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첨단 반도체 2위” 미국의 자신감이 석연찮은 이유
이재연
미국 정부의 반도체 부흥책, 10년 뒤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것으로 전망
미국의 첨단반도체 생산, 2022년에 0%, 2032년에는 세계 생산량의 28%
기댈 곳은 인텔뿐... 시가총액 전세계 110위가 현실, 미래는 희망고문일까?
TSMC의 미국 투자 못 미더워... 미국의 반도체 르네상스가 맞닥뜨린 현실
“반도체 전망은 맞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반도체 업계에 오래 몸담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듣거나 해봤음직한 말이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주목받는 핵심 산업인 만큼 매일같이 무수히 많은 반도체 ‘통계’와 ‘전망’이 쏟아지지만, 그 정확도는 많이 아쉬운 수준이다. 원래도 변수가 많은 산업에 최근에는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이나 미-중 분쟁 등 예측하기 어려운 요소까지 더해졌다. 게다가 영업비밀로 여겨지는 영역이 여타 산업보다 넓어 기업의 공식 자료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한계가 있다. 반도체 분야에서 어떤 통계나 전망이 발표되면 먼저 그 타당성부터 철저히 ‘해부’해봐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텔 파운드리 반도체의 칩 웨이퍼 커팅 장면. / 사진=인텔
미국의 자신감 “세계 2위로 급부상할 것”
지난주에도 이런 ‘해부’가 필요한 숫자가 하나 발표됐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컨설팅그룹(BSG)이 내놓은 보고서 ‘반도체 공급망 복원력의 부상(Emerging Resilience in the Semiconductor Supply Chain)’이다. 제목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보고서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반도체 부흥책이 10년 뒤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들일 것으로 내다봤다.
<그림 1> 국가별 첨단 시스템반도체 점유율. 2022년 기준 한국과 대만만이 보이던 영역에 2032년이면 미국이 한국 이상으로 성장해 대만을 추격할 것을 보여준다. / 자료=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보스턴컨설팅그룹(BSG) 제공
30쪽이 넘는 분량이지만 사실 그래프 하나로 요약 가능하다(<그림 1>). 이른바 ‘첨단 시스템반도체’의 국가별 점유율이 향후 10년간 어떻게 전개될지 나타낸 그래프다. 보고서는 2022년에는 미국이 첨단 반도체를 단 1장도 생산하지 못했지만, 2032년에는 전세계 생산량의 28%를 도맡을 것으로 내다봤다. 불과 10년 만에 첨단 반도체 불모지에서 세계 2위 생산국으로 격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반면 1위 대만의 점유율은 10년 만에 69%에서 47%로, 기존 2위 한국은 31%에서 9%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 전망대로라면 미국의 반도체 부흥책은 한마디로 ‘대성공’이다. 보고서에는 “미국은 마침내 수십년에 걸친 과거의 하향 궤도를 되돌릴 것”이라는 확신에 찬 문장도 서슴없이 등장한다. 근거가 있는 자신감일까? 통계가 보여주는 현실은 사뭇 다르다.
<그림 2> 2020년 이후 전 세계에서 발표된 주요 신규 팹 및 ATP 투자 건수 / 자료=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보스턴컨설팅그룹(BSG) 제공
미국 ‘장밋빛 전망’의 근거는?
일단 미국이 목을 매는 첨단 반도체(advanced chips)가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보고서는 ‘첨단’의 기준선을 10나노미터(㎚)로 잡았다. 10㎚는 1억분의 1미터(m)이며, 머리카락 굵기로 따지면 1만분의 1 수준이다. 반도체 회로 선폭이 이것보다 좁아야 ‘첨단’ 대열에 들어설 수 있다는 얘기다. (메모리반도체는 회로 선폭이 더 넓기 때문에 ‘첨단 반도체’라는 용어는 주로 시스템반도체 쪽에서 쓰인다.)
예상 가능하듯이 첨단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전세계에서도 극소수다. 현재로서는 중국을 제외하고 사실상 3개 회사로 추려진다. 독보적 1위를 달리는 대만 파운드리 TSMC와 2위 삼성전자, 그리고 몇 년 전 파운드리 재진출을 선언한 미국 인텔이다. 이들 회사가 미국에 공장을 얼마나 크게 짓는지에 따라 미국의 첨단 반도체 점유율이 결정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미국의 ‘장밋빛 전망’에 결정적 역할을 한 회사는 3곳 중 어디일까.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2020년 5월~2024년 4월 발표된 미국 내 반도체 투자금액(계획)은 모두 4473억달러다. 이 중에서 인텔이 총 1035억달러로 23.1%를 차지한다(<그림 3>).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회사 3곳(TSMC·삼성전자·인텔)으로 좁히면 인텔의 비중은 무려 48.5%로 뛴다. ‘첨단 반도체’ 강국을 향한 미국의 꿈이 실현될지는 상당 부분 인텔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그림 3> 미국 투자금액(계획)의 회사별 비중. 인텔이 전체의 1/4 정도에 해당하는 23.1%를 기록하고 있다. / 자료=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 제공
‘인텔’이라는 거대한 변수
문제는 미국 반도체의 명운을 짊어진 인텔의 전망이 썩 밝지 않다는 데 있다. 최근 들어 시장에서는 인텔에 대한 평가가 갈수록 박해지는 중이다(<그림 4>). 올해 들어서 빠진 주가만 약 35%에 이를 정도다. 한때 전세계 시가총액 2위까지 올랐던 기업 치고는 내리막길이 꽤 가파르다. 최근 인텔의 시가총액은 전세계 110위 안팎이다. 같은 반도체 업계의 엔비디아(3위)와 TSMC(9위)는 물론 30위권인 삼성전자보다도 훨씬 낮다.
<그림 4> 2024년 인텔의 주가 추이.
한때 전세계 반도체를 호령했던 기업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과거 아이폰의 잠재력을 외면하고 PC에 안주한 인텔의 패착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바다. 최근 시장이 주목하고 있는 건 인텔이 다른 종류의 패착을 저지르고 있을 가능성이다. 바로 인텔이 2021년 부활시킨 파운드리 사업이다.
인텔의 파운드리 재진출은 국가와 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케이스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자국 내 반도체 생산능력을 늘리기 위한 각종 지원책을 담은 법안이 이미 발의된 터였다. 더 이상은 반도체 ‘설계’ 부문의 강자로 만족하지 않고, 1990~2000년대를 기점으로 아시아로 옮겨갔던 반도체 ‘공장’을 되찾아오겠다는 취지였다. 파운드리 재진출에 나선 인텔에 미국이 총 200억달러의 보조금(대출 포함)을 제안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제는 인텔이 파운드리 산업에서 떠나 있는 동안 기술이 너무 빨리 발전했다는 점이다. 인텔이 파운드리에서 철수한 2018년 당시에는 7㎚가 최신 공정이었다. 현재 TSMC와 삼성전자에서 3㎚ 공정 양산이 이미 이뤄지고 있으며 2㎚ 양산도 머지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격차가 크다. 5㎚ 이하의 미세공정에서는 하나에 3천억원 정도 한다는 극자외선장비(EUV)가 필수인데, 업계에서는 인텔이 이 장비를 경쟁사에 비해 뒤늦게 도입한 것도 기술 격차를 키운 주된 원인으로 보고 있다.
기술 격차를 단기간에 좁히기 위해 필요한 건 역시 돈이지만 이것도 확보하기 쉽지 않다. 당분간은 인텔 파운드리를 찾는 고객이 없다시피 할 가능성이 높은 탓이다. 특히 첨단 반도체에서는 TSMC의 독주가 워낙 강력해 삼성전자도 고객사 확보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인텔 파운드리 사업의 미래는 수익이 미미한 와중에도 대규모 투자를 이어나갈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난도가 매우 높은 ‘머니게임’인 셈이다.
이런 식의 보릿고개가 얼마나 깊게, 얼마나 오래 갈지도 불투명하다. 인텔은 지난해 파운드리 사업에서 연간 69억5500만달러의 영업손실을 봤다. 원화로 10조원에 육박하는 규모다. 올해에는 1분기에만 파운드리에서 24억7400만달러의 적자를 냈다. 파운드리 외 사업부문에서는 흑자를 기록했지만, 파운드리 적자가 워낙 큰 탓에 회사 전체로도 ‘마이너스’였다. 인텔은 올해 파운드리의 연간 적자 규모가 지난해보다 더 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인텔은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 인텔이 앞으로 실적을 발표할 때마다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되뇔지도 모른다. “인텔은 지금 역사상 가장 큰 반전의 시기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린 한물간 기업의 헛된 노력에 수백억달러를 쏟아붓겠다고 약속한 것일까?”(<파이낸셜타임스> 칼럼)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 북부 지역에 건설중인 대만 파운드리 기업 티에스엠시(TSMC)의 첨단 반도체 공장 모습. / 사진=셔터스톡
“미국인 게을러” TSMC는 미국에 진심일까
미국 반도체 청사진의 두 번째 퍼즐조각은 단연 TSMC다. 미국은 거액의 보조금을 발판 삼아 대만의 TSMC 공장을 사상 처음으로 유치한 바 있다. TSMC는 총 65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해 내년부터 애리조나주에서 생산을 시작할 예정이다. 당장 내년에는 4㎚, 2028년부터는 2~3㎚ 양산이 계획돼 있다. 미국 정부가 여기에 화답하며 제안한 현금 보조금 규모는 모두 66억달러다.
눈여겨봐야 할 점은 아직 약속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과 TSMC의 투자 계획을 담은 문서는 구속력이 없는 예비각서(non-binding preliminary memorandum of terms)에 불과하다. 물론 이미 건설이 진행 중인 팹도 있지만, 양쪽이 구속력 있는 절차를 밟기 전까지는 보조금 규모와 투자 계획 모두 미정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더 가깝다는 얘기다.
업계에서는 벌써부터 TSMC가 투자 계획을 모두 이행할지 미심쩍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실제로 TSMC는 이미 수차례에 걸쳐 공장 가동 시점을 미뤄왔다. 일단 지정학적 요인이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전세계 파운드리 점유율이 약 60%에 이르는 TSMC는 대만을 중국의 침공으로부터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곤 한다. 미국 내에서 안정적인 첨단 반도체 생산이 가능해지면 대만은 ‘버려진 카드’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경제적으로도 걸림돌이 적지 않다. 일단 미국인 근로자와 대만인 근로자가 일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크다. 이와 관련해서는 2022년 출간돼 전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크리스 밀러의 《칩 워》에 나온 구절을 참고할 만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샹이 치앙은 스탠퍼드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일하다 TSMC로 옮겨 최고운영책임자(COO) 자리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대만 사람들은 (미국인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해요.” 치앙이 말하길, 미국에서는 뭔가가 새벽 1시에 고장나면 엔지니어가 다음날 아침에서야 수리를 한다. 반면 대만에서는 새벽 2시까지 다 고쳐놓는다.
<그림 5> 미국 내 반도체 제조 고용 인력 추이. / 자료=미국 백악관 제공
미국에 숙련된 반도체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미국 내 반도체 제조 고용 인력은 2000년 28만7천명에서 2017년 18만1천명으로 쪼그라들었다(<그림 5>). 미국 반도체 산업의 무게중심이 ‘팹리스’로 옮겨간 데 따른 영향으로 풀이된다. 미국이 반도체 제조 부흥에 시동을 건 최근에서야 20만명선을 회복한 상황이다. TSMC도 앞서 애리조나주 공장 가동 계획을 연기하면서 “첨단 장비를 설치할 만큼 숙련된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한 바 있다.
반도체 사이클이 투자 계획에 미칠 영향도 지켜볼 만한 변수다. 반도체 호황이 계속되면 기업 입장에서 미국 내 투자에 대한 부담이 크지 않을 수 있다. 반면 2022~2023년 수준의 불황이 반복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인공지능(AI) 산업이 언제까지 반도체 수요를 떠받쳐줄지가 관건이다. 만에 하나 공급과잉이 찾아오면 기업 입장에서 수십조원씩 드는 팹 건설은 미루거나 취소하는 게 나을 수 있다.
‘반도체 르네상스’를 향한 미국의 꿈은 이런 걸림돌을 모두 넘어설 수 있을까. 미국은 반도체 제조에만 보조금 3900억달러를 쏟아부으며 ‘된다’에 베팅한 상황이다. 하나 분명한 건 그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점일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이렇게 평했다. “미국은 전례가 없는 일을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바로 핵심 제조업 부문에서 줄어들고 있는 점유율을 반등시키는 것이다.”
글쓴이 이재연은
경제학을 전공하고 한겨레신문 경제산업부 기자로 일하고 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한국거래소, 공정거래위원회, 자동차·배터리 산업 등의 출입처를 거쳤다. 주로 금융시장과 금융정책, 경쟁법 분야를 취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