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술 이야기4 : 맛없는 물, 맛있는 물
노성열 前 문화일보 부장
맛있는 물, 술 이야기 네 번째 글입니다. 술 가운데 전 지구적으로 가장 많이 보급된 인기 만점의 술, 맥주부터 지난번에 알아보았습니다. 맥주의 탄생과 보급, 제조법에 관한 기초 공부였죠. 이번 글에서는 맥주와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술인 포도주의 세계를 공부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뒷부분에 발효주를 증류해 만든 독주(毒酒)의 영토도 잠깐 들러보겠습니다.
신석기 때 처음 등장, 높은 알코올 함량으로 귀족들이 애호
맥주가 전 세계에서 밀 농사를 짓는 광범위한 경작지에서 주된 식품인 빵과 함께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지금도 빵 문화권인 유럽, 미국,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는 빵과 더불어 고유의 맥주 문화도 남아 있습니다.
이에 비해 포도주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지중해 인근 지역에서 처음 나타나 서서히 중동과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원전(BC) 9000년경 신석기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술적 견해입니다. 아프리카의 북부 레바논과 시리아, 그리고 이스라엘의 일부 지역에는 야생 포도나무가 오래전부터 숲을 이루고 있었다고 하네요. 이곳 주민들의 유적지에는 대륙과 대륙 사이에 낀 ‘연결 지역’이란 입지를 이용해 중계 무역에 종사한 흔적이 예부터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근대에 들어 우연히 이집트의 한 왕릉에서 발굴된 포도주 창고의 700여 개 항아리에서는 이집트산(産)이 아닌 고대의 포도주들이 발견됐습니다. 이 출처를 과학적 기법으로 추적한 결과, 고대 가나안 땅의 페니키아에서 재배, 수출된 것임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포도주는 맥주보다 더 높은 알코올 함량 때문에 귀족들에게 애호되곤 했습니다. 빵 대신 배를 불리기 위해 듬뿍 마시던 싸구려 맥주가 서민인 농부의 술이라면, 포도주는 조금만 마셔도 취하고 싶은 부자들의 고급 술이었던 것이죠. 아무튼 이집트가 포도주 수입 국가에서 재배 국가로 서서히 변신하면서 지금의 그리스 크레타섬까지 포도주 문화는 퍼져나갔던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페니키아 왕의 딸 에우로페(Europe)에게 반한 제우스 신(神)이 황소로 변신해 그녀를 크레타섬으로 납치했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이는 포도주 교역의 경로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역사학자들은 해석합니다. 크레타에서 출발한 유럽 대륙의 포도주 재배는 페니키아인들으로부터 지중해 교역권을 탈취한 그리스 본토로 번지고, 이윽고 이탈리아에 상륙합니다. 그리고 스페인과 지브롤터해협까지 진출하기에 이릅니다.
포도넝쿨나무 열매에서 추출한 신의 물방울
포도주는 잘 익은 포도의 당분을 발효시켜 만든 알코올 음료로, 라틴어 ‘비눔(Vinum)’에서 어원을 찾습니다. 지금도 이 포도넝쿨나무의 열매로부터 추출한 신의 물방울을 ‘비노 (vino, 이탈리아어)’, ‘뱅(vin, 프랑스어)’, ‘와인(wine, 영어)’이라고 부르고 있죠. 포도주의 제조는 열매를 수확한 후 세척, 발효용 효모 첨가, 압착 공정으로 원액 추출, 용기에 담아 숙성이라는 과정을 거칩니다. 적절한 숙성을 거친 포도주의 알코올 함량(도수)은 맥주보다 좀 높은, 대략 13~15%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떤 포도 품종을 쓰느냐, 흰 포도인가 붉은 포도인가에 따라 적포도주와 백포도주, 로제(Rose) 와인으로 나누는 게 일반적입니다. 또 후속 가공 작업에 따라, 발효가 끝난 포도주에 당분과 효모를 첨가해 인위적으로 재(再)발효를 유도하면 탄산이 포함된 발포 포도주가 생산됩니다. 이 가운데 프랑스의 샹파뉴지방에서 생산되는 발포 포도주만 ‘샴페인’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곳에서 생산된 제품은 보통 ‘스파클링 와인’이라고도 하지요. 알코올 도수를 높인 강화 포도주도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포르투 와인이 대표적입니다. 포도주의 양조 과정에서 브랜디와 당분을 첨가해 만든 주정 강화 포도주죠. 포도주의 품종이나 음용 예법 등은 ‘맛있는 과학’에서 조금 벗어나기 때문에 여기서는 자세한 기술을 생략하겠습니다.
증류주의 탄생과 ‘스피릿’ 애호가들의 3단계 음주 격식
술의 과학을 처음 소개하면서 자연 발효주의 알코올 농도는 18%가 한도라고 설명했던 내용이 기억나시나요? 곡식이나 과일을 발효시키는 미생물인 효모가 당분을 분해하면서 부산물로 알코올이 만들어지는데, 그 속에서 스스로 죽지 않고 살아남는 한계치이기 때문입니다. 효모는 분해 과정에서 원래 경쟁 미생물을 퇴치하기 위해 알코올이란 독한 소독 성분을 생산했는데, 너무 농도가 짙어지면 자신도 견디질 못합니다. 그래서 18% 이상 독한 술은 맥주, 포도주 등 발효주를 끓여서 수분은 날리고 알코올 농도만 강화한 증류주로만 만들 수 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증류주를 술의 영혼, 정수(精髓, 엑기스)란 뜻에서 ‘스피릿(spirit)’으로 부릅니다. 진, 보드카, 위스키, 브랜디 등 우리가 아는 양주가 바로 그것입니다.
스피릿은 탄생 초기에는 향수처럼 귀족들의 약이나 기호품으로 출발했습니다. 특히 부패에 대한 염려 없이 장거리 운송이 가능해서 선원들의 술로도 각광받았죠.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 때 의사들의 치료용 약으로 널리 보급되면서 국민 술로 사랑받기도 했습니다. 라틴어 ‘아쿠아 비테(Aqua Vitae, 생명의 물)’란 별명도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증류주는 너무 독하기 때문에 보통 물이나 얼음, 다른 음료를 타서 희석해서 마시는 주법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순수 스피릿 애호가들은 애써 3단계 음주의 격식을 지킨다고 하네요. 노징(nosing), 테이스팅(tasting), 피니싱(finishing)으로 나뉘는 순서입니다.
잔을 받으면 먼저 코에서 3cm 정도 거리에 놓고 냄새를 맡습니다. 스피릿의 첫인상을 관찰하는 상견례라고 할 수 있죠. 이것도 잔의 각도를 앞으로 혹은 뒤로 기울이느냐, 얼마나 오래 맡느냐 등에 따라 의견이 분분합니다. 테이스팅은 살짝 한 모금을 입에 머금고 본격적인 시음에 들어간 단계입니다. 스피릿은 증류와 숙성에 오랜 공을 들인 술의 ‘영혼’인 만큼 벌컥벌컥 들이키기보다는 홀짝홀짝 맛을 보는 게 어울립니다. 마지막으로 삼킨 후 남는 향과 혀의 알알한 뒷맛을 즐기는 것이 피니싱입니다. 각자의 느낌에 따라 동료들과 품평을 주고받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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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토닉(진과 토닉워터를 넣은 칵테일) ⓒ픽사베이 |
진은 주니퍼란 열매를 기초로 여러 허브와 식물의 향을 더해 만든 증류주입니다. 네덜란드에서 탄생했지만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증류주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색투명한 진은 살인 면허를 가진 첩보원 007이 좋아하는 마티니 칵테일을 만드는 주재료이기도 하죠. 진을 얼마만큼 넣느냐, 얼음을 덩어리로 넣느냐 깨서 넣느냐, 섞을 때 젓느냐 흔드느냐, 올리브 열매를 몇 개나 곁들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한 조합이 나온답니다. 하지만 토닉워터를 섞어 달달하게 마시는 칵테일이 가장 보편적인 음주법입니다. 보드카는 러시아와 폴란드가 원산지인 무색투명의 술입니다. 동양의 소주처럼 곡물, 당밀, 감자 등 여러 식물 재료로 만들죠. 제조법도 비교적 단순하고 향과 색이 없는 그 순수성 때문에 어떤 술과도 섞어 마시는 기주(基酒, base)로 애용됩니다. 파티의 흥을 돋우는 과일 칵테일 펀치의 주재료로도 쓰입니다. 다음은 위스키, 테킬라, 압생트, 럼, 브랜디 같은 세계의 다른 증류주도 차례로 공부해봅시다.
※ 이 원고는 월간 <과학과기술> 5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