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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태는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준태 하고는 완전히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근사근한 것이 여자들의 비위를 잘 맞춰주는 스타일이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미모며 여자들의 인기를 얻을 만 하다고 소희는 생각했다.
"영태 씬 키가 얼마나 돼요?"
"키요, 하하하 도둑질 하고 도망가다가 뒤쫓아 오면 으슥한 골목에 가만히 서있으면 전봇대인줄 알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니까요."
"호호호, 농담도 잘하셔. 얼마니까요?"
"겨우 칠십오밖에 안돼요."
"아니 그게 겨우 칠십오면 얼마나 더 커야 하는 거 에요? 우리나라 남자 표준 키가 칠십이라는데."
"한 팔십 정도만 됐어도 멋진 배구선수가 됐을 텐데 모자라서 포기했어요."
"키 커면 싱겁다고 하잖아요. 그만하면 됐어요. 준태 씨가 들으면 서운하겠어요. 준태 씨는 얼마나 되는지 알아요?"
"그까짓 키 가지고 뭐 서운하고 자시고 할 게 있어요. 서운하면 많이 먹고 많이 커면 되지. 준태가 육십오일걸요."
"완전히 세 사람이 대조적이네요. 한 사람은 육십오, 한사람은 칠십오 그리고 문수 씨는?"
"칠십."
"호호호, 참으로 그렇게 고르려고 해도 어렵겠어요. 아니 세 사람 전에부터 친구였어요?"
"아니에요 여기 와서 만난 것이지. 모두 제각각이에요. 출신 고등학교도 틀리고 사는 동네도 틀리고 성격도 틀리고 아무튼 내가 생각해도 좀 색다른 친구들이에요. 그래도 정들고 나니까 통하는 데가 있더라고요. 이제는 눈짓으로도 척하면 알아볼 정도니까요."
"재미있군요."
"소희 씨는 키가 얼만데요? 여자 치고는 상당히 큰 것 같은데"
"저도 여자들 표준 키는 넘어요. 미스코리아 나가려다 만 걸요. 호호호, 그건 농담이고요. 육십삼이에요."
" 미스 코리아 나가도 충분해요. 차라리 공부 뜯어치우고 그 길로 나가는 게 어떻겠어요?"
"전, 그런데 흥미 없어요.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고 봐요. 남들이 가는 길이 좋다고 마냥 따라가다가는 결국 주저앉고 말 거에요."
그때 마당을 가로질러 준태와 문수가 수건을 목에 걸치고 돌아왔다. 준태는 고무신을 댓돌에 세우고는 마루 위로 올라섰다.
"이제 좀 살 것 같다.영태 너는 안 씻니?"
"응, 그래. 씻어야지. 그럼 나도 씻고 올게."
"야야! 부엌에 가서 그것 가지고 와." 문수도 고무신을 댓돌에 세우면서 영태에게 부엌에 가서 무엇을 가져올 것을 명령하듯이 했다.
땅거미가 지고 주위는 겨우 물체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져 이 산에서 소쩍새가 울어주면 저 산에서 대답을 해 주고 있었다. 문수가 마루로 올라서며 소희에게 방으로 들어가자며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소희는 준태가 들어가자 따라서 들어갔다. 소희의 방과 똑 같았다.벽에는 대나무 옷걸이에 바지 하나와 티셔츠 하나 그리고 남방셔츠 하나 달랑 걸려있고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열댓 권의 책들이 어지러이 꽂혀 있었다. 소희는 책들을 훑어보다가 대학입학 예비고사 예상문제집 이라는 책에 눈이 마주쳤다. 아마도 본고사 보다는 예비고사를 우선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태는 이불을 등지고 번듯이 드러누워 있었고 문수는 책상 위에 얹혀있던 책을 집어 들고 한장 한장 건성으로 넘기고 있었다.
"짜식! 이런 것도 읽을 줄 알고 아무튼 재미있는 놈이야."
"뭔데?"
"응, 빙점."
"뭐? 빙점?" 누가 쓴 건데?"
문수는 책표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본 사람이네,미우라 아야꼬. 니 들어봤나?"
"아니, 책 볼 시간이 어디 있나. 아휴! 이 지옥. 빨리 벗어나야 책을 읽든 무엇을 하든 할 것 아냐."
준태는 자금의 심정을 토로해 냈다. 그랬다. 그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의 공통사였다.
소희는 공감대를 느끼며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저 그 책 읽어 봤는데요. 참으로 감명을 많이 받았어요. 그 책에 보면 이러한 대목이 나오거든요. 어느 날 한 동물원의 원장이 초청강연회를 나가는데요, 원장은 각 동물들의 특성과 수명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하죠. 강연이 끝난 후 질문을 받는데, 미우라 여사는'동물이나 생물 중 어느 것이 빨리 죽나요?'하고 물어요. 그때 원장이 대답하기를'호전적이고 성질이 급한 놈, 덩치가 큰 놈들은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동물들은 오래 삽니다. 라고 말하죠. 언제 시간을 내어 한번 읽어 보세요.결코 후회하지 않을 거 에요."
"책 읽는 것도 후회를 하나요?"
문수가 소희의 말에 토를 달고 나섰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책을 읽는데 빼앗긴 시간이 아깝지 않을 거라는 거죠."
그 말을 듣고 문수는 대답대신 다시 책장을 한 장씩 넘겨보고 있었다. 그때 영태가 들어서며 국그릇인 대접 두개와 풋고추며 된장을 내어 놓는 것이었다. 소희는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우리 소희 씨의 환영식을 거행합시다."
영태는 미리 가져다 놓은 비닐봉투며 주전자를 방 가운데로 가져다 놓았다. 비닐봉지를 풀자 빵이며 과자봉지가 쏟아져 나왔다. 영태는 둥근 빵 봉지 하나를 집어 뜯고는 그 기에다 성냥 알 네 개를 꽂았다. 그리고는 성냥을 소희에게 주었다.
"자! 소희 씨! 불을 댕겨요."
소희는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벅차게 달아올랐다. 성냥을 잡은 손이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소희는 성냥을 켜서 빵에 꽂혀있는 성냥 하나 하나에다 불을 붙였다. 성냥은 불을 붙일 때마다 '푸지직' 소리를 내며 유황냄새를 풍겼다. 소희는 그럴 때마다 눈을 질근 감으면서도 환희로 다가와 무척 흥분되었다.
문수가 주전자를 들고 대접에다 막걸리를 가득 따랐다. 그리고는 소희에게 내어 밀었다.
"자! 마셔요. 이것은 여기 우리의 법이에요. 거절은 없습니다. 마시는 것 외에는."
"맞아요, 마셔요 소희 씨. 무조건 두 눈 꼭 감고 마셔버려요. 그리고 낙방의 액을 삼켜버리는 거 에요."
소희는 낙방의 액이라는 말에 훔칠 놀랐다. 혹시 그동안 잊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아니 잊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았다. 이제야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영태가 고맙기 그지없었다.'그래 맞아. 난 낙방의 고배를 마시는 거야. 마셔서 지워버리는 거야.'소희는 속으로 다짐을 하며 문수가 내어 민 술잔을 받아 꿀꺽꿀꺽 마셨다. 막걸리는 목젖을 타고 내려 위에 멈추지 않고 곧장 창자를 타고 내리는 것 같았다.그리곤 금방 머리 위로 치솟아 올랐다. 소희는 잔을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보았다. 손바닥으로 화끈거리는 전율이 느껴졌다.
"아니, 뭐해요? 잔 빨리 넘기지 않고. 이거 숨 넘어 가겠네."
문수가 술잔을 빨리 넘기라는 독촉에 소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5
소희는 문수에게 잔을 내어밀었다. 그리고는 주전자를 들었다. 그러나 주전자는 한손으로 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시 두 손으로 겨우 주전자를 들어 문수가 들고 있는 잔에다 한잔 가득 따라 주었다. 소희는 문수를 시작으로 준태 그 다음 영태 순으로 한잔씩을 따라 주었다. 소희의 술 한 잔을 마신 영태가 입을 열었다.
"아까는 무안스님이 계셔서 우리 서로의 인사가 소원했는데 이제 정식으로 서로를 인사 합시다.우선 나부터, 난 예비고사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는 중이요. 이곳은 우리 어머니가 다니시는 절이라 어머니께서 무안스님께 부탁을 하여 오기는 했지만 워낙이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놈이라 하는 시늉은 하고 있지만 자신은 없어요. 그래도 어쩝니까, 우리 어머니가 저토록 애걸복걸하시니 우리 어머니를 봐서라도 일단 예비고사는 붙고 봐야 되잖겠어요. 사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노래요. 여기 오기 전까지는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곤 했는데 절간이라 기타를 가져가면 안 된다는 어머니의 만류에 할 수 없이 지금 집에서 아마 기타 줄이 썩고 있을 거요."
"그러면 음대를 갈 건가요?" 소희가 물었다.
"그렇다고 음대를 가고 싶지는 않아요. 아직은 어느 대학을 가겠다는 뚜렷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어요. 예비고사도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 어느 대학에 가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인 것 같아서요.혹시라도 예비고사에 합격하면 내 그때 가서 소희 씨한테 자문을 구할 테니 모른 체나 말고 잘 좀 부탁합니다. 내 소개는 이만하고 다음은 문수 네 이야기 해 봐라."
영태는 이야기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주전자를 들어 막걸리를 한 대접 따라서는 불꺽불꺽 마셔댔다.
"나는 촌놈이 겁도 없이 서울S대 법대에 응시를 했었는데 택도 없더만요. 역시 S대는 그냥 얻어진 명성이 아니던데요. 그래도 촌에서 난다 긴다했는데 막상 부딪쳐 보니까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나 난 붙을 때까지 한 번 해볼랍니다. 제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끝까지 해 보는 거죠. 하다하다 안되면 머리 깎고 무안스님 밑에 있을랍니다."
"그 정도 각오면 하늘에 별도 따겠어요."
문수는 영태가 따라주는 막걸리를 한잔 쭈욱 들이키고는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아까 소희 씨가 빙점에 나오는 이야기를 했듯이 난 그 성질이 급해서 탈이랍니다 .아마도 오래 살지는 못할 모양이지요."
"아니 언제 빙점을 다 읽었어요?"
영태는 소희를 쳐다보며 의외라는 듯 넌지시 물어왔다.
"네, 고등학교 이학년 때 밤을 새워 읽은 기억이 나요.그 때만 해도 책을 읽느라 밤을 새는 것은 예사였는데 지금 와서 공부를 하려고 하면 밤을 새우기가 그렇게 어렵네요. 미안해요. 문수 씨 이야기 하는데 끼어들어서."
"괜찮아요, 그래도 그 때 그렇게 책들을 많이 읽어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에요. 나 같은 놈은 하지도 못하는 공부 한답시고 책이라고는 교과서와 참고서 밖에 읽은 것이 없으니 이렇게 메마른 가슴이 아닙니까?"
"그런 걱정은 마세요. 대학에 들어가서 밤낮 주야로 읽으면 되잖아요.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그래도 책이란 읽는 시기에 따라서 다가서는 느낌이 다를 것 같아요."
"듣고 보니 그것은 그런 것 같네요.연령에 따라서 감정이 틀리니까 약간씩 차이는 있을 것 같군요."
"아까 이야기 하다 말았지만 그런데 머리를 깎는다 해도 걱정이더군요."
"왜요?"
"여기 와서 가만히 무안스님을 살펴봤는데 스님의 일과가 무지하게 힘든 것 같아요.무안스님은 자는 시간 외에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아요. 새벽 세시면 일어나서 참선하고 그러고 나면 새벽예불 드리고 공부하고 심지어 저 넓은 밭일이며 논일까지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그런데 나같이 게으르고 성질이 급한 놈이 할 수 있겠어요. 차라리 공부하는 게 났다 싶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체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문수 씨는 두가지중에 하나는 될 거 아니에요. 결국은 공부 쪽으로 가닥이 잡히네요. 스님이 더 어려우니까 당연히 결과는 불 보듯 뻔 하네요."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어쨌던 열심히 히는 데까지 해볼랍니다."
문수는 주전자를 들어 술잔에 술을 한잔 따라 소희에게 내어 밀었다. 소희는 문수가 주는 잔을 안 받을 수 없어서 받아서는 주전자 뚜껑을 열고 삼분의 이 정도를 지우고는 나머지 막걸리를 마셨다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았는데도 주루룩 넘어갔다. 소희는 기분이 묘해왔다.
"다음은 준태 씨 이야기 좀 들어 봅시다."
어느새 소희는 대담해져 있었다.
"나야 뭐 별 할 이야기도 없구만. 시험이야 떨어졌으니까 여기에 온 거고, 나는 돈을 벌어야 되겠어. 내가 잘 되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눈이 몇 개나 되는지 알아. 자그마치 열두 개야. 부모님은 물론이고 밑으로 여동생만 넷이야. 그 졸망졸망한 눈들을 생각하면 어지러워. 명예고 뭐고 간에 돈을 벌어야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적성이 맞지 않아도 돈이 되는 과목을 선택해야겠어. 지난번에는 사회학을 선택했었는데 이번엔 토목공학으로 바꿔서 응시하려고 해."
"알만해요. 우리들 모두가 그만그만하게 살고 있을 거 에요. 뭐 특출하게 좋은 환경을 가진 사람도 없는 것 같고요.저 역시 밑으로 남동생만 둘이에요. 그래서 집에서는 고명딸이라고 조금은 대접을 받습니다만, 이 시대 이 농촌에서 그래봐야 얼마나 다르겠어요. 다행이라면 아버지께서 학문을 깨우친 분이시라 그래도 여자 차별 안하고 공부를 하라고 적극적으로 밀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난 무지하게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부 합니다.전 법학을 공부하고 싶어요. 그래서 정말 억울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해보고 싶어요. 오늘의 이 만남이 결코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값진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술 한 잔씩 따라드릴게요."
소희는 주전자를 들어 영태부터 돌아가며 한잔씩을 따라주었다. 마지막으로 준태가 받아 마시고는 잔을 소희에게 건넸다.
"자! 조금만 받아요. 이럴 때 취해 보지 않으면 언제 취해 보겠어요." 준태는 삼분의 이 정도 되게 막걸리를 따라주었다.
"고마워요.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소희는 준태가 따라준 막걸리를 들이켰다. 소희는 술이라는 게 이렇게 좋은 것인 줄을 몰랐었다. 어느새 서먹하던 분위기를 몇 년 지기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6
소희는 잔뜩 부풀은 가슴이 되어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찌르레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태 방에서 서로들 이야기하고 있을 때는 들리지 않던 밤의 소리가 하나씩 하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안스님이 기거하는 요사채 지붕 위로 성긴 별들이 초롱이 빛을 발하며 밤이슬에 젖어 사각거리며 나리고 있었고 밤 뻐꾸기는 처량하게 울어 외며 짙은 밤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었다. 소희는 방문을 닫고는 문고리를 걸어 잠궜다. 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여 있는 도라지꽃으로 눈길이 닿았다. 소희는 눈을 감아보았다. 해질녘에 본 물결치는 도라지 꽃밭이 선하게 떠올랐다. 하얀 드레스가 바람에 휘날리며 군데군데 보라색 꽃망울이 툭툭 떨어졌다. 소희는 달빛 아래의 도라지 꽃밭을 상상해 보았다. 창창히 부서지는 달빛은 도라지꽃술에 취해 남실거리며 춤을 출 것만 같았다. 달이 뜨면 도라지 꽃밭에 꼭 가보리라 소희는 다짐했다.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 깔고는 소희는 반듯이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낯선 방에서의 첫날밤이 왠지 낯설지 만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옆방이 영태 방 그리고 그 옆방이 문수 방 그리고 또 그 옆방이 준태 방이었다. 소희는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려 보았다. 무뚝뚝하지만 집념이 강해 보이며 책임감이 있어 보이는 준태 그리고 다소 성질이 급하지만 명석한 두뇌에 눈망울에 초점이 유난히 맑은 빛을 발하는 문수 그리고 또 소탈하면서도 음악을 좋아하는 영태 모두들 하나같이 소희의 가슴을 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제껏 남자라고는 모르고 오직 공부에만 전념을 했던 소희는 우연히 찾아온 세 남자를 가슴에 안는 행운 아닌 행운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소희는 밤을 뒤척이다가 찌르레기 소리의 자장가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소희를 깨운 것은 새벽종소리였다. 소희는 부리나케 일어났다. 무안스님의 새벽예불에는 꼭 참석하라는 말씀이 생각나서였다. 소희는 이불을 동여 벽장에 넣고는 칫솔을 찾아 치약과 수건을 가지고 세면장으로 갔다. 여름이었지만 산사의 새벽녘은 서늘하기만 했다. 소희는 양치질을 하고 얼굴을 씻기 위해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기 위해 머리를 들었다. 소희는 그 순간'와'하는 감탄사를 토해냈다. 여명 전의 새벽하늘엔 별들의 장날이었다. 은하수를 사이로 저마다의 몸매를 뽐내며 자랑을 하고 있었다. 소희가 넋이 빠져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데 준태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일찍 일어났네요. 괜찮아요?"
"네, 준태 씨. 잘 잤어요?"
"속 안 쓰려요?"
"글쎄요? 조금 머쓱한 것 같기도 하고."
준태는 바가지로 물을 떠서 쭈욱 들이켰다.
"자! 물 한바가지 마셔 봐요. 그럼, 한결 속이 후련하고 정신이 맑아질 거 에요."
소희는 준태가 주는 물 한바가지를 마셔보았다. 산 위에서 부터 호스를 연결해 내려오는 물은 냉장고에서 막 꺼낸 물보다도 더 차가웠다. 준태 말대로 정말 뱃속이 후련한 게 정신이 맑아 오는 것 같았다.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고 있었어요.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랬군요. 처음에 오면 다 그렇게 낭만에 빠져들죠. 조금만 있어 봐요. 덤덤해 질 테니."
"그럴까요?"
그때 졸린 눈을 억지로 뜨며 문수와 영태가 역시 수건을 목에 걸고 들이닥쳤다. 걸음걸이로 보아 아직도 선잠 중에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것을 보고는 준태가 물을 한 바가지 떠서 손으로 두 사람의 얼굴에 뿌렸다.
"아이 차! 어이! 그만! 그만! 준태!"
문수와 영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물방울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때? 정신이 번쩍 들지. 자! 물부터 한바가지 마셔."
준태가 물 한바가지를 내밀자 뒤에 있던 영태가 불쑥 뛰쳐와 바가지를 잡아 꿀꺽꿀꺽 마셔댔다. 한참을 마셔대던 영태는 다 마신 듯 바가지에 남아 있는 물을 비워버리고는 다시 한바가지 떠서는 문수에게 주었다. 문수는 멋 적은 표정을 지으며 영태가 주는 물을 마셨다.
"어서 가자! 무안스님 법당에 드신다."
준태가 일행을 독촉했다.
소희는 물을 한바가지 떠서 대야에 붓고는 두 손을 오므려 한 움큼 물을 떠서 얼굴을 적셨다. 얼굴이 싸하게 시려왔다. 서너 번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져 왔다. 소희는 방으로 돌아와 머리를 빗어 새앙머리를 했다. 두 갈래로 따서 곱게 묶고는 법당으로 들어섰다. 법당에는 벌써 촛불을 켜고 향을 붙여놓아 향내음이 법당 안을 온통 채우고 있었고 이제 갓 지어올린 부처님의 공양은 김이 모락모락 나며 한 그릇 소복이 담겨 있었다.
"어서 오너라." 무안스님은 두 손을 공손히 합장을 하고 소희를 향해 인사를 했다.
"네, 스님. 잘 주무셨어요?" 소희는 엉겁결에 무안스님과 같이 두 손을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래, 잘 잤구나. 저기 저 방석을 가져다 그 기 앉거라."
소희는 무안스님이 가르치는 곳으로 가서 방석을 하나 가져와서 놓고는 앉으려다 말고 다시 가서 세 개를 더 가져와 나란히 놓았다.
"소희는 마음이 참 곱구나."
무안스님은 소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밖을 내다보며 가사를 걸치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아마 여기에 오니까 그렇게 되나 봐요."
"어디서든 자꾸 그러다 보면 몸에 익는 법이지."
그때 영태를 선두로 문수 준태가 합장을 하며 법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 좋은 밤이었는가?"
세 사람은 동시에'녜'하고 대답을 하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무안스님이 새벽예불을 드리는 동안 소희는 줄곧 두 손을 합장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꿇어앉아 있었다. 옆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니 그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공양주 보살만큼은 연신 절을 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절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다. 소희는 아마도 말만 들은 백팔 배를 한 것이 아닌가, 미루어 짐작했다.
예불이 끝나고 각자들 방으로 돌아와 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다. 소희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소희는'이제 안정을 찾고 밀린 공부를 하자'고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수학책을 들고 책갈피 속에 꽂아둔 표지를 찾아 폈다. 문제를 하나씩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조용한 절간의 맑은 새벽공기는 소희를 삼매에 빠져들게 해주었다.
한참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아침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소희는 기지개를 켜고 몸을 풀고는 방문을 열어 젖혔다. 어느새 밝게 찾아온 아침은 너무나 상쾌했다. 절간의 마당은 맑은 빛을 띠고 있었다. 벌써 무안스님의 손길이 지나간 마당엔 흘린 떡을 그냥 주어먹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법당 앞의 백일홍이 이슬을 머금고 환하게 웃어주며 소희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소희는 자리를 틀고 일어섰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소희는 백일홍이 있는 법당 앞 돌계단으로 가서 백일홍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침 이슬이 촉촉이 젖어 빠알간 꽃빛이 소희의 손에 묻어 나왔다.
문수와 영태 그리고 준태가 아침 공양을 하려고 마당을 가로 질러 가며 소희를 발견하고 인사를 했다.
"그 기서 뭐해요? 공양 하러 갑시다."
영태의 목소리였다.
소희는 얼굴을 돌려 활짝 웃어 보이며 손을 들어 답례를 했다.
"아, 그러다가 소희씨도 백일홍 될까 걱정되는 구만요."
문수가 던진 유머에 말에 소희는 피식 웃어 보였다.
"가요! 밥이나 먹게. 배고프지 않아요?"
준태 다운 인사였다.
"나 이대로 꽃이 되어도 좋으리."
소희는 마당으로 내려서며 그냥 한마디를 던져 보았다.
"그 듣고 보니 무슨 시의 한 구절 같네요. 무슨 시에요?"
영태가 꼬리를 물고 물어 왔다.
"아무런 시도 아니에요. 그냥 나오는 대로 씨부렁거려 본 것뿐이에요. 가요 배고파요."
소희는 앞장서서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7
식당에는 벌써 무안스님이 둥근 식탁 앞에 앉아 계셨다.
"와 이리들 늣노. 아직 배가 안 고픈 모양이제. 그럼 일 좀 할래?"
방으로 들어서던 소희와 영태, 문수 그리고 준태는 슬금슬금 기다시피 하여 상 앞에 가서 앉았다. 소희는 공양주 보살이 부엌문으로 들여보내는 밥과 반찬들을 들어다 날랐다. 그러자 영태가 다가와 같이 거들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국그릇이 들어왔다. 시큼한 내음에 국그릇 안을 들여다 본 소희는 그것이 묵은 김치를 가지고 끓인 김칫국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양주 보살이 들어오며 민망한 듯 한마디를 뱉었다.
"스님이 시원한 김칫국을 끓이라 하시는데 김칫국에는 콩나물이 들어가야 제격인데 콩나물이 없어서 제 맛이 날란지 모르겠네."
"괜찮소, 콩나물이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냥 묵은 김치국만 해도 속이 후련해질 거요. 자! 뭣들 하는가. 드세나."
모두들 무안스님의 사랑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숟가락만 움직이고 있었다. 어젯밤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무라기는커녕 속 쓰릴까 봐 술국까지 끓여 주라고 하시는 무안스님의 깊은 사랑 앞에 네 사람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많이 배우고 싶어들 하지. 그러나 그 배움은 곧바로 시련으로 다가서리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를 안 하거든.사람들은 많이 아는 것만큼 행복하리라 생각들 하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지. 우리가 알아가는 그만큼 불행해 지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려고 하는 것은 살아가는데 대한 편리함을 누리자는 것에서 시작 되었다고 보면 좋을 거야. 이제 세상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네. 모르면 그만큼 사람취급도 받지 못할 날이 다가서고 있다네. 아는 만큼 불행이 비례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배워야 하고 또 배운 것을 더 키워 나가야 하는 숙명적인 귀로에 서 있다고 보네. 그러니 자네들은 그 배운 것을 잘 조화시켜 나가는 안목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네. 이거 공양할 때 길게 늘어놓아서 미안하구만. 그래도 이시간이 아니면 같이 이야기할 시간이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 이해들 하시게."
가만히 듣고 있던 사람들 중에 문수가 스님의 이야기에 수긍한다는 듯 말을 꺼냈다.
"네, 스님. 좋은 말씀 귀담아 들었습니다. 항상 좋은 말씀 우리들에게 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새겨두고 언제라도 꺼내어 적절할 때 사용하려고 합니다. 간혹 새벽예불 때 스님의 이야기들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예불은 안 드리고 다른 생각한다고 나무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안 되는 걸요."
"그래, 문수 말이 맞네. 그까짓 예불이 무슨 대수겠는가. 통하지 않는 예불보다야 통하는 생각이 훨씬 더 효과적이지. 바로 그게 가르침이고 배움이지."
"스님! 그렇게 해석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는 데요."
"하하하, 그런가? 난 자네가 옳은 걸 옳다고 한 것뿐일세."
아침공양의 분위기가 문수의 이야기로 상당히 화기애애하게 돌아와 있었다.
소희는 아침공양을 끝내고 공양주 보살을 도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보살님! 보살님은 예불 때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기도드리나요?"
"뭘 내가 열심히 한다고. 아휴! 몹쓸 놈."
"누구 말입니까? 누가 그렇게 몹쓸 짖을 했는데요?"
공양주 보살은 설거지를 하던 손을 멈추고 허리를 펴고는 허공을 바라다보았다. 아마도 종종 저 허공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그리워하거나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소희는 어젯밤도 또 지금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공양주 보살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들 녀석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예, 죽었다면 밥이라도 한 그릇 떠 놓을 텐데."
"아드님이 몇 살이나 되는 데요?"
"그러니까 올해가 스물셋이 되는구먼. 그놈을 마지막 보고 내가 여기로 올 때가 그놈 나이 열여덟이었거든. 서울 어딘가에 있다고는 하더라만 그곳이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연락이야 하지 않았겠어요. 보살님이 이리로 와버려 연락을 못할 수도 있잖을까요?"
보살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마음만 있으면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쯤 쉽게 알아낼 수가 있을 걸세. 그놈은 클 때부터 망나니였어. 못쓸 짓만 골라서 하다시피 했거든. 동네에서는 내노라 했어.마지막 떠나갈 때도 동네아낙을 겁탈을 했는데 그것이 발각이 난 거야.일찍이 남편을 잃고 계집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는 곱상한 과부였지. 술이 취한 그놈은 그 과부가 잠든 틈을 타서 겁탈을 했는데 아마도 그 과부를 좋아하던 다른 사람이 그 광경을 본 모양이야. 그래서 고함을 지르고 곧바로 동네사람들이 몰려든 거야. 그 바람에 그놈은 줄행랑을 쳤는데 그 후론 아직 얼굴 한번 보지 못했어. 그 일이 있고난 후 보름도 안 되어서 그 색시는 동네를 떠나고 말았지. 그리고 또 나도 여기로 오게 된 거야. 얼굴을 들고 동네에 나다닐 수도 없고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고 싶지가 않았어. 그래서 난 그 색시를 위해 기도를 드린다네. 아니 기도를 드린다고 하기 보다는 대신 속죄를 하는 거지."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그런데 아들이 서울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응, 그것은 걔 이모가 서울 근방 어디 성남이라고 하던가? 그기에 사는데 불쑥 한번 찾아왔더라구만. 찾아와서는 다짜고짜 돈을 좀 달라고 하더래. 저거 이몬들 무슨 돈이 있겠어. 그래도 모처럼 이질이 찾아와서 돈을 좀 달라는데 어떡하겠어. 할 수없이 이웃에서 삼 만원을 빌려서 줬대. 그랬더니 돈을 움켜 받자마자 앉아보지도 않고 가버리더라는 거야. 그 때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서울 영등폰가 하는데 있다고 하더래."
"그래도 아들인데 보고 싶잖으세요?"
"보고 싶다고? 내 속에서 나온 자식이지만 어떻게 그런 자식이 태어났는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심한 벌을 주시는지 모르겠어. 그래서 그 죄 값을 사하려고 공양주를 자청했어. 하루 세끼 부처님께 따스운 공양을 올려 아들놈의 죄를 조금이나마 사할 수 있게 해 주십사 기도드리는 것뿐이야."
소희는 공양주 보살의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에 눈시울이 불거졌다. 그러면서도 한편 소희는 공양주 보살의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눈가에 맺힌 이슬을 보고 느낄 수가 있었다.
"보살님의 그 정성에 아드님도 결국 탄복 할 거 에요. 그러니 너무 상심 마시고 그저 불공이나 드리면서 마음 편하게 사세요."
"그래, 그래야지 별 수 있겠어. 오로지 부처님께 매달리는 수밖에."
"제가 괜한 질문을 했나 봐요?"
"아냐, 괜찮아. 오히려 후련하구먼. 아직 누구한테도 토해보지 못한 것을 토해내고 나니 체증이 다 내려간 것 같아. 소희아가씨라고 했지? 그래, 소희 아가씨는 부모형제는 어떻게 되는 데?"
"네, 보살님. 양부모님 다 계시고요, 밑으로 남동생 둘 있어요."
"그럼 고명딸이구먼. 아휴! 집에서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겠어?"
"그렇지만은 않아요. 고명딸이기는 하지만 워낙이 엄한 부모님이신지라 참 어렵게 컸어요."
"그래도 그런 부모님이 계시니까 이렇게 참하게 컸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혜택을 누릴 수가 있겠어?"
"그것은 저도 그렇게 인정해요. 지금의 우리시대로 봐서는 혜택이라면 혜택일 수 있죠. 어쨌던 앞으로 보살님 신세 많이 질게요."
"신세라니 당치도 않아. 이런 부엌일이나 하는 나를 그래도 이야기 받아 주는 소희 아가씨가 난 정말 부처님 다음 가는 것 같은데."
소희는 공양주 보살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공양주 보살도 소희를 따라 벙긋이 웃었다.
8
소희는 설거지를 끝내고 마당을 가로질러 요사채로 오고 있었다. 그 때 양손에 팔랑개비를 들고 경수가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 경수야!"
"누나! 누나 줄려고 팔랑개비 만들어 왔어요."
소희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어제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아침 일찍 만들어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경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소희 앞에 다가와 들고 있던 보라색 팔랑개비를 소희에게 내어 밀었다.
"그래, 고마워 경수야! 그럼, 누나가 무얼 줄까? 가만 있어봐."
소희는 경수에게 줄 마땅한 선물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 한참을 망설였다 .소희는 경수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 방이 누나 방이에요?"
"응, 그래. 여기가 누나가 공부하는 방이야."
"햐아! 좋다. 그런데요, 누나! 이런데서 공부하면 공부가 잘 되나요?"
"그럼 잘 되지. 조용해서 얼마나 공부가 잘 된다고."
"그럼, 나도 커서 여기서 공부해야지. 어서 커고 싶어요. 어서 커서 이방에 와서 공부하고 싶어요."
"경수야! 공부라는 것은 어디서든 열심히만 하면 되는 거야. 집에서도 잘 할 수가 있어 다만, 하던 공부가 잘 안 되고 할 때 이러한 곳에서 분위기를 바꿔서 해 보는 것이란다. 너도 좀 더 커면 알 수 있을 거야. 가만 있어봐라 우리 경수 무엇을 선물로 줄까? 누나가 가지고 온 게 없어서 말이야. 음-, 그럼 이것은 어때? 이건 누나가 아끼던 것인데."
소희는 예쁘게 생긴 빨간 볼펜을 경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지금 누나가 가진 게 이것밖에 줄 게 없구나. 다음에 좋은 선물 줄게."
"누나! 정말 이것 내가 가져도 되는 거 에요?" 경수는 딸깍딸깍 볼펜을 눌렀다 눌렀다를 되풀이 하며 너무나 좋아하고 있었다.
"그럼, 누나가 준 건데."
"야이! 신난다. 만수한테 자랑해야지."
"경수야! 우리 팔랑개비 돌리려 갈래?"
"정말요?"
"응, 그래. 가자."
소희는 경수를 데리고 산문을 빠져나왔다.
"음, 어디로 갈까? 경수야! 우리 저 위 언덕으로 갈래?"
"네, 누나. 누나 좋을 대로 하세요."
소희와 경수는 팔랑개비를 돌리며 도라지 꽃밭 앞에 까지 달려왔다. 소희는 숨을 활딲거리며 도라지 꽃밭 앞에 주저앉았다. 경수가 뒤따라 와 소희의 옆에 앉았다.
"누나! 힘들어요?"
"응, 굉장히 힘 드는데, 경수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나도 힘 드는데요, 일부러 힘들지 않는 척 하는 거 에요."
소희는 경수의 그 말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엹은 코발트색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넓은 가슴으로 소희를 안아주고 있었다.
"경수야! 너도 누워 봐. 하늘이 너무나 넓고 아름답구나."
소희의 그 말에 경수는 소희의 옆에 바짝 다가오며 스르르 잔디에 누웠다.
"하늘이 저렇게도 높아요? 누나! 저기 저 하늘에도 사람들이 살까요?"
"그럼 살고말고. 사람들이 착한 일만 하다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간다. 그곳에는 말이야 사시사철 꽃도 피고 새도 울고 한단다."
"정말요? 그럼 누나도 죽으면 하늘나라에 가겠네요?"
"어째서 경수는 그렇게 생각하지?"
"누나는 첫째로 예쁘고요. 이 경수한테 착하고요."
"또?"
"음-, 또오, 그냥 그렇게 생각해요."
"호호호, 그런 게 어딨어. 경수 간질어 주어야지."
소희는 경수의 가슴을 간질어 주었고 경수는 몹시 간지러운 듯 자지러지게 웃으며 몸을 비비꼬았다. 소희는 경수를 끌어다 팔베개를 해 주었다.경수는 다소곳이 소희의 팔베개에 누워 그윽한 눈으로 소희를 바라다보았다.
"누나!"
"응, 경수야."
"난 누나가 참 좋아요. 누나는 요?"
"응, 나도 경수가 참 좋아."
"얼 만큼 요?"
"음-,하늘만큼 땅만큼."
"나도 누나가 하늘만큼 땅만큼 좋아요. 누나! 나 매일 누나한테 놀러 와도 되요?"
"그럼, 되지. 그런데 누나는 공부를 해야하거든. 그러니 어제 네가 온 그 시간에 놀러오면 좋겠다. 절간에는 누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공부하고 있거든 그 사람들은 조용한데서 공부를 하려고 이곳 절에 까지 왔는데 우리가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어. 어때? 경수?그럴 수 있겠어?"
경수는 소희를 말똥히 쳐다보다 벌떡 일어나 앉으며 소희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 오늘 저녁때부터 그렇게 해도 되요?"
"좋아, 그렇게 하려무나."
경수가 일어나 도라지 꽃밭으로 가는 것을 보고 소희는 일어나서 도라지 꽃밭을 바라다보았다. 짙은 햇살을 받은 하얀 도라지꽃 물결에 보랏빛 돛을 단 돛단배들이 하얀 물결에 떠밀리고 있었다. 경수는 보라색 도라지꽃을 한 송이 꺾어 와서 소희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누나! 이 도라지꽃 참 이뻐죠?"
"응, 참 이뻐구나. 경수는 이 도라지꽃의 이야기를 알고 있니?"
경수는 대답대신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그럼 내가 도라지꽃 이야기를 해 줄까?"
"네, 누나. 해주세요. 얼른 요."
경수는 어서 해 달라며 소희를 졸라댔다.
"옛날에 도라지라 부르는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는데 이 처녀에게는 어려서 부터 양가 부모가 결정해 높은 약혼자가 있었어. 어느덧 성년이 되어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총각은 공부를 더하고 싶다며 중국으로 떠났대. 그 때는 우리나라보다 중국이라는 나라가 공부할 것들이 더 많았었어. 두 사람은 굉장히 사랑했거든. 그래서 총각은 이 도라지 처녀에게 기다려 달라는 말만을 하고 떠났대. 하지만 한해 두해가 지나도 총각한테서는 아무런 소식이 오지도 않고 돌아오지도 않는 거야. 중국에서 살림을 차렸다는 소문도 있고, 오던 도중 배가 침몰하여 죽었다는 등 소문만 무성했대. 처녀는 언제나 바닷가로 나가서 한없이 서쪽만을 쳐다보며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더랬어. 그러다 세월은 흘러 처녀는 늙어 할머니가 되었지만 바닷가로 나가는 일은 그치지 않았대.결국은 그녀는 죽고 그녀가 죽은 자리에 꽃이 피었는데 바로 이 도라지꽃이야. 그래서 도라지꽃의 꽃말은 '소망'이라고 하기도 하고, '영원한 사랑'이라고 하기도 한단다."
"참 슬퍼요."
"그렇지! 슬프지! 자! 우리 그만 내려가자. 누나는 가서 공부 좀 해야겠어."
"네, 누나 내려가요. 팔랑개비 잘 돌려요."
소희와 경수는 보라색 팔랑개비와 빨간 팔랑개비를 돌리며 산문을 향해 뛰었다.
9
소희는 산문 앞에서 경수와 작별을 하고 준태방을 지나고, 문수 방을 지나고, 영태 방을 지나면서 설핏설핏 옆 눈으로 들어오는 방안의 광경을 들여다보았다. 준태와 문수는 앉은뱅이책상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공부삼매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그러나 영태는 방 한쪽 벽에 포개놓은 이불을 기대고 자는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번듯이 드러누워 있었다. 소희는 사뿐사뿐 발소리를 죽여 맨 끝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살짜기 문을 열고 들어섰다. 팔랑개비를 책상 위 한쪽에 구겨지지 않도록 잘 받쳐 놓았다. 그리고는 가만히 책상 앞에 깍지손을 해서 턱을 고이고 앉아 눈을 감았다. 소희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할 때 즐겨 이런 자세를 취했다. 십 분정도 그러한 자세로 고요히 흐르는 음악을 생각해 내면 어느새 마음은 잔잔히 흐르는 강물이 되어 평온해져 왔다.
소희는 턱을 고였던 깍지 손을 풀고 책을 집어 들어 책장을 넘겼다. 마음이 안정이 될 때는 삼매에 빠져드는 게 소희의 강점이었다. 이제껏 공부를 해오면서 터득한 소희만의 도였다. 두세 시간 정도는 미풍에 흔들리지 않고 삼매를 유지했다.
"소희 씨! 점심 공양하러 가요." 바로 옆방의 영태가 마루에 걸터앉아 소희를 불렀다.
"네, 벌써 점심때에요? 아휴! 무슨 시간이 이렇게 빠르다냐?"
"빠르긴 뭐가 빨라요. 난 시간이 안 가서 환장하겠는데."
소희는 마루로 나와 영태와 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영태 씨는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인기? 인기라. 하기야 이 영태가 떴다 하면 여학생들 치맛자락이 휘휘 휘날렸는데."
"못내 아쉬워하는 것 같아요?"
"아쉬운 것이 아니라 숨통 터지려고 하건만요. 걔는 떡하고 대학생 빼지 달고 다니는데 난, 여기서 재수를 한답시고 드러누워 있어야 하니 이 사나이 영태 가슴이 푹푹 썩어 내려앉지 않고 배기 것소."
"호호호, 행복한 고민이네요 영태 씨!"
"행복한 고민이라니? 뭐가 행복이요?"
"생각해 보세요.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포기하고 공장으로 어디로 생활전선으로 가야만 하는 그들을."
"그렇게 보면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나 아니에요."
"영태 씨! 그것은 영태 씨 자기중심적이라는 생각 안 들어요?"
"아이! 뒤통수야. 이거 말 한마디 잘 못해 가지고 소희 씨한테 호되게 한방 얻어맞네요. 배 고파요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요."
가로질러 가는 마당 위로 붉은 햇살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미친 듯 달려들고 있었다. 식당 앞 댓돌 위에는 하얀 고무신이 두 켤레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문수와 준태는 먼저 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옆에 낯선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손님이 오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희와 영태가 방으로 들어서자 무안스님 곁에 못 보던 낮선 얼굴이 둥근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 자네들 때문에 뱃속에서 난리가 났다네."
"스님! 죄송해요."소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늦게 온 것을 사과했다.
"음, 여기 계시는 처사님은 오늘부터 우리 절에 모든 일을 돌봐주실 분이시라네. 아버지 같이 할아버지 같이 그렇게 배려해 주시게나. 연세도 많고 하니 힘이 부치실 거야. 서로가 마음으로라도 조금씩만 도와주면 큰 힘이 될 걸세."
소희와 영태, 준태 그리고 문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앞으로 처사님을 부를 땐 그냥 강처사 님! 하고 부르면 되네. 그리고 강처사 님! 한 번에 이 사람들 구분하지는 못하겠지만 저기 저 예쁜 아가씨가 안소희고요, 그 다음 옆에 있는 키 큰 젊은이가 박영태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잘생긴 젊은이가 김문수 마지막 처사님 옆에 앉아 있는 젊은이가 강준태 라고 해요. 구분하기 어려우면 키 크기로 구분하면 쉬울 거요."
강처사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떡이며 일행을 쭉 훑어보았다. 점심공양이 끝나갈 무렵해서 짙은 어둠이 깔리고 이윽고 뇌성벽력과 함께 '쏴아'하고 후두둑후두둑 큰 빗줄기가 쏟아졌다. 뇌성이 얼마나 큰지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우르렁 쾅'뇌성벽력은 거듭하고 금방 절간마당은 흙탕물로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지간히 쏟아 붙는구만. 이런 소나기는 여기서도 보기 드물 정돈데."
무안스님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억수로 쏟아지는 소나기를 묵묵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점심공양이 끝나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며 모두들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때였다. 영태가 무엇을 보고 손가락을 가르치며 큰소리로 외쳐댔다.
"저기 좀 봐! 저, 저것 미꾸라지 맞지? 얼레, 저기도 있네. 어, 어, 저기도."
모두들 영태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정말로 그 기에는 커다란 미꾸라지가 꿈틀대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저 미꾸라지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가만히 봐. 빗줄기와 함께 하늘에서 뚝뚝 떨어지잖아."
준태가 손가락을 들어 빗줄기를 가리키며 신이 난 듯 말을 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었다. 손가락만한 미꾸라지들이 빗줄기를 타고 절간 마당에 뚝뚝 떨어지며 아픈 듯 몸을 비비꼬고 있었다. 어느새 절간 마당에는 미꾸라지들이 즐비하게 널려 꿈틀대며 물줄기에 못 이겨 떠내려가는 놈이 있는가 하면 물줄기를 따라 올라 가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벌건 대낮에 뇌성벽력과 함께 미꾸라지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네. 아니지 직접 봤네." 영태의 목소리였다.
"참으로 신기하네 .어째 이런 일이 있지?"
문수 역시 신기해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때 무안스님이 마루로 나오며 일행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간혹 이런 일이 있다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고기들의 습성 때문인 것 같아."
"습성이라니요?"
문수가 무안스님의 말에 의아해 하며 되물었다.
"응, 말하자면 이러한 것이지. 고기들은 새물 즉 비가 와서 씻겨 내려가는 흙탕물을 몹시도 좋아하지. 그리고 고기들은 세찬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습성이 있어. 그러니 오죽이나 좋겠어. 갑자기 좋아하는 물이 세차게 쏟아져 내려오니 살판 만난 거지.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하여 치솟아 오르는 거야. 정확한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미꾸라지가 뛰어오르는 것이 한 오륙 미터는 되는 것 같아.바로 우리 요사채 뒤로 고랑이 있잖은가. 그 고랑을 뛰어오르다가 방향이 조금씩 틀어져 이곳 마당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보네. 어떤가? 내말이 신빙성이 없는가?"
모두들 무안스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것 같다는데 시선이 일치했다.
"결국 너무 좋은 것만 쫒다가 저런 꼴이 된다네. 그러니 중용이 필요한 거야. 항상 적당한 선에서 자기를 관리할 줄 알면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고 견딜 수 있지 않겠나."
소희는 무안스님의 교훈이 너무나 쉽게 가슴에 와 닿았다. 학문을 가르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찾아내는 값진 교훈은 쉽사리 상대방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10
비가 그치자 꿈틀대던 미꾸라지들이 맨땅에 헤엄을 치고 있었다. 무안스님은 대야를 들고 미꾸라지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일행들은 모두들 달려들어 꿈틀대며 물로 가고 싶어 하는 미꾸라지를 주워 담았다. 무안스님은 한마리라도 더 있나 해서 넓은 마당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요사채 뒤에 있는 도랑으로 가서 물에 던져주니 미꾸라지들은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즈음 우리 불자들 사이에 방생법회를 자주 갖는 걸로 아는데 정작 방생이란 이런 것이라네. 잘 살고 있는 고기들을 잡아다 방생한답시고 다른 환경에다 놓아주는 것은 방생이 아니라 살생이라네. 왜 그걸 모르는지 모르겠어. 모두가 눈이 흐려 있어. 잘 살고 있는 친구에게 술 한 잔 사주는 것보다 춥고 굶주리는 친구에게 떡 하나가 더 값진 것임을."
무안스님은 젖은 안개 걷히는 산봉우리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자욱이 흐르는 안개는 스멀스멀 산등성을 휘돌아가며 싱그러운 미소를 남겨두며 떠나가고 있었다.
소나기가 할퀴고 간 산사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소희는 방으로 돌아와 벽을 기대고 방문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맑아 높고 깊은 바다가 되어 있었다. 소희는 벽에 기댄 채 스르르 오수에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를 잤을까? '탁, 탁, 탁, 탁'목탁소리에 소희는 부시시 일어났다. 눈부신 햇살이 소나기가 적시고 간 맑은 마당 위를 성큼 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엷은 잿빛 마사토는 햇살에 반사되어 맑은 가슴을 들어내고 있었다. 무안스님의 낭랑하면서도 묵직한 염불소리가 절간을 맴돌아 안개가 걷어간 산허리를 돌아가며 푸른 숲을 흔들어 대고 있었다.
소희는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품어 냈다. 깍지 손을 하고 머리 위로 올려 좌우로 허리를 젖혀서 굳어 있는 허리를 풀었다. 그리고 머리를 돌리며 목 근육을 풀었다. 한결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깍지 손을 하고 턱을 고였다. 눈을 감고 늘 떠올리는'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떠올려 보았다. 이내 음악은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소희는 공부삼매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소희는 방 앞에서 소희를 부르는 경수의 목소리를 듣고 밖을 내다보았다.
"누나! 공부해요?"
"응, 경수니? 아직 저녁시간 안 됐잖니? 너무 일찍 온 것 아니야?"
"응, 누나."
경수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경수 뒤에 젊은 부인이 한사람 서 있는 것이었다. 소희는 마루로 나갔다. 그러자 그 여인이 소희 앞으로 다가섰다.
"엄마! 이 누나야! 이 누나가 줬단 말이야!"
"저-, 안녕하세요? 저 경수 엄마에요."
"네, 그러세요. 좀 앉으세요."
"네, 다름이 아니라 우리 경수가 비싸게 보이는 볼펜을 가지고 왔기에 혹시나 나쁜 짓을 한 거나 아닌지 해서요."
"아-!그 볼펜 말씀이군요. 그것 제가 준 것 맞아요. 경수가 어떻게나 귀엽고 똑똑한지 모르겠어요. 제가 팔랑개비를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저렇게 예쁜 보라색 팔랑개비를 만들어 왔잖겠어요. 그래서 제가 뭘 줄까 망설이다가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라는 뜻에서 제가 아끼던 볼펜을 주었답니다. 괜히 제가 그것으로 경수의 동심에 큰 상처를 줄 뻔 했네요."
"물론 여태껏 남의 물건을 손대거나 한 적이 없었는데 어제는 예쁜 누나가 주더라면서 고급볼펜을 가져 왔길래 황당했어요. 그래서 바로 찾아오려고 하다가 너무 예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이제서 왔구만요."
"걱정 마세요. 경수는 너무나 똑똑하고 명석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아이에요. 경수야! 너 그 볼펜가지고 공부 열심히 할 거지?"
"네, 누나 열심히 할 게요. 그래가지고 누나같이 대학도 가고 높은 사람 될 거 에요."
"호호호, 우리경수 대단하네. 경수 어머니! 방으로 좀 들어오세요. 옆방에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까 해서요."
경수랑 경수엄마는 소희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게 경수가 만든 필링개비에요. 그런데 여기는 대접할 게 아무것도 없어서 어쩌죠."
"그런 걱정일랑 하지 말아요. 여기 절간에 뭐가 있겠어요. 먹은 거나 진배없으니 그리 아세요."
"그럼, 경수가 몇째?"
"네, 큰 아들이에요. 밑에 남동생 하나 있고."
"그렇군요, 농사를 짓는 집 아이들 같지 않던데요?"
"농사를 조금 지어요. 우리 식량 할 정도로, 경수아빠가 면사무소에 다니시거든요. 그래서 부모님한테 다른 형제들보다 물려받은 논밭이 적어요. 월급이래야 쥐꼬리만 하게 받아오는데 그래도 공무원이라고 적게 주시는데 뭐 어쩌겠어요. 당신들이 그르시겠다는데 자식이 토를 달 수 있나요. 그저 우리 경수하고 제 동생 공부나 시키고 안 굶으면 되겠거니 하고 살아요."
"그러시구나."
경수는 소희와 엄마가 이야기 하는 동안 줄곧 소희의 책상머리에 앉아 책들을 살펴보며 혼자서 책 제목들을 읽어보고 있었다.
"아니, 경수가 벌써 글을 다 읽네요?"
"제가 좀 가르쳤어요. 시골이라 마땅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애들하고 노는 시간이 많거든요."
"경수는 좋겠다, 이렇게 훌륭한 엄마를 두어서."
경수가 배시시 웃으며 소희를 쳐다보았다.
"누나! 나 구구단도 다 외우는데요. 한 번 외어 볼까요?"
"그래 그럼 육이단을 한번 외워 봐."
"육일은 육, 육이 십이, 육삼 십팔, 육사 이십사."
경수는 유창하게 육이단을 줄줄 외웠다.
"그래 참 잘했어. 아휴! 경수 너무 잘한다. 누나가 더 이뻐해 줘야겠는걸."
"정말요! 야! 기분 째진다!"
경수는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렇게도 좋아?"
"그럼요, 난 누나가 참말로 좋단 말이에요."
"애는 그러면 엄마가 섭섭해 하시잖아."
"헤헤헤, 엄마 다음으로요."
경수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엄마에게 살짝 눈인사로 애교를 떨었다. 그러는 경수가 흐뭇한지 경수엄마는 계속 미소만 짖고 있었다.
"자! 경수야, 가자! 누나 이제 공부해야 하거든."
"그럼 나중에 저녁 먹고 오면 돼요?"
"그럼, 되고말고. 누나도 저녁 먹고 나면 휴식시간이거든. 그 때 누나랑 팔랑개비 돌리자."
"저-, 고마워요. 공부하는 사람을 우리 집에 놀러오라고 할 수는 없고 제가 언제 다시 한 번 올게요."
"네 ,경수 어머니. 그렇게 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경수는 엄마의 손을 잡고 깡충 걸음을 하며 싱글벙글하며 산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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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꺼번에 다 올리는 거에요.왜 이렇게 많이 올려요. ㅎㅎ
ㅎㅎㅎ 길어서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요 ㅎㅎ 미안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