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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알바트로스
제56차 정기합평회
(2023. 10. 19.)
순서 | 제목 | 작가 | 합평 담당 |
1 | 마음의 거리 | 옥경자 | 최선화 |
2 | 작업 걸다 | 백금태 | 공도현 |
3 | 오늘의 한가위만 같아라 | 오수미 | 김 경 |
4 | 배우며 가르치며 | 엄옥례 | 김경애 |
5 | 그림 여행 | 이미경 | 김미숙 |
6 | 기쁨과 슬픔 사이의 페르소나 | 채정순 | 김아가다 |
7 | 어린 마부 | 김 경 | 김영희 |
8 |
마음의 거리/옥 경 자
(1) 그와 나는 오래전에 인연을 맺었다. 어느 날 새벽,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가야 하는 데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일을 제쳐놓고 달려갔다.
(2) 그는 내시경 검사를 마치고 문제점이 생겨 수술하게 되었다. 자식들이 멀리 있어서 내가 수술실 문밖을 지켰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나 입원실로 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내 집에도 돌봐야 할 식구들이 있었지만, 흔쾌히 모든 절차를 떠안았다.
(3) 퇴원하기까지 일주일 동안 내가 간호했다. 그 후에 편하다는 이유로 나는 늘 그의 병원행에 불려 다녔다. 사람들은 내가 그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오해였다. 가족이 멀리 있어 그가 아플 때 올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것이 나의 오지랖을 작동시켰을 뿐이다.
(4) 평소에 그는 내게 가족 중에 누가 아프면 몸으로 때우지 말고 돈으로 해결하라고 했다. 간병사를 둘 경제적인 형편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그가 그런 말을 할 때는 마음에 상처가 되기도 했지만,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거니 마음에 두지 않았었다.
(5) 사람은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렇게 말은 하면서 막상 그에게 병원에 가는 일이 닥치면 돈으로 해결하지 않았다. 내가 집안일에 매달려 즉각 달려가지 못함에 못마땅함을 서슴없이 드러냈지만, 나는 서로의 생활환경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비중에 두지 않았다.
(6) 손녀도 돌봐야 하고 친정엄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나도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내 집 일만해도 가득한 데 그에게 더 이상 불려 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가정사에 충실해야겠다고 했다. 그는 내게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가족에게 끌려다닌다고 또 타박을 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서서히 그에게서 내 마음의 거리가 멀어짐을 느꼈다.
(7) 그래도 가끔 만나 치맥 한잔하면서 내 생활의 힘듦을 털어놓기도 했다. 내 코가 석 자여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8) 최근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어떤 식으로든 연락받았을 것이다. 섭섭하게도 그에게서 한마디 문자도 없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실리(失利)를 따지기 전에 지위를 막론하고 정이라는 것이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인간의 얍삽한 마음을 보는 것 같았지만 그를 만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9) 얼마 전 우연한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살갑게 부둥켜안을 만큼 마음의 거리가 아니어서 가볍게 목례만 했다. 식이 끝나자마자 내게로 달려와서 본인이 인정하지 않는 인사는 무효라며 무슨 인사를 그따위로 하냐고 따졌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들었다. 삽시간에 대역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10) 사실 인사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고개 숙이면 될 일이다. 인사는 서로에게만 보이는 핑계에 불가하지 않았을까. 죽은 사람에게 인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음에 차지 않는 인사에 지나치게 반응을 보인 그도 지나간 일에 연연한 나도 서로 멀어진 마음의 거리에 서운함을 가중했으리라고 생각해 본다.
작업 걸다 / 백금태
1) 해거름이 내리는 강가로 나갔다. 걷기를 할 참이었다. 벚나무가 터널을 이룬 강둑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맨발로 걷는 사람, 쫙 쪼이는 트레이닝복으로 몸매를 과시하는 젊은이들,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중년들, 지팡이를 짚고 한발 한발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는 노인 등 세상이 한눈에 펼쳐졌다. 나도 그들과 한 쌈에 끼었다.
2) 앞사람의 엉덩이만 쳐다보며 걸었다. 펑퍼짐한 엉덩이, 축 처진 엉덩이, 착 올라붙은 둥그스름한 엉덩이. 앞을 보지 않고도 엉덩이로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마주쳐 걸어오는 사람들과 눈 맞춰지는 게 어색해서 준 눈길인데 엉덩이 감상의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누군가도 내 뒤태를 주시할 걸 생각하니 뒤통수가 간질거렸다.
3)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걷기라 피로도 빨리 찾아왔다. 앉을 곳을 찾다 보니 나무 밑에 자리 잡은 의자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한 의자에는 이미 노인 한 분이 쉬고 있었다. 나는 옆 의자에 앉았다. 옆에 앉은 노인이 자꾸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노인이 말을 걸었다.
“조금 전에 지나가더니 다시 돌아오네.”
“저 보셨어요?”
나는 다른 사람 엉덩이만 쳐다보며 가느라 노인이 앉아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친 모양이었다.
“봤지. 빼빼한 사람이 지나가길래 눈에 들어왔어.”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들이며 노인이 아는 체했다. 쉬고 싶어서 앉았는데 이런 말 저런 말 쉴 새 없이 물어오니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의자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4) 노인의 말은 이어졌다.
“올해 나이가 몇인고?”
처음부터 반말하더니 급기야 나이까지 대란다.
“일흔이 내일모레입니다.”
숙녀한테 예의 없이 나이까지 물었다.
“우리 딸하고 같네.” 젊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늙었다는 말인가 아리송했다.
5) 노인의 말이 또 이어졌다.
“나는 올해 아흔인데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어. 연금을 받고 있어서 사는데 걱정 없어.”
지갑을 펼쳐 연금증서까지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보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행동이 의아할 뿐이었다. 자식들이 내 재산에는 손도 못 댄다느니, 혼자 지내니 누구를 만나도 괜찮다는 둥 노인의 말은 점점 더 많아졌다. 얼마나 적적하면 저러실까 싶은 짠한 마음에 억지로 참고 있었다. 듣다 보니 언제 끝날지 몰라 쉬다 가시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6) “오늘은 운동 많이 했네.”
나가기 바쁘게 돌아오던 마누라가 한참 만에 들어오니 남편이 의외인 듯 말했다.
“여보, 강가에서 어떤 남자가 나한테 작업 걸었다,”
입가에 야시시한 웃음을 날리며 말했다.
“젊었어?”
요즘 잘 쳐다보지도 않던 그가 눈을 치뜨며 말했다. 톡 쏘는 말투에는 가시가 돋쳐있었다. 노려보듯 쳐다보는 눈빛에는 질투가 이글거렸다. 젊은 시절 질투의 화신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남편의 묘한 반응에 웃음이 나왔다. 더 했다간 부부싸움이라도 날 분위기였다.
“아흔 살 할아버지야.”
내 대답에 남편의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한번 잘해 보지 그래.”
남편의 목소리는 한껏 부드러워졌다. 활활 타오르던 눈빛도 스르르 사그라졌다.
7) 남편의 태도를 보니 그 할아버지도 나에게 진짜 작업을 건 것이 아닐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할아버지도 남자다.
오늘의 한가위만 같아라 / 오수미
1)추석 연휴 첫날, 남편은 요양원에 계신 시어머니를 모시러 가고 나는 친정으로 갈 준비를 했다. 남편은 혼자서는 어머니에게 간적이 없다. 항상 내가 먼저 가자고 말하길 기다리던 그가 이번에는 자처하였다. 나는 남편 없이 친정에 갈 생각에 들떠서 꽃단장을 시작했다.
2)이렇게 이번 명절은 나에게 특별하게 시작되었다. 시어머니가 집에 오셨지만 상관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가 우리 집에 머물렀지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가 없어 유동식을 드셔야 하는 어머니를 위해 따로 음식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주무시다가도 열 번쯤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어머니 때문에 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앞으로 오늘만 같아라!
3)명절날 모처럼 곱게 차려입었다. 친정으로 나설 준비를 마쳤을 무렵,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어머니가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거북이걸음으로 들어섰다. 어머니를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이빨 없는 어머니가 갓난아이처럼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어머니 얼굴의 100년 묵은 주름이 자글자글 춤을 추었다. 코로나가 발발하기 전 설날에 오시고는 4년만이었다.
4)친정으로 달려가는 동안 꿈을 꾸는 듯 했다. 고루하고 가부장적인 남편이 죽을 때가 다 되었나보다. 지금까지 살아본 결론으로 쉽게 바뀔 인간은 아니었다. 뭔가 꿍꿍이속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무튼, 해방이었다. 어쩌면 그동안의 나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며 투쟁에 대한 승리리라.
5)우리는 주말부부다. 토요일저녁에 온 남편이 참치회를 샀다. 간만에 먹었기에 살살 녹았다. 젓가락을 놀리면서 남편이 말했다.
“이제 코로나 규제가 풀렸으니까, 추석엔 어머니 모셔와야겠어.”
순간 입안에 비린 맛이 확 돌았다. 남편에 대한 잊었던 분노가 불을 댕겼다. 지난 일이 곱씹혔다.
6)작년 코로나 규제가 약해졌을 무렵, 타지역에서 일하던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를 며칠 모셨으면 한다고 했다. 아들인 본인이 보살핀다는 것이 아니라 나더러 하라는 말이었다. 매일 출근하는 내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집에 아무도 없이 하루 종일 혼자 계실 수 있을까하니 그렇다고 했다. 밥도 차려놓으면 드시고 설거지까지 해놓을 거라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알츠하이머에 거동조차 불편한 노인을 집에 혼자 둔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 물었다. 자기 엄마는 괜찮단다. 다 할 수 있단다.
7)아들이 맞나 싶었다. 자기 엄마 상태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하기야 어머니를 모셔올 때마다 모른 척 방관하고 있었으니 모를 수밖에. 무슨 이런 뻔뻔스러운 경우가 있단 말인가.
나는 맏며느리도 아니다. 큰아들인 형은 남편에게 어머니에 대한 책임을 넘겼다. 아내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여자를 부려먹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유일한 며느리인 나를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다.
8)당시 어머님은 코로나 백신을 단 한 번도 접종하지 않은 탓에 나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요양원에 갇혀 지내다보니 답답하다고 난동을 피운 모양이었다. 요양원에서 그 일을 큰아들인 아주버니에게 얘기했고 아주버니는 남편에게 전달했다. 그리고는 결론적으로 생각 없는 남편이 나에게 들이댄 형상이었다. 이 어찌 수긍할 수 있단 말인가.
9)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시고 코로나이전까지 생신, 어버이날 그리고 두 번의 명절을 집에서 모셨다.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웃기는 건 하면 할수록 당연하게 여겼다. 오히려 더 바랬다.
10)내가 어머니에게 잘 해드렸던 이유는 같은 여자로서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홀로 자식 넷을 키운 어머니가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관습을 내세워 나를 옥죄려는 그들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애잔함마저 달아났다.
11)나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 우선순위이었거늘, 당당하게 어머니를 모셔오겠다는 남편의 말이 기가 막힐 정도로 화가 나서 무기력해졌다.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는 남편을 마주보고 싶지도 않았다. 비린 맛이 올라오는 참치조각을 억지로 삼켰다.
‘그럼 당신 혼자 어머니 모셔. 나는 친정갈래.’ 라고 말하려는데 남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12)“미안하지만 이번에는 혼자서 친정에 내려가라.”
잠시 멍했다. 그동안 얼마나 싸웠던가. 수백 번을 다그쳤건만 눈도 깜짝 하지 않는 그였다. 그런 그가 변했다.
13)어머님의 거동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며 자신이 모시겠다고 했다.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면박을 주고 싶었지만 곧 만끽할 자유가 있으니 꿀꺽 삼켰다. 나더러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오나 싶었다.
나는 남편의 의중을 모른다. 어머님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아내인 나의 수고를 이제야 알게 된 것일까.
14)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자랑삼아 오늘을 이야기했더니 승리를 축하한다고 했다. 자기 부모는 자신이 먼저 도리를 다 해야 한다며 남편의 행동은 당연하다고 했다. 함께 수고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친구들의 말에 공감한다.
15)남편이 친정집에 버티고 있지 않으니,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친구들과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보고할 이유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편안했다.
16)나는 나대로 친정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남편은 아들로서 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했을 거다. 생전 처음으로 몸을 움직여 효자 노릇을 했으리라.
17)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어머니가 요양원으로 돌아가셨을까 궁금했다.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동료가 송이버섯을 선물로 줬다면서 언제 올 거냐고 물었다. 그의 말에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송이는 소고기랑 같이 먹어야 제 맛이라고 멋쩍게 반문했다. 그렇지 않아도 구울 준비를 해놓았다며 어머니는 이미 요양원에 모셔다 드렸다고 했다.
18)기분 좋게 휴식하고 돌아온 집은 깨끗이 청소 되어 있었다. 세탁실에 쌓여있던 빨래는 건조대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반려묘 리우는 가르릉거리며 나에게 부비적댔다. 그리고, 남편이 구워준 송이와 소고기는 완전 꿀맛이었다.
부디, 앞으로 오늘의 한가위만 같아라!
배우며 가르치며 / 엄옥례
1.머리맡에 세워둔 ‘꿈의 지도’를 바라본다. 독서치료 전문가 과정에서 만든 것이다. 미래의 삶을 글, 그림, 사진으로 꾸몄다. 지도 한가운데에는 큰 글씨로 명수필가, 명독서치료사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 사진에는 꿈에 닿기라도 한 듯, 치아를 보이며 환하게 웃는 내가 있다.
2.결혼 후, 계절의 수레바퀴가 스물 몇 번 돌 때까지 남편 일에 손을 보태고 아이들 돌보며 살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꿈을 이루면 그들의 등을 타고 같이 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가족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이런 삶이 곧, 여자의 행복이라 여기며 평생 가족의 배경으로만 살고 싶었다.
3.불혹의 중반, 수필 아카데미와 독서치료 자격증 과정에 입문했다. 원해서가 아니라 가고자 하는 길이 막혀 납작하게 퍼져 허우적대던 손에 잡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심리적 고통으로 강의가 귓등으로 들렸다. 그래도 한 가닥 와 닿는 부분이 있었는지 결석은 하지 않았다.
4.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마음이 안정되자 수강생들의 면면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수필 아카데미에서도, 독서치료 자격증 과정에서도 수강생들은 나와 비슷한 연배이거나 연장자들이었다. 청년도 아닌데 다들 공부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델 것만 같았다. 나 혼자 뒤로 처질까 봐 정신이 번쩍 들었다.
5.그러구러 독서치료 입문 과정을 수료하고 전문가 과정을 마쳤다. 어렵사리 독서치료 전문가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여러 기관에 나가서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등을 토닥여 주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한 지 십 년을 훌쩍 넘겼다.
6.수필 아카데미에서도 결실을 거두었다. 처음에는 정신을 딴 데 두고 몸둥이만 수필 교실에 앉아있었다. 글 쓰기와 나는 사돈의 팔촌보다 더 먼먼 사이였고, 마음의 불편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점차 강의가 솔깃해져서 수료할 때까지 강의만 즐겁게 들었다. 무조건 써보라고 하지만 일기 한 줄도 쓰지 않던 사람이 펜을 들 수 있겠는가. 수료만 하면 얼른 도망치려고 작정했는데, 난데없이 수필 아카데미의 사무간사를 맡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수료하고도 아카데미 교실에 계속 나가서 강의를 듣다 보니 글눈이 틔어 등단을 하게 되었다.
7.지금, 독서치료와 수필에 발을 들여놓은 지 16년 차다. 독서치료 강사로서 타지역에서도 섭외가 오고, 수필가로서는 아카데미 원장이 되었다. 짧은 경력이 아님에도 강연 의뢰가 올 때면 늘 부족함을 느껴 준비에 준비를 거듭한다. 또,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어 계속 수필 교실에 나가서 강의에 귀 기울인다.
8.배움의 길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내가 되도록 배우며 가르치고 가르치며 배운다. 명수필가, 명독서치료사가 못 되더라도 새로 접어든 이 길이 나쁘지 않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쓴 나를 위해 두 팔로 어깨를 감싸며 토닥인다.
그림 여행 /이미경
1.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영국 내셔널 갤러리 명화전이 개최 중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마음이 설렌다. 어떤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있을까? 푸른색을 배경으로 핀 아몬드꽃은 희망차고 강인하게 봄을 열고 있다. 볼수록 경쾌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이다.
2.쇠라의 ‘라 그랑자트섬에서의 오후’는 진품으로 꼭 보고 싶은 그림이다. 센 강변에서 사람들이 산책하고 보트를 타고 낚시하는 모습이 점묘화로 환하게 표현되어 있다. 동적인 활동을 하는 그림임에도 정적인 느낌이 강해서 작고 개별적인 점들이 내면의 고독처럼 보이는 매력 있는 작품이다. 점묘화는 선을 사용하지 않으니 나뉨이 없고 노란색 점과 초록색 점이 조화를 이루어 주황색이 되니 점은 소외된 개별자 아니라 충만한 단독자가 되어서 좋다.
3.서울로 가는 중이다. 기차를 탄 후부터 생각은 의식의 흐름대로 내달린다. 뜬금없이 고흐가 벨기에의 탄광 거리에서 선교 일을 하면서 본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고갱은 주식 중개상과 화가의 길을 오가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예술가로서 작품에 삶의 무게를 어떻게 녹였을지도 궁금했다. 오래전부터 영국 여행을 하게 되면 내셔널 갤러리는 꼭 들러 보리라 마음먹었다. 생각보다 빨리 그곳의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즐거운 여행이 되겠다.
4.어느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 앞에 와 있다.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라는 제목으로 르네상스 시대부터 인상주의 초기까지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대가들의 작품에 설렌 사람은 나만이 아니 모양이다. 그림을 보려는 인파가 물결을 이루어 갤러리 안으로 유유히 흐른다. 그 물결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도 그림을 보러 들어간다.
5.유럽 미술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신과 종교의 그림들이 먼저 보인다. 라파엘로의 성모자와 세례자 요한의 그림 앞에 섰다. 성모님이 입은 옷의 색채가 아름답다. 빨강, 파랑, 아이보리 색감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의 아기인 예수님과 인간의 아기 요한이 노는 모습이 요즘도 흔히 보는 모습과 같아서 정감이 간다. 두 아기를 바라보는 성모님의 눈길은 그윽하다. 그 눈길이 좋아 성당에 갈 때면 성모님께 나 또한 당신의 눈길로 세상을, 사람을 바라보게 해 주십사 낮은 목소리로 기도하곤 한다.
6.신과 종교의 그림을 벗어나니 화가의 시선은 사람과 그 주변으로 옮겨진 듯 초상화와 풍경화가 보인다. 초상화의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을 보며 감탄한다. 옷의 소매나 장신구에 그려진 섬세한 표현, 붓의 속도와 터치가 만들어 낸 옷의 질감과 광택이 진짜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것 같다. 영상이나 책에서는 느끼지 못했다. 이런 걸 아우라라고 하는구나. 화가의 기가 느껴진다.
7.벽을 따라 걸려 있는 그림에는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다. 시대적 특징이나 화가에 관한 내용이다. 작은 정보임에도 친근감이 생긴다.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에는 햇빛에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울트라마린블루가 채색되어 있다. 당시에는 금보다 귀했다고 한다. 순간 또다시 생각이 의식의 흐름대로 흐른다.
8.파란 대문의 집.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던 향이 집이다. 그 집에는 책이 많았다. 어느 날 향이와 책이란 책은 죄다 뽑아 블록처럼 가지고 놀았다. 그날 이후부터 향이 집에는 놀러 갈 수 없게 되었다. 대학 교수인 향이 아버지가 주제별로 정리해 놓은 것을 모르고 마구잡이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9.모네 그림 앞이다. 붓꽃이 액자에 가득하다. 동네에서 명자 집 꽃밭에만 붓꽃이 있었다. 붓꽃의 보라색이 얼마나 예쁘던지 꽃봉오리를 따와서 흰 홑청에 포도 그림을 그렸다. 신사임당이 잔칫집에서 국을 쏟아 당황하는 어느 여인의 얼룩진 치마에 포도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그날 어머니에게 등이 얼얼하도록 맞았다.
10.지금 보는 붓꽃은 물감을 여러 번 덧칠해 뭉개듯 터치한 꽃이다. 모네가 활동할 때는 사진이 등장했던 때여서 대상을 그대로 묘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또한, 튜브 물감의 발명으로 야외 작업이 가능해져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과 색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보고 있는 붓꽃은 기억 속의 붓꽃과는 사뭇 다르지만, 어린 시절을 소환하기에는 충분하다.
11.세잔의 그림에서는 난로가 있다. 숙이 생각이 난다. 숙이는 동네 끝에 비닐하우스처럼 생긴 집에서 살았다. 겨울이면 화목 난로에 고구마를 구워 먹었다. 놀러 가면 뜨거운 것을 못 만지는 나를 위해 껍질을 까주던 다정한 친구였는데 더 높은 세상으로 이사 간 지 오래다.
12.아쉽게도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와 쇠라의 ‘라 그랑자트섬에서의 오후’는 없었다.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사람 같은 그리움의 파문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인다. 그래도 대가들의 그림과 함께 어린 시절의 추억 여행까지 했으니 풍성한 하루다.
13.가을로 접어드는 나이가 되면서 가끔 어린 시절이 뛰어놀던 골목이 그립다. 그런 날은 그 시절의 모든 흔적이 없어진 것을 알면서도 찾아간다. 그곳 지리에 밝은 친구가 여기가 향이 집터고 여기가 배꼽마당이었다고 말해도 갈 때마다 잡히는 게 없다. 난 그곳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
14.예전에는 예술은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볼 수 있으니, 예술은 결국 사람을 향한다는 말이 게다. 어릴 적 놀던 배꼽마당에 들어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도 사람을 향한 그리움일 것이다. 여행은 공간도 중요하고 시간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아니겠는가.
기쁨과 슬픔 사이의 페르소나 / 채정순
상가 문을 밀친다. 신발에 묻혀온 바람이 저 먼저 들어간다. 흰 국화꽃이 주를 이룬 화환 사이로 멈짓 멈짓 걷는다. 몇 발짝 나가자 물속같이 조용한 빈소가 처연하다. 영정사진은 미소를 지으나 사위는 슬픔으로 흔근하다. 상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나도 옷섶을 여민다.
늘어선 무리 속에서 엄마 잃은 죄인이라며 친구가 흐느끼며 다가온다. 와락 끌어안고 말없이 등을 토닥인다. 옆방에 모여 있던 상객들 눈빛이 내리쏘는 전조등은 저리가라다. 망자에게 향을 피우고 두 번 절로 예의를 갖춘다. 내쳐 상주들과도 맞절 한다.
내 눈동자가 갑자기 알전구 만해진다. 이 집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며느리의 표정으로 호기심이 치솟는다. 장소가 장소인 만큼 사위들은 물론 찾아온 손님들도 어두운 얼굴인데 그녀의 볼에는 철없는 복사꽃이 활짝 피었다. 절 할 때는 화사함이 뒤통수까지 배어 나와 흐트러진다.
며느리를 흘끔 거리는 바람에 내 속내가 얼비친 모양이다. 친구가 식탁 앞에 나를 끌어다 놓고는 제 올케를 도마 위에 올린다. 진작 이성이 부족한 위인인 줄은 알아도 저 정도 인줄은 몰랐다며 한숨을 쉰다. 평소에는 위선보다 겉과 속이 하나임을 드러내는 게 났다던 투명한 친구다. 그녀의 이례적인 넋두리에 그래도 신경은 쓰였을 거라고 대꾸 한다.
"아이고 아이고" 호곡소리 자지러진다. 친구가 부리나케 낭자한 울음소리를 향해 상주 역할을 하러간다. 저렇게 질펀하게 우는 경우는 피의 밀도가 대단할 것이라 고개를 들어본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의 엄마 닮은 얼굴들이 바닥을 치며 오열한다.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다.
내 머리 속에 곧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모락모락 인다. 옆 자리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사람 마음이 다 같음을 나타낸다. 역시나 며느리 인상이 한없이 홀가분해 보인다며 날카롭게 칼질한다. 그래도 조신하고 숙연해야 한다는 성토 또한 매정하다. 독한 시집을 살았나보다 짐작하는 소리에 내 속이 욱해진다. 절대 큰 시집살이는 하지 않았다는 말을 어금니로 지그시 깨문다.
친구 올케는 서울에서 살았기에 부모 모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 부모들이 자주 아파도 딸들이 모두 대구에 있어 번갈아 가며 간병을 맡은 탓이다. 그녀가 중년이 되어 대구로 이사 와서도 그림은 매 한가지였다. 시어머니가 삼 년간 입원했어도 며느리 저 홀로 수발하러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전업주부이면서도 꼭 제 신랑 쉬는 날 신랑 차를 타고 와서는 한 시간 가량 앉았다가 가는 것이 다였다.
하기야 들어온 자식이 친자식과 같을 수야 있갰는가! 새삼 사위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본다. 선입견 때문인지 그들도 며느리만큼은 아니지만 아들딸들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다만 사회성이 좋아 페르소나의 개념을 잊지 않아 어두움을 연출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뭔가 건성이 들은 듯 본능이 시키지 않음을 짐작케 한다.
이건 다. 창조주의 의지 탓이다. 인간을 희한하게 만들었다. 진료에 피라는 액체를 사용해 그 농도에 따라 좌지우지 방향을 잡게 한다. 피의 단위 일촌, 이촌, 삼촌, 사촌 등이 생겨 난 것도 그 조화다. 뭔 일을 맞닥뜨릴 때 교묘하게 감정 빛깔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만 봐도 안다.
피는 본능이다. 본능이 영 제동이 걸리지 않을 때는 진정성이 어디론가 도망간다. 다행이 이성이란 것을 주어 시험도 하지만 쉽지 않다. 이성으로 해결 할 경우는 어딘가 표시가 난다. 그런 일을 접할 때마다 피의 위대함에 고개가 잘 익은 벼 이삭이 된다. 여북하면 시어머니의 심술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했을까
이것저것 핑겨 놓은 음식접시를 바라보며 언젠가 친구가 한 말을 되뇐다. 올케가 자기 엄마가 몇 달 간 병원 신세 질 때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간병했다고. 음식도 맛깔나게 만들어서 자기 차에 싣고 가서 돌봤다고, 시어머니 때는 콩나물 한 줌 무쳐오지 않았으면서라고 쓴 웃음을 물었다.
마침 친구가 왔기에 인사 하고 방을 나온다. 문 앞 한 공간에서 며느리의 친척들이 앉아 있어 눈길이 절로 간다. 얼핏 봐도 사각 탁자 위를 떠도는 공기는 부숭부숭하다. 한 공간 안에서 저쪽 모퉁이는 눈물바다고 이쪽 한 곳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어린 마부 / 김 경
어디를 돌아봐도 초원과 하늘뿐인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십 마리의 말들이었다. 본격적으로 몽골의 말 투어가 시작될 참이었다. 앞니가 빠지고 얼굴에 주름 일색인 늙은 마부가 여행객들에게 말을 한 마리씩 배당해 주었다. 회색과 우윳빛이 섞인, 무리 중에서도 조금 어려 보이는 말이 내 차지가 되었다. 드넓은 초원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말, 그 위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원시적 자연을 누빌 나의 조합이 한 폭의 그림처럼 뇌리에 그려졌다. 마지막 사람까지 말 위에 오르자 앞쪽에서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인솔하는 말과 양옆으로 따르는 두 마리 말, 이렇게 세 마리의 말과 여행객 세 사람이 한 팀이 되었다. 나의 마부는 고작 아홉 살이나 열 살쯤 됨직한 어린 소녀였다. 세 마리의 말 고삐를 이끌며 노련하게 나아가는 조그만 소녀가 신기하기도 하고 믿음직스럽기도 했다.
한 30미터쯤 갔을까. 갑자기 내가 탄 말이 푸우 푸우 소리를 내며 자꾸만 소녀의 말을 들이받았다. 처음엔 저희 짐승들끼리 장난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계속해서 녀석이 머리로 목덜미를 들이받고 엉덩이로 엉덩이를 치받기를 멈추지 않았다. 당연히 내 몸은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소녀는 앞장서 갔으므로 이 모습을 볼 리 없었다. 가뜩이나 낙타나 말을 타는 투어를 좋아하지 않는 판국에 이 같은 상황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까는 몰랐던 안장 높이가 너무 높게 느껴진 것도 문제였다.
“스탑, 스탑!”
참지 못해 소리를 질렀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돌아다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소녀에게 한 손으로 땅에 내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몇 걸음 뒤로 말을 물린 소녀가 작은 소리로 “겟 아웃?” 하는 게 아닌가?
그제야 그 나라에서도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운다고 했던 가이드의 말이 생각났다. “아이 원 투 컴백.” 나는 아는 대로 내 밭았다. 소녀가 빙그레 웃더니 누군가를 불렀고 저만치 앞장서 가던 늙은 마부가 달려왔다. 부녀가 몽골어로 몇 마디 나누더니 내가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와 말은 각자 자유의 몸이 되었다. 말은 근처에 있는 나무 기둥에 묶이더니 태연스레 풀을 뜯었다.
모두를 초원으로 보내놓고 저 혼자 출발지 게르 앞에서 유유자적 차를 마시고 있던 젊은 가이드가 되돌아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냅다 뛰어왔다. 무슨 일인지 놀란 모양이었다. 말의 행동이 불안해서 투어를 포기했다는 내 말에, 온종일 여행객들을 태우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일행들이 올 때까지 함께 차나 마시자는 그의 배려를 사양했다. 사방으로 펼쳐진 초원, 저 드넓은 땅을 언제 또 품에 안을 것인가 하는 조바심이 아까부터 나를 채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서쪽 하늘에 걸리기 시작한 해를 보고 걷기 시작했다. 땅에 낮게 피어있는 에델바이스이며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들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내 속에 넘쳐오던 충만함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 사방을 둘러봐야 초록 일색인 땅과 푸르른 하늘과 둥둥 떠다니는 뭉게구름이 다였다.
얼마를 걸었을까.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장관이었다. 몇 그루의 나무와 하얀 게르 지붕들 그리고 불꽃 파편들이 퍼져가는 듯한 오렌지색의 하늘. 어쩌면 몽골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지도 몰랐다. 이 선물을 주기 위한 말의 깜짝쇼였을 거라는 몽상에 젖어 있는데 가이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에 일행들이 하나둘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한 시간이 그렇게나 빨리 지나가다니. 하염없이 넓은 공간에서의 시간은 저들끼리 나누어버리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사람들은 저마다 만족한 얼굴로 말을 좀 더 타고 싶더라고 했다. 나는 초원을 더 걷지 못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들은 말 위에서 초원을 누비는 호사를 포기한 나를, 나는 내가 누린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그들을 동정한 셈이었다.
어리거나 나이 많은 마부들은 사람들에게서 해방된 말을 이끌고 갔다. 우연인지 그 많은 말과 사람들 틈에서 아까의 그 소녀와 코앞에서 딱 마주치게 되었다. 소녀는 잠깐 보았던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상기시켜 줄 요량으로 “겟 아웃?” 하자 그제야 생각난 듯 활짝 웃었다. 마침 내 바지 주머니 속에는 여행사에서 일러준 팁 2달러가 있었고 그것을 건네자 소녀가 멈칫했다. 여행객 말을 한 마리만 인솔했으니 당연히 팁은 그것뿐이라 여긴 것 같았다. 눈길로 재촉하는 내 뜻을 알고는 작은 소리로 댕큐, 하는 그 얼굴이 어찌나 순진하고 사랑스럽던지.
아버지를 도와 씩씩하게 말을 몰고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저 일이 마냥 좋아서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가난한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몽골 사람들이 자식들은 편하게 살라고 도시로 내보냈더니 대학을 마친 후 다시 초원으로 돌아오는 예가 허다하다는 다큐멘터리가 언뜻 떠올랐다.
남들이 만든 제도 속에서 살아야 하는 도시의 일상이 갑갑하더라는 청년의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초원에서는 내가 주인이고 타인으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아 행복하다고, 그래서 돌아오고 싶었다고 했다. 저 넓은 땅을 두고도 21세기 문명의 혜택에서 제외된 그들의 삶이 여행 내내 안타깝던 내 감정이 오지랖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몽골에 대한 관심도가 어느 때보다 뜨겁다. 텔레비전 예능에서는 앞다투어 몽골 탐험기를 내세우고, 역사 프로그램에서는 징기츠칸의 시대부터 재조명하고 있다. 어떤 형태가 되든 그들의 삶이 지금보다는 더 윤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 어린 마부의 미래가 궁금하다. 그녀에게 주도적인 꿈이 펼쳐질 충분한 기회가 있기를, 더 나아진 그들의 세상에서 아름다운 삶을 영위하기를 응원한다. 하긴 어떻게 알겠는가. 십 년쯤 뒤, 소녀에서 숙녀로 변신해 새까만 얼굴로 긴 머리 휘날리며 멋지게 자신만의 인생을 누비는 대초원의 기수가 되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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