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잠을 깨워라>
자산서원(紫山書院)과 우득록(愚得錄) 목판(木版)
“내심에 아름다운 덕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말함에 신중히 하여 함부로 외부에 발설하지 말고, 겸양하는 마음으로 그 미덕의 성정을 키워 총명함을 자처하지 않고 비록 사물의 이치를 변별하여 알아챔이 있을지라도 그 알아챔을 자의로 이용하지 말고 사물의 이치를 알아도 그 아는 바를 자의로 이용하지 아니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득록은 조선 중기 호남사림의 한 봉우리를 이루었던 곤재 정개청(困齋 鄭介淸, 1529~1590)의 문집으로 수차에 걸친 당화를 입으면서도 어렵게 보존된 귀중한 자료이다. 정개청의 자는 의백, 호는 곤재, 중종 24년(1529년) 나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웠고 홀로 절에 들어가 유학, 천문지리, 약학, 산수, 역학 등을 널리 공부하여 깊은 경지를 체득했다.
![Image_View](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woodkorea.co.kr%2FAdmin%2FPhoto%2F200701%2FBG%2F24-1.jpg)
이후 41세에 지금의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마을에 윤암정사를 짓고 학자들과 교류하며 후학들을 길렀다. 그의 호 곤재는 ‘곤란함으로 지은 집’이다. 곧 그에게 있어 학문과 삶이란 역경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닦아가는 의지실현의 경로이자 거처였던 셈이다. 문집 제목인 ‘우득록’ 또한 ‘어리석게 얻는다’는 뜻이니 그런 그의 의지를 짐작케 한다. 그는 우득록의 첫머리에서 ‘겸허’를 위와 같이 논한다.
1589년(선조2년) 정여립의 모반사건(기축옥사)이 일어났다. 관군에 쫓긴 정여립은 전북 진안의 죽도로 도망해 자결했다고 전해졌다. 무수한 소문과 폭력과 광기만이 휩쓸고 지나갈 뿐 앞서 가버린 망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역모에 연루된 것으로 지목된 이들은 반역의 주모자도 없이, 변호해 줄 이들도 없이 고문 속에서 죽어갔다. 인구 5백만의 조선에서 1천여 명이 죽었다.
전쟁과 다름없는 피의 살육전이요, 마녀사냥이었다. 그 와중에 ‘동방의 진유(眞儒)로 이황(李滉)에 버금간다’는 평을 들었던 함평의 대학자 곤재마저 살육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 모반사건을 통해 서인들이 정국의 주도권을 쥐어 동인들이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으나 그는 정작 동서의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았던 은둔의 학자였을 뿐이었다.
굴곡진 운명은 사후에도 그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사후 26년이 지난 1616년(광해군 8년)에야 역적의 누명을 벗고, 그의 사우(祠宇)가 함평에 세워졌으나 당쟁의 소용돌이는 지속되어 훼철과 복설이 반복되었다. 1616년에 건립된 사우는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이르기까지 무려 5차례의 훼철을 당했으며 1988년에 복원되기까지 6번 건립되는 곡절을 거치게 되었다.
시간의 경과와 허술한 관리로 손상된 목판과 서원 건물의 수리를 맡아 설맞이 새해 다짐을 해봅니다. 그간 글쓰기의 대상이 주로 긴 세월을 차폐된 환경에서 살아남았거나, 또는 견디어와 남겨진 목재로 만들어진 물건들에 관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관심과 소양입니다. 신문이 허락하는 지면이 주어질 때까지의 한정된 시간만큼임은 물론입니다.
정해진 시간에 대지 못하는 일이 태반인 일상이 여기에서라고 다를 바 없어서 신문 만드는 분들에게 늘 미안하고, 무엇보다 소통하지 못하는 글이 수년째 지면을 점거한 것에 대하여도 독자 분들께도 송구합니다. 급기야 지난해 십이월에는 그남둥의 글도 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었지요. 가친의 노환이 게으른 아들에게 변명거리를 주셨습니다. 늦게나마 새해인사 올립니다. 몸도 마음도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목재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