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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25]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루카 9,18-22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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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언제 어디서든 <독서 : 하까 1,15ㄴ-2,9 / 복음 : 루카 9,18-22>
아가다의 남편은 한창 나이에 실직하고 일터를 찾아 중국으로 건너갔다. 아가다는 십여 년 넘게 두 나라를 오가며 혼자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키웠다. 나 같으면 팍삭 주저앉을 상황에서도 그는 늘 웃었다. 그것은 베드로처럼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믿고 기댄 사람의 느긋함이라고 나는 그의 웃음을 부러워하며 십여 년 연상인 내 신체 나이를 부끄러워했다. 그는 혼자 익힌 중국어 실력으로 신구약성경 필사를 끝냈고, 얼마 전 한참 늦깎이로 방송대 중어중문학과에 들어갔다고 해서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요란하게 번쩍이지 않았지만 그는 빛났다. 그런 아낙들이 곳곳에 박혀 있어 우리나라가 이만큼 버티는 거라고 든든한 묵상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가다는 마침 중국에 있었다. 그곳에서는 평화방송을 시청할 수도 없었고 주일에 한 번 중국 건물을 빌려 미사를 드리는 형편이라 생각 끝에 아가다는 자기 집에 분향소를 차렸단다. 추기경님 사진을 모시고 촛불은 켰지만 영 송구스러웠고 그 며칠 간 옷 갈아입기도 민망했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어설픈 분향소를 송구해하며 드렸을 아가다의 간절한 연도가 연상되어 콧마루가 찡했다. 추기경님의 영혼이 가장 달게 가장 먼저 그의 연도를 흠향하셨을 것 같았다.
사실 후닥닥 튀어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평소 그분을 ‘품고’ 그분을 ‘느끼고’ 그분을 ‘살았음’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아가다는 언제 어디서든 주어진 상황에서 예수님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침묵을 알아들을 사람(루카 9, 21 참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넘어 부활의 영광을 맨 먼저 내다볼 사람이 아닐까?................◆
[말씀자료 : 이난호(서울대교구 구로1동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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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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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auline.or.kr%2Fdata%2Fcatholic%2Fimage%2Fcyber_pray_content%2F200909%2Fcyber051029.jpg) 예수님,
당신께 제 마음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당신은 제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며
제 눈과 말, 제 자신과
다른 이들에 대한 제 행동이
투명하지 않음을 알고 계시나이다.
이 시간 당신을 흠숭하며
제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제가 당신을 뵙고,
또 당신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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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우리 나라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당신이 주신 손과 발로 땀을 흘려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과 함께 하시어, 그들의 노고와 활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게 하시고 저희들로 하여금 고마운 마음으로 보답하게 하소서.
오늘의 복음 :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루카 9,18-22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3.blog.daum.net%2Fimage%2F22%2Fblog%2F2008%2F08%2F09%2F00%2F52%2F489c6bb40b3d7%26filename%3Dda_icon05.gif)
영적독서 :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 (1818-1866년 48세)
주교·제5대 조선 교구장. 3월 30일 충청도 보령 갈매못에서 군문효수
성 안토니오 다블뤼(안돈이安敦伊 : Daveluy, marie Nicolas Antoine) 주교는 파리 외방선교회 회원으로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1841년 11월 신부가 되었고, 1843년 외방선교회에 입회했다. 1844년 2월 고국을 떠나 그해 9월 말 마카오에 도착했다.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요청으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되어 1845년 10월 12일 강경포에 입국하여 21년 동안 조선 선교사로 활약했다. 그는 교황청의 허락을 받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조선교회의 새 주보로 모시게 했고, '성모성심회'를 설립하여 신자들이 성모님께 받은 은총에 깊이 감사드리게 했다.
또 「한한불자전 漢韓佛字典」· 「한국천주교회사」·「조선순교사」등을 편찬했으며, 많은 순교 자료를 파리 본부로 보내 훗날 달레dallet가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다니면서 선교하다 체포되어 충청도 보령 수영水營으로 압송되었다. 3월 30일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성모님의 손을 잡고 천국으로 갔다..............<박도식,「103위 순교성인과 함께하는 30일 묵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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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해] 연중 제25주간 금요일(2009-09-25) I 복음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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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착수했다. ‘즈루빠벨’ 총독과 ‘예수아’ 대사제는 선봉에서 지휘한다. 하까이 예언자는 백성들을 격려한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용기를 내어라.’고 외친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과 맺으신 계약을 기억하시어 힘을 주신다(제1독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답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무덤덤하시다. 그분의 관심은 제자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정답을 고백한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복음).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보충 계시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신원에 대한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 간의 대담을 전하면서, 함구령과 함께 첫 번째 수난예고를 들려준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한 의문으로 고민을 했다. 헤로데는 예수가 소생한 엘리야도 아니오, 옛 예언자 중의 한 사람도 아니오, 소생한 세례자 요한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례자 요한은 자기가 목 베어 죽였기 때문이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의 신원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면서 예수를 한 번 만나 볼 궁리를 하고 있을 즈음, 예수께서는 직접 당신 제자들에게 이 문제를 던지신다. 제자들에게 던져진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는 것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은 마태오복음(16,13-20)과 마르코(8,27-30)복음에도 똑같이 전해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마을들을 향하는 길목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기 전에 “혼자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수행은 루가가 즐겨 사용하는 고유특성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기도’와 ‘예수의 신원’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루가복음에서 ‘예수께 대한 헤로데의 호기심’(9,7-9)과 ‘예수의 신원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9,18-21)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사화’(9,10-17)가 삽입되어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헤로데가 예수의 신원을 두고 불안에 싸인 이유는 아직 만나본 적이 없는 예수를 여론에 의존하여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이다.
루가가 곧바로 들려주는 ‘빵의 기적’이 헤로데의 생각을 입증해주려는 듯이 보이기도 하겠지만 솔직한 삽입 의도는 기적의 방법에 있다. 예수께서 굶주림에 지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배불리신 기적(奇蹟)은 헤로데가 생각하는 ‘정치적인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이루어낸 치적(治績)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 올려 바친 ‘감사의 기도’(루가 9,16)로 이루어낸 기적(祈績)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12사도를 선발하실 때와 같이 기도하신 후(루가 6,12) 제자들에게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예수께 있어서 기도란 무엇일까? 다른 복음서는 제쳐두고라도 루가복음서에만 예수께서 직접 기도하셨다는 대목은 여러 군에 있다. 빵의 기적을 베푸실 때(9,16), 최후의 만찬에서 잔을 손에 들고,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바치신 기도(19,17-19),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하신 기도(24,30)는 모두 하느님 아버지께 올린 감사의 기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외의 다른 기도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공생활 기간 내내 자주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셨고(5,16), 제자들 가운데서 12사도를 선발하시기 전에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으며(6,12), 거룩한 변모 사건도 기도하시는 중에 이루어졌고(9,28-29),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전수하기 전에도 기도하셨으며(11,1), 베드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셨다(22,32)는 부분이 바로 그런 대목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 기도의 가장 중요한 대목을 살펴보자.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께서는 올리브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2,42) 이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가 수렴되는 예수님 신원과 사명을 확신하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는 목전에 놓인 고통의 십자가를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거부하도고 싶지만, 기도 안에서 다시금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신적(神的) 사명을 다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의 서두에서 기도하셨다 함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 기도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와 기도하실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3,21-22)라고 말씀하신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한 확신인 셈이다. 따라서 예수의 기도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신원의 확신이며, 자신을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과 자신의 사명에 대한 다짐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기도도 바로 이런 예수님의 모범을 닮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복음의 질문은 예수께서 제자들로부터 어떤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제자들의 입을 빌어 스스로의 신원을 확신하고 아울러 스스로를 계시(啓示)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던 권세 당당한 정치적 메시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수난과 부활의 메시아로 오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은총이 주어졌기에 그들의 입을 빌어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오늘 제자단을 대표하여, 나아가 전체교회를 대표하여 비록 자신의 입으로 스승 예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시다’(20절)고 고백하지만, 논리적 고백에 따른 실제적 행위에 도달하기는 베드로도, 우리도 아직 멀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자신의 수난예고로 수정해주시고 보충해주시는 것이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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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주님의 계시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의 중심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 고백이 복음서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복음서의 전반부를 결론 짓고, 새로운 주제인 제자도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가는 중심점에 있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주님이 행하시는 여러 가지 기적들을 보고, 또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점에서 영적인 소경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마침내 제자들은 주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먼저 사람들이 자기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 후에, 그 대답이 만족하지 않게 되자,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주님께서 누구신지를 간단하게 요약해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I.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루카 9,18-19 ; 마태 16,13-14 ; 마르 8,27-28)
1. 카이사리아 필리피에 대해서...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시고 벳사이다에서 북쪽으로 25마일 떨어진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의 여러 마을로 가셨습니다. 이 곳은 경치가 아름답고 매우 비옥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헤르몬산이 있었으며, 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이 지역 전체를 적시면서 요르단강으로 흘러갔습니다. 이 물로 인해 이 지역은 매우 비옥했습니다.
또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은 정치와 종교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헤로데에게 준 도시였습니다. 헤로데는 이에 감사하기 위해 이곳에 흰 대리석으로 황제의 이름으로 된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 신전은 황제 숭배가 당시에 팔레스티나인에도 침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이 곳에서는 우상 숭배를 위해 세워졌던 신전과 제단의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도시는 황제 숭배가 가장 절정에 달했던 도시였습니다.
주전 3년에 헤로데는 이 도시를 자기 아들인 필립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헤로데의 아들 필리피는 이 도시를 개발하고 그 곳에 자기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필리피는 이 도시를 로마 황제의 이름인 시이저, 즉 "카이제르"라는 이름을 따서 "카이사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지중해 해안에 "카이사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항구도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필리피는 이 도시를 지중해 해안의 항구 도시와 구별하기 위해서 뒤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카이사리아의 필리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필리피의 관할 영토인 카이사리아" 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황제 숭배의 중심부에 있던 도시에서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질문을 통해서 세상의 주인은 "로마 황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2.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루카 9,18-19)
주님은 팔레스티나에서 황제 숭배의 중심지인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습니다. 마르코의 경우에는 이 질문이 길을 가는 도중에서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루가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따로 기도하실 때에 이 질문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아마도 주님께서 이 곳에서 복음활동을 하다가, 잠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그 때에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은 이 장에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람의 아들", 즉 "인자"라는 말을 당연히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로 알아들었습니다. 주님은 그 동안 제자들과 함께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동안 내가 한 활동을 보고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주님 당시의 사람들은 주님을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분명히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께 한 대답들은 비교적 긍정적인 답변만을 간추린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미친 사람"으로 보기도 했으며, 어떤 사람은 주님이 "마귀 들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의견은 제외하고 주님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견해들을 골라서 대답했습니다.
주님 당시의 사람들은 주님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것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상식을 추월하는 많은 일들을 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가르침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을 위대했던 예언자들과 비교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헤로데 같은) 예수님을 "부활한 세례자 요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후에 심한 양심의 가책을 받으면서, 하느님의 징계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주님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자기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예의주시하며 그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세상에 다시 온 엘리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라기는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서 메시아의 길을 준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주님이 바로 그 엘리야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주님을 예레미야나 다른 예언자 중의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하는 주님의 탄식을 듣고, 눈물의 에언자 예레미야가 다시 살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도 주님께서 하느님의 보내심을 받은 예언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각 시대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가지 기적을 행했으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주님이 행하는 기적과 가르침을 듣고, 하느님께서 이 시대에 에언자를 보내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당시 사람들은 주님을 매우 특별하고 비범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대답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대답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은 것은 그 대답이 옳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3. 현대 세계와 그리스도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세계 3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주님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육자 중에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가난한 자를 위해 정권에 항거하다가 몸을 던진 자유의 투사로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주님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성인이나 정치가, 또는 위대한 랍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떤 분이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서 다음 장에서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II. 그러면 너희는 나를...?(루카 9,20 ; 마태 16,15-16 ; 마르 8,29)
1.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루가 9,20(ㄱ)
주님은 사람들이 주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제 주님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과 몇 년 동안 함께 해 온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너희는 나와 함께 있었다. 너희는 예루살렘과 예리고로 가는 길을 나와 함께 걸어왔다. 너희는 내가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았고, 내가 가르치는 천국 복음을 들었다. 너희는 나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보았고, 또한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도 알고 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피상적이고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나와 함께 동행하면서 나에 대한 진면목을 모두 보았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님은 당신 자신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며, 가까운 곳에서 자신을 지켜 본 제자들이 자기를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한 다수의 견해가 아니라, 특별히 선택받은 소수의 견해를 알고 싶어하셨습니다.
2.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9,20(ㄴ)
이러한 주님의 질문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낳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가 한 대답은 20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주님에 대한 신앙 고백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이 교회와 신앙의 초석이 되는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베드로는 어떻게 주님의 질문에 답변했을까요? 배드로는 그때에 제자들을 대표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말하면 베드로는 주님을 가리켜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메시아)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말이며, 히브리어로 "메시아"와 같은 뜻을 가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고백은 "주님은 성서에서 약속된 메시아입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나서 히브리 사상 속에서 양육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메시아에 대해서 히브리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오래 전부터 민족의 희망을 성취할 메시아를 고대해 왔습니다. 하느님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장차 한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모든 뜻을 이룰 것이며, 새 나라와 새 시대를 여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 동안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온 이스라엘이 기다려 왔던 그 메시아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히브리 민족의 모든 선견자들과 시편 기자, 그리고 예언자들은 장차 한 사람이 와서 하느님의 뜻을 행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모세는 자신과 같은 한 예언자가 올 것을 예고했으며, 사무엘서와 열왕기 기자 역시 다윗의 후손 중에서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통치자가 일어날 것을 예고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를 압박과 고통을 받는 종인 동시에 왕관을 쓴 왕으로 소개했습니다.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은 이 메시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기대와 소망을 성취할 것이라고 예고해 왔습니다. 예언자들은 성령에 감동되어 먼 미래에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았으며, 그에 대해 예언했습니다(2사무 7,14-16, 이사 55,3-50, 예레 23,5 등).
모든 히브리 예언자들은 그 분이 오시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의 지배와 압제를 받을 때가 되면,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가 와서 이스라엘을 이방인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고대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히브리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강대국의 압제에서 구원하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세울 분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메시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적들이 사라지고, 하느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은 몇 년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주님이 행하는 이적과 그 분이 가르치는 교훈을 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는 마침내 그 청년이 그들이 그토록 기다려 왔던 메시아라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민족의 기대와 소망을 이루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실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3.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에 또 한가지 고백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행하시는 기적들과 가르침 속에서 신적인 권세를 느꼈습니다. 물론 당시의 다른 사람들도 주님의 탁월함과 초자연적인 능력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 주님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의 능력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통해서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또는 다른 예언자들을 넘어서는 신적인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야훼의 이름으로 메시지를 전했지만, 주님은 자신의 권세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여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려냈지만,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명령하여 그들을 고치고 살려냈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주님 안에 창조주 하느님의 능력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을 가리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주님이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었으며, 성령께서 그 눈을 열어주실 때에만 할 수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III. 너는 베드로이다.(루카 9,21 ; 마태 16,17-18 ; 마르 8,30)
1.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이러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시몬 바르요나야,...너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르요나"라는 말은 "요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참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한 대답이 옳다는 것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를 진정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주님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또는 예언자 중의 하나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 구약 성서에 예고된 메시아이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진정으로 축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을 진정으로 기뻐해 주시며 그를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는 물질이나 지식, 또는 많은 명예를 가진 사람을 축복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올바로 알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올바로 알고,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을 인해 기뻐하고 서로 축복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주님에 대해 올바른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은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입니다. 즉, 예수를 메시아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육신의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서 계시해 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의 이성은 주님이 메시아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또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주님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이며,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주님은 여러 가지 가르침과 기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임을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수많은 기적들을 보면서도 주님이 메시아이며 하느님이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자신을 올바르게 보는 한 사람의 동역 제자를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동안 제자들을 훈련하며 가르치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베드로가 성령을 통해 주님에 대해 올바른 눈을 가지게 된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눈을 열어 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한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를 진심으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2.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또한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더 큰 축복을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요나의 아들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베드로, 즉 "페트로스"는 "바위" 바위 조각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전에 안드레가 시몬을 데리고 왔을 때에 그를 보고 이렇게 예고하셨습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파라 하리라!(요한 1,41-42)." 여기에 언급된 "게파"라는 말은 바위를 의미하는 아람어로서 헬라어 "페트로스"와 같은 말입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안드레의 형 시몬이 반석과 같은 견고한 믿음의 용사가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고는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시몬이 강한 신앙의 용사가 될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을 올바로 알고 바르게 고백하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그는 예전의 나약한 사람이 아니며, 하늘의 비밀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영원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주님에 대해 이런 고백을 하는 우리 신자들을 축복해 주시고, 그들을 "너는 베드로!"라고 선포해 주십니다.
또 주님의 말씀은 여기에서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을 바위조각(페트로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큰 반석이라고 부르시고, 그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반석"이라는 말이 여러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반석"은 항상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을 "내 바위(반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복음에 언급된 "반석"은 베드로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누가 되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이나 베드로나 우리나 모두 하느님 안에서 하나인 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 위에 세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닮은 바위 조각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며, 따라서 영원하고 견고합니다. 주님 위에 세워진 교회는 그 어느 것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주님을 믿는 신자들을 가리켜 "교회", 즉 에클레시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소집된 회중을 의미합니다. 헬라인들은 지방이나 나라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소집된 회의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당시에 "에클레시아", 즉 교회라는 말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소집된 회중"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단어를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하는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에 적용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사람들을 "내 교회"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공동체는 주님이 부르셨고 주님이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주님은 이를 가리켜 "나의 에클레시아"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공동체를 죽음의 힘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IV. 하늘나라의 열쇠와 교회(루카 9,21 ; 마태 16,19-20 ; 마르 8,30)
주님은 황제 숭배가 절정에 달해 있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자신이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진정한 세상의 통치자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기뻐하시면서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 대해 알게 하신 분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시몬을 가리켜 베드로(작은 바위)라고 선언하신 후에, 내가 이 반석(페트라-큰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가 사람의 뜻이나 노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세우실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주님의 교회를 죽음의 힘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전능하신 주님께서 세우시고, 친히 다스리시기에 이 세상 어느 것도 그 교회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1. 하늘나라 열쇠의 의미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ㄱ)
또한 주님은 계속해서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천하늘나라의 열쇠"는 무엇일까요? "열쇠"라는 말은 히브리인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열쇠"는 하느님의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율사의 직무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해석의 열쇠는 율사들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긴 것은 베드로를 "하늘나라의 율법사"로 임명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 비유들이 나오는 마태 13,52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는 마치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 주님은 이 곳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하늘나라의 율법학자"라고 부르셨습니다.
카이사리아의 필리피에서 베드로는 "주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러한 고백을 한 베드로를 복음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하늘나라의 율법학자로 임명해 주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는 성령의 조명을 받고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베드로는 가장 먼저 성령의 조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졌습니다. 이로 인해 앞으로 올 신자들의 대표로서 하늘나라의 열쇠를 부여받았습니다.
이 하늘나라의 열쇠는 하느님 복음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자를 나타내는 증명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하늘나라의 열쇠는 사제로서의 열쇠가 아니라, 하늘나라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그것을 가르치는 하늘나라의 율법학자로서의 임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친히 반석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죽음의 세력에 대해 공격적인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는 세상을 향해 하늘나라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할 것입니다.
주님 당시의 율사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열쇠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행위로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침으로 천국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그들은 천국 문 앞에 서서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도 막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복음을 통해 자신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도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만드는 신실한 하늘나라의 율법학자가 될 것입니다.
2. 매고 푸는 권한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ㄴ)
주님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자들의 삶에 관한 최종적인 권위를 교회에 부여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매고, 푼다"는 말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의 문헌을 보면 이러한 표현이 있습니다. "샴마이는 이것을 묶지만, 힐렐은 이것을 푼다!" 이 말은 "샴마이는 이것을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힐렐은 이것을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볼 때에 "맨다, 묶는다"는 말은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의미하고, "푼다"는 말은 어떤 일을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허락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엇을 묶고 푸는 것은 율법의 해석이나 신자의 행위에 대한 결정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교회가 죽은의 문을 공격하여 승리할 것이며, 복음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열쇠를 갖게 되고, 또 주님의 교회는 신자들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당시에 이러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율법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올바르게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싫어하면서, 신자들에게는 지기에 너무 무거운 짐(의무)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율사들은 신자들에게 올바른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들이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당시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여기에서 언급된 "짐"은 무거운 율법의 요구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무거운 짐을 모두 벗겨주시고, 안식과 자유를 누리는 복음을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가르침으로 신자들에게 자유를 우리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죽음의 세력을 정복할 것이며, 복음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한을 갖게 되고, 또한 신자들의 삶의 기준을 제시하는 곳이 될 것입니다.
3. 자신을 알리시기를 유보하심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루카 9,21)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임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에 대해 크게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모세나 다윗과 같이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제자들이 주님을 메시아고 말하고 다닌다면, 주님은 정치 선동가로 오해받아 로마의 감시 대상이 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로마에게 필요 없는 간섭과 제재를 받게 되고, 복음 전파 활동이 큰 방해를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여 승천하실 때까지 자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메시아였지만, 메시아에 대한 진리가 밝히 계시될 때까지 다른사람에게 알리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복음서에는 복음서 기자들이 묻고 대답하고 있는 중요한 두 가지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 "예수님은 누구신가?"(신앙 고백), 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제자의 도)"에 관한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전반부에서 첫 번째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후반부에서 두 번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 주제의 중심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을 결론 짓고, 두 번째 주제로 출발하는 전환점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V. 십자가와 부활의 길(루카 9,22 ; 마태 16,21 ; 마르 8,31)
우리는 앞장에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질문과 이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에 동의하시고 그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며, 죽음의 힘도 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당분간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숨기셨을까요? 신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 "메시아 은닉(비밀)사상"(the messianic secret)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고의로 숨기셨습니다. 예수께서 공개적으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선포된 것은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오순절 때였습니다(사도 2장).
그러면 왜 주님은 이 일을 일시 동안 숨기셨을까요?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당시에 만연된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받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아로 오해받는 경우에 주님은 로마의 견제를 받게 되어 복음 활동에 큰 방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참된 메시아관을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자신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만은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하심으로 이 모든 일이 성취된 후에 제자들이 이 일이 하느님의 섭리였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어떤 일을 하실 때에 예언자들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난 후에 그 일이 하느님의 계획 안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제자들에게 미리 예고하신 일도 이러한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1. 죽음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언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2)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가르쳐 주신 후에 즉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계시하신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주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한 것이 3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고는 주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는 제자들에게 바른 메시아의 길(수난, 부활)을 가르쳐 주기 위해 한 것이었고, 둘째는 누가 더 큰 자인지 다투는 제자들에게 메시아가 섬기는 종임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셋째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의 좌우 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을 보시고, 메시아를 따르는 길이 섬김과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쳐 주신 주된 이유는 제자들의 그릇된 메시아관을 바로 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메시아가 모세나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구해내고 세계적인 국가를 세울 정치적인 지도자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가르쳐 주신 후에 참된 메시아가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메시아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손에서 구원하는 자가 아님을 알려주셨습니다. 주님은 메시아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인류의 속죄 제물이 되어 십자가를 질 것이며,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메시아라는 것을 확인하고 큰 기대에 부풀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역사적인 메시아 왕국의 핵심 멤버가 되어 한 자리 차지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이러한 그들의 생각과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은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수많은 반대와 적대 세력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 자기를 거부하고 죽이려고 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보통 사람이었다면 예루살렘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피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배척을 당하고,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해야한다"(must)는 말이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야만 했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해야 했으며",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했으며",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야만 했습니다."
주님께서 다른 곳으로 도피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셨다면 굳이 고난을 받고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구약 성서를 통해서 자신이 속죄 제물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인류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프로그램을 충실히 따라야 했습니다.
[참고자료] : 사람의 아들(인자)
마르코복음과 루가복음을 보면 주님은 자신의 수난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son of man)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때에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인자)"라고 부르셨을까요?
1) 당시의 관습에 따라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G. Vermes) 주님 당시 "사람의 아들, 인자"라는 말은 "나"라는 말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내가"를 낮추어서 부를 때에 "제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주님께서 "사람의 아들(인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능욕이나 위험, 또는 죽음"과 관계된 때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M. Black, An Aramaic Approach to the Gospel and Acts, Oxford 1967). 우리가 이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주님은 자기를 겸손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표현으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메시아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용함.
주님이 자신을 "사람의 아들"라고 부른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릇된 메시아 관에 대한 오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성서에서 말하는 메시아와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세계적인 정부를 세울 정치적 지도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이러한 메시아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러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메시아"라는 말대신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3) 자신이 성서에 예언된 메시아임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함.
주님이 자신을 인자로 부른 것은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에는 "사람의 아들"라는 말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경우가 있습니다(다니 7,13-14). "나는 밤에 또 이상한 광경을 보았는데 사람 모습을 한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와서 태곳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나아갔다. 주권과 영화와 나라가 그에게 맡겨지고 인종과 말이 다른 뭇 백성들의 섬김을 받게 되었다. 그의 주권은 스러지지 아니하고 영원히 갈 것이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하리라(단 7:13-14)."
다니엘은 환상 중에 "사람의 모습을 한 이"가 구름을 타고 하느님께 와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심으로 자신이 다니엘에 예언된 "사람의 모습을 한 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하느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을 것이며, 영원히 계속될 나라를 세우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영광은 능욕과 죽음을 지나서 도달하게 될 길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멘...................◆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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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람들이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느냐...는 문제는 그 사람의 구원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 사람에게 올바른 신앙이 있느냐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하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 고백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이단이냐, 아니면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느냐는 판단도 역시 신앙 고백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그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은 제자들에게 과연 영생을 약속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를 시험해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I. 칭찬받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1. 일반적인 그리스도관
성서에는 주님을 대면한 사람,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 그로부터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판단도 여러가지였습니다.
(1) 어떤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명을 가진 예언자인 줄로 알았다는 것과 다른 한가지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헤로데왕처럼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후 다시 살아나서 활동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2) 어떤 사람은 엘리야라고 했습니다. 말라 4,5절에서 엘리야는 메시야가 아니라 그분 길을 준비하는 예언자로 예언되어 있으며, 이들은 주님이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3) 어떤 사람은 예레미아나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옛 에언자 중에서 다시 살아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들이 성서를 잘 못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2. 올바른 그리스도관
예수님은 이같은 제자들의 말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선듯 나서며 이처럼 고백했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잠깐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베드로는 주님을 "그리스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즉, 메시야란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에는 세 가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모세가 율법에서 증거한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오신 에언자이어야 합니다. 이 일에 히브리서(1,2)에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와서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 그에게 대사제적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110,4)에는 예수님에 대하여 "야훼께서 한번 맹세하셨으니 취소하지 않으시리라. "너는 멜기세덱의 법통을 이은 영원한 사제이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는 다윗의 족보를 계승한 영원한 왕이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추어진 이가 바로 메시야의 자격자인 것입니다. 이같은 분은 예수님 이외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말은 보편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아들인 것이 아니라 그와 기원을 함께 하시고 영광이나 본체나 인격이 동격이신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3. 베드로와 하늘나라의 열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반석이란 이름을 주셨는데 이 이름이 주어지기 이전까지 그에게 부쳐진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 우리가 반석이란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헬라어에 나오는 두 단어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이름은 페트로스( )로 이 단어는 작은 반석이란 뜻입니다. 반석 그 자체가 아니라 반석의 한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반석에 페트라( )란 말이 있습니다.
이 반석이란 말은 거대한 반석으로써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고 했습니다(1고린 10,4). 그러므로 "너는 베드로"라고 하신 말씀은 '너는 너의 신앙 고백으로 그 반석의 한 부분이 됐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의미이며, 또한 베드로를 통해서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그러나 각 종파간에 이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또한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늘나라 열쇠란 구원의 열쇠, 생명의 열쇠를 말합니다. 너라고 하신 대상은 베드로 한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를 지칭합니다. 구원은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야 그리스도와 합치한 몸이 되어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우리의 신앙이 이같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믿음이라면 우리도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같은 신앙은 하느님이 주신 신앙이며 이런 신앙에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II. 책망받은 베드로의 메시아관
베드로는 주님께 칭찬들을 만큼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한지 얼마 못되어 그 주님으로부터 사탄이라고 하는 심한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은 할 수 있었지만 그 신앙을 뒷받침할 만한 지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주님의 신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긴 했지만 그러나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아직 이같은 지식이 없는 베드로는 사탄의 대리자 노릇을 하게 됨으로써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1. 베드로가 들은 책망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발길은 죽음을 향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의 이같은 고난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며 주님의 심정을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고난의 사실을 제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셔야 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 곳에서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당하실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죽음의 고난을 이기시고 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일에 대하여 알려 주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53장에 나오는 고난의 메시야에 대하여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은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으로 오르시어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줄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일에 대비하여 좀 더 높은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은근히 서로간에 자리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광을 누려야 할 주님께서 왕은 고사하고 잡혀서 죽게 된다고 하니, 결코 그들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때도 성미가 급한 베드로가 주님을 붙들고 간했습니다.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말리면서 매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에게 뒤돌아보시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고 하시는 책망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2. 베드로의 메시아관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들에게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하셔야 할 활동을 몰랐기 때문에 왜 대사제나 율법학자들에게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셔야 하는가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도 세상 마지막에 있는 부활에 대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선생이 죽으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는 부활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어야 하는지, 즉 올바른 메시아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이유는 그는 율법의 마침이 되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의가 율법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2) 주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인데 그 아버지의 뜻은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죄인의 속죄 제물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3)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이유는 그는 그의 백성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치르셔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요한1서 4,10)고 하셨습니다.
3.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로서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 영광을 구합니다. 하느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앞세웁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정욕에 의하여 그의 생각이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면 사탄에게 이용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탄이 준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사탄의 대변자 노릇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는 준엄한 책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일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상의 내용에서 보듯이, 사탄은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서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인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돌아다닙니다."(1베드 5,8)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생각을 하면 사탄은 그 때 나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항상 나와 가까운 내 주변의 사람을 통하여 넘어지게 하려고 온갖 계교를 다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이 끊임없이 자라나야 하며 언제나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생활을 하여 영생의 결실을 맺어야 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죽음을 가져와도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화를 가져옵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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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너는 복이 있다."라고 칭찬하십니다. 저는 하느님 앞에서 영적인 소원이 하나가 있습니다. 오늘 시몬 베드로처럼 예수님으로 부터 복된 사람이라고 칭찬을 듣는 것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묵상공간의 모든 분을이 함께 받았으면 합니다. "너는 복이 있다." 이 얼마나 근사하고, 가슴 벅찬 말씀입니까?
오늘 예수님은 이 축복의 말씀을 카이사리아 필리피라는 곳에서 베드로에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했기에 이 축복을 받았을까요?
첫째, 그는 주님을 따르는 자였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며 한낱 물고기를 잡고 있었던 시몬에게 어느날 주님은 찾아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부르심에 시몬은 그물과 배를 버려 두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3년 동안 시몬은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됩니다.
처음 시몬 베드로가 주님을 따랐을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다 이해하고 따랐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주님을 따르면서 그는 주님이 누구신지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은총을 입었을 때 비로소 주님을 온전히 알고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했을 때, 하루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왔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평범한 어부였던 시몬이 위대한 베드로로 변할 수 있었을까요? 그 첫 번째의 원인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따르는 자에게 주님의 복이 주어집니다. 오늘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카이사리아 필리피까지 올라갔습니다. 이곳은 팔레스티나 제일 북쪽 끝, 헬몬산 중턱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헤로데 대왕의 아들 필리피아가 로마의 황제 카이자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카이사르의 도시"라는 뜻으로 카이사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카이사리아라고 하는 항구 도시가 지중해 연안에 먼저 세워져 있었기에 사람들은 이곳을 필리피아가 세운 곳이라 하여 필리피아의 카이사리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만을 데리고 이 이방인의 도시로 올라가십니다. 그때 베드로는 11제자와 함께 따라 올라갑니다. 힘들고 고된 여정이지만 아무 불평이도 없이 잘 따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잘 따르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성경의 기록에 보면 잘 따르는 자에게 하느님은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에녹이 그랬고, 노아가 그랬고,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잘 따랐고, 영적 지도자를 잘 따랐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부관으로 따랐습니다. 그리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장인 사울이 자기를 죽일려고 했지만 그 권위를 인정하고, 따르는 자가 됩니다. 그러한 다윗을 하느님은 때가 되었을 때, 유다의 왕이 되는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세상적인 소망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옵니다. 룻기 1,16입니다. "저에게 어머님을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성화하시지 마십시오." 하며 룻이 말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이러한 룻을 하느님은 복을 내리시어 이방 여인으로 다윗의 조상이 되게 하시고, 이 여인의 후손에서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주님의 축복은 잘 따르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둘째, 그는 지금 은총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까지 오셔서 제자들을 앉게 하고 중요한 질문 하나를 제자들에게 던집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는 두가지 질문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높은 산 중턱에 있는 이방 도시까지 굳이 올라와서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고 계실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곳은 당시, 눈에 보이는 세상 왕국인 로마와 황제인 카이사르를 상징하는 신상과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세상 나라, 영원히 제국을 통치할 것 같은 카이사리아의 상징 앞에서 온 우주의 왕이신 당신 자신에 대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평가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3년 동안 주님을 따르던 12제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제자 훈련을 시켰는데, 그 훈련을 제대로 받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예수님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똑바로 깨달은 사람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 동안의 사목 활동을 총 결산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자리입니다. 3년 동안의 제자 훈련을 테스트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복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 있다면 은총 받는 자리에 언제나 앉아 있는 것입니다. 다른 자리에는 없어도 괜찮습니다만, 항상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는 나와 앉아 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내게 임할련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은총 받는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일미사이든지, 매일미사이든지, 새벽미사이든지 주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은총의 자리를 찾아 앉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은총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셋째, 그는 바른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예수님의 이 질문에 제자들은 그 당시 사람들이 평가하고, 말하고 있는 대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들은 선생님의 메시지를 듣고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때 또 한 제자가 말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의 기적 행하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그러자 또 한 제자가 대답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예레미야의 탄식과 눈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민족을 향한 애정을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대답은 예수님에게 만족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온전하고 바른 평가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순히 불의 메시지를 던지는 사람으로, 기적을 베푸는 사람으로, 인간적인 눈물과 애정을 가진 분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 세상 사람들의 이해는 이렇게 불완전하고 부분적이었습니다. 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따랐지만 진정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주님을 향한 평가는 각각 달랐고, 그들의 대답이 주님을 기쁘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진정으로 묻고 싶은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집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평가를 먼저 물으신 것은 제자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한 준비작업이었습니다. 주님의 진정한 관심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고백, 우리의 심장에서 나오는 고백, 그 고백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지금도 이 자리에 같이 앉아 있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는 나를 따랐고, 지금까지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왔다. 병자를 치료하는 것을 보았고, 수많은 기적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반대와 적대적인 태도도 보았다. 그것을 체험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또한 이 질문은 이 자리에 나와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을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이 날에 이곳에 나아와 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온갖 봉사의 일을 하고, 열심히 헌신하는 일꾼들에게 던지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은사와 신비한 것을 체험하며,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앞서 나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너무나 중요한 핵심을 입술을 열어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제자들을 대표해서,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을 대표해서 시몬 베드로가 성령에 감동되어 지금 이 대답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시냐에 대한 두 가지 해답을 얻게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정녀에게 태어나신 나자렛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바다를 잠잠케 하시고 오천명을 먹이셨던 그분, 마귀를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그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메시야라는 말로 그 말을 그대로 직역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자라는 뜻이며, 인류의 영원한 왕, 영원한 대사제, 영원한 예언자로 오신 약속의 성취자라는 뜻입니다. 그분 안에 구원이 있으며, 그분 안에 모든 소망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보다 더 완벽하고 정확한 신앙고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 고백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하느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역사를 가진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느님 아들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살아계신 하느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죽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머리 속에서 만들어낸 하느님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활동하시는 현존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인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자도, 인류4대 성인도, 박애주의자도 아닙니다. 초자연적인 신비한 인물도 아닙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시는 하느님 자신이시오, 그리스도이시오,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시며 장차 심판주로 오실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입을 열어 놀랍게도 주님을 향하여 이 신앙고백을 합니다. 베드로가 이런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척 놀랐습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백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흡족한 고백이었습니다. 주님은 너무나 기쁘셔서 큰소리로 "시몬 바르요나"라고 베드로의 이름 전체를 불러주십니다. 여기서 "바"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축복하시며, 칭찬하십니다. "너는 행복하다(복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참된 신앙고백에서 참된 축복이 나온다는 진리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저것 여러가지 하여도 주님이 기뻐하시지만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 그것은 제일 정확하게 그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바로 이 고백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세 가지 축복을 하십니다.
첫째,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축복하십니다. 둘째,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축복하십니다. 셋째,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고 축복하십니다.
오늘은 이 세 가지 축복 가운데 첫 번째 축복만 살펴봅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고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네가 이러한 고백을 한 것은 인간적인 지성이나 지식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임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함께 하는 사람, 성령에 감동되어서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복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했고, 세례도 받았고, 교회 안에서 봉사의 일도 하고 있지만, 내 마음에 성령과 함께하는 기쁨이 없습니다. 고백도 없습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드리는 찬양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마치 결혼한지 오래되어 권태기에 이른 부부와도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삶에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늬만 예수 믿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봄에 국민일보 임한창 기자가 쓴 교회 이야기에 오늘날 교인들의 유형을 몇 가지로 나누어 놓은 것을 보며 웃은 적이 있습니다.
첫째, 고양이 신자가 있습니다. 이 신자는 신부가 항상 등을 도닥 거려 주어야 만족하는 신자입니다. 조금만 관심을 덜 보이면 서운한 감정을 여지없이 노출시킵니다.
둘째, 럭비공 신자도 있습니다. 어느 방황으로 튈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이런 교인들이 무슨 일을 한다하면 언제나 가슴이 조마조마 합니다.
그 다음 사목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신자가 있는데 "고무풍선 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바람이 잔뜩 들어 있어 언제 폭발할지 알 수가 없는 신자입니다.
또 그네 신자도 있습니다. 반드시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어야만 동작을 취하는 신자들입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신자입니다. 가정에 조그만 일이 생겨도 신부나 교회직급자를 부릅니다.
또 가오리연 신자도 있습니다. 연줄을 붙잡고 있지 않으면 언제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 가 없습니다. 끈을 놓으면 곧바로 세상 속으로 곤두박질을 치는 신자들입니다.
그리고 요즘엔 호랑나비 신자들이 많답니다. 주일은 교회에서 총천연색의 날개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 나가면 가을의 병든 낙엽처럼 칙칙한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입니다.
왜 이런 신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나요? 하느님의 영이 충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기도로,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움직여야만 진정한 고백이 충만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칭찬 받고 복 받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날마다 참된 고백이 있는 복된 자녀들이 되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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