 척박한 식민지에 태어나
총칼 아래 쓰러져 간 나의 애비야
어이 죽순에 괴는 물방울
수정처럼 맑은 오월을 모르리 모르리마는
(4)
작은 꼬막마저 아사하는
길고 잔인한 여름
하늘도 없는 폭정의 뜨거운 여름이었다
끝끝내
조국의 모든 세월은 황톳길은
우리들의 희망은
(5)
낡은 짝배들 햇볕에 바스라진
뻘길을 지나면 다시 모밀밭
희디흰 고랑 너머
청천 드높은 하늘에 갈리던
아아 그날의 만세는 십년을 지나
철삿줄 파고드는 살결에 숨결 속에
너의 목소리를 느끼면 흐느끼며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52. 회귀
김지하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친구들 모두
짧은 눈부심 뒤에 남기고
이리로 혹은 저리로
아메리카로 혹은 유럽으로
하나 둘씩 혹은 감옥으로 혹은 저승으로
가데
검은 등걸 속
애틋했던 그리움 움트던
겨울날 그리움만 남기고
무성한 잎새 시절
기인 긴 기다림만 남기고
봄날을 가데
목련은 피어
흰빛만 하늘로 외롭게 오르고
바람에 찢겨 한 잎씩
꽃은 돌아
흙으로 가데
가데
젊은 날
빛을 뿜던
아 저 모든 꽃들 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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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외로울 땐 풀잎 하나도 정답다. 그렇군요... ^^*...
김지하의 시들이 마음에 들어서,
다른 시인들보다 좀 더 많은 시를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