片想(100):終 ,終 ,終,,,,
돌이켜 보니 작년(2001) 5월 21일 부터 시작한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와 片想이니 벌써 일년이 된 셈이다.
그날 그날 편두통에 기대어 생각 나는대로 끄적 거린 것이 이만큼 와 버렸다.
사실 이 중얼중얼 씨부렁 거린 것을 누가 일부러 와서 하나 하나 들춰 보겠는가? 처음 부터 본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일부러는 들춰 보지 않을 것이다.끄적인 양도 만만치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내용 또한 문학적인 수사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니 지리따분한 것이 분명할 터인 데 일부러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기독교인이었다.
이른바 모태신앙이라고 하는데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 부터 세례를 받고 믿어 왔다는 말이다.
우리 아이들 대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4대째 꼬박 기독교를 신앙해 오는 집안인 셈이다.
우리 집은 3남 6녀의 대가족인데 아버님은 25세 때 부터 시골 교회의 장노님이셨고 어머님은 지금 권사님이시다.초등학교 때 부터,아니 그 이전 부터 아침 마다 우리 집은 가정예배를 보았다.아버지는 우리를 날 마다 돌아가며 대표기도를 하게 하셨고 덕분에 나는 한 때 성경을 다 암기 하겠다고 창세기 부터 시작하는 나를 아버님은 신약성경만 하라고 적당히 충고하시는 바람에 슬며시 뒤로 물러나 유야무야 없었던 걸로 해 버렸지만,기독교는 나의 성장과정에 말 할 수 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성가대와 교회학교와 학생회 청년회 등 각종의 교회기관에 주모(?)를 거치면서 매 해 마다 보냈던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추수감사절 등의 추억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들이다.
우리 집은 지금도 모이면 예수아멘 아니면 얘기가 안 통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뚫여 있다고 하듯이 우리집의 모든 이야기는 예수로 뚫여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내가 불교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은 거의 기적이다.
기독교,특히 신교계통에서 불교는 우상숭배교,귀신믿는 교,마귀사탄교로 인정사정없이 규정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기적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렇다고 누가 나에게 일부러 찾아 와서 불교를 가르쳐 준 것도 아니요,전도한 것도 아니요 협박한 것도 아닌데,순전히 우연히 또는 어쩌다가 '대승기신론' 이라는 책 한권 본 인연으로 나는 불교를 알아 봤던 것이다.
대번에 나는 알아 봤던 것이다.
불교가 우상숭배교가 아니라는 것을,
불교가 마귀 사탄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그 동안 나를 가르쳐 온 기독교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의문을 가지게 했다.마치 북한 사람들이 남한을 가르치기를 거지들만 사는 곳이라고 가르친 것 처럼 기독교의 나에 대한 가르침이 그릇된 것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대승기신론'(고 이기영 박사 번역.해석)을 내리 3 번을 읽었다.
눈도 떼지 않고 읽었다.큰 충격은 기신론의 논점의 허구성을 기독교적인 유일사상으로 무장하게 하여 찾도록 애를 쓰게 했지만,끝끝내 나는 실패 하고 말았다.
결론은 그렇다면 하나였다.
기독교가 나를 그릇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때의 경험으로 나는 지금 기독교가 빨리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가르치지 않는다면 언제나 공산당의 그 쇄뇌의 가르침에 불과하는다는 테두리적인 종교로 전락하고 말것이라는 것을 예감한다.장삿술에 이것이 저것 보다 좋다 하는 것 보다 이것과 저것이 있는데 어느 것을 가질래 하는 것이 더 옳을 때가 많다.)
책을 탁 하고 덮는 순간,나는 차마 말 할 수 없는 처참한 혼란에 빠져 들었다.이 때의 나의 혼란은 거의 위험수준에 가까웠다.나는 악마의 유혹에 분명 빠진 것이라고 거듭거듭 자성하면서 하나님을 예수님을 모질게 붙들고 찾았지만,이미 그 얇은 책자 속의 반듯한 논지는 그런 하나님은 모조리 없애버린 후였다.
위험수준이라는 것이 바로 나를 혼란의 늪 속에서 미쳐죽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그 때 나는 외진 과수원 방에서 혼자 하릴없이 밥만 간신히 먹고 있었다.그러니 이 때 부터 먹는 밥은 모조리 다 혼란의 에너지로 쏠려 들어가고 있었다.밤 마다 꿈을 꾸는 데 교회 안에서 부처님과 하나님의 형상이 나와 나의 한 손을 잡고 잡아 댕기면 나는 갈갈이 찢기우는 고통에 식은 땀을 흘려야 했다.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이 때의 경험으로 나는 지금도 예수 믿는 사람들 한테 불교를 권유하지 않는다.그가 만일 햇가닥하는 날엔 누가 책임을 질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에 관하여 고백하고 상의할 사람이 주변에 단 한사람도 없었다.
이 문제를 빨리 해결 하지 않으면 하찮은 일(?)로 미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긴장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 때 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불교서적을 탐독했다.오로지 불교서적만 보았다.나는 본래 만화책 말고는 책을 가까이 하는 고상한 인품이 아니다.하지만, 불교에 내가 모르는 뭔가 있다고 생각 하고서도그것을 단편적인 상식으로 내 몸 어느 한 구석에 밀쳐놓기에는 충격이 너무 컸다.
생각해 보시라.
불교의 불자도 모르는 사람이 서점을 기웃거리면서 접하게 될 그 무질서한 선택을, 그리고 그 무질서에서 오는 무정리된 것들의 집합을,그 막막함을,,, 게다가 불교의 역사적 전래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진행됬던 한문이라는 문자와 불교자체의 난해한 어휘와 논점들을,,,
난 불교가 그렇게 이중 삼중 사중 오중으로 둘려 쌓인,마치 처음 보는 남정네의 시선을 차단하려고 차도르를 실컷 두른 사우디아라비아의 처녀처럼 수줍어 하는 종교일 줄은 몰랐다.그래서 확 한번에 벗겨보려고 또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돌진했지만,짝사랑하는 남자는 언제나 막상 그녀 앞에선 실패하는 법이 틀림없다.그렇게 그렇게 번번히 난 거듭할 수록 실패만했다.
실패는 하고 있었지만,어느새 거듭되는 실패 속에는 확신의 세포가 그 상처를 메꾸고 있었다.'불교에 뭔가 있다'가 아니라,'불교에 모든 것이 있다' 였다.
비로소 난 예수가 보였다. 하나님이 보였다.교회가 보였고 믿음이 보였다.기독교안에서 오히려 보지 못하던,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것들이 불교를 통하니 잘 보였다.막힘이 없었다.기독교의 성경이,기독교의 교리가,기독교의 믿음이 아무 막힘이 없이 설명되었다.
그것은 부정이 아니라 인정이었으며,그것은 폐함이 아니라 완전하게 함이었다.나는 이 때 부터 진정으로 내 일생 일대 최고의 책임을 가지고 부모님을 모시고 교회에 가게 되었다.그들이 하는 일을 알게 된 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안 것이엇다.
항상 나는 기독교를 불교안의 한 법당으로 보게되었다.
사찰엘 가면 왜 그렇지 않은가?
대웅전이 있고 지장보살법당이 있고 관세음 보살 법당이 있고 삼신각있고,나한전이 있고 ,대웅전 안에서도 과거7불의 탱화가 있고 화엄성중탱화가 있고 등등등,,, 불교인들은 열심도하여 그 각각에다 늘 절을 따로 올리지 않는가 말이다.그와 같이 기독교를 수습하게 되었다는 말이다.물론 이것은 전혀 나 개인적인 수습이므로 따라 할 필요는 없다.이런거 잘 못 따라 하다간 햇가닥하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시라.유마가 한다고 나도 한다 하다가는 유마가 구렁텅이에 빠지면 당신도 빠진다는 걸 항상 명심하여야 한다.사람 마다 체중이 다 달라서 나는 안 빠지는 것에 당신은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른 다섯 쯤에 나는 비로소 절엘가면 남들처럼 절을 할 수가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기독교의 습관이 배어 있어서 절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나는 아직도 처음 불상 앞에서 절을 했을 때의 그 망설임과 두근거림이 기억난다.그 때 부터 나는 초상 집에 가면 망자에게 꿇어 절을 할 수 있었다.비로소 나도 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는 처음 기독교인들이 불교를 바라 보는 시각에 아주 지대한 경솔함과 얕음과 헛점이 있음을 지적한 것인데,대부분 나의 돌아가신 아버님과 휴가 때 마다 집에 가서 담론한 내용들이다.
어떤 부분에선 나는 아버님의 신앙적 경륜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배려하기도 했지만,결국 그런 시도는 부분적이었을 뿐 전체적으로는 실패했다.아버님은 곳곳에서 말문이 막히시곤했다.
나의 아버님,
시골의 장노님이라고 보통 장노님으로 알면 큰 코 다친다.
목사님들 조차 충분히 가르치고도 남을 만한 신앙경험과 성경에 대한 학문적 고찰이 매우 깊으신 분이시었다.이 점에 대하여는 우리 아버님을 아는 사람은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국내의 성경학자들의 연구가 짧음을 한탄하시고 일본에서 원서를 구입하여 탐독하시는 아버님의 기독교에 대한 역사와 시각적 조명은 그 분의 신앙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 어려웠을 시절에 아직 스물 다섯의 연세에 교회 장로직을 맡고 제주 4.3 이라는 거대한 근대사의 좌우대립의 사상사에서 어렵게 생존하시어 교회를 세우시고 그 당시 교회 역시 분파적인 싸움으로 대립하며 동네를 시끄럽게 할 때 한 동네 안에서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여서야 어떻게 동네의 모범이 되겠느냐며 교회를 통합하시는 녹녹치 않았을 작업을 감당하셨던 나의 아버님은 그 후 우리 집안 모두에게 지금까지 신앙적 뿌리로 남아 살아 계심을 적어도 우리 집에선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휴가 때 마다 나눴던 아버님과의 담론은 유마와 수자타의 입을 통하여 여기 고스란히 들어 있다.말문이 막히실 때마다 곤혹스러워 하시던 아버님의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도 그것이 일반적인 불효의 업에 들지는 않는지 걱정스럽다.하지만,아버님은 처음 내가 불교에 빠져 드는 것을 훈계하셨지만,나중에는 '불교에도 뭔가 있다' 하는 기독교인으로서는 생각 할 수 없는 전향적 평가를 내려 주셨다.돌아가시기 3개월 전이다.그러니까 1993년 8월의 휴가 때였다.그 때 나는 아버님으로 부터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초상 치를때 제주도에서 전통적으로 하는 짐승을 잡는 일을 삼가하게 해 달라고 간청을 드렸는데 아버님은 두 말 없이 흔쾌히 그리하라고 하셨다.
이 일로 나는 아버님에게 좋은 세계를 마련해 드리고 싶었다.
남을 죽이지 않겠다는 의지는 매우 좋게 쓰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새삼 아버님이 보고싶고 그립다.
계셨더라면 분명 이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그리고 편상을 보시고 이 아들이 삿된 길을 택한 것이 아님을 아셨을 텐데.....
오직 기독교인 중에서 나의 아버님만 이 일을 이해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누가 또 있겠는가?
(그 만큼 기독교인들의 사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선민사상은 그 주체가 힘이 있을 때에는 남을 가해하고(히틀러의 나치 사상은 또 하나의 선민사상이었다.그들의 힘을 가졌을 때에 어떻게 했는가?) 힘이 없을 때에는 순교를 가장하여 배째라(B.J.R) 한다.)
가장 알아 들을 만한 단 한 분이 이미 가시고 없으니 외롭기 그지 없다.
'유마와 수자타의 대화'와 '片想'이 나오게 된 배경을 말하다 보니 너무 길어졌다.
마지막 말은 항상 좀 길어야하나 보다.
어떤 이들은 짧게 잘 만 하던데...
'안녕"
이라고.
부처님은 마지막 말씀이 '정진하라' 이셨는데 이 말씀은 소처럼 부지런히 살라는 말씀이 아니고,개미처럼 부지런히 일하라는 뜻이 아니라,부지런히 쉬지 말고 지관(止觀)을 행하라는 뜻이다.이것만이 사람세계에 태어난 이의 마지막 할 일이라는 말이다.무멋을 멈추고(止) 무엇을 살필 것인가(觀)는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 그때그때 찾아서 해야 할 것이다.여기에는 일률적으로 정하여진 법이 따로 없다.살생을 즐겨 하는 사람은 살생을 그쳐야 할 것이고,이와 같이 좋지 못한 습관과 관습에 훈습(熏習:훈증되는 것)되는 것을 살피고 멈추는 것은 다 각자의 깨달음과 연관되어(인연)있다.인연이 없으면 부처님도 어쩔 수 없다고 하신 부처님의 고백을 상기하여야 한다.
지난 일년,참으로 잊지 못할 일년일 것이다.
인연있는 분들과 함께 한 일년이 언젠가는 모두 다 한자리에 모여 정진하는 인연이 되리라 믿는다.
요구르트를 마시며 자기 마음을 보여 주는 걸음마 아이 한테
녹차를 마시며 나의 마음을 보여주었더니 수줍어 도망가는 아이를 보며..
유마.
나모 붓다
나모 다르마
나모 샹카.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