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f-Portrait, 1887년 봄, 파리. 캔버스 유채
La Maison de Vincent a Arles, 1888년, 오일
강렬한 푸름과 노랑으로 화면을 2등분하여 밝은 태양을 만끽하는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인상을 설득력 있게 나타내고 있는 이작품은 그의 조형적인 의도가 뚜렷이 느껴진다. 고호는 1888년 5월에 아를르의 역 가까운 라마르티느 광장에 있는 노란 집을 빌려 조금씩 손을 대고 가구를 넣어서 9월부터 옮겨 살았다. 고갱을 맞이하여 그의 그 불행한 비극을 일으킨 것도 이 집이었다.
아를르 반고호의 침실(Chambre a coucher de Van Gogh a Arles ), 1888년
미술 교과서에도 실리는 명작의 하나이다. 수건, 거울, 침대, 의자, 낯익은 생활도구들이 우리를 고호의 질박한 삶 속으로 빨아들인다. 아를르 시대에서 노란 조그만 집으로 옮겨간 후, 그 집을 예술가의 집으로 또는 예술가들의 공동 생활 터전으로 고호는 꿈꾸고 있었다.
실내에는 그의 취향에 알맞는 몇 가지의 가구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가 의도적으로 성격이 있는 분위기로 꾸미고 싶었던 생각을 읽게하여 준다. 침대도 쇠침대가 아닌 농부들이 쓰던 건장하고 커다란 것으로 고르고, 의자 역시 무뚝뚝한 농부용의 것으로, 벽면에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수점의 그 자신의 작품이 걸려 있고, 그외 가구다운 가구가 없는 소박한 침실은고호의 성격과 가난한 아를르 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밤의 카페테라스 (Le Cafe,le soir),
1888년 9월, 아를. 캔버스에 유채
고흐는 인상주의에서 보고 배운 것 이상을 표현하기위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이시기의 고흐의 색채가 다소 밝아진 듯하다. 고흐는 사흘 밤, 잠도 자지않고 카페의 밤을 담았다. "나는 간혼 낮 보다는 밤이 더 생동감이 있어, 색채가 넘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카페가 본격적으로 묘사되며 회화의 주제로 자리잡은 것은 인상주의 시기에 들어와서다. 반 고흐의 밤의 풍경에 대한 열정은 타는 듯한 정신의 낮을 향했던 반 고흐의 눈이, 마음속의 보다 어두운 부분, 정신의 그늘진 부분을 향하게 된 것이다.
아를의 붉은 포도밭 (Der rote Weingarten in Arles), 1888년 11월, 아를. 캔버스 유채
약 10년 동안에 879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린다. 그런데 '안나 보흐'라는 사람이 '붉은 포도밭' 한 점을 사간 것이 고흐가 생전에 판매한 유화 그림의 전부였다.
석양의 씨뿌리는 사람 (Le Semeur),
1888년 10월, 캔버스에 유채
밀레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그의 <씨 뿌리는 사람>은 풍요의 상징으로서, 아를에 체류하던 1888년 6월 중순에 다시 다루어졌다.
'보랏 빛을 띤 거대한 밭, 짙은 노란색의 하늘과 태양' 그와 같은 대조에 힘을 얻고 있는 반 고흐는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떠나서 암시적이고 감정을 자극하는 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앙케탱의 <수확La Moisson>을 떠올리면서, 그림의 구성을 낡은 달력 속에 있는 소박한 이미지들처럼 단순화했다.
반 고흐는 6월 말에 그 그림을 다시 손질하면서 보색들 간의 상호 작용을 강조하고 인물을 다시 그렸는데, 그러자 밀레의 그림과 더 비슷한 풍이 되었다. 확실히 "그것은 다루기 힘든 주제" 였고, 반 고흐는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다.
가을이 되었을 때도, 씨 뿌리는 사람은 늘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11월에 그린 것은 고갱이 있을 때 시작되었는데, 단속적으로 끊어지는 붓질이 덜해졌고 태양이 둥그런 형태가 되는 등 종합주의적인 특성이 강했다.
일본처녀 (La Mousme) 1888년 7월
정수리를 면도한 자화상
(Autoportrait au crane rase), 1888년
고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당시 그의 내면 생활을 읽을 수 있게 솔직하게 나타내 고 있다. 이 자화상은 고호 자신이 말했듯이 색채가 없는 회색 주조(主調)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간혹 자기 작품을 친구들에게 선사하기도 하고 교환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작품을 나누어 주기도 했었다.
이 작품은 고갱과 교환한 <자화상>이며 <밤의 카페>와 같은 주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밤의 카페>가 빨강과 초록의 대조에 의한 강렬한 구성인데 비하면, 이 <자화상>은 상당히 억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무렵의 내면 생활에 있어 격한 동요를 나타내고 있고, 아를르 시대 초기의 안정을 깨뜨리고 평형을 잃은 흔적이 짧은 머리칼과 예리한 시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 Madame Ginoux with Book), 1888년 11월 작품, 좌측은 마담 지누의 실제 사진. 왠지 책이 잘 어울린다.
카미유 룰렝의 초상(Portrait de Camille Roulin)
이탈리아 여인 (L'Italienne)
파리 시절 말기인 1887년에서 1888년에 이르는 겨울에 제작되었다. 몽티셀리에서 분할묘법 이론과 일본 판화에 대한 연구를 거쳐 인상파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반 고흐는 근대의 교훈을 소화 흡수해왔다. <이탈리아 여인>은 예전에 모델이었다가 카페 르탬버랭을 운영하고 있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를 모델로 한 그림이다. 반 고흐는 그녀와 개인적인 관계와 직업상의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그는 그녀의 카페에서 1887년 3월 일본 판화전을 열었고, 카페에 앉아 있는 그녀를 그렸다.
그림의 구성은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가의 작품 <압생트L'Absinthe>(1876, 파리, 오르세 미술관) 나 마네의 <자두La Prune>(1876-1877, 워싱턴, 국립미술관)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오르세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 그림의 원래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초상화 <탕기영감>에서처럼 이 그림의 회화적 공간은 극히 축소되었고, 판화의 장식적 효과도 강렬하게 채색된 배경을 드러내기 위해 포기되었다.
아를르에서의 산책, 1888, 캔버스에 유채
Wheat Field with Alpilles Foothills in the Background, June 1888
Sunset: Wheat Fields Near Arles, June 1888
아를르의 햇볕, 1888년, 캔버스에 유채
아를르 공원의 입구(Entrance to the Public Park in Arles), 1888년 9월, 캔버스 유채
측백나무와 길, 그리고 그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인물이 화제이다. 길을 주제로 삼는 것은 네덜란드 회화의 전통이자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택한 것이다. 무질서한 자연에 어떤 질서를 주려는 화가들의 주관이 잘 반영될 수 있는 모티브이다. 반 고흐가 아를 공원을 묘사한 작품은 모두 4개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이다.
고갱의 의자, 1888년, 캔버스에 유화
겨우 두 달 동안 지속된 고흐와 고갱의 공동생활의 추억으로는 두 사람이 그린 몇 점의 작품만이 남아 있다. 그동안 고갱은 몇 번이나 고흐의 모습을 그렸지만 묘하게도 고흐는 고갱의 모습을 단 한번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정신착란의 시초)이 일어나기 며칠 전 두 사람의 공동생활의 파국이 가까웠음을 예감한 듯 <고갱의 의자>라는 작품을 그렸다.
고흐의 의자, 1888년 12월, 캔버스에 유채
네덜란드 시데에 그린 <신발>과 함께 의자를 모티브로 한 이 그림도 고흐 특유의 것이다.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이 한 개의 의자를 통하여 항시 거기에 걸터앉는 주인의 성품과 생활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고갱과의 공동 생활이 시작된 이래 그는 두 개의 의자를 그렸다. 먼저 그린 것이 이 작품인데, 자신의 의자를 햇빛 아래에서 그렸고, 뒤에 그린 것은 고갱의 의자인데, 그것은 램프의 빛으로 그렸다.
고흐의 것은 건장하고 소박하며, 고갱의 것은 유순한 곡선으로 그렸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두 개의 의자는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의 성격을 암시하고, 마침내 비극으로 끝나는 공동 생활의 운명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간단한 의자 하나를 그리는데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성격이나 생활까지도 묘사하는 그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연인이 있는 정원, 셍피에르 광장(Garden with Courting Couples : Square Saint - Pierre)
1887년, 유화
1887년 제작된 '연인이 있는 정원'은 고흐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제작한 작품으로 세밀한 붓으로 점묘법의 형태를 취한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세밀하긴 하지만, 직접 작품을 보실 때 느끼실 수 있듯 촛농을 떨어뜨린 듯 물감을 상당히 두껍게 칠한 임파스토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부드럽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그동안 보셨던 고흐의 다른 작품과는 경향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쌩마리의 바다 풍경(Seascape at Saintes-Maries Arles), 1888년 6월, 캔버스에 유채
이젤 앞의 자화상, 1888년,캔버스에 유채
아를 (1888~1889)
약 15개월 동안 아를에 있으면서 그는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이 기간 동안 무려 190점의 작품을 제작해 내었는데 이로부터 그의 그림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는 그의 독자적 양식을 확립하는 시기로 작품의 양뿐만 아니라 질적 변화에서도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색채는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된다. 다음의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의 특징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것을 똑같이 재현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색채를 주관적으로 사용한다."
생 레이미 (1889~1890)
신경발작으로 시달리던 반 고흐는 1889년 5월 3일,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다. 거기서 처음에는 병실 창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그렸고, 그후 관리인 한 명과 동행하여 들판에서 작업하게 되었다. 구불구불한 그의 화필은 소용돌이 모양에 의해 입체감을 갖게 되었다. 7월에는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리는 일에 착수했다.
1889년 (36세)
1월 7일 퇴원하여, 2월 환각 증상을 일으켜 주민들의 고발로 3월 말까지 병원에 감금되었고, 3월 시냑의 방문을 받는다. 4월 17일 동생 테오 결혼(그는 결혼하여 아들 1명을 낳았음), 그동안 고흐는 200점에 달하는 작품을 제작하였다.
4월말 더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동안 의사의 감독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5월 9일 아를르 근교의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했고 발작은 없었으며, 레이 박사의 진료를 받으며 자유롭게 입원 생활을 한다. 그림 그리는 능력을 잃지 않아야만, 자신의 온전한 정신상태가 보장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세 켤레의 구두, 1889년 작품, 캔퍼스에 유화
반 고흐는 화가로서의 작업에 도움을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헤이그에 있는 사촌 모베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모베는 그를 나막신이 있는 정물 앞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그 나막신은 빈센트가 최초로 그린 구두라 할 수 있다. 그 후 그는 구두를 소재로 한 그림을 10점이나 그렸는데, 그것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연작의 형태를 띠고 있다.
네덜란드 체류 시기에 그린 나막신이 있는 정물화 3점은 브라반트 시절에 그린 갈색톤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그림들 속에 등장하는 농부들과 농촌 아낙들이 신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파리에서 보낸 1886년에서 1887년에 이르는 겨울 동안 그는 5점의 구두 그림을 그렸는데, 그 중 적어도 1점은 그가 아직 코르몽의 화실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그린 것이었다.
그의 동료 가우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벼룩시장에서 새로 윤을 낸 헌 구두를 사온 반 고흐는 그것이 너무 윤이 난다고 생각하고서 비오는 날 신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진흙으로 더러워진 구두를 그림으로 그렸고, 그것이 화실에 다니던 다른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아를에서 빈 센트는 '농부들의 낡은 구두를 다룬 정물화'를 그렸다. 그 시리즈는 1888년 말 <나막신La Paire de sabots>(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이에 대해 평론가들이 해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구두 그림들 속에서 전원 세계에 대한 공감의 표현과 도시 생활이나 부르주아적 관습에 대한 거부감을 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이 구두들이 자화상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는데, 반 고흐가 두 켤레의 구두를 그릴 때면 그것은 각각 테오와 그 자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별이 빛나는 밤 (La Nuit Etoilee),
1889년 6월, 캔퍼스에 유화
이 작품은 그 삶의 마지막 1년,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그린 작품입니다. 강렬한 색채의검정. 노란색의 별의 소용돌이는 구심적인 운동에너지를 표현하는 듯 보이는데 이는 작품이 그가 살아있을 적에는 그의 진가를 누구도 인정하여주지 않아 비참한 생에 시달리는 듯한 내면 중심의 몽환적인 화법으로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아이리스 (Irises), 1889년 9월
<별이 빛나는 밤에>와 <아이리스> 두점이 파리 앵테팡당 살롱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 즈음 그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한다.
측백나무 (Cypresses), 1889년 6월, 캔버스 유채
생 레미에서 발견한 보다 더 중요한 모티브는 병원에서 바라보이는 보리밭과 측백나무였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측백나무, 배후의 밭이나 산을, 고흐는 흡사 그 자신의 마음의 번민과 희망의 상징인 것처럼 응시했다. 대부분 직선에 가까웠던 아를르 시대의 필치 대신 휘어 구부러져 서로 대응하는 필치가 화면을 메운다. 일종의 바로크화인데, 그 장대한 리듬의 집합은, 한 그루의 측백나무라 할지라도 거대한 마음의 상질물로 변화시킨다.
고흐는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에게 '측백나무는 시골 풍경의 전형입니다. 그 것은 해바라기에 필적하는 것이고 또한 그 대조이기도 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확실히 해바라기가 아를르 시대의 마음의 상징이라면, 측백나무는 생 레미의 마음의 상징으로, 산도 하늘도 대지도 측백나무의 호흡에 맞게 요동한다.
측백나무가 있는 밀밭 (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년 9월, 캔버스에 유채
타오르듯 요동하며 무성하게 깔린 들의 풀들, 역시 불 꽃 모양을 하고 하늘을 치솟는 올리브 색의 측백나무, 휘몰아치는 대기의 하늘. 그러나 화사하게 서로 어울리는 해조(諧調)의 색채가 억제된 색조에 의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아를르에서 생 레미로 옮겨간 고흐는 그곳에서 아를르 시대와는 다른 조화와 성숙을 달성하고 있다.
해를 쫓아 다니는 해바라기에 공감의식을 가졌던 그가 생레미에서는 힘찬 생장력을 가지고 하늘 속을 뚫고 오르는 측백나무를 주제로 하는 풍경에 열중하고 있다. 얼핏 보면 그는 격렬한 사나이로만 보이나 그것은 일면일 뿐, 이 작품이 갖는 안정감, 섬세함, 조화, 억제는 또 다른 일면으로 부각된다. 고흐 자신도 이 작품을 '내가 그린 가장 명석한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다.
삼나무가 있는 푸른 보리밭(Wheat Field with Cypresses), 1889년, 캔버스에 유채
삼나무와 두여인, 1890년 2월, 쌩레미. 유화
두 여인이 있는 삼나무, 1889년 6월, 쌩레미. 유화
젊은 농부, 1889년, 유채
황금색으로 무르익은 보리밭을 배경으로 그 멀리에는 아늑한 나무 숲을 이루고, 통상보다 낮은 위치에 인물의 반신상을 배치한 이 초상화는 단순한 초상화라기 보다 수확의 계절을 맞이한 농촌 풍경의 한 연장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고호 특유의 필치와 색으로 화면을 통일시킨 대신 인물과 배경의 분위기를 서로 맞서게 배치하여, 그가 나타내려는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다. 생 레미 시대에 그가 많은 인물화를 그리지 못한 것은 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대하면서도 상처 입은 그의 마음이 사람들과의 가까운 접촉을 거부함으로써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 농부의 초상은 네덜란드 시대에 그린 농부들과는 상당히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날카로운 얼굴의 윤곽과 예리한 눈, 입술, 그 표정이나 성격을 그려내는 능력을 충분하게 읽게 한다.
목부 (La Berceuse) 1889년 1~3월
Trabuc, Trabuc부인의 초상,
1889년 9월, 쌩레미. 오일
자장가: 루랭의 부인(La Berceuse : Augustine Roulin), 1889년 1월, 아를. 캔버스 유채
우편 배달부 루랭의 부인을 그린 작품이다.
빨강, 노랑, 초록.. 고흐의 기본적인 색채 관계를 나타내는 보다 전형적인 작품이다. 룰랭 부인은 1888년 8월에 태어난 마르셀과 함께 두 차례나 모델을 서 주었으며, 또한 혼자서도 모성을 상징하는 인물화 <흔들의자에 앉은 여인, La Berceuse>(1888년 12월에서 1889년 3월까지 동일한 주제로 5점의 그림이 그려졌다. 암스테르담, 보스톤, 시카고, 런던, 오테를로)의 모델이 되어 주었다.
생레미 들판 풍경 (농부가 있는 보리밭)
1889년, 캔버스에 유채
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Self-Portrait with Pipe and Bandaged Ear)
올리브 나무들, 1889년, 생레미
뒤집힌 게, 1889년 1월, 캔버스 유화
화판과 양파가 있는 정물(Nature morte a la planche a dessin et auxoignons)
이 작품도 아를르의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의 정물화인데, '내일부터 일에 치중할 마음이다. 그리는 습관을 다시 되찾기 위하여, 먼저 정물을 1, 2점 시작하게 될 것이다.'라고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쓰여 있다. 술병, 물주전자, 양파, 냅킨, 담배쌈지, 파이프, 양촛대, 성냥통, 테오로부터의 편지, 라스파이유라는 의학자에 의하여 쓰여진 의학서, 이런 것들은 모두 고호의 생활 중심부에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그의 생활 중심부에 있는 모든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단지 그리는 습관을 되찾기 위한 방법으로서만 정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평형을 잃은 상태로부터 다시 자기 자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의 생활에 보다 확실한 것을 확인하려는 마음가짐이었음이 틀림없다.
셍레미의 셍폴 정신병원
(L'Asile Saint-Paul a Saint-Remy)
아를에서의 비극적인 사건 이후 반 고흐는 1889년 5월 3일 생폴 드 모솔 Saint Paul de Mausole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곳에 입원해 있던 1년은, 그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한 아를로 '건강을 위한 여행'을 떠난 이래 가장 자주 발발했던 심각한 발작들로 점철된 1년이었다.
아를 요양원의 병실 (Ward in the Hospital in Arles) 1889년 4월, 아를. 캔버스 유채
고흐는 그 정신병원에 12개월 동안 갇혀 있으면서, 되풀이되는 발작에 시달리고 평온한 기분과 절망적인 기분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다. 이것은 고흐가 아를을 떠나기 직전 아를 병원을 그린 두 작품 중 하나다. 두 작품의 따뜻한 분위기로 미루어 고흐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받아들이게 된 듯하다.
병원의 내부는 푸른색과 적갈색, 오렌지색의 보색적인 조화로 표현되어 차분한 느낌이다. 1월의 추위를 피해 난로 주변에 둘러앉은 환자들에게는 절망감이 서려 있고 그들의 주변에서 수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일상적인 광경을 끌어가는 원근법의 소실점에는 십자가가 있다. 자신의 격심한 고통을 이처럼 완화된 초연함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고흐의 면모를 말해준다.
우편 배달부 루랭 (Le Facteur Roulin),
1889년 2~3월
고호는 아를르에서 약간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조롱 속에서 둘러싸이기도 했지만, 제작의 틈바구니에서 한가 롭게 밤의 카페에서 차츰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어 갔다. '금빛을 장식한 푸른 제복을 입고, 수염을 길러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보이는 우편 배달부'의 루랭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깝게 영속적(永續的)인 우정을 갖게 되었다. 특히 그 배달부의 가족 전체와 친분이 두터워, 아들 아르망의 초상도 그렸고 부인도 그렸다.
셍레미 셍폴 정신병원의 복도(Le Couloir de L'Asile Saint-Paul a Saint-Remy)셍레미, 1889년 5~6월
아를르 병원의 마당, 1889년 4월 작품, 유화
Paysage sous un ciel mouvemente,
1889년 캔버스에 유채
붓꽃 (Irises), 1889년, 캔버스에 유채
아빠는 바다에 가고, 1889년, 캔버스에 유채
Vue de l'asile et de la Chapelle de Saint-Remy, 1889년, 캔버스에 유채
생-폴 병원의 공원, 1889년. 캔버스에 유채
두 마리의 게, 캔버스에 유채, 1888-1889년
생 레미의 정신병원 뜰
이것은 지금 내가 입원하고 있는 생 레미의 요양소의 조망이다. 오른쪽에는 병원의 벽과 회색의 테라스, 꽃이 져버린 무성한 장미의 덩굴. 왼편 뜰의 지면에는 홍다색 태양이 타고 있는 소나무의 낙엽으로 어우러지고 있다.
뜰의 경계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둥치도 가지도 홍다색으로 물들어 있지만, 잎의 초록에는 검은 색이 섞여 있어 뭔가 슬픈 느낌이 든다.' 고흐는 이렇게 친구 베르나르에게 이 그림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병원에서 폐쇄된 채 둘러싸인 상태, 그리고 그 둘러싸인 속에서 타오르려는 마음, 그런 것을 상징하듯 한 화면이다.
거의 대부분은 평탄해야 하는 지면이나 테라스까지도 일렁거리며 동요하고 있다. 고흐는 소나무를 '검은 거인'이라 부르고, 실제의 정경 인물에 대조시키고 있다. 그 점에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를르의 댄싱홀, 1889년 작품, 캔버스에 유화
자화상, 1889년 9월, 캔버스 유채
1889년 7월 중순에 발생하여 6주를 끈 생레미 요양소에서의 첫번째 발작에서 회복한 고흐는 한동안 작업실에 틀어박혀 지내며 힘이 넘치는 두점의 초상화를 그렸다. 첫번째 그림은 병원 측이 그의 작업을 중지시키지 못하도록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번째 그림인 이 작품은 가차없는 자기 반성과 동시에 확고한 결심을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베르 쉬르 와즈 (1890)
반 고흐는 북프랑스로 가면 건강이 회복되리라는 기대를 품고, 1890년 6월 가셰 박사가 살고 있는 오베르쉬르우아즈로 옯겨갔다. 거기서 아마추어 화가이자 판화가, 수집가이기도 했던 가셰 박사와 우정을 쌓게 되었으며, 그의 초상화도 2점 그렸다. 반 고흐는 다시 열정적으로 작업에 몰두했으나, 몸이 점점 더 쇠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