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수집하는 사진가 구본창, 공명의 시간을 담다
배소라
[배소라의 다시 들추는 책장] #10. 사진가 구본창의 삶을 담은 유일한 책
\가족 반대로 접었던 미술에의 꿈, 회사원을 거쳐 결국 사진가로
"왜 책이 나오지 않는 거냐" 회사의 독촉 속에 2년을 공들이다
피사체/대상과 공명하며 사진을 찍는 작가의 내면이 마침내 책으로
‘배소라의 다시 들추는 책장’ 코너는 30년 경력의 편집자가 쓰는, 책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 섭외부터 기획, 편집, 제작과 출간 이후 반응에 이르기까지 출판업에 종사하는 기획자만 알 수 있는 숨은 이야기들이 매달 펼쳐진다. 열번째 책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진가 구본창 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생각을 담아 화제가 되었던 《공명의 시간을 담다》이다. 책 작업은 늘 저자와의 총체적이고 전격적인 만남이지만, 특히 구본창 작가와의 작업은 섬세하고 다정한 예술가의 내면을 살피고, 삶의 구체적인 세목들을 만나면서 마침내 그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편집자와 저자가 함께 작업하며 만들어낸 공명(共鳴)의 기록을 따라가본다. [편집자 주]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3월 10일까지 열린 '구본창의 항해' 전시는 구본창 작가의 사진 인생을 중간 정리하는 대규모 전시였다. 개막 전날의 기자간담회 도중 작품 '숨' 시리즈 앞에서 전시에 대해 소개하는 구본창 작가. / 사진=연합뉴스
21세기 컬처 크리에이터! 마땅히 들어가야 할 이름, 구본창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구본창 선생님과의 인연은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컬처그라퍼 편집주간이었던 나는 사장님의 뜻에 따라 3월말경 ‘21세기 컬처 크리에이터 시리즈’를 기획했다. 21세기 대한민국 문화예술계를 움직이는 거장들이 들려주는 ‘인생과 예술’ 멘토링 시리즈, 거장들이 걸어온 예술의 길과 삶에 대한 통찰을 들여다보며 컬처 크리에이터로 걸어가야 할 올바른 방향과 창조적인 영감을 얻는다는 콘셉트였다.
사장님은 건축가 승효상, 사진작가 구본창 선생님을 섭외해서 미팅을 주선할 테니 이 시리즈를 빠르게 추진해달라고 부탁하셨다. 승효상 선생님은 4월에 미팅을 해서 기존 칼럼을 토대로 책을 내기로 했고 덕분에 바로 1권을 스타트할 수 있었다.
이제 구본창 선생님을 설득할 차례였다. 나는 선생님의 작품집과 각종 인터뷰를 비롯해 수많은 자료를 읽었고 그것을 토대로 ‘구본창, 사진으로 세상과 소통하다’라는 가제로 기획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2012년 5월 초 편집자 박현주 과장과 함께 성북동 안그라픽스 본사로 가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구본창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다.
구본창 선생님은 거장답지 않은 소탈함으로 우리를 편하게 대해주셨다. 상냥한 말씨로 다정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굉장히 섬세한 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출력해 간 기획안을 드리고 ‘21세기 컬처 크리에이터 시리즈’ 콘셉트와 함께 선생님의 책에 대한 기획 콘셉트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기획안을 보며 우리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선생님께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기획안을 보니 나에 대해서 조사를 많이 했네요. 하하. 구성과 배치는 다시 고려해야겠지만 전체 흐름은 괜찮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사진집이 아니잖아요. 텍스트 분량이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할까요? 어떻게 써야 할지, 글을 쓸 시간이 있을지 전혀 감이 안 잡히네요.”
“집필하시는 걸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전체 구성안과 세부 목차를 확정하신 뒤에 그 내용에 대해 인터뷰한다 생각하고 말로 풀어주시면 그 내용을 녹취해서 초고를 만들겠습니다. 초고가 나오면 선생님께서 그걸 원하시는 방향에 맞춰 수정해주시면 어떨까요?”
“원고를 다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은 덜 수 있겠네요. 그럼 그 작업을 누가 하지요?”
“저희가 작가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동안 선생님께서는 목차를 어떻게 수정하실지 생각해봐주세요. 수정 목차가 정해지고 작가가 확정되면 후속 미팅을 하시지요.”
다행히 선생님은 우리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여주셔서 미팅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나는 기획안을 선생님께 메일로 보내놓고 적당한 작가를 물색했다.
구본창의 항해' 전시는 관객의 사랑을 많이 받은 전시 중 하나로 남았다. 구본창을 대표하는 연작 중 하나인 '백자' 중 달항아리 작품들 앞에서 전시 풍경을 사진에 담고 있는 관객들. / 사진=연합뉴스
시간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작가
사진과 예술에도 조예가 있고 경험이 있는 구성작가가 필요했다. 베테랑 작가 한 분을 생각했으나 아쉽게도 일정이 맞지 않았던 터에 친한 번역자 선생님이 프리랜서로 콘텐츠 기획과 글 쓰는 일을 하는 지인을 추천해주었다. 나도 그녀와 몇 번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했던 터라 연락을 했더니 구본창 작가님 일이라면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지적이고 예술적 소양이 있었지만 사실 나는 그녀와 작업을 해본 적이 없었다. 머지않아 서둘렀던 내 선택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났다.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른 뒤 선생님은 수정한 목차를 보내오셨고, 우리는 그것을 검토해서 작가에게 질문지를 만들도록 했다. 그녀가 만들어온 질문지가 다소 부족한 느낌이 들었지만 ‘첫술에 배부르랴’ 싶은 생각에 나와 박 과장이 수정 보완한 뒤 선생님께 보내고 드디어 7월에 첫 인터뷰 날짜를 잡았다. 선생님은 낙원동의 오래된 주상복합 아파트에 있는 사무실로 오라고 주소를 알려주셨고, 첫 인터뷰는 나와 박 과장, 작가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선생님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수집하는 분이었다. 누구에게는 하찮게 느껴질 수 있는 오래되고 사소한 물건들이 선생님의 컬렉션을 채우고 있었고, 선생님은 그것이 무엇인지 다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추억의 물건들과 유학시절의 습작과 드로잉, 각종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선생님 사무실은 잡동사니로 가득한 보물 창고였다.
선생님은 내성적이어서 친구도 없이 혼자 물건을 모으고 관찰하던 어린 시절 이야기, 미술을 좋아했지만 부모님의 뜻에 따라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했고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결국 그만두게 된 이야기, 작은 회사의 독일 주재원으로 출국해 낮에는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공부를 하다가 결국 사진을 전공하게 된 이야기 등 1부 ‘나는 누구인가’에 해당하는 내용의 대부분을 풀어놓으셨다. 그날의 인터뷰에서 나는 선생님의 진면목을 발견했다.
영국 타악기 연주자 이블린 글레니는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면서 "어렸을 적 들었던 기억 속의 음을 찾는 것"이라 말했다. 구본창 작가는 그 말을 인용하며 사진가의 일 역시 어려서 경험한 시각적 영상을 재확인하는 작업일지 모른다고 술회했다. / 사진=《공명의 시간을 담다》 미리보기 중, 알라딘
구성작가는 교체되고 시간은 흘러가고
3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는 깊이 있었고 흥미로웠다. 그 내용을 작가가 녹취했고 풀어서 초안을 만들기로 하고 헤어졌다. 작가는 우리에게 그날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한 샘플 2꼭지를 보냈다. 원고를 받아본 우리는 당황했다. 선생님의 어휘와 표현력은 누구보다 풍성했는데 그 원고는 그것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차마 그대로 보낼 수는 없어서 손을 좀 봐서 선생님께 샘플원고를 보내고 작가에게도 이런 방식으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선생님은 오케이를 하셨고 지난 번 인터뷰 내용을 마저 담아서 초안을 보내달라고 하셨다. 고비는 넘겼지만 불씨는 남아 있었고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작가는 시간을 끌다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초고를 우리에게 보여주지도 않고 선생님과 우리 앞으로 같이 보냈다. A4로 20장 가까이 되는 그 원고는 샘플 초고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나와 박 과장은 사색이 되었고 다음날 선생님으로부터 미팅을 요청하는 메일이 왔다. 우리는 낙원동 사무실에서 다시 마주앉았다.
“작가가 사용하는 표현이나 어휘, 문체가 내 스타일과 너무 달라서 내 글 같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작가분 작업은 중단시키고 박 과장이 진행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현재 들어온 원고 두 편 정도를 수정해서 다시 보내드릴 테니 판단해 주세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작가에게 연락해 양해를 구하고 현재까지 작업한 원고료와 인터뷰 등 수고료를 산정해서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다시 리라이팅에 들어갔다. 박과장이 1차로 정리하고 내가 피드백해서 수정한 원고 2편을 선생님께 보내고 우리는 가슴을 졸였다. 다행히 선생님의 오케이를 받아냈다.
이제 진행을 하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문제는 박 과장이 작가 역할을 할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녹음파일을 텍스트로 변환해주는 소프트웨어가 있지만 당시에는 보이스레코더로 녹음을 하면서 노트북으로 주요 내용을 받아 적고, 이후 원고를 정리하다가 내용이 막힐 때면 녹음파일을 다시 확인하는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 했다. 박 과장이 다른 책 편집 작업에서 손을 놓고 이 일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생님이 너무 바쁘신 것도 문제였다. 해외 일정들과 국내 사진전 기획 일정이 갑자기 생기면서 좀처럼 인터뷰할 시간을 내지 못하셨다. 그렇게 2012년이 지나 2013년이 되었고 선생님은 회갑을 맞이했다.
《공명의 시간을 담다》의 본문 첫 페이지. 말굽자석을 통해 배운 공명에 대해 이야기하며 책을 시작하고 있다. / 사진=《공명의 시간을 담다》 미리보기 중, 알라딘
사진작가와의 책 작업이 주는 어려움
2013년 3월 구본창 선생님은 회갑을 앞두고 류가헌 갤러리에서 ‘행복한 기억’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전시장에는 선생님이 선후배 작가들과 교환한 사진, 전시회 포스터,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와 그림엽서, 심지어 전자메일 인쇄물까지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사실 우리는 선생님의 회갑 직전에 책을 내서 출판기념회도 하고 전시회에서 책을 홍보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꽃다발과 초콜릿을 사들고 전시회 오프닝에 류가헌을 찾은 우리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다행히 선생님은 오랜만에 보는 우리를 반기며 전시회가 끝나는 대로 다시 인터뷰를 시작해서 올해는 어떻게든 책을 내보자고 말씀하셨다.
전시회가 끝나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선생님은 분당에 있는 자택으로 우리를 초대해주셨다. 단독주택의 한 층 전체가 갤러리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선생님의 일생을 관통해온 다양한 작품과 물건이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2차 인터뷰를 진행했다.
2013년 봄과 여름에 걸쳐 인터뷰는 마무리되었고 가을부터 박 과장은 녹취를 풀어 초고를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다. 초고가 한 편 완성되면 선생님께 보내 선생님이 원고를 손보는 방식이었다. 본문 목차는 기획안과 비슷하지만 파트를 다 해체해서 개별 에세이 느낌으로 구성했다. 선생님의 뜻에 따라 1부에 해당하는 어린 시절과 유학시절, 사진작가 데뷔 초기까지는 시간 순서로 갔지만 나머지는 주제별로 재구성했다. 우리가 감탄할 만큼 기대 이상으로 선생님의 글이 좋았고 사진과 어우러져 훌륭한 책이 되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문제는 속도였다. 박 과장도 선생님도 너무 바쁜 상황에서 작업은 너무 더디게 진행되었고 사장님은 도대체 책이 언제 나오느냐고 월간 회의 때마다 채근을 하셨다. 그렇게 힘든 가을과 겨울을 맞이하며 2013년 마침내 원고가 완성되었다.
2014년 초 편집 디자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만큼이나 엄청나게 꼼꼼한 검토로 편집자와 디자이너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최고의 사진작가이자 전시기획자인 저자와 일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었다. 예상했던 바지만 원고에 맞는 사진을 골라내고 본문과 표지 디자인을 진행하는 일은 평소보다 훨씬 많은 품과 시간이 들었다. 모던하면서도 여백이 있고 하나의 서체를 베리에이션해서 쓴 본문 디자인과 달항아리 연작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핑크색과 바탕의 표지 재킷과 담쟁이 문양을 바탕에 깐 표지가 결정되었다. 본문과 표지 모두 선생님이 흡족해하시자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쇄 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본문에 수록된 사진들이 다 전시회 작품들이기에 선생님은 전시회 도록 수준으로 컬러를 맞추기 원하셨다. 거의 온종일 인쇄소에서 본문 감리를 보았지만 서너 장 정도 사진은 원하던 색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받으신 선생님은 아쉬워하며 다음 쇄에서 꼭 수정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2쇄 때도 감리를 보러가야 할 상황이었지만 큰 문제 없이 책이 나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공명의 시간을 담다: 시간을 수집하는 사진가》, 구본창 지음, 안그라픽스, 201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