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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개헌인가?] 헌법개정에 관한 제22대 국회의 시대적 사명 (1)
이국운(한동대 교수, 헌법/법사회학)
지지율과 리더십 최악, 헌법적 위기상황에서 묻는 대통령직의 본질
산업화, 민주화, 청년세대의 격렬한 갈등, 힘의 우위 없는 균형상태
사라지는 150만표... 지금 ‘의도하지 않은 균형상태’가 붕괴하고 있다!
헌법개정은 시대적 요청, '의도적인 균형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개헌 과정의 유의점: 내부변수, 정치적 타협, 헌법과 법률의 재구조화
곧 시작될 22대 국회가 마땅히 응시해야 할 시대정신 중 하나는 헌법개정이다. 개헌은 현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단축부터 현행 대통령제에 대한 대안적 모색, 두 직선 권력(의회와 대통령) 이상으로 비대해진 사법권력의 민주적 통제 등 여러 쟁점들을 거칠 것이다. 지난 문재인 정부 당시 헌법개정안 준비과정에 참여했던 이국운 교수로부터 개헌 논의를 정리한 글을 받아 두 번에 나누어 소개한다.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 그리고 현재의 청년세대가 갈등하며' 의도하지 않은 균형상태'가 달성되었지만, 그 균형이 이제 붕괴하고 있다. 헌법개정은 '의도적인 균형상태'를 만드려는 노력이다. [편집자 주]
1987년 이후 여소야대 국회가 처음은 아니지만 24년 6월부터 시작하는 22대 국회는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일 것으로 전망된다. 22대에서 국회발 뉴스는 단지 정치뉴스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운명을 건 일대 격돌이 될 가능성이 크다. / 사진=연합뉴스
Ⅰ. 헌법정치적 위기상황과 대통령직의 본질
임기 내 국회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최초의 대통령
제22대 국회의원들을 뽑는 총선거가 야당들의 압승과 집권 여당의 참패로 마무리되었다. 여당으로서는 그나마 헌법개정안 발의나 대통령 탄핵소추를 막을 수 있는 재적 3분의 1 의석을 확보한 것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사태 수습을 방기하는 듯한 대통령실의 우왕좌왕이 한 달째 계속되면서 이른바 레임덕 현상이 급속하게 심화되고 있다. 야당들은 국회를 통과한 채상병 특검법안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경우, 곧바로 전면적인 정권 퇴진 투쟁에 돌입할 분위기이다.
사실 현직 대통령이 국회 다수파 정당 또는 정당 연합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임기 5년을 보내게 된 것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 최초로 벌어진 현상이다. 정치 9단이라던 YS, DJ, JP조차 경험해 보지 못했던 초유의 헌법정치적 위기상황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지만, 지난 한 달여를 돌이켜 보건대, 국가원수인 윤석열 대통령은 별다른 위기의식도 없고, 특별한 대책도 없는 것 같다. 국민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 거국 내각을 구성하거나 대연정을 시도하는 차원은 고사하고, 하다못해 협치나 국정 방향의 일대 전환에 대해서조차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진정, 취임 이후 2년 동안 그랬듯이, 검찰권을 앞세워 사정 정국을 조성하고, 대통령의 고유권한들, 특히 인사권·거부권·행정입법권·사면권을 마음껏 활용하면 남은 3년도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은 무엇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대통령직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혹시 대통령은 대통령직의 본질을 철저히 자신의 공무담임권이나 직업선택의 자유를 실현하는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공적 직위를 정치적 경쟁이나 시험합격의 노획물로 이해하여 쉽사리 사유화하는 관직사냥주의에 깊이 함몰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이 글에서 나는 지금 한국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이 미답의 헌법정치적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현행 헌법의 개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펼쳐보려고 한다. 다만, 그 실현과정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적극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을 생각이다. 그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헌법개정의 성패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득실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 과연 대통령직의 본질이 무엇인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대통령직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국민 모두를 위한 것인지에 관한 전면적인 성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글은 헌법개정의 주도적 역할을 제22대 국회가 수행할 것으로 전제하면서, 헌법개정의 필요성 및 그 기본 방향과 골자, 특히 국회와 대통령 사이의 권력 조정을 포함한 주요 쟁점들에 관하여 몇 가지 제안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총선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윤 대통령은 김건희 여사의 의혹 등에 대해 형식적인 사과문을 읽는 것으로 넘어갔다. 이후 김건희 여사는 다시 공식석상에 등장했다. 이에 대해 홍준표 대구시장은 자기 여자를 지키는 '상남자론'을 폈지만 국민이 대통령에 기대하는 것은 공정하고 상식적인 일처리와 국가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주느냐이다. 5월 19일 경기도 양주시 회암사지에서 열린 '회암사 사리 이운 기념 문화축제 및 삼대화상 다례재'에 참여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 사진=연합뉴스
Ⅱ.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균형상태’에서 ‘의도적인 균형상태’로
사라질 150만표와 K-방역의 성공
지난 한 달여 한국 정치의 미래에 관하여 제기된 공적 발언 중에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집권 여당 공천으로 수도권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보가 한 토론회에서 했던 발언이었다. 그 요지를 요약해 보자면, 2년 전 윤석열 대통령이 승리한 선거에서 70대 이상 유권자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 어르신들이 일 년에 평균 30만 명씩 돌아가시고 있어서, 앞으로 3년 뒤에는 적어도 150만 표를 보충해야 하는데, 지금의 대통령실이나 집권 여당의 모습으로는 어림도 없겠다는 토로였다. 발언자의 의도는 명백하게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당파적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지만, 헌법학자인 내게 그 의미는 한국 사회에서 민주공화국 프로젝트의 추진동력을 확보하는 것과 관련하여 발생한 위기의 징후로서 훨씬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불과 몇 년 전 우리 모두를 뿌듯하게 만들었던 ‘K-방역의 성공’을 예로 들어 이 문제를 생각해보고 싶다.
전 세계가 코로나-19사태의 충격에 얼어붙었던 2020년 전반기 K-방역의 성공은 그 신속성과 입체성, 그리고 일관성의 모든 측면에서 선진국들 대부분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대한민국을 21세기 자유민주주의의 새로운 모델로 부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이면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찬사는 매우 부담스럽고 솔직히 조마조마한 측면이 컸다. 왜냐하면, K-방역의 성공 이면에는 외부에선 잘 포착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독특한 정치적 균형상태가 존재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한 조건들이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한 예는 최근의 여러 선거에서 거듭 나타났던 세대 간의 격렬한 대립과 투쟁이다.
세 세대의 격렬한 갈등, 힘의 우위 없는 균형 상태
이데올로기적 분단과 한국 전쟁의 상흔을 뚜렷이 기억하는 노년 세대에게는 여전히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라는 국가주의적 세계관이 압도적이다. 이에 비하여 탈냉전이 본격화된 19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제이션과 함께 자라난 청년 세대는 디지털 네이티브의 첫 세대로서 ‘어떤 공적 가치도 개인의 자유와 행복의 실현에 앞설 수 없다!’라는 정반대의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윗세대에 대해서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강조하고, 아랫세대에 대해서는 탈역사적 개인주의의 위험을 강조하는 장년 세대가 존재한다. 장년 세대의 세계관적 특징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문제를 지나치리만큼 정치적 관점에서 이해하면서 어떻게든 담론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경향은 다른 두 세대에 비하여 확실히 두드러진다.
지나간 십여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이 세 세대는 과거청산, 대북관계, 부동산, 탈원전, 일자리 분배, 연금구조조정, 교육혁신, 검찰개혁, 기본소득 도입 등 거의 모든 정치적 이슈에서 충돌을 거듭해 왔다. 흥미로운 것은 그중 어느 한 세대도 좀처럼 위세가 수그러들지 않은 채, 날카로운 대립과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바는 이와 같은 세 세대의 대립과 투쟁이 ‘의도하지 않은 세계관적 균형상태’를 조성하여 K-방역의 성공기반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이다. 만약 한국 사회에 전국민건강보험체제나 전국단위의 질병관리본부처럼 노년 세대가 뒷받침해 온 국가주의적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K-방역의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대면 의료와 교육의 플랫폼이 된 청년 세대의 디지털 미디어와 소통문화가 계발되지 않았더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리라. 심지어 국지적인 불만과 문제마저도 전국민적인 논쟁거리로 만드는 장년 세대의 담론적 헤게모니 집착까지도 K-방역의 성과를 낳은 한 가지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 셋 중 어느 하나만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K-방역의 성공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사실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 내부의 치열한 대립과 투쟁이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균형상태’를 이루어 결과적으로 외부에 대해 강력한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현상은 세대의 문제에 국한될 수 없다. 공간적으로는 서울의 강남 3구를 위시한 핵심지역과 이를 둘러싼 이른바 광역 수도권, 그리고 그 바깥의 비수도권 전체가 이루고 있는 정치적 균형상태를 들 수 있고, 산업적으로도 제조업과 서비스산업, 그리고 공공 가치의 관점에서 여전히 강력한 위세를 지닌 농업 등의 정치적 균형상태를 생각할 수 있다. 미디어의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인쇄 매체와 각종 케이블을 포함한 방송 매체, 그리고 유튜브를 비롯한 사회관계망 매체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을 지목해야 할 것이고, 권력분포의 측면에서는 국회와 대통령과 정당을 위시한 선출직 권력(deputy)과 행정 관료제와 사법부를 포함한 비선출직 권력(proxy), 그리고 기업‧언론‧시민사회단체 등 그 바깥의 공론장 권력들 사이의 대립과 투쟁을 꼽아야 할 것이다.
헌법개정의 필요성: ‘의도하지 않은 균형상태’의 붕괴
이처럼 한국 사회의 여러 층위에 존재하는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균형상태’가 코로나-19사태와 같은 긴급상황에서도 K-방역의 성공을 이끌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진정한 경쟁력이라면, 우리는 그로부터 헌법개정의 필요성에 관한 결정적인 논거를 끌어낼 수 있다. 단적으로 그와 같은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균형상태’가 한국 사회에서 이미 붕괴의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K-방역의 성공은 균형이 깨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모습에 가까웠던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세대 간의 균형은 고령화 추세에 힘입은 바가 크며, 저출생 추세의 지속과 더불어 곧바로 붕괴될 수밖에 없다. 수도권 핵심지역의 부동산 투기를 잡지 못하고, 적극적인 균형발전전략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지역 간의 공간적 균형 역시 공허한 정치적 슬로건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산업 간의 균형이나, 미디어 간의 균형, 권력분포의 균형 역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년 전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을 때, 윤석열 대통령에게 주어졌던 시대적 사명은 대단히 명백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균형상태’를 ‘의도적인 균형상태’로 바꿀 수 있을지, 달리 말해, 끊임없는 외부의 도전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스스로 균형을 창조하는 역동적인 시스템을 한국 사회의 여러 부문에 확실하게 제도화할 수 있을지를 답해야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황금 같은 2년의 기간을 윤석열 대통령은 어떠한 위기의식도 없이 도저히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좌충우돌로 일관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총체적인 경쟁력은 급전직하 수준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경제, 외교, 민생, 자치분권, 균형발전, 교육연구, 과학기술, 보건의료, 심지어 언론자유와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가시적인 지표하락과 함께 국민 개개인의 자긍심과 활력에도 심대한 타격이 있었다. 오죽하면 어떻게 대통령 한 사람 바뀌었다고 나라 전체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느냐는 말이 외국 기관들로부터 나오게 되었을까?
지난 2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의도하지 않은 정치적 균형상태’가 거의 붕괴상태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다. 또 민주화 이후 최초로 5년 내내 소수파 정부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 윤석열 정부가 이와 같은 한국 사회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만한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우리라는 점도 명약관화하다. 그렇다면 이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이번에 선출된 제22대 국회가 헌법개정을 비롯한 대대적인 구조개혁에 성공하여 일거에 상황을 반전시키는 방법밖에 없지 않겠는가? 일찍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국가들이 대부분 경험했듯이 대한민국은 이미 산업정책이나 부동산정책, 교육정책이나 연금정책과 같은 핵심정책 중 한둘만 삐끗하더라도 국가 전체가 장기침체에 빠질 수밖에 없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따라서 시급하게 구체적인 체제 혁신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이후 한국 사회는 급속한 혼란과 침체를 겪게 될 수도 있다. 제22대 국회에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도 분명하다.
1987년 11월 10일 폐회한 제137회 정기국회의 마지막 날 의사당 모습. 당시 12대 국회는 대통령 중심 직선제 개헌안 · 대통령 선거법 등 66건의 법률안과 새해 예산안 및 86년도 결산안 16건등 모두 85건의 의안을 처리하고 폐회했다. 회기 도중인 87년 10월 29일 공포된 6공화국 헌법은 2024년 현재 그 시대적 효용성에대해 질문받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Ⅲ. 헌법개정은 어떻게 추진되어야 하나
1987년 헌법: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대타협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1987년 헌법은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대타협을 확인한 정치적 휴전 문서나 다름없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은 한국 전쟁 이후 적대적 공생 관계를 이어 온 쌍생아였으며, 이 둘의 정치적 타협은 체제 내 경쟁자들의 타협이었다. 권력 구조의 측면에서 그 핵심고리는 중앙집권주의를 공통의 지향으로 삼아 성장 욕구를 수용하면서, 강력한 직선 의회와 강력한 직선 대통령을 공존시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행 헌법의 이러한 기획은 과연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끊임없이 패자부활전을 제도화하는 독특한 권력 구조는 분명 시민들의 성장 욕구를 수용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 유례없는 저출생 추세가 고착되고 경제적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지속적인 성장이라는 근본 전제는 이미 무너졌고, 그와 함께 현행 헌법을 뒷받침해온 다른 조건들도 상당 부분 사라져 버렸다. 간단히 세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의 정치적 휴전에 불변의 상수로 작용했던 분단 현실이 변화하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 남북한 UN 동시가입을 거쳐 남북정상회담과 경제협력으로 이어지는 남북화해의 점진적인 진행과정은 이러한 흐름을 보여준다. 1989년 동구 공산권 붕괴 이후 개시된 탈냉전 및 동북아 국제정치구도의 재편을 생각할 때, 남북의 화해 협력은 돌이킬 수 없는 대세이다. 시대착오적인 북한의 핵 개발과 3대 세습이 없었더라면, 분단 현실의 변화는 진작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둘째, 1987년 헌법이 전제하는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인 단일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화와 정보화, 다원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최근에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까지 일상에 침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삶의 기본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세대는 이미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류가 되었다. 산업화에도 민주화에도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 이 세대에게 중앙집권적이고 폐쇄적인 단일국가 및 이를 전제로 구성된 정치, 행정, 사법, 금융, 교육, 문화 시스템들은 시대착오적일 뿐이다.
셋째, 1987년 헌법이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던 사법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중대한 헌법적 과제가 되었다. 1987년 헌법 아래서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의회의 공존은 기묘하게도 정치의 사법화를 배태했다. 위헌법률심판은 일상사가 되었고 대통령 탄핵이나 정당 해산도 헌법재판소가 결정했으며, 모든 정치 현안에는 검찰의 개입이 당연시되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과 제왕적 의회는 무책임하게도 정치적 책임을 사법과정으로 전가하다가, 급기야 2년 전에는 ‘검찰 국가’의 탄생을 방조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개헌의 키워드와 문재인 정부의 헌법개정안 평가
그렇다면 이와 같은 변화를 수용하고 또 극복하기 위하여 제22대 국회는 어떠한 방향에서 헌법개정을 추진해야 할까? 나는 크게 두 쌍의 키워드에 그 열쇠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분권과 경쟁’으로서 한국 사회의 중앙집권적 권력 구조를 분권적 형태로 해체하고 각 단위 사이에 자주적이고 공정한 경쟁의 기풍을 북돋아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체계화와 정교화’로서 국회와 대통령의 관계에 관해서만이 아니라 헌법재판소, 법원, 검찰, 감사원을 비롯한 사법권력의 권력 행사, 그리고 중앙권력과 자치 권력의 상호관계 등에 관해서도 현행 헌법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제22대 국회는 일단 남북관계가 극적인 호전의 기미를 보이던 2018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했던 헌법개정안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헌법개정안은 전면개정안의 형태로 공식 제안되었던 유일한 안인 데다가, 내용의 측면에서도 전문, 총강, 기본권 및 경제, 기타 영역들에서 당시까지의 헌법개정논의를 집대성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헌헌법 이래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자치분권 및 균형발전의 영역에서는 사실상 헌법제정에 가까운 수준의 헌법개정안이 제출되었다. 요컨대, ‘분권과 경쟁’의 측면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헌법개정안은 반드시 참고해야 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제22대 국회가 추진할 헌법개정의 또 다른 축인 ‘체계화와 정교화’의 관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헌법개정안은 재고의 여지가 크다. 무엇보다 중앙권력의 핵심인 국회와 대통령의 관계에 관하여,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 정도를 삭제하는 수준에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는데 머물렀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건대, 문재인 대통령은 헌법개정안을 제안하면서, 좁은 의미의 권력 구조 재편에 관하여 정치세력들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질 경우, 그 결과를 담은 국회의 헌법개정안에 우선권을 부여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한 존중과 겸양의 관점에서 높이 평가할 측면이 있으나, 국민이 직접 선출한 유일한 공직자이자 국가원수로서 헌법이 보장한 최대의 권한인 헌법개정안 제안권을 행사하는 국면에서는 책임정치의 관점에서 아쉬운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22대 국회는 반드시 ‘체계화와 정교화’의 관점에서 최대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를 담은 최선의 헌법개정안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개헌 과정의 유의점: 내부변수, 정치적 타협, 헌법과 법률의 재구조화
헌법개정은 공동체적 정체성의 확인이나 국가적 비전의 제시, 민주주의의 확대나 기본권의 신장과 같은 이념과 명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실질적인 정치적 타협의 문제, 즉 정치세력들 사이에서 권력과 이익을 새롭게 조정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현행 헌법만 살피더라도, 1987년 8월 이른바 8인 정치회담에서 이루어졌던 당시 정치세력들 사이의 타협은 대통령선거에서 최고득표자가 2인 이상일 때 국회의 선출규정(제67조 제2항)이나, 대통령의 궐위 사태 등에 대비한 후임자 선출 규정(제68조 제2항), 대통령 임기연장이나 중임변경을 위한 헌법개정의 효력제한 규정(제128조 제2항) 등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렇다면 제22대 국회가 주도할 향후의 헌법개정작업은 과연 어떻게 한국 사회의 살아있는 권력들 사이에서 그와 같은 실질적인 정치적 타협을 끌어낼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나는 적어도 세 가지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남북관계의 개선처럼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변수를 실질적인 헌정 개혁의 정치적 동력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한다. 체제 개혁에서 외부변수는 어디까지나 환경적 요인이므로, 그 변화가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는 있으나, 선후 관계를 바꾸어 그 자체를 핵심 인자로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정반대로 체제 개혁의 정치적 동력은 철저히 주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내부변수를 중심으로 확보하고, 외부변수는 단지 환경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둘째, 헌법 문서의 개정과 실질적인 헌정 개혁을 함께 추진하려면, 반드시 한국 사회에서 살아있는 권력들 사이의 실질적인 정치적 타협이 수반되어야 한다. 특히 국회와 대통령, 여야 정치권과 관료집단, 각 광역권 지역 사회, 언론과 기업 및 시민사회단체들 전부를 아우르는 압도적 다수의 정치연합이 필요하다. 따라서 국회의 헌법개정시도는 주요 정당은 물론 정부와 다른 헌법기관들의 협조를 제도적으로 확보함으로써 압도적 다수의 정치연합을 형성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야 한다.
셋째, 실질적인 헌정 개혁을 위해서는 헌법 문서의 개정과 헌법적 법률들의 재구조화를 완결된 세트로 추진해야 한다. 헌법적 법률들의 재구조화와 체계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한, 헌법 문서의 개정만으로는 실질적인 헌정 개혁이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검찰개혁 문제만 보더라도, 헌법 문서에서 검사의 영장청구권 규정을 삭제하려면, 수사와 기소의 분리를 포함한 형사사법 권력기관의 구성·배치 및 민주적 통제에 관한 헌법적 법률들의 골격이 함께 제시되어야 한다. 헌법 문서의 개정을 실질적인 헌정 개혁의 로드맵 상 중간 목표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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