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라는 이름의 절은 전국에 산재해 있으나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길상사가 가장 유명하다.
1997년에 세워져 그리 오래된 사찰은 아니지만 이곳은 최고급 요정이었던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요정중의 하나인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유명한 곳이다. 이 절은 대원각 요정의 주인이었던 공덕주 김영한(불명 길상화_吉祥華: 1916~1999)이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죽기전 기증을 하여 절로 탈바꿈한 곳이다.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1987년 시주의 뜻에서는 사양을 하였으나거듭된 요청이 받아들여 1995년 길상사로 탈바꿈 하였으며 이때 김영한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시 시가로 1,000억 원이 넘었는데, "아깝지않냐?" 란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천억 재산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도 못해" 길상사에는 사찰에 있는 대웅전을 대신하여 김영한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뜻으로 "극락전"이라 명명 하였다.
1999년 11월 14일 평생 백석을 그리워했던 김영한이 길상사에서 생을 마감 하였는데, 죽기 전날 그녀는 목욕재계하여 절에 참배하고는 하룻밤을 길상헌에서 보내 고생을 마쳤다.
유해는 살아생전 그녀가 화장하여 길상사에“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 달라"는 유언대로 그녀의 유해를 백석의 시처럼 눈이 내리는 날 길상사에 골고루 뿌려져 따로 무덤이 없이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안에 있다.
2010년 법정 스님도 여기서 입적을 하였으며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김영한은 부친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였으며, 그녀의 가족은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알거지가 되어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이때 김영한은 열여섯 살의 나이로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백석은 1924년에 오산소학교를 졸업하고 오산(五山)고보로 진학하였으며 학과 성적도 우수하고 문학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백석의 성적 정도면 평양의전에 진학해 의사가 될 수 있었지만 백석은 교사가 되려 하였고, 집이 가난하여 기회를 얻기 위해 한동안은 집에서 지내야 했다.그러던 중 방응모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가장 학비가 비싸다는 아오야마가쿠인 전문부 영어사범과에 진학을 하였다.기생 김영한과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인 백석과의 운명 같은 만남으로 사랑이 시작되었다.
백석은 이백의 싯구에 나오는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김영한에게 지어주고 사랑에 빠졌으나, 백석 부모님의 반대와 함께 백석은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결혼 첫날밤 자야를 잊지 못해 찾아온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제안하였으나 그녀는 거부하였고 그럼에도 백석은 나중 그녀가 뒤따를 것을 믿고 먼저 만주로 떠났다. 만주에서 백석은 자야를 그리워하다 그 유명한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지었으며 잠시 동안이라고 믿었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이후 해방이 되어 남한으로 홀로 내려온김영한은 성북동 지금의 터에 시작한 청암정이라는 한식당이 뒤에 유명한 대원각으로 변신하면서 엄청난 재력가로 성장을 하였으나, 백석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가슴에 새기며 홀로 지냈다. 수많은 사람의 구애를 뿌리치고 첫사랑 백석을 평생 그리워했던 자야는 폐암으로 1999년 세상을떠난다.
매년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면 식사를하지 않고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 언제 백석이 가장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어디 있냐?”는 답으로 생전에 그녀가 백석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알 수가 있다. https://naver.me/5NqeDAub
첫댓글 길상사에 가셨군요
설렁탕도 드셨고 잘 하셨어요
빨리 보도록 해요 건강하게
네 형님
별탈 없으면 다음주에 갈려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