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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생활의 윤리 3:18~21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사회생활의 윤리 3:22~25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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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되,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님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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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생활의 윤리 3:18~21
바울은 가정생활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먼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합당한 일이라고 합니다(18절). 이는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창조되었기에 권위와 책임이 남자에게 부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남편이 아내 위에 군림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19절).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시듯 남편도 아내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20절).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거나 낙심하게 하지 않도록 세심히 배려해야 합니다(21절). 가족 관계의 기초는 사랑과 존중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나요?
가족 안에 사랑과 존중이 확대되도록 내가 더 노력할 점은 무엇인가요?록 세심히 배려해야 합니다(21절).
가족 관계의 기초는 사랑과 존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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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의 윤리 3:22~25
바울은 사회생활의 윤리를 제시합니다. 당시 교회 안에는 노예를 거느린 그리스도인과 노예 출신의 그리스도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종은 육신의 상전(주인)에게 눈속임이 아닌 두려운 마음으로 성실하게 ‘주님께 하듯’ 순종해야 합니다(22~23절). 그는 육적 신분이 노예이기에 땅에서의 기업은 없지만, 영적 신분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기에 장차 하늘의 기업을 상속받습니다(24절). 상전이든 종이든 불의를 자행하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25절). 하나님은 사람을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하지 않으시는, 공평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디서나 주님께 하듯 진실히 행하면 됩니다. 종의 충성과 주인의 배려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아름답게 결속시킵니다.
● 더 깊은 묵상
상전이든 종이든 불의를 저지른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나요?
나는 하나님이 세워 주신 지도자를 어떤 마음으로 대하나요?
한절묵상:골로새서 3장 22~23절
'마음을 다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영혼으로부터'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으로부터 진심으로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주님을 섬기는 일로 만드는 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인구 절반이 노예였던 시대에 바울은 노예의 일조차 마음 다해 주님께 하는 일이 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어떤 직분과 직책을 가졌든 성도는 그 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고 성도답게 생활한다면 모든 관계와 일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는다. -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
오늘의 기도
주님, 무엇을 하든 누구를 대하든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인생임을 드러내길 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배우자를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듯 자녀를 존중하며, 주님을 경외하듯 정직하게 일하게 하소서. 속사람을 살펴보시는 주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자녀로 살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25 예수가 함께 계시니)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으로서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감사하면서, 당신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면서 거룩하고 정결한 삶,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면서, 말씀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진심을 다해 살아가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신 본분에 맞게 최선을 다하면서 모든 일에 진심을 다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노력하자
11월7일 오전8시 청라호수공원
18,19절 ‘위의 것을 추구하는 삶’은 가정에서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부부관계는 일방적인 애착이나 복종관계가 아니라 상호 존중과 사랑의 관계여야 합니다. 여인들은 아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법을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통해 배워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과 돌봄의 대상으로 여기며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물리적 폭행만 아니라 정서적인 소외도 또 다른 폭력(괴롭힘)입니다. 부부관계에서 나는 어떻게 구별되고 있습니까?
20,21절 자녀는 부모를, 하나님을 대하듯 순종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부모를 판단하고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도 자녀를 소유나 대리만족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고 그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이 되지 않는 권위는 도리어 반항심만 키울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주님을 대하듯 하고 주님의 자녀를 키우듯 한다면, 주님은 이 관계를 예배로 받으실 것입니다.
22절~4장 1절 종은 눈가림만 하지 말고 주님을 대하듯 진심으로 주인을 대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걸 보고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며, 맡은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주인도 종이라고 하대하지 말고 자신의 참 주인이 하늘에 계심을 잊지 말고 그분이 자신을 대하시는 방식(의와 공평)대로 해야 합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귀한 자들로 대하고, 심지어 협력자로 인정하고 감사할 때 하나님은 그 일터를 성소로 여기시고 그 일을 성직으로 간주하실 것입니다.
11월7일 오전8시 청라호수공원
오늘 본문은 골로새 성도들 가정에게 주는 윤리적 교훈으로 부부 관계, 보모와 자녀 관계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주안에서 지켜야 할 도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화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되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아내들에 대한 권면, 남편들에 대한 권면, 부모와 자녀들에게 대한 권면, 종들에 대한 권면 등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 ‘어버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격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와 같은 말입니다. 당시 부모들은 자녀에 대해 매우 권위적이었습니다. 가부장 사회에서 생명에 대한 권한까지 아버지가 갖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자녀 교육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였는데 아버지의 명령과 지시가 곧 명령이었으며, 만약 순종치 않을 시는 체벌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대에 바울의 권면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하라는 말은 아버지의 뜻과 방법으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하라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단지 주님의 가르침의 전달자뿐이라는 것입니다. 종들과 상전에 대해서는 더 파격적입니다. 여기서 종은 가정에서 일하는 노예를 말합니다. 당시 노예는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그래서 주인이 절대적으로 소유권을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주인의 말에 불순종할 수 없는데 노예들은 그런 이유로 매우 피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매사에 적극적이지 않고 주인의 눈을 속이면서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은 것이지요, 문제는 그런 종들이 주인과 함께 교인들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성실하게 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아울러 주인들에게도 그들을 천대하지 말고 의롭고 공평하게 대하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일부러 ‘육신의 상전들’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 말은 종들이 주님을 믿는 순간 비록 육신은 종이지만 그 영혼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누릴 존재라는 선언입니다. 아마 그 말에 노예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주인들은 학대하던 일들을 멈추어야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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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 성실하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늘의 축복을 상으로 받게 될 것이니,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는 어떤 일이든지 주님 앞에서 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한 것으로, 그 까닭은 땅의 기업도 기업이지만 무엇보다도 성도는 하늘의 기업을 상급으로 받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기업은 한계가 있지만 하늘의 기업은 영원한 것으로, 비교가 되지 않으니, 바울이 그 인센티브를 제시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혜롭게도 부부와 자녀 문제 외에 종과 상전의 문제를 다루면서 결론으로 가장 은혜로운 제안을 합니다. 상대방을 그리스도로 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누구에게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면 그 보상은 우리 주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주께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하실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주님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정녕 그리스도 안에서의 인간관계의 핵심을 밝히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주님으로 보면 내 관점과 기대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대신 주님의 관점과 기대감을 채우지 못해 죄송스러울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우리 주님으로 보면 어떨까요? 기대하다 불만족하기보다는 존경하고 사랑스러워 못 견딜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우리 주님으로 보면 어떨까요? 역시 기대하고 실망하기보다는 존경하고 사랑스러워 못 견딜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으로 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장차 천국에선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는다고요. 그곳에서의 관계는 지상에서의 인간관계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우리 각자는 한 인격으로서 오직 주님과 관계를 맺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이른 바 그리스도 신부의 신분입니다. 그 때 사랑하는 배우자가 옆에 있을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자녀들이 옆에 있을 것입니다. 부부가 아니고, 부모와 자녀가 아니고, 오로지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서 말입니다. 우리 모두 한 생명체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서 녹아지지 않을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고 합니다. 쓰면 쓸수록 더 나오지만 인색하면 아예 그 근원이 말라 버리는 샘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퍼도 퍼도 또 나오는 샘물과 같은 사랑을 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듯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니까요.
믿음은 반드시 삶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을 받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4)
그래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직적 관계와 수평적 관계에 건강하고 균형 있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수직적 관계라 함은 하나님과의 관계로서, 스스로 주인 된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자신이 아닌 주님이 주가 되시는 변화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또한 수평적 관계라 함은 인간 관계로서,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사랑과 평강이 가득한 인적 관계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부부관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골3:18~19)
또한 부모는 자녀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부자관계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3:20~21)
뿐만 아니라 주 안에서의 성실함으로 서로를 대하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3:22)
이런 변화의 핵심은 바로 세계관의 변혁, 곧 인간론의 변혁에 있습니다 즉,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는 식의 세상적 인간론이 아니라, 나도 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저도 그리스도의 사람임으로 그리스도께 하듯 모든 사람을 대하는 그리스도적 인간론의 변혁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24)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우리를 이 나라를 이루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거룩한 나라요"(벧전2:9)
그러므로 서로 주께 하듯 함으로 이 나라를 우리 가운데 이루어 우리끼리 화목하기 원합니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5:13)
신앙인의 첫 사역지는 가정과 직장입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선교지에 나아가 주님 나라 확장을 위해 쓰임 받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가정에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한 몸인 공동체를 돌아보지 못한다면 그 믿음과 받은 은혜는 껍데기뿐인 것이 될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과 그의 생명으로 사신 교회 간의 무한한 십자가의 사랑과 순교로 화답하는 순종의 언약 관계를 배우고 행하는 가장 근본이 됩니다.
자녀의 순종과 부모의 인자함과 긍휼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겸손과 감사와 하나님의 헤세드의 은혜와 용서를 볼 수 있게 합니다.
당시의 종들이 그의 육신의 주인들에게 행하는 것 역시 주님께 하듯 함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성령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얼마나 정결하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로 도움이 되고 변치 않는 상을 주시는 그분께서 그 목숨 값을 내어놓고 지금도 사랑하시는 이들을 품는 것이 그의 뜻을 이 땅 가운데 행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는 지표가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는 외모로 우리를 취하지 않으시고 겉모습을 통해 함부로 판단하지도 경솔하게 대하지 않으시는 신실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그 놀라운 뜻에 참여하고 그 축복과 평강을 누리는 거룩한 제자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골로새서 3:18~25 일상의 모습이 영성입니다.
말씀요약:
아내는 주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말라.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아비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는다.
말씀묵상:
오늘도 크게 3가지 정도를 말씀하시고 계신다.
첫째 : 부부와의 관계에서 구체적인 신앙의 원리(18~19)
둘째 :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구체적인 신앙의 원리(20~21)
세째 : 종과 상전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인 신앙의 원리(22~25)를 말씀하신다.
이 3가지를 두가지로 줄인다면 가정에서의 신앙의 원리(18~21)와
사회 생활에서의 신앙의 원리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도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에서도 언젠가 잠깐 스쳐 보고 지나 간 것이 있었지만
바울은 독특하게 신앙의 원리를 설명하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 원리를 제시 하신다.
이것이 정말 올바른 신앙의 원리이고 태도이다.
가정의 모든 일을 다 팽겨쳐 버리고 교회에만 미처서 돌아다니는 것도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이 분명히 보여 주시고 계시는 것이다.
부부와의 관계가 가장 먼저 나온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위가 부부이기 때문 일 것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가정의 원리와 부모 자녀의 원리를 변하지 않는 말씀 가운데 기록해 놓았다.
부부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아내들이다.(18)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다.
그리고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셔서 아담을 잠 들게 하시고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다.
돕는 배필(a suitable companion to help)로 만드신 것이다.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신다.(18)
복종 해야하는 이유는 많이 있겠지만 남자가 먼저 만들어 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고전11:9)
하나님께서 남자를 여자의 머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기도 하다(창3:16)
아무튼 여자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신다.
두번째 남편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19)
아내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은 좋고 쉬운데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어렵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라(엡5:25)하시는 것이다.
간단히 알기 쉽게 말씀하면 십자가가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인데 .....쉽지가 않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면 쉬운데 가끔 시퍼렇게 다시 살아나는 것이 문제다.
아내가 먼저 복종하면 사랑하는 말씀이 아니다.
아내의 복종과는 상관없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게리 채프만은 사랑에는 5가지 언어가 있다고 한다.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스킨십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부모와 자녀에 관계에 대한 말씀이다.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20) 아비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21)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훈육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자녀가 순종 할 때에만 잘 훈육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 할 때에도 권위를 가지고 훈육해야 한다.
어린 자녀가 이제 막 사춘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올바르게 지도 할 수 있을지 지혜를 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하신다.(22)
노예제도가 일반화 되어 있던 시절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요즘에도 소위 말하는 갑을 관계에 슈퍼 갑질의 문제 때문에 언론에서 곤욕을 치르는 자들도 많다.
눈가림 만으로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신다.(22)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23) 하신다.
내가 어떤 자세로 회사에 일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하는 것은 없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하자.
오늘의 말씀요약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비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종은 상전에게 순종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아닌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해설
가정생활의 원리(3:18~21)
믿음은 추상적인 관념이나 자기 신념이 아니며,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관계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주 안에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주님의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엡 5:22~33)를 경험합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아내는 남편에게 예수님을 향한 교회의 복종을
행합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 또한 주 안에 있습니다. 부모는 주님의 종으로서 자녀를
분노하게 하거나 실망시키지 말고, 자녀도 주님의 종으로서 부모의 권위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처럼 가정 안에서 맺는 모든 관계를 하나님께 하듯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순종의 관계로 형성할 때,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 묵상 질문: 가정의 모든 관계에 예수님과의 관계를 적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역할을 주님의 종으로서 감당한다면, 태도가 어떻게 달라질까요?
사회생활의 원리(3:22~25)
믿음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일에 드리는 예배도
받으시지만, 일상생활의 삶을 통해서도 영광 받으십니다(마 5:16 참조). 우리와 상사의 관계 속에도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새사람은 상사가 지켜볼 때만 열심히 일하지 않습니다.
혹 사람은 보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모든 상황과 마음까지 속속들이 보십니다. 따라서 주님께 하듯
하는 것은 성실하게 일하되 마음까지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부당하게 대우할지라도, 우리는 주님께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성도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일상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하찮게 여기며 소홀했던 일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것을 바라본다면 어떻게 행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제 믿음을 보일 때와 장소가 막연한 훗날과 먼 곳이 아니라 바로 ‘지금’이고
‘이곳’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예수님을 보이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시고,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마음가짐을 허락하소서.
본문/ 골 3장 예수님과 동행하세요
예수님을 만나보셨습니까? 이 질문은 많은 기독교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질문은 잘못된 질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면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이 아니라 이미 만난 사람이며 그 이후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만나본 것이 아닙니다. 계속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얼굴을 보아야 만난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났냐는 말에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확신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지금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골로새서 3장 말씀은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마치 헌 옷을 입고 새 옷을 입듯이 새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새 옷을 입는 것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동행입니다.이 동행을 알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기독교인인 우리는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해야합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17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인 것을 의식하며,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의식하기에 예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신중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다면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실지 아는 것은 신중한 생각과 깊은 지식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뜻을 아는 것이기에 그것은 신앙성숙과 성경에 대한 통찰력과 풍성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직 그러한 것이 부족하여도 있는 그 모습 그대로에서라도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예수님의 뜻을 행하며 살면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의식하며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그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의식하며 내가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새 예수님이 내 안에서 행하고 계심을 알게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다보면 우리안에 예수님께서 나와 동행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더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인식하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다스리시기를 소원하며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다보면 어느새 예수님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심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해 사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그 분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을 더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말을 할 때나 일을 할 때나 예수의 이름으로 하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치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말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처럼 하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신성을 따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성을 따라 할 수 있습니다.
인성 부분에서도 예수님께서 맡으신 일과 우리의 소명이 다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삶속에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시다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그것은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몰라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더욱더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행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더욱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면 더욱더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십시오.
모든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종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라고 고백해야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을 받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말을 하든지 일을 하든지 말입니다.
오늘 내가 주인이 되어 살고 있습니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니 나는 그 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살겠노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십시오. 내 이름으로 내 이익을 위해 살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 사십시오. 예수님의 눈이 되어,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행하며 사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작은 예수가 되어 생활하는 것은 어찌 보면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더 예수의 이름으로 사십시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 안에 참으로 살고 계심을 경험하십시오. 그 경험만이 우리를 참 믿음의 세계속으로 인도합니다.
주께 하듯하고
내가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과 더불어 또한 아주 중요한 다른 한 축은 모든 사람을 주로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23절) 이 말씀은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예수님을 대하듯이 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종과 주인의 관계에서 종의 행동규범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들의 행동규범이 됩니다.
주인이 종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합니까? “종부리듯”대합니다. 그렇지요. 옛날 주인이 종을 어떻게 부렸겠습니까? 자기 멋대로 부렸습니다. 나쁜 주인들이 많았습니다. 주인이 좋아보았자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종은 종이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나쁜 주인을 대할 때도 주께 하듯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주인을 섬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상대편이 어떤 사람이든지 상관없이 주께 하듯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그 사람을 대할 때 주께 하듯 진심으로 대하였는지입니다. 내가 예수가 되어 살아야 하고, 또한 상대방을 예수로 여겨 살아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작은 예수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 중에 누구를 예수처럼 여기며 살아야 합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예수처럼 여기며 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예수로 여기고 살아야 합니다.
주께 대하듯 사람을 대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이니 우리는 항상 주님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주께 하듯 하면 우리는 주께 하듯 하기 위해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앞에 있는 이상한 사람을 주님을 보듯하기 위해서는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특별히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에 있는 그 사람을 주께 대하듯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말입니다. 그렇게 주를 대하듯 사람을 대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어 사는 것 못지 않게 우리를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을 예수님처럼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식당 종업원의 모습으로 있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그 분이 회사 사장의 모습으로 있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택시 운전사의 모습으로 계시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역할만 다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다양한 역할로 우리 앞에 계십니다. 그들을 예수님을 대하듯이 하면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과 더욱더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귀한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실재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대하듯이 섬기면 우리는 실재로 예수님을 섬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대하듯이 소자를 대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대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듯이 사람을 대하면 우리는 실재로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그 사람안에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면 또 그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만남은 분명히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됩니다. 주께 하듯이만 하면 말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잡으십시오. 내가 사람을 만날 때 주께 하듯이 해야겠구나라고.
예수님이 계십니다. 내 안에, 이웃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할 때 우리 안에 그 분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대하듯 이웃을 대할 때 이웃안에서 드러내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도 그 분의 이름으로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 분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으로 이웃을 대하지 않으면 그 분을 결코 보지 못할 것입니다. 눈뜬 봉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십시오. 그 어색한 한걸음은 그 분의 이름으로 살고, 그 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단에 넘어가고, 어리석은 일들에 흔들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단을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학연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그리스도의 새 옷을 입히시고
가정으로 세상으로 보내어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사명을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모든 이들을 향해 주님께 하듯 정성을 다하고
모든 전쟁은 주님께 있음을 믿고 온전히 의뢰하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하늘의 창고를 열어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간 재해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고
저 북녘땅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은 전심으로 예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열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 걸어가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