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저 엄청난 요동의 철광지대와 만주벌판의 광활함...
수-당을 연이어 상대한 막강한 군사력의 근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 맞이한 전성기는 ㄷㄷㄷㄷㄷ
근데 왜 저 고구려는 삼국을 통일 못한거임????
1.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왜구 물리치라고 군사 총 5만명 파견했을 때,
통수치고 남방 싹쓸이 안됨? 그때 기세라면 삼국통일도 쌉가능 ㅇㅈ??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만 만주와 한반도에만 집중하지 말고, 시선을 옆으로도 돌려보면 어떨까?
당시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기병과 보병 도합 5만을 파견했을 때, 고구려의 서방에는 후연이 있었다.
후연은 하북과 산동, 요서와 요동의 일부 지방을 움켜쥔 강대국이자 선대 왕조인 전연에 이은 고구려의 오랜 앙숙
오히려 이런 불안요소를 두고 광개토대왕은 신라에 군사 5만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후연은 광개토대왕이 신라 구원을 위한 남방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 있는 사이 고구려를 침공했고,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 700여 리 영토를 빼앗아가며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까지 위협하였다. 이런 마당에 5만이나 되는 대규모 군대를 남방에 더는 상주시킬 수 없다. 삼국통일 욕심내려다(당시에는 단일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굉장히 옅거나 없긴 했지만) 까딱 잘못하면 왕조 자체가 한꺼번에 휙- 하고 말릴 수 있기 때문에...(후연 뿐 아니라 부여를 굴복시키기도 전이다.)
물론 남방 원정에서 돌아온 광개토대왕의 대반격으로 후연은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던 영토들을 모두 잃고 요서의 숙군성, 나중에는 대릉하 부근(학계는 대부분 북경-北京 [베이징] 인근으로 추측)의 연군까지 털리면서 이제는 반대로 후연이 고구려에게 수도 용성을 위협받는 역전현상이 일어난다. 이후 407년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 군은 모종의 세력과 회전(會戰)을 치루며 대승을 거두고 전성기의 포문을 열게 되는데... 역사학계에서는 406년 12월까지 고구려가 후연과 싸우고 있었다는 점과 407년에 후연이 멸망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이 모종의 세력을 대부분 '후연' 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407년에 벌어진 이 전투가 후연의 멸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고구려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것...
이후 고구려는 멸망의 순간까지 완벽한 요동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된다.
"1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기보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해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광개토대왕릉 비문」
2. 남진정책을 표방한 장수왕 때는 (선왕 덕분에)확실한 요동의 주인이잖아?
철광지대를 기반으로 어느 정도 경제력도 뒷받침 될텐데 왜 불가능???
남방 정책을 표방한 이유는 뭐... 까고 말해서 당시 경제성 있는 땅이 더 없는 것도 있지만(장수왕도 사실 흥안령 일대까지 진출한 바 있다.) 북조 북위의 성장과 유연의 존재에 의한 한계 봉착도 있다.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면서 고구려는 (반쪽이라도)집약된 중원왕조의 위력을 정면으로 받아내게 생겼으며, 거기다 북위를 제외하고도 북방엔 유연이라는 거대한 유목세력도 있었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는 서-북방면에서는 최대한 충돌을 피하는 것이 현명한 법... 그래서 장수왕도 북위와는 화친 노선을 걷고 유연과는 지두우 분할을 협상하며 최대한 서-북방면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어쨌든 왜 "남방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삼국통일을 못했느냐?" 하면...
먼저, 평양 천도 이후 형성된 국내성 기존 귀족들과의 반목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평양 천도는 이미 아버지인 광개토대왕 대부터 염두해 두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이 부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평양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아마 추측해 보건데 선대왕 대부터 천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왕실과 국내성 토착 귀족간의 반목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갈등이 깊어짐에 따라 장수왕은 원정군 동원이나 노역 징발 등 많은 부분에서 국내성 출신의 유력 귀족들과 협의를 맺지 못하면서 권력의 중앙 집권화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고 심하면 그들의 반란도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장수왕과 국내성파 귀족들간의 내부알력으로 삼국간 경쟁에 필요한 힘을 응집시키지 못했을 가능성을 염두해 둘 수 있겠다...
2년(393)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임금이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9년, 기해(己亥)년에 백잔(百殘, 백제)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하였다. 왕이 순시하면서 평양으로 내려오니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기를 왜인이 그 나라 국경지역에 가득 차서 성들을 파괴하고 있는데, 노객(신라왕)은 신민으로서 의탁하여 왕의 지시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밀계를 내렸다.
14년, 갑진(甲辰)년에 왜(倭)가 분수없이 대방(帶方)지역을 침입하였다. 그들은 백잔(百殘, 백제)군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공략하였다. 연이언 배----. 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평양을 출발하였다.
「광개토대왕릉 비문」
그리고, 생각외로 고구려만을 대상으로 한 나제동맹의 결속력과 저항이 너무 강했다. 당장 고구려가 개로왕을 죽이고 백제 한성을 점령할 때(475)만 해도 신라는 태자(문주왕)의 요청으로 영혼까지 긁어모은 병력 1만을 백제의 원군으로 보내주었고, 신라가 공격당할 때(481)에도 백제는 원병을 보내며 고구려에 함께 맞섰다. 이러한 관계는 계속 이어져 장수왕 사후에도 지속되는 고구려의 남진에 백제와 신라는 서로가 공격받을 때마다 원병을 끊임없이 보내주며 고구려에 저항하게 된다. 즉 공동의 강력한 적 앞에서 '뭉치지 않으면 X된다.' 라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며 신경을 곤두세운 것...
39년(455) 겨울 10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였기에 임금이 병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 마립간
개로왕 재위 21년(475)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지키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도록 하여 병사 1만을 얻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3년, 481)3월,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狐鳴) 등 일곱 성을 빼앗고, 또 미질부(彌秩夫)에 진군하였다. 우리 병사가 백제, 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서 그들을 막았다. 적이 패하여 물러가자 니하(尼河)의 서쪽까지 추격하여 쳐부수고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 마립간
(16년, 494)가을 7월, 장군 실죽 등이 살수(薩水)의 벌판에서 고구려와 싸웠다.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견아성(犬牙城)을 지키고 있었다. 고구려 병사가 그곳을 포위하자 백제왕 모대(동성왕)가 병사 3천 명을 보내 포위를 풀고 구원해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 마립간
26년(548)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 양원왕)이 예(濊)와 공모하여 한수 이북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해오자, 임금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주진(朱珍)을 시켜 갑옷을 입은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게 하였다. 주진은 밤낮으로 행군하여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병사들과 일전을 벌여 크게 이겼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즉, 고구려는
외부적으로는 후연-북조, 유연(-돌궐), 백제 + 신라와 국경을 맞대며 외교전과 정복전을 병행하는 상황,
내부적으로는 왕과 유력 귀족들 사이의 반목 가능성 (+ 수많은 전쟁과 외교전이 고갈시키는 재정??)
이러한 문제들이 겹쳤기에 현실적으로 삼국통일이 어려웠던 것...
아 ㅅㅂ... 다 먹은 겜인줄 알았는데
생각외로 어려웠네...
아들, 그 와중에도 아빠는 요동 먹고,
부여 먹고, 거란이란 말갈족 복속했어.
왜구도 때려잡았단다.
아빠가 열심히 해놓은 세이브,
제대로 못 먹어서 ㅈㅅ함요. ㅎㅎ;;;;
그래도 트롤짓은 안함 ㅇㅇ
ㅇㅇ, 그래도 너 정도면 양호하지. ㅇㅈ
대충 그렇다는 이야기 ㅇㅇ
첫댓글 까비...
어차피 고구려는 중국 왕조들이랑 싸우느냐고 힘들었고 차라리 발해가 더 기회있었다고 봄
우리가 아는 발해 영토는 선왕때 완성된거라 8세기까지는 발해의 국력이 신라에 못미쳣다는게 정설...
애초에 일시적으로 한반도 남부를 억누르는건 가능했지만 만약 남부 정복전쟁까지 했으면 고구려vs가야,왜,백제랑 싸우게 되는거임. 백제랑 왜가 혈맹인건 유명한거고 가야도 가담한 시절임. 순식간에 전선이 존나게 생겨나는거임. 북부 후연이랑 오랑캐들도 신경쓰면서 백제,왜같은 해상전력 상대하기도 벅참. 신라도 언제 뒷통수 칠지 모르는 상황이고 . 지금 중국이 대만 찍어누르고도 남는다고는 하지만 뒤에 미국,한국,일본까지 신경써서 함부로 못하는거랑 비슷 . 그리고 광개토대왕이 신라까지 깊숙히 원정왔을때는 거의 도박에 가까운거였고 백제가 군주들로 이루어진 연합국가였고 그냥 길을 열어줘서 가능한거였음. 만약 백제가 왕권이 셌으면 바로 지방군 보내서 쌈싸먹혔음
전투를 받쳐주는 인구수도 많이 딸렸다고 들었음
ㅇㅇ 고구려랑 백제 멸망할때 인구가 8년차이인데 오히려 백제가 근소 우위엿던걸로
@aoa최아 근데 고구려는 수-당과 7차례에 연이은 대전쟁을 치뤘다는 걸 고려해야 함...ㅠㅠ
신문왕도 못했던 천도를 성공시킨 선왕을 업은 장수왕의 고구려 내부에서의 힘이 대단하긴 하네요.
기록에 따르면 장수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국내성vs평양성 세력의 내전이 수년간 지속됐다고 하죠. 장수왕이 결국 이기고 천도에 성공하지만 나중에 연개소문 죽고나서 다시 세력이 국내성vs평양성으로 나뉘면서 고구려는 멸망의 길로..
@계란계란김계란 만약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했더라도 국내성vs평양성 으로 나뉜 파벌로 인해 또다시 분열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하더라구요. 거기에 말갈과 융합이 변수 인데 이것마저 잘안되면 후삼국이 훨씬 일찍 왔을지도..
@계란계란김계란 오... 역시 천도는 개빡세군요. 몰랐던 사실 알려주셔서 감사함다
아쉽네 여건만 좋았다면 신라 백제 둘다 그냥 없애버렸으면 좋았을것을
난이도 개빡시네 ㄷㄷ
크흡..
삭제된 댓글 입니다.
7차례 수-당과 대전쟁 치룬거 생각하면 그것도 당연한 결과...
결과론이지만 고구려가 통일했으면 나라 없었질 가능성도 있지요
걍 그럴 힘이 안된거
생산력 딸림 + 왕권 약화 + 반강제적 탱킹
신라가 결국 통일한 이유가 있음
꿀잼
듣기론 광개토대왕 이후 장수왕의 기록에 등장하기까지 공백기간이 상당히 길었고, 분명 나라 내부에서도 세력 다툼이 치열했을 거라고..
아마도 이때부터 대부분 평양파 VS 국내성파로 주된 정계구도가 나뉘었을 것이라 예측하기도 해요. 장수왕 대에도 반목이 있었지만 이러한 내부 다툼은 나중에 안원왕과 양원왕 대, 고당전쟁 가서도 발현되었다는 것이ㅠㅠ...
잘읽엇어용
감사합니다.^^
당시 백제 신라가 약해보이지만 곡창지대 끼고 있는 백제였던지라 신라가 힘을 보태니 더 못 밀었을거 같기도 합니다 중국의 힘도 크구요... 인구나 식량 문제에서 고구려가 그리 큰 나라는 또 아니여서
반대로 이때 만약 곡창지대인 백제를 먹었으면, 신라는 시간문제이고..다 가정이지만 후방위협없이 수, 당과 자웅을 겨루었을텐데요.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개혁이란게 참 어려운 듯요...
재밌네요ㅋㅋㅋ시간이지나서 단순 고구려짱짱맨! 이것만 알고있었으니 생각한거보다 복잡한 상황이 잇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