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밈 노라임(경외 하며 두려워하는 날들)
야밈노라임은 '경외의 날들, 두려움의 날들'을 의미합니다.
이 기간 유대인들은 지나간 일년을 돌아보면서 그들이 행한 일들 가운데 좋은 일을 한 것과 좋지 못한 일을 한 것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삶 가운데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한답니다.
유대인의 달력에서 특별한 날로 표시됩니다.
이 기간 유대인들은 지난 일년 동안의 삶을 돌아봅니다. 유대인들은 야밈 노라임에 기도할때 "하나님, 우리가 지난 일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한 그릇된 것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용서를 비는 기도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에 한해서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릇된 일을 했다면 직접 그 사라에게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야밈 노라임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어느 해, 로쉬 하샤나(유대인 설날) 오후에 나드보르나의 유명한 랍비 모르드가이가 길을 걷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급하게 지나가다가 그와 부딪혔습니다. 랍비는 그가 회당의 캔터(회당에서 예배드릴 때 성경을 곡을 붙여서 읽는 사람이며, 교독할 때와 찬양할 때 선창하는 사람을 말한다)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서둘러 가십니까 나의 친구여"라고 랍비가 물었습니다. "랍비여 당신은 나에게 어떤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나 저는 야밈 노라임을 위한 기도책 마흐죠르(회개의 기간동안에 드려지는 예배시간에 읽는 기도책의 한부분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를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당신은 마흐죠르를 찾으려고 서두르지 말고 대신 지난 일년 동안 당신이 행한 일을 돌아보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맡은 순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돌아보고 향상시키려는 당신의 노력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야밈 노라임(두려워하는 날들) 기간에 하나님의 용서를 찾는 것과 다른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에 관한 두가지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하나님과 흥정하는 유대인
첫번째 이야기는 베르딕 헤이브의 랍비 레위 이삭(1740-1810)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해 야밈 노라임 동안 랍비 이삭은 그의 양복을 수선하기 위하여 양복점에 갔습니다. 랍비는 수선공이 마히죠르를 읽을만큼 히브리어를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랍비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깨닫도록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수선공은 기도를 하지 않은지도 오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수선공이 기도하지 않은 이래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못한 것을 깨닫도록 하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도록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랍비는 수선공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이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랍비는 친절한 말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의 친구여, 나는 매년 욤 키푸르(속죄일)에 똑같은 일을 많이 합니다. 나는 지금 놀라고 있습니다.
당신은 금년 욤 키푸르에 어떤 일을 하시면서 보냈습니까?"
수선공이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제가 범한 죄는 당신이 범한 죄와 비교하면 아주 작습니다. 단골손님이 많아지므로 그들이 양복이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서 옷감을 가지고 오면 옷을 만든 후 남은 천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대신 제가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소?
그러나 당신은 좋은 기회를 잃어버렸소. 당신은 용서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당신 스스로 그것을 잃은 것이오. 하나님과 당신은 거래를 할수 없소.
설날에 유대인들이 행하는 아주 특이한 관습이 있습니다. 그들은 흐르는 냇가나 강으로 가서 타슈리흐(문자적인 뜻은 보내다, 버리다)의식을 행합니다. 이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옷을 흔들면서 주머니를 완전하게 비우며, 흐르는 물속에 빵 조각을 던집니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죄를 흐르는 물속에 흘려 보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죄없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는 의미의 의식입니다.
창세기 18장 20절로 32절까지 자세히 읽어 보시면서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이 세상에는 의로운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느니라(로마서 3장 10절)는 성경 구절이 생각날 것입니다
카바나(집중함)
카바나는 '의지'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예배와 일에 집중하는 것을 제안하는 용어입니다.
카바나를 다하여 드리는 예배는 습관적으로 기계적으로 예배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모든 순서와 행위, 특히 말씀과 기도문의 단어 하나 하나의 의미에 집중하는 예배입니다.
당신이 카바나를 가지고 하는 일에 대하여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에 어떻게 카바나를 가지고 참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카바나를 가지오 모든 일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특히 성경을 읽을 때 카바나를 가지고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일ㄹ고 기도를 하며, 찬송을 하며, 다른 이들에게 선을 베푸는 가운데 어떻게 카바나를 가지고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어 단어 카바나는 티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키분은 방향을 지적하는 단어로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설때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정확하게 방향이 정하여 있어야 됨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랍비들은 카바나를 가르치면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예배 행위를 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하여 집중되어 있느냐, 있지 않느냐에 관심을 가지신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피아노 경연대회나 운동경기에 참가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생님이나 코치는 여러분에게 집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쳤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것을 준비하여 발표할때 정신 자세가 흐트러진다면 얻어지는 성과는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실력만큼 나타날 수 없을 것입니다.
잘하는 것과 탁월한 것과의 차이점을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연주자의 집중의 정도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카바나는 유대인으로서 그들의 삶과 다른 민족들의 삶에 진정한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축복의 구문들이나 기도문을 묵상하는 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오도록 인도하지 못합니다. 기도문이나 축복의 구문들을 암송하고 읽을 때 마음을 다하고, 단어 하나 하나의 진정한 의미에 카바나를 두어야 합니다. 유대교는 예배자에게 "행위의 예배"가 아니라 "마음을 다하는 예배"를 드릴 것을 언제나 요구합니다.
본 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하여 어떻게 우리가 참여하는 예배에 카바나를 가지고 예배할 수 있으며, 어떤 마음의 의지를 가지고 예배에 참여하는지를 곧 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약 200여년 전 바알 쉠 토브(1700-1760)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한 사람에 의하여 하시딕 운동(은혜를 강조하는 부흥운둥)이 유대인들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바알 쉠 토브는 "유대인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유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와 집중력의 조화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카바나가 필요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많은 하시딕(은혜주의자들)의 기도에 관한 이야기는 카바나의 양면성을 중요하시며 강조합니다.
중언부언의 기도와 카바나(집중)를 가진 기도
베르딕 헤이브에 사는 유대인들이 어느날 아침 아미다 기도(예배 중에 드리는 기도)를 마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 랍비 이삭이 예배자들에게 걸어와서 인사를 주고 받던 중 랍비가 하는 인사말에 에배에 참석한 예배자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손님이나 또는 다른 도시로부터 와서 처음으로 회당 기도모임에 출석한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인사말인 "당신들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인사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예배자들은 랍비에게 "랍비여, 우리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예배하였으며 오늘도 같은 방에서 예배하였는데 왜 우리에게 처음 온 사람에게 하는 인사말을 사용하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나는 당신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당신들의 예배와 기도의 모습을 볼수 있었소. 당신들은 입으로 기도의 구문을 읽고 있었으나 마음은 하나님을 항하여 있지 않았소. 당신들의 마음은 기도와 수십리나 떨어져 있었소. 아마 유명한 백화점에 세일하는 것이나 오늘 저녁 있을 만찬장을 향하여 당신들의 마음과 생각이 있는 것을 보았소. 그래서 지금 나는 당신들이 그와 같은 긴 사업 여행으로부터 예배당에 돌아온 것을 환영하고 있엇던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랍비는 "나는 당신들이 기도할 때 카바나를 가진 기도, 즉 집중력을 가지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다하는 기도를 조금이라고 하기를 바라오"라고 덧붙였습니다.
카바나(줍중)의 중요한 부분인 '의지력' 또는 '의지'
랍비 이삭은 매년 로쉬 하샤나(유대인 설날)에 그의 동료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하곤 합니다.
"옛날에 나는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방문할 기회가 한번 있엇습니다. 그날 나는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 날 아침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아침기도에 참석하였지요. 그때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있었답니다.
기도모임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인이었습니다. 나의 귀에 들려오는 그들이 기도하는 소리가 어린이들이 속닥대는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때로는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것 같았고 때로는 아주 나쁘게 발음되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상인들이 그들의 사업을 위하여 떠나기 전에 나는 그들에게 '구.구. 바.바'하면서 어린 아이처럼 기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인들은 놀라서 나를 마치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 관해서 설명한 후 '여러분은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말로 하나님께 말햇어야 했소. 좀 부끄러워 할줄 아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상인 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히브리어를 정확하에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유대인을 놀리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오. 당신은 우리들이 기도할때 사용한 말을 어린아이의 말로 비교하였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오. 그러나 랍비여, 당신은 이것을 아시는지요? 어린 아이의 부모는 말도 안되는 자기 자식의 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요. 다른 어떤 사람도 그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어린아이릐 말로 기도할지라도 우리가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한다면, 어누 누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완전하게 이해하신다고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나는 '당신의 말이 옳소. 오늘 로쉬 하샤나에 당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것이란느 확신을 갖기를 바라오.
사람들이 기도할 때 사랑과 카바나를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사람위 귀에 그들의 말이 어떤 소리로 들릴지라도 하나님은 이해하십니다.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하기를 바라고'라고 말했지요"
카바나(집중)를 가진 기도
'나는 어떻게 카바나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을까?'
기도에서 카바나를 향상시키는 방법은,
당신이 기도하고 있는 말을 당신 스스로가 먼저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기도할 때 상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며 기도할 때 당신은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문을 히브리어와 당신의 모국어로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 자신의 개인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이 과정을 반복한다면 당신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의 기도 창고에 점점 더 많은 기도가 저장될 것입니다. 그때 계속되는 기도는 당신에게 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바로소 희생과 진실한 의미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 한 대로 삶 속에서 행할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당신 자신이 하는 기도를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음을 붙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배시 기도에 사용하는 음률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를 니군이라고 부르는데,
기도자의 성격과 취미에 따라 다양한 음률을 붙이기도 합니다.
가장 평범하며 일반적으로 들려지는 음률이 누싸흐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누싸흐로 음률을 붙여야 되는 것은 아니며,
새로운 니군(임률)을 만들어 기도에 붙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만물의 니군(임률)레 기도말을 붙여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기도에서 카바나를 이루는 다른 또 하나의 전통적인 방법은,
기도하는 동안 제스쳐를 취하는 것입니다.
가령 몇몇 사람이 그들의 가슴을 그들의 주먹으로 두드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통하여 기도자는 말 뿐만이 아니라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잘못을 몸부림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들이 슈마를 기도하는 시간에는 손으로 눈을 가리우든지, 눈을 꼭 감든지 합니다.
왜냐하면 슈마를 낭독하는 동안 기도의 의미에 완전하게 집중하는 것으로부터 사상과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미다를 시작할 때
첫째 구절의 축복 구문을 낭독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이것은 신하가 왕의 옥좌가 있는 방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를 숙여 예의를 표하는 것과 같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제스쳐가 기도를 더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할 떄 카바나를 증진시킬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기도를 하기 위하여 노력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 귀중하게 보여진다고 합니다.
어떤 랍비의 가르침-
기도는 끊임없는 투쟁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라면 기도를 시작하지 마시오.
기도를 시작하지 전에 당신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을 향하여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십시오.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방법은 카바나(집중)를 가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