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창호 선생님
연미숙
유리창 너머로 어두움을 타고 봄비가 온다. 비는 만물을 소생시키고
메마른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이렇게 비가 오는 창밖을 보고 있으
면 내 마음에도 비가 흐르고, 찌들고 묵어 있던 삶의 앙금들이 씻겨지고
그 눈에 비친 세상은 더 순수해 보인다. 이 봄비로 어디선가 향기로운
열매를 위해 떨어지는 꽃잎 하나 있으리라. 떨어지는 꽃잎의 아픔을 가
슴에 담으면 이윽고 내 가슴에도 가득 떨어지는 꽃비......
풍요로운 5월, 스승의 날이 다가올수록 생각나는 그리운 얼굴이 있다.
사춘기적 갈등으로 타던 내게 단비처럼 책과 벗할 기회를 만들어 주신 임
창호 선생님이시다. 고등학교 졸업반에 새 국어 선생님으로 우리를 가르
치시던 그 분은 별명이 ‘벽창호’이셨다.
벽창호란 평안북도 벽동, 창성지방에서 나는 크고 억센 소를 뜻하는 벽
창우에서 비롯되었고, 우둔하고 고집이 센 사람을 불러 벽창호라 부른다.
별명만 들어도 그 사람의 성격이나 외모가 눈앞에 그려지듯이 선생님의
성함 때문이었는지, 수업시간에 뜬금없이 하시던 문학 강의 때문이었는지
선배들로부터 이미 불리어지고 있던 별명이었다.
상업학교라서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되자, 취직이 되어 직장으로 나가
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하나 둘 빈자리가 늘어갔다. 듬성듬성 이 빠진듯
한 교실에 남아있던 우리들은 앞날이 불투명하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견뎌
야 했다. 선생님도 이런 우리들의 심정을 아셨을까? 재미있는 이야기좀
해달라고 떼를 쓰면 '말의 폭포에 빠져보라'거나 '안광(眼光)이 지배(紙
背)를 철(徹)' 정도로 책에 깊숙이 몰입해 보라시며, 문학의 열정을 쏟
아 내셨다. 다만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어김없이 '질문이 없으면 5분 일
찍 끝내겠습니다'하시며 공부에 흥미를 잃어가는 우리들을 다독이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열렬한 문학 강의 귀기울여 듣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일찍 수업을 끝낸다 해도 아무도 싫은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취직이 급
한 우리들에게 문학이 얼마나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선생님은 말의 폭포
에 빠져 보셨을까? 종이가 뚫어질 정도로 책을 많이 보셨을까? 나는 슬
그머니 호기심이 발동했다. 젊은 혈기와 사춘기적 오기도 한몫 했으리라.
아니 그보다는 ‘생각’할 수 있는 마저 상실되어 가는 무덤덤함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게다.
'마지막 5분'에 나는 질문을 했다. 국어시간에 ‘어떤 질문으로 선생님을
난처하게 만들까’에 골몰할만큼 질문도 많이 했지만, 질문할 때의 팽팽한
긴장감을 더욱 좋아했다. 선생님도 질문이 의외라는 듯 빙그레 웃음으로
대하셨지만 갈수록 그 강도를 더해 가자 ‘너 때문에 책을 들여다본다’시며
농담도 하셨다.
그 해도 저물어 갈 무렵, 내 질문에 당황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지금
도 잊을 수가 없다. 답변이 궁하셨는지 더 이상 나를 이기지 못하시겠다
며 일어서라고 하시고는 내 긴 코를 잡아 비트셨다. 그만하라는 경고였
다. 나처럼 진드기같이 물고 늘어지는 학생은 본 적이 없으시다며 고개
를 절래 절래 흔드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끈질긴 질문'의 실체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드러내고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자 하는 사춘기적 열망의 한 표현이었고, 사색
의 시간이 필요했던 시기에 대화를 이어주는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제자의 속 들여다보이는 질문에도 스승으로서의 성실한 면모
를 잃지 않으셨던 선생님! 지금은 잃어버린 시작(詩作)노트와 중학교 때
부터 쓰고 싶었던 시나리오 작가에 관한 꿈이며, 이해하기 어려워 여러
번 읽었던 '데미안'의 선과 악의 세계나, 알을 깨고 날아오르던 새에 관한
이야기도 진지하게 토론해 보고 싶었던 일들...... 그 모든 것들이 비뚤어
진 오기 때문에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였으니 지금도 아쉬움이 마
음 가득 남아 있다.
졸업 후 십여년만에 모교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이미 그곳을
떠나신 후였다. 학교는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낯설지가 않은데 그곳을
돌아 나오는 발길은 마음만큼이나 무거웠다. 철없던 그 시절, 선생님을
당황시키리라던 어리석은 고집이 이제 와서 마냥 후회스럽고 그렇게도 제
자들을 아끼고 문학을 사랑하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살고 계신지...... 지금
이라도 선생님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도 싶다.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던가. 선생님 말씀대로 책을 통해 세상
을 보는 안목도 넓어지고 책읽는 즐거움이 생활 습관이 되고 보니 더욱
사모(思慕)의 정이 샘솟는다. 거칠고 메마른 우리의 마음에 늘 ‘글사랑’의
씨앗을 뿌리시던 벽창호 선생님! 지금도 삶이 버겁거나 허허로울때면 선
생님의 다정하고 힘있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돈다.
‘이제는 네 안광이 지배를 철했느냐?”고.......
‘음유(吟遊)시인처럼 말의 폭포 속에도 빠져 보았느냐?'고......
1999.
첫댓글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던가. 선생님 말씀대로 책을 통해 세상
을 보는 안목도 넓어지고 책읽는 즐거움이 생활 습관이 되고 보니 더욱
사모(思慕)의 정이 샘솟는다. 거칠고 메마른 우리의 마음에 늘 ‘글사랑’의
씨앗을 뿌리시던 벽창호 선생님! 지금도 삶이 버겁거나 허허로울때면 선
생님의 다정하고 힘있는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돈다.
‘이제는 네 안광이 지배를 철했느냐?”고.......
‘음유(吟遊)시인처럼 말의 폭포 속에도 빠져 보았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