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EaDR3ibr4D0?si=p5BKBs3lyBdXqEpZ
열아홉 번째부터 스물네 번째 말씀까지 24:1~10
1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2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3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4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5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6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7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8 악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악한 자라 하느니라
9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열아홉 번째부터 스물네 번째 말씀까지 24:1~10
11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12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13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14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15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17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18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19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20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21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22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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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도, 악인과 함께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지혜는 영혼의 꿀과 같습니다. 지혜를 얻으면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지만 악인은 재앙으로 인해 엎드러집니다. 하나님과 왕을 경외해야 하고, 반역자와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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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번째부터 스물네 번째 말씀까지 24:1~10
지혜자가 가르치는 서른 개의 말씀 중 본문에서는 열아홉 번째부터 다룹니다. 열아홉 번째, 마음으로 폭력을 꾀하고 입술에 악이 있는 사람과 어울리지 말아야 합니다(1~2절). 스무 번째와 스물한 번째는 집을 세우고 견고하게 하는 지혜와 총명, 방들을 온갖 보물로 채우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사람은 점점 강해지고 전쟁을 이길 계책을 얻습니다(3~6절). 스물두 번째와 스물세 번째, 미련한 자는 지혜에 미치지 못하기에 죄만 생각하는 자와 악행만 계획하는 자, 교만한 자를 멀리해야 합니다(7~9절). 스물네 번째, 고난의 때에 약함을 보이기보다 용기를 내어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10절). 고난의 시기에 길을 찾고 견고히 서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환난을 당할 때 낙담하면 무엇을 드러내는 것인가요?(10절)
고난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릴 때 나를 붙드는 하나님 말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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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번째부터 서른 번째 말씀까지 24:11~22
스물다섯 번째, 죄로 인해 죽임당할 자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는 마음을 저울질하시고 영혼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11~12절). 스물여섯 번째, 지혜가 꿀처럼 달콤함을 알아야 합니다(13~14절). 스물일곱 번째, 악인은 재앙으로 망하지만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섭니다(15~16절). 스물여덟 번째와 스물아홉 번째, 원수의 실패를 기뻐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악인으로 인해 분을 품거나, 등불같이 사라질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17~20절). 서른 번째,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과 이 땅에서의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를 멀리해야 합니다(21~22절).
● 더 깊은 묵상
인생의 고통 속에서 의인과 악인의 모습은 어떻게 다른가요?(16절)
내가 실패를 딛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나 도전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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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
어떤 배우가 팬에게 조언해 준 기사를 읽었습니다. “열일곱 살의 힘듦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인생을 살아갈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힘이 들어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미래의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는 자신도 멘탈이 강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미래의 희망을 보았기 때문에 힘든 순간을 견딜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다음 말을 덧붙였습니다. “지금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을 수 있지만 오늘을 버티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버텨 낸 자에게 많은 복과 행운이 따르는 게 인생입니다. 그러니 죽을 준비가 아니라 복을 받을 준비를 하면 됩니다.” 이 배우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만일 아니라면 세상적인 지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세상 사람들이 붙드는 희망은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확실한 하나님 약속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혼자 올라와 서울역에 도착한 아이 두 명이 있다고 합시다. 한 아이는 찾아갈 곳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 반드시 성공할 거야.”라고 다짐하지만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 다른 아이는 찾아갈 곳의 주소가 있습니다. 그를 도와주고 이끌어 줄 사람이 있습니다. 둘 중 누구에게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 약속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약속하신 분이 신실하시니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이제 희망을 갖고 새롭게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시며 우리 아버지십니다.
수고하고 애쓰는 그리스도인들에게 / 김경진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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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잠언 24장 3~4절
본문에서 집은 '가정, 교회, 국가'같은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방은 공동체 일원인 '가정의 자녀, 교회의 성도, 나라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집은 하나님 말씀을 아는 '지혜'로 건축되고, 말씀을 분별해 순종하는 '명철'이 있을 때 견고해집니다. 또한 방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보배로 채울 때 안전하고 복된 집이 됩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지혜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을 때, 견고하고 아름답게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정답이 아니라 지혜와 분별력이다. - 플로이드 맥클랑
오늘의 기도
하나님, 인생의 거듭된 실패로 두려움이 밀려오지만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길을 걷겠습니다. 모든 이의 마음과 행동을 저울질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겸손하고 진실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 제 삶을 온전히 채워 승리를 선포하게 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380 나의 생명 되신 주)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며 당신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고, 삶으로 실천하면서 소외된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인들이 판치는 세상, 그들의 부와 지식과 명예와 권력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 우리의 가정을 가득 채워 나가기 위해 노력하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악행을 꾀하지 말고, 미련하고 거만한 자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다른 사람의 넘어짐을 즐거워하지 말고, 우리 주변의 소외된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에게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자가 되자
12월12일 청라호수공원에서
‘ 네 생명을 지키시는 분 (12절) ’
세상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고 어떤/ 모양의 집에 사는 냐를 중요하게 여기고 거기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도록 채찍질합니다. 나도 그길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땅 가운데 삶만 본다면 ‘도’가 ‘돈’에 비하여 그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잠시 살다가 사라져 먼지와 흙이 되어 버릴 육신의 허무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해 볼 때
죽음 이후의 삶과 영원을 향한 우리의 열망은 누구에게나 큰 숙제이고 두려운 세계입니다.
결국 어떤 옷을 입은 것보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가 중요하고
어떤 차를 타는 것보다 누구와 동행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것이며
어떤 모양의 집에 사는 것보다
어떻게 굳건한 터 위에 영혼을 세우는 지가
더 큰 문제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죄의 열매를 내는 악하고 교활한 사람(8절)과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마음을 돌이켜(1~2절)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인생을 굳건히 세우고 (10절) 그 통찰력을 주시는 분을 의지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11절)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다시 넘어지지만 생명을 지키시는 분을 경외하고(12절, 21절) 그 지혜와 공의를 바라보는 자는 다시 일어설 것입니다(16절). 오직 구원의 길과 부활의 능력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진노와 준엄한 심판 앞에 구함을 받는 복된 인생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지혜라는 커다란 주제 하에 서른 개의 소주제로 구성된 잠언 중, 마지막 열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입에 악이 있는 사람과 어울려서는 안 됩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지혜와 총명 그리고 지식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환난 날에 낙담하지 말아야 하며, 죽을 위기에 처해있는 자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은 마음을 저울질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은 재앙으로 쓰러지지만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하고, 반역자를 멀리해야 합니다.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 ’지혜는 너무 높아 어리석은 사람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여 사람이 모인 데서 입을 열지 못한다‘라는 말입니다. 고대 서남아시아에서 성문은 재판을 하거나, 중요한 의제를 토론하는 장소입니다. 그런 곳에서 함부로 입을 열면 그의 어리석음이 드러나게 되어있으니, 토의 사안에 대해 지혜가 없으면 입을 다물라는 격언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입을 다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니, 사람 모인 데서 입을 열지 말라‘
’17.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 ’원수가 넘어졌다고 기뻐하지 말고 그가 망했다고 즐거워하지 말라! ‘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곧 다음 문장에서 나옵니다. ‘18.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 여호와께서 그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않으시며 분노를 그에게서 돌이키실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진노가 단순히 원수에게서 돌이키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마음에 기뻐하는 자에게 옮겨지는 것인지 불분명합니다.
공동번역, 현대인의성경에서는 전자를, 새번역과 우리말성경에서는 후자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그 다음 문장에서 풀 수 있습니다. 곧 ’19.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 ’행악자 때문에 분개하지도 말고, 악인을 시기하지도 말아라’라는 말로, 그 까닭은 모든 것이 여호와의 주권적 심판에 달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절대적인 주권에 관한 것으로, 사람은 온전히 그분의 판단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진노가 어디로 돌이킬 것인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7,18,19는 묶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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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 ’재난을 당할 때에 낙심하는 것은, 너의 힘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위기시 연약함을 보이기보다는 도리어 용기를 내어 강하게 서라는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의 날에 낙심하면 즉시 좌절이 찾아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그나마 이길 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위기는 그때부터 시작되어 결국, 자포자기하게 되어 인생이 망가지게 됩니다. 오직 그 낙담 하나로 인해 불거지는 불상사로, 낙담은 낙담을 불러 결국 뭉쳐진 눈덩이와 같이 낙담의 사태를 불러와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기도 합니다. ‘낙담하면 그가 죽기까지 악한 날과 환난 날이 된다‘
지난 9월 수요일 어느 날, 교회 차 사정이 생겨 운전을 부탁받았습니다. 그날 비가 와서 조심히 운전하였지만 결국 사고가 났습니다. 아이들을 조금 더 편한 장소로 내려주기 위해 우회전을 하였는데, 그만 슈퍼 앞 주차된 차를 긁고 나간 것입니다. 오랜만에 큰 차를 운전하므로 크게 돌아야 하는 것을 잠시 잊은 것으로, 제 잘못입니다. 문제는 그 차가 외제 차이고, 한 시간 뒤에는 제가 설교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미 모여있는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이 걱정을 합니다. 속상했습니다. 그러나 순간 이런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은혜가 많을 것 같습니다’ 모두의 마음이 밝아졌습니다. 그날 설교도 잘하고 은혜로운 예배가 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낙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하필이면 외제차냐? 라고 불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튼 원치 않튼 성인이 되면 책임이라는 것이 주어집니다. 가정적 책임, 사회적 책임 그리고 영적인 책임 곧 교회공동체 책임입니다. 어머니는 강합니다. 여러 이유로 설령 홀로 될지라도 어린 자녀들을 위해서 엄마는 약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자녀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도 고난을 피할 수 없을진대, 만약 어머니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역시 자녀들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기업이 어려울지라도 사장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를 믿고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들을 위함입니다. 위기시 무능력해진 자를 누가 도와주고 지원해 줄 수 있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전에 제가 겪은 경우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좌절이란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영원에 비하면 짧은 인생, 촌음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재난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문제는 ‘우리가 그분 앞에 사는 것처럼 살았느냐!’라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분 앞에서 사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망은 불 신앙이요, 낙심은 사치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명은 위대한 업적도, 금자탑도 아닙니다. 오직 그분 앞에서 우리 믿음 대로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질문한 것 같습니다.
세상 악인의 형통은 부러워할 일도 아니지만, 분노할 일도 아닙니다 '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잠24:19)
왜냐하면 분노하실 이도 행한 대로 심판하실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삼키시리니 불이 그들을 소멸하리로다"(시21:9)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잠24:22)
그러므로 악인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잠24:20)
그러므로 악인에 대해서는 분노할 필요도 없고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잠24:1~2)
다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꾸준히 갈 뿐입니다
"의인은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욥17:9)
그렇게 꾸준히 가다보면 힘을 얻고 더 얻어서 나아가 하나님 앞에까지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시84:7)
다만 낙심하지 않기 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3:13)
낙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잠24:10)
그러므로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기 원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12:3)
주께서는 우리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24:16)
일곱 가지 환난이 와도 피하게 하시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의 위협에서 너를 구원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욥5:19~21)
참 지혜를 추구하는 삶(1-9)
잠언은 지혜에 대한 책입니다. 일반적인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지혜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혜자는 지혜의 가치를 대단히 높게 평가합니다. 우리 삶을 집으로 비유한다면, 기초부터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혜로 채워져야 합니다. 지혜를 가진 사람은 강하며, 지혜로 승리하는 삶을 삽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혜를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을 학력 인플레이션 시대라고 말합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정보를 거의 무제한 공급합니다. 이처럼 지식과 정보가 차고 넘치는 시대가 되었지만, 과연 이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지혜롭게 살고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참 지혜가 필요하며, 또한 참 지혜를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 영혼을 풍성히 가꾸어주는 지혜가 내게는 있습니까? 나는 그런 지혜를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지혜 그리고 의인(10-16)
성경은 의인과 지혜자를 동일시합니다. 참 지혜를 가진 사람이 곧 의인이며, 또한 의인이라면 참 지혜를 가진 자여야 합니다. 이는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쉽게 수긍이 갑니다. 악인은 재앙으로 인해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반면, 의인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납니다. 그것은 의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 지혜로 인해 그의 내면의 세계가 굳건하기 때문이며,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성공의 기회보다는 실패의 가능성이 더 커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은 실패할망정, 아주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나는 이러한 지혜를 가진 의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보라(17-22)
원수가 넘어지고 엎드러질 때 즐거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참 지키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게 될 때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부러워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금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게 된다면 이 말씀들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선하신 뜻대로 모든 것을 인도하실 것이기에, 우리는 원수마저도 품을 수 있고,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임할 종말로 인해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만사를 하나님의 눈으로, 종말론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단기적인 유혹을 이길 수 있고, 혼란스러운 상황들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어떻게 보입니까?
▧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는 지혜를 추구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2. 나는 어떤 실패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간구하고 있습니까?
✔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겸손한 마음으로 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1~7절).
마음은 폭력만을 꾀하고, 입술은 문제 일으킬 궁리만 하는 악인들을 부러워하지도, 친구가 될 생각도 하지 말라(1~2절)고 경고합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결국 그들과 같은 길을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 그러므로 지혜와 명철과 지식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보배’로 채워야 합니다(3~4절). 지혜로운 사람이 힘센 자보다 낫고, 지식 있는 사람이 무사보다 낫습니다(5절). 나아가 참된 지혜를 소유한 사람은 그 자체로 능력이 있습니다. 전략과 지략을 가진 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참된 지혜는 미련한 자에게는 너무 높이 있어서 성문 앞 광장에서 할 말이 없도록 합니다(6~7절). 지혜의 가치를 모르는 미련한 자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노력을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을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소유하게 될 때 비로소 인생이 형통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므로 지혜를 얻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지혜와 지식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것이 복된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질그릇과 같은 약한 존재이지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심으로 언제나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음에 실망하지 말고, 지혜가 주는 실제적인 유익을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며 사랑해야 합니다(8~14절).
남을 해 할 음모만을 꾸미는 사악한 자 그리고 미련한 자는 범죄 할 생각만 하고, 거만한 자는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8~9절)이 됩니다. 미련한 사람은 환난을 당하면 그 환난을 이겨내기 위해 아무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쉽게 자포자기함으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킵니다(10절). 모든 상황을 용기 있게 헤쳐 나아가기 위해 지혜를 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육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11절). 결코 그것은 ‘내가 알 바 아니라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12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꿀과 송이 꿀처럼 좋고, 달콤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13절). 결국 지혜를 찾으면, 인생의 앞길이 열리고, 소망이 결코 꺾이지 않을 것(14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스스로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고난 받는 자가 내 자신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고난과 절망과 아픔 가운데에서 애통해 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에 대하여 관심과 사랑의 짐을 짊어져야 할 때이자 곧, 십자가입니다. 오늘 내 자신은 ‘누가 내 이웃인가’라고 하는 좁은 틀 안에서 고민하지 말고, ‘내 자신은 과연 고통을 받고, 절망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를 심도 있게 고민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그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마음에 품고 나아가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힘껏 보듬어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해야 합니다.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콤한..’(시 19:10)지혜의 말씀이 내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그 아픔과 고통이 내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면서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도록 노력을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새롭게 힘주시는 은혜를 신뢰해야 합니다(15~22절).
악한 자들은 의인의 집을 망가뜨리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15절). 그러나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려지느니라...’(16절).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즉, 일곱 번 넘어짐은 완전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악인들의 계획은 외형적으로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의인은 흥하게 되고, 악인은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원수가 넘어진 것에 대하여 즐거워하지 말고, 엎드려질 때에도 기뻐하지 말라(17절)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장래에 소망이 없고, 등불도 곧 꺼질 악인에 대하여 불평하지도, 부러워하지도 말라(18~19절)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않아야(21절)합니다. 그들에게 임할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22절)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아감에도 형통하게 살아가고, 인생에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볼 때, 참으로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내 자신이 깨닫게 되는 것은 믿음 생활을 성실하게 잘 해도 넘어지고,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방의 의인이라고 소개했던 ‘욥’도 인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고난을 당했습니다.
요셉도 모세도 베드로도 그리고 다윗도 믿음의 실패와 말로다 할 수 없는 고난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결국 이들이 다시 회복되고, 일어났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수도 없이 넘어지고, 쓰러져 아파하는 내 자신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 자신이 망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손은 강하십니다. 강하신 손으로 내 자신을 기가막히게 회복시켜 가실 것입니다. 새롭게 힘주셔서 일어설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신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답게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고난 중에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간구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지혜를 사모하며 구하여 지혜의 능력을 매일의 삶 가운데서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잠 24:1~22절)...
1,2,8,9절 :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 악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악한 자라 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에게 미움을 받느니라
악행을 서슴지 않는 자들이 잘 되는 것을 부러워하거나, 그로 인해 분노하지 말고, 그들 곁에서 어떠한 혜택도 누리려고 시도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폭력적인 행동과 무자비한 말로 얻은 것들일 뿐입니다. 사악한 자들의 행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든 소극적으로 동조하든, 그들과 함께 당하는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출처 : 매일성경 5/6월호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비교하지 않아야지요.
비교할 때 나 자신이 초라해집니다.
비교할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지금'에 감사하길 원합니다.
악한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않겠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자와 가까이하여 동조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나 자신이 악행을 저지르지 않도록 지혜를 구합니다.
내 입술을 잘 다스릴 수 있길 원합니다.
거만한 태도와 눈빛을 갖지 않도록 마음 다스리기를 잘 해야겠습니다.
잘못된 수익을 취하지 않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상상 속에서라도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요청합니다.
3,4,13,14절 :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하게 되며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지혜 있는 인생, 지혜 있는 자녀, 지혜 있는 가정과 공동체에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이들에게 귀한 보배로 상징되는 넉넉한 생명과 풍요로운 삶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망치는 이 세상의 인스턴트 지식이 아니라, 영혼을 즐겁게 하고 밝은 미래를 열어주는 송이꿀과 같은 하나님의 지혜로 자녀들을 양육합시다.
출처 : 매일성경 5/6월호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된다고 하는데 이 집은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지혜와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해진다 하는데 말과 행동에 따른 결과라고도 생각합니다.
오직 참되신 말씀만이 그 길을 알려주기에 말씀 안에 늘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을 날마다 받아먹도록 하겠습니다.
그 안에만 소망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5-7절 :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진정으로 강한 자는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전쟁의 승리가 무력보다 지혜로운 모략에 달려 있듯, 신앙의 성패도 지혜를 의지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전술을 설명하는 장소인 '성문'에서 미련한 자에게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듯, 전쟁 같은 우리 삶도 하나님의 지혜인 말씀에만 통솔을 맡겨야 합니다.
출처 : 매일성경 5/6월호
지혜가 없으면 쓰러집니다.
미련하여 곁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없는 삶이 그렇습니다.
말씀 안에 모든 길이 있음을 믿습니다.
말씀 안에서 모든 답을 얻기를 원합니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 악에게 지지 않기를 원합니다.
나의 마음에서부터 미련함을 물리쳐야 하는데 어리석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께 지혜를 구하며 순간순간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기준은 자꾸 바뀐다 해도 변하지 않는 말씀의 기준에 맞추어 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10-12절 :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 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환난을 당한 중에도 이웃의 신음에 귀를 기울이는 힘을 잃지 않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놓인 자들의 곤경에 대해 '나도 여유가 없어서 도울 수 없다'고 핑계한다면, 모든 생각과 행동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이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출처 : 매일성경 5/6월호
낙담할 때가 어찌 없을까요?
깊은 수렁에 빠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을까요?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허덕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쓰러지고 낙심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요?
자신 없습니다.
넘어집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따르겠노라 하면서도 때론 쓰러지고 낙심합니다.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나 다시 힘을 얻게 됨은 주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나를 이기고 힘든 자를 도우라고 말씀하시네요.
나도 힘든데 도우라 하시네요.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도우라 하시다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 함께 치유받는 역사도 있더군요.
내가 약하다고 쓰러져 있기만 하면 더욱 수렁으로 빠질 뿐이더라고요.
마음을 이길 힘은 주님께서 주십니다.
사람을 통하여 위로를 주시기도 합니다.
내가 그 위로의 손길을 기다리듯이 나도 그러한 자를 향할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요청합니다.
15-20절 :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가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의인은 오뚝이처럼 일어서는 자들입니다. 악한 자의 음모와 예기치 않는 공격도 의인의 회복력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원수의 넘어짐을 기뻐하거나 악인의 성공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함께 아파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실패로 내 박탈감을 상쇄하려는 오만한 마음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출처 : 매일성경 5/6월호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입니다.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어렵습니다.
감정이 따라가 주질 않습니다.
나를 힘들게 한 자를 축복하고 사랑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넘어질 때 고소한 맘이 먼저 듭니다.
주님의 마음을 담지 못하여 그러겠지요.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따르고 싶은 말씀만 따르기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넘어짐에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수 십 년 주님을 따른다고 고백할지라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모습이 내 안에 가득합니다.
날마다 죽지 않으면 내 멋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더욱 말씀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의지함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 마음을 닮기를 소원합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일지라도 또 주의 말씀을 담습니다.
오늘도 이기며 나아가는 하루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21-22절 :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와 더불어 사귀지 말라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그 둘의 멸망을 누가 알랴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이 땅에서 왕과 정부를 통해 반역자들을 심판하시고, 최후에는 우리 모든 것을 심판하실 하나님뿐입니다.
출처 : 매일성경 5/6월호
누구를 따라가야 하는가는 명백합니다.
반역자는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거역하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사귀지 않아야 함은 너무도 명백합니다.
오늘을 살면서 내 안에 주님을 멀리하는 반역의 행위를 따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의 말씀이 때로는 무겁게 다가올지라도 따라가길 원합니다.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 그저 맡기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