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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쉼터 스크랩 한국의 美_ 사랑
ysoo 추천 0 조회 45 16.05.11 23: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가정_박목월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 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 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골목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 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한국의 美_사랑


우리 옛 선조들은 사랑을 ‘아끼고 위하여 정성과 힘을 다하는 마음’ 이라 하여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아끼고 귀히 여기는 일을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징표라고 믿었습니다.


<GOLD&WISE>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옛 선조들의 사랑문화를 엿보고, 모든 것의 으뜸이요,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이 되는 ‘사랑’의 참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보았습니다.

KB고객 여러분, 사랑으로 충만한 행복한 5월 되십시오.


에디터 조민진 캘리그래피 강병인

포토그래퍼 김재이 어시스턴트 이승헌 스타일리스트 양은숙 어시스턴트 김소혜, 유민영
소품협찬 표지에 도자기 나비ㆍ도자기 그릇(고운솜씨, 031-889-8678)





별것 아닌 사랑, 별것인 사랑.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사랑이 횡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얼굴 한 번 못 본 채 덜렁 혼례를 치르고서야 서로를 대면하고, 그렇게 맺은 부부라는 인연으로 평생을 살아
간다. 묘한 것은 그럼에도 삶이 고달팠건 괜찮았건 도중 파탄은 거의 없이 대부분 해로했다.
그들은 그냥 살았던 것일까? 그저 살아내기 위해서, 사회적 굴레 때문에 헤어지지 못해서?
그래서 우리는 한(恨)의 근원 중 하나가 그런 혼인 제도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그네들의 삶이 가여웠다 무심히 여길 즈음, 문득문득 두터운 먼지 속에 잠들어 있던 낡은 책장 속에서, 간혹은 캄캄한 땅속 주검 곁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며 애잔했던 속내를 들려주는데, 아뿔싸! 서러워 눈물 지으며 한만 쌓아갔을 것 같은 그네들은 너무도 애틋하고 절절하게 사랑하고 잊지 못해 했다네.


도무지 알 수 없는 마음이고 사랑이지 않은가. 하루라도 안 보면 눈이 짓무를 것 같고, 목소리나마 듣지 않으면 심장이 멎을 것 같아 전화기라도 붙잡고 늘어지다가, 만나면 결코 떨어지지 않을 듯 서로 얼싸안고….

그런데도 어느새 그 불같던 사랑은 시들해지고, 때로는 미움을 넘어 원수가 되어 평생을 증오하며 스스로를 갉아먹기도 하는 게 우리네 사랑이니 말이다.
고등학생 시절 징그러운 국어 선생님을 만났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 하나를 선택해 사설 전부를 베껴오라니. 처음에는 한자 가득한 사설을 베끼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쯤 지나자 느긋하게 신문 전면을 다 읽게 되는 여유까지 생겼다. 그때, 일주일이 멀다하고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의 기사를 읽으며 사랑은 참 모진 것이로구나, 겁먹었다.


이제는 제법 나이를 먹어 인생을 관조할 수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개뿔! 

여전히 아쉬움에 시린 가슴을 한동안 달래지 못해 혼자 술잔을 기울이는 날이 있는가 하면, 무언가에 대한 설렘을 들키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맥없이 들켜 민망스러운 때도 있다.

에구, 언제나 철들려나….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나를 도무지 철들지 못하게 하는 건 오직 하나인 듯싶다. 갖고 싶은 욕망이야 그럭저럭 체념으로 억누를 수 있고, 후회나 부끄러움도 도리질 한 번 치고 질끈 눈감아 외면할 수 있지만, 간절한 마음만은 어떻게 되지를 않는다.


사랑, 그게 무에 그리 대단한 별거라고. 아니다. 생각해보면 사랑이야말로 별거였다.

하지만 화드득 타오르는 정념은 있었던지 모르겠다. 아마 사랑이란 이름으로 어물쩍 타협한 적도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느리게, 오래 기다리는, 집착하지 않는 지켜가려는 사랑은… 감히 자신할 수 없다.


어쩌면 말도 안 된다 여긴 그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별것도 아닌 ‘사랑’, 그 언어의 유혹에 눈멀지 않고 사랑의 본디인 사람을 바라보고, 믿으며 별것인 사랑으로 만들어간. 정념의 순간에는 불태우고, 냉담의 시간에는 미워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설레고 미더웠던 순간을 지켜가려는 그 의리가 만들어낸 별것인 사랑.


눈알이 팽팽 돌아가는 바쁜 세상이니 그런 기다림이나 의리는 이제 영영 멀어져간 것일까. 그래도 불꽃 같고 미칠 것 같은 사랑이라면 목숨 하나쯤은 담보로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언제부터인가 사랑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보다는 해코지하고 죽였다는 이야기만 들려온다. 미친! 그게 무슨 사랑인가. 차라리 제가 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사랑하는 이를 아프게 한단 말인가.

하긴, 제 두 눈 밝혀 제대로 찾을 수 있게 된 이 좋은 세상에서도, 결국은 계산기두드려 연(緣) 맺기에 환장들이니. 더구나 인연을 무슨 신분 상승의 엘리베이터쯤으로 여기는 이들까지 널렸으니 그게 짝짓기지 무슨!


그래도 어쩌다 보이는, 별것인 사랑을 만들어가는 이들 덕에 세상이 아직은 멀쩡한 듯한데….

그래, 언젠간 그런 사랑이 돌아오겠지, 내게도, 모두에게도.


글 김정현(소설가)



조영석 ‘명나라 화가 당인의 화의를 따른 어선도’(31.3×43.4cm, 조선 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뱃머리에 앉아 그물 손질을 하는 남편과 담소를 나누며 일을 돕는 아내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아기…. 고기잡이를 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어부 일가에게 사랑하는 가족은 존재만으로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되었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5월이다. 그간 전하지 못한 사랑을 전하기에는 5월만큼 좋은 핑계가 없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그리고 부부의 날까지.
애써 날짜까지 정해놓고 사랑을 전하라 하니 마음 한 번 크게 먹고 사랑을 말하자.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참 고마운 핑계다.



사랑을 묻다


사랑에 대한 책을 읽고,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속삭이는 하루, 또 하루. 도대체 사랑은 무엇이기에 우리의 곁을 이리도 맴도는 걸까. 사랑이라는 명사의 뜻풀이는 무려 네 가지다.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열렬히 좋아하는 상대’.
이런 마음, 이런 사랑, 그대는 누구에게 가지고 있나.


한국인은 ‘사랑한다’는 말에 유난히 수줍다. 요즘 젊은 연인들이야 하루에도 백번 천번씩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 땅에 살아온 우리네 선조는 ‘사랑한다’는 단 한마디 건네는 데도 입 떼기를 조심스러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라는 적극적인 말 대신 ‘정’이라는 은근한 표현법을 선호했다.

정의 대상은 무한대다. 어른을 공경하고 섬기는 것, 아랫사람을 귀여워하고 예뻐하는 것, 보살피고 돌보고 베푸는 시혜, 그리고 소유욕과 욕정이 엉킨 충동까지 ‘정’에 속한다.

한국인의 몸에 녹아 있는 정서에서 사랑은 ‘정(情)’과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게 ‘정’을 준다는 것은 곧 마음을 주는 것이자 사랑을 주는 것과 같다. 결국 한국인은 성적인 것보다는 감정적인 마음을 사랑이라고 믿어온 것이다.


순수한 한글로는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괴다’, ‘그리워하다’, ‘마음을 주다’, ‘못 잊어하다’, ‘귀여워하다’, ‘예뻐하다’, ‘고와하다’, ‘섬기다’, 그리고 ‘모시다’까지 사랑의 동의어로 제시할 수있는데, 남녀 간의 사랑 말고도 상당수 낱말이 나이나 신분의 상하 관계를 넘나드는 한국식 사랑임을 알 수 있다.

 한국식 사랑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조선 신화에서 시작된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베풂의 마음이 담긴 ‘홍익인간’이 바로 천신과 군주를 겸한 사람을 통해 실천될 ‘하늘의 뜻’이자 ‘하늘의 사랑’인 것이다. 이만큼 큰 사랑이 또 어디 있을까.


이런 사랑이 역사를 걷고 또 걸어 삼국 시대에 이르면 다양한 사랑의 관념과 만나게 된다.
<삼국사기>에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먼저 ‘도미’의 아내 이야기를 보자.


백제 때 얼굴이 아름답고 정숙한 아내 덕분에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사는 도미라는 양민이 있었다. 아내의 미모가 어찌나 출중했는지 개루왕에게까지 그 소문이 들어갔다. 왕은 그 사랑을 시험하고 여인을 취하고자 하지만, 도미의 아내는 여종을 대신 들여보내 위기를 모면한다.

이에 크게 노한 왕은 도미의 두 눈을 뽑아버리고 작은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 보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아내를 음행하려 하나, 여인은 절개를 굽히지 않으려 월경으로 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에 오겠다는 기지를 발휘해 그 자리를 모면하고는 그대로 강어귀로 도망친다. 그러나 배가 없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던 때, 물결을 따라 홀연히 배 한 척이 여인 앞에 멈춰 선다.

그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도착하니 남편이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살고 있었다. 이어지는 눈물의 해후(邂逅). 그 후로 둘은 한 배에 올라 고구려에 이르러 오래도록 함께 살았다는 애잔한 사랑 이야기다. 도미의 아내 이야기 말고도 <삼국사기>에는 변방으로 군역을 나간 약혼자 ‘가실’을 6년간 기다린 끝에 가연을 맺는 ‘설녀’와 적국의 왕자를 사랑한 낙랑 공주가 사랑의 역사를 이어주어 후대에 <춘향전>과 <운영전> 등 문학 작품으로 계승된다.


공경과 우러름을 기본으로 한 <삼국유사> 속 사랑 이야기도 있다.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아버지에게 허벅지 살을 베어 봉양한 아들 이야기 ‘향득사지 할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 과 배곯는 어머니를 보다 못해 어린 자식을 생매장하려다가 석종(石鐘)을 얻었다는 ‘손순매아(孫順埋兒)’는 효를 근간으로 한 사랑 이야기다. 그러나 요즘은 이런 참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다. 사랑보다는 실리가 우선이고 포용보다 배척이 앞선다.


학교에선 교실마다 일진들이 권력의 탑을 쌓고 왕따나 괴롭힘을 당하는데도 선생은 모르거나 또는 모른 척한다. 학생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옛말을 들으면 코웃음을 친다.

학생의 부모도 선생을 믿지 않아 교실에서 교사를 폭행한다.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할 아버지가 친딸을 성폭행하기도 하고, 반대로 자식이 부모에게 칼을 겨누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사랑이 부재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사랑이 그리운 5월, 잠시 선조의 사랑법을 한수 배워봄은 어떨까.


부모와 자식 간의 조건 없는 사랑


자식이 부모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무엇일까.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나온 제주판관 ‘김과’의 부모 사랑은 벼슬자리까지 마다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느라 이미 일흔다섯 살이나 된 어머니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는데, 어찌 또 어머니를 두고 관직
에 나가겠느냐는 것이다. 그의 절절한 상소문은 임금의 마음을 울렸을까.


고려 시대에 성리학을 들여온 회헌 안향 선생의 19대손인 안정구가 남긴 <재향지(梓鄕誌)>에도 효 사상이 희미해지는 세태에 일침을 가하는 이야기가 있다.


"안응일은 문성공의 11대손으로 어버이를 섬기면서 효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곁에 모시면서 허리띠를 풀지 않았고 부모가 잠든 뒤에 곁에 누웠다. 낚시와 사냥으로 맛있는 반찬을 올리고, 옷과 이불이 더러워지면 손수 세탁했으며, 아버지가 병들자 변을 맛보아 증세를 징험했다. 상을 당하여서는 몹시 늙고 쇠약한 몸으로 집상(執喪)에 예를 다하여 상복의 띠를 벗지 않았고, 푸성귀와 과일을 입에 대지 않아 몸이 몹시 여위어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부모의 변까지 맛보며 행여 무슨 병이라도 나지 않았을까 가늠했다니, 참으로 온몸과 온마음을 다한 효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온,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봉양했다는 ‘향득’의 이야기는 조선 시대에도 맥을 그대로 이어온다. <성조실록> 성조 21년 6월 20일자에 나오는 기록이다.


"박기는 영산 사람인데, 그 어미 공씨가 광질에 걸려 거의 죽게 된 지 9년이 되었는데 온갖 약을 써도 효험이 없으므로, 스스로 왼쪽 무릎 위의 살을 베어 여러 가지 양념을 하고 간을 맞춘 국인 화갱(和羹)을 만들어 바쳐 어미의 목숨을 잇게 함으로써 오늘에 이르도록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현대로 넘어와서는 1921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이와 비슷한 사례가 실렸다. ‘세상에 드문 효부, 무명지를 끊어서 시모 목숨을 구해’라는 제목의 기사다.

1924년 1월 5일자에는 ‘편모를 위하여 열두 살 먹은 어린아이가 손가락 잘라’,

같은 해 11월 12일자에는 ‘정평군 효부, 살을 베어 병 걸린 시모에게 먹였다고’라는 글귀도 눈에 띈다.

 같은 신문 1938년 12월 28일 자에는 어린 소녀의 살신성인이 상세히 실려 있다.


"16세 소녀로 부친의 임종에 단지 수혈한 일편단심 갸륵한 소녀의 미담이 숨어 있다가 이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소녀는 해남군 현산면 조산리 고 추수협 씨 장녀 추묘례로서, 그 부친 추씨가 작년 10월부터 중병에 신음하게 되자 딸 묘례는 불철주야로 간호를 해오던 중 지난 2월에 이르러 병세는 극도로 악화되어 드디어 절명하려는 찰나 양편 손가락을 아낌없이 잘라서 그 부친의 입에다 주입시켰는데 그 보답인지 부친 추씨는 즉시 소생하여 5일간 생명을 유지하다 마침내 불귀의 객이 되었으나 어린 소녀의 단지 수혈은 일반에게 감격을 아니 줄 수 없다 한다."


요즘은 부모를 돌보지 않는 자식도 많다는데 70여 년 전 열여섯 살 소녀의 갸륵한 부모 공경은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자신의 살까지 스스로 베어내 살리고 싶을 만큼 깊은 사랑, 그것이 바로 ‘효’의 한 모습이다.



 

봉수당진찬도’(155.8×64.8cm,1795년,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조가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에 걸쳐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거행한 주요 행사를 그린 모습이다. 그는 사도세자의 묘 근처의 송충이까지 잡아먹을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절절했다.


한 콩깍지 안, 형제간의 사랑


형제나 자매간의 친근한 정을 순 우리말로는 ‘띠앗’, 한자로는 ‘우애(友愛)’라고 쓴다.

의좋은 형제를 두고 안항(雁行)이라고도 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기러기가 줄지어 날아간다는 뜻인데, 그 가지런히 행렬을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사이좋은 형제 같다 해서 생긴 말이다. 또 옛 속담엔 ‘형제는 하늘이 내려주신 벗’이라고도 했다. 한 콩깍지 안에서 태어나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형제간의 사랑은 가히 하늘이 내려준 천륜이라 할 수 있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위왕 조조는 시문에 뛰어나고 재주가 출중한 셋째 아들 조식을 가장 총애했다. 조조가 죽자 위의 두 형의 질시가 심해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을 터. 어느 날 큰아들 조비는 황제인 자신을 알현하지 않은 조식에게 화가 나 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절대해낼 수 없을 만한 명을 내린다.

 ‘형제’를 소재로 시를 짓되 ‘형제’라는 말을 쓰지 말 것, 그리고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완성할 것. 만약 명을 행하지 못하면 용서하지 않겠노라는 공언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식은 채 일곱 걸음을 다 걷기 전에도 시를 낭송한다. 이것이 이른바 ‘칠보시’다.


콩깍지로 불을 지펴 콩을 삶으니 솥 안에 있는 콩이 울고 있네
본디 한 뿌리에서 태어났거늘 어찌 이리도 급하게 삶아대는가


큰아들 조비는 ‘칠보시’를 듣고 부끄러워하며 동생 조식을 놓아준다. 조비는 한 콩깍지 안에서 함께 자란 형제간의 우애를 깨달았을까.


우리 역사에는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가 많다. 옛날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는 모두가 기억할 것이다. 함께 추수한 볏단을 서로에게 더 많이 주려고 밤새도록 이고 지고 나른 형제 이야기다.


경북 상주 달내마을에도 형제의 미담이 전해 내려온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무신인 ‘이준’과 그의 아우 ‘전’의 이야기다. 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해 왜적과 맞서 싸웠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왜군의 습격으로 의병 진영의 병사들이 흩어지고 형제도 인근 백화산으로 급히 피신했는데, 피신 도중에 그만 동생 준이 토사곽란을 일으키며 쓰러지고 만다. 뒤에서는 왜군이 추격해오고 앞에는 험한 백화산이 가로막고 있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처지라 자칫 둘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동생 전은 형 혼자 피하라고 간청한다. 형은 나중에 선조의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형은 그럴 수 없다며 동생 준을 등에 업고 백화산 꼭대기로 향한다. 격렬한 추격전 끝에 드디어 정상에 오른 후 아우가 처음 쓰러진 곳을 내려다본 형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곳엔 번쩍이는 칼날이 들판을 덮었고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던 것이다.

다른 버전의 이야기도 있다.

전장에서 아우를 업고 가는 형을 보고, 칼을 빼든 적군이 감동해 살려주었다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생명을 살린 사랑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온몸을 바친 형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동생은 후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는 길에 그곳 화공에게 부탁해 이때의 일을 그림으로 그리도록 했다. 그림의 이름이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다.



‘월간창석형제급난도’(21.5×29cm, 조선 시대, 작자 미상, 도 지정 지방유형문화재 217호, 이병훈 소장ㆍ상주
박물관 전시). 임진왜란 당시 월간 이전, 창석 이준 형제의 우애를 묘사한 작품이다. 죽음을 초월한 형제의 사
랑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형제간의 사랑이 극진하다면 비록 동물이라도 그 마음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 이도 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성호 이익의 저서 <성호집>에 실린 이야기다.

언젠가 선생이 집에서 암탉을 길렀는데, 그 암탉은 두 배의 병아리를 함께 키우고 있었다고 한다. 첫배에 나온 새끼들은 이제 막 깃이 돋아나 제법 중닭의 모습을 갖출 때였고, 둘째 배에 나온 새끼들은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였다. 그런데 어느 밤, 어미 닭이 들짐승에게 물려가고 만다.

먼저 태어난 중닭들도 잡혀갔는데 요행히 그중 암컷 한 마리가 온몸에 상처를 입은 채 도망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병아리들이 삐악삐악 어미를 찾는 모습이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자 상처 입은 중닭이 아우 병아리들을 품어주기 시작했다. 그 후로 몇 개월 동안 중닭은 병아리들을 돌보느라 점점 약골이 되었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하며 이 암컷을 일러 우계(友鷄)라고 불렀다.

심지어 사람이 착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면 “저 우계를 봐라, 우계를!” 하고 주의를 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결국 병아리들을 지키던 우계가 들짐승에게 물려가고, 이익은 안타까운 마음에 산길에 떨어진 우계의 깃을 모아 상자에 넣어 산에 묻어주고 이를 ‘우계총’이라고 했다.

비록 닭의 모습을 하고 살다 갔지만 우계가 보여준 ‘형제를 향한 사랑’은 기꺼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부부간의 평생의 사랑


오륜의 하나인 ‘부부유별(夫婦有別)’이 세상의 이치이던 옛 시대에도 부부간의 사랑은 엄연히 존재했다. 청춘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는 데 솜씨가 뛰어난 조선 말기의 문인 이안중의 <현동집>에 실린 ‘달거리 노래’에는 옛사람의 신혼 생활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오늘 추위 몹시도 심하여라, 원앙 이불이 얇아 쌀쌀하기에
밤새 낭군과 안고 자다가 고개 돌려 낭군에게 말하네
옆집에 사는 여편네 혼자 자면 얼마나 추울까?
오늘 밤 촛불 켜지 않았더니 낭군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향긋한 숨소리만 듣다가 아침에 거울 보고 하는 말

어찌하여 뺨에 바른 연지가 낭군 얼굴에 가득 묻었나요?"


신혼부부만 사랑을 나눈 것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오숙의 시문집인 <천파집(天坡集)>에는 중년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이 담겨 있다.


"밥 먹고 느릿느릿 채마밭으로 나서니
병든 아내 뒤따르고 아이는 앞장서네
인생의 이 즐거움 더 바랄 것이 없어라
누가 백년 인생 고생고생하며 사는가"


다산 정약용 역시 긴 유배 생활 동안 숱한 ‘사부곡(思婦曲)’을 남겼다. 그중 결혼 60주년, 즉 회혼을 맞아 지은 ‘회혼시(回婚詩)’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이 진솔하게 배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정도일 터. 당시에 이 정도 표현할 정도면 다산은 상당한 애처가였을 것 같다.


"육십 년 세월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갔는데
복사꽃 짙은 봄의 정취는 마치 신혼 때 같구려
나고 죽고 헤어짐이 늙기를 재촉한다지만
슬픔은 짧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때로 부부의 사랑은 이승과 저승의 거리도 넘나들 만큼 강력하다. 1998년 4월, 아파트 택지 개발 사업 중이던 경북 안동의 산기슭에서 이름 모를 무덤이 발견됐다.

관에서 나온 건 400년이 넘은 미라 두 구. 한 구는 고성 이씨 15세손 이명정의 처 일선 문씨의 것이었고, 다른 한 구는 그의 손자 이응태의 것이었는데, 이응태의 시신은 염습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놀라운 것은 보존 상태만이 아니었다. 망자의 가슴 위에는 머리칼을 엮어 만든 미투리 한 켤레와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편지의 수신자는 망자인 원이 아버지 이응태에게 망자의 아내가 보낸 편지인데 그리움이 절절하다.


"원이 아버지에게
당신 언제나 나에게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그런데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생략)"


각별한 마음을 주고받으며 백년해로를 약속한 원이 엄마의 사랑은 갈 곳을 잃어 더 먹먹하다.


‘순명효황후 한글 편지’(25×39cm, 조선 시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순명효황후가 순종의 스승 김상덕에게 보낸 한글 편지다. 힘든 인생의 고비에서도 순명효황후는 자신의 스승처럼 의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했다.



잊지 못할 스승과 제자간의 사랑


사랑하는 이의 충고는 가슴 깊이 박혀 때로는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기도 하고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한다. 특히 사랑의 대상이 스승일 때 인생의 변화 그래프는 더 크다.


강진 유배지에서 만난 다산 정약용과 황상의 관계가 그러하다. 황상은 나이 열다섯 살에 자신의 ‘둔하고, 막혀 있고, 미욱한’ 세 가지 결점 탓에 학문의 길로 나아가기가 염려된다며 머뭇거린다.

그러나 다산은 세 가지 약점을 장점으로 삼을 수 있다며 오히려 격려한다. 학문의 길에 ‘부지런함’ 외에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음을 깨우쳐준 스승의 애정 어린 격려는 황상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후 “부지런하라 부지런하라 부지런하라”던 스승의 이 ‘삼근계(三勤戒)’는 황상의 평생 삶의 좌표가 된다. 스승을 사모하는 그의 마음은 절대적이었다. 황상은 예순여섯 살에 이미 15년 전에 돌아가신 스승을 꿈에서 만나 ‘몽곡(夢哭)’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간밤에 스승님 꿈꾸었는데 나비 되어 예전 모습 모셨다네
마음이 기쁜 줄을 알지 못하였고 여느 때 모시던 것과 다름없었네
(중략)

때마침 옆 사람 흔들어 깨워 품은 정 다하지 못하였어라


때로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사제 관계도 있다. 조선 후기 대제학을 지낸 삼주 이정보와 기생 계섬의 만남이 그렇다. 이정보는 여느 사대부와 달리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예인의 후원자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계섬 역시 그가 길러낸 제자 중 한 명이다.

이쯤에서 어느 사대부와 기생이 볕 좋은 날 만나 애정을 나누고 유흥을 즐기는 것을 상상하지는 말자.

그들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로서의 사랑, 그 자체였다. 스승 이정보가 죽자 제자 계섬이 세속적 관례를 뛰어넘어 아버지의 죽음 이상으로 애도할 정도로 그들의 신뢰와 사랑은 돈독했다.


 ‘선생’이란 말을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요즘, 그들의 신뢰 가득한 사랑이 참으로 부럽다.


글 전희영(방송작가)

자료협조 국립중앙박물관, 상주박물관, 동국대학교 박물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참고도서 <키질 하던 어머니는 어디 계실까?>(김영조(푸른솔겨레 문화연구소장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情이란 무엇인가>(정운현 지음, 책보세 펴냄), <부부>(이종묵 지음, 문학동네 펴냄), <살아 있는 고전문학 교과서3>(이형대 외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91년 초판본 사랑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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