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3. 7. 30(주일) - 성령강림절후 아홉째 주일 - (2023년 31주)
제목; “바울의 감사와 기도에 담긴 사랑”
성경; 골 1:1-14 (p.323) (시 25:4-5, 252<184>, 361<480>, 5)
<예배의 부름> (시 25:4-5)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련의 달 7월 마지막 주일에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지난 27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우리 민족 최고의 비극이었던 6.25전쟁 종전 70주년 기념일 혹은6·25 정전협정 70주년이었습니다. 이번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일에 초청된 6.25 참전 노병들 중 93세된 영국인 콜린 태커리 씨가 있습니다. 그는 89세에 참가한 2019년영국의 경연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역대 최고령 우승 기록을 세웠습니다. 휴대전화를 팔던 폴 포츠, 동네 성가대원이던 수전 보일이 우승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프로그램입니다. 이 콜린 태커리 씨가 6.25전쟁 정전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부른 노래가 “아리랑”입니다. (☞ 아리랑 노래 동영상 2개 보고)
참 감동적이지요! 6.25전쟁 참전 용사인 태커리 씨가 정전 70년만에 방문한 나라에서 먼저 간 전우를 생각하며 부르는 아리랑이 정말 감동 그 자체입니다.
태커리 씨는 열아홉 나이에 영국군 제45야전포병연대소속으로 1950년 9월 영국을 떠나 6주 뒤 부산항에 내렸습니다. 그 배를 타기 전까진 교회 성가대에서 찬송을 했고, 드럼을 연주했습니다. 부산항 주변에선 인간 배설물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철도가 폭격으로 망가져서 부산에서 수원까지 닷새 걸려 이동할 때는 피 냄새를 맡았습니다. 피비린내는 38도선 주변 전선에 가까워질수록 진해졌습니다. 군인과 피란민의 육신이 뿜어내는 냄새였습니다. 태커리 씨는 부산부터 압록강까지 한반도 전역을 2년간 누볐습니다. 영국군이 6·25전쟁 통틀어 가장 참혹했던 전투로 꼽는 경기 파주시 일대 ‘임진강 전투(1951년 4월 22-5일)’에서 피 흘릴 때 그도 있었습니다. 영국군 글로스터 연대 600명이 중공군 3만명과 맞선 전투입니다. 중공군이 국제노동절(5월 1일)을 기념해 서울을 마오쩌둥에게 선물하겠다는 목표로 인해전술을 펼쳤는데, 전멸을 각오한 영국군의 방어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영국군은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됐습니다. 그는 포대 관측병이었는데, 한밤중 본부로 가서 무전기 배터리를 받아오는 찰나에 중공군이 덮쳐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6·25전쟁의 냄새가 지독히도 강렬해서 휴전 후 한 번도 한반도를 찾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귀한 목숨들이 허무하게 스러져간 기억과 대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걸렸던 동상도 그를 평생 괴롭혔습니다.
정전 70주년인 올해 용기를 냈습니다. 태커리 씨가 국가보훈부의 유엔참전용사 초청을 수락해 24일 한국에 왔고, 27일 부산에서 열리는 정전협정 70주년 행사에선 아리랑을 직접 불렀습니다. 임진강 전투에서 전사해 부산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동료들을 향해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는 “참전 당시 처음 밟은 한국 땅이 부산이었는데, 우연히 듣게 된 아리랑을 노랫말 뜻도 모르고 전우들과 함께 흥얼거리곤 했다”며 “너무 아픈 기억이 많은 한국이었지만 이번엔 기쁜 마음으로 왔다. 한국에서 영원히 잠든 전우들을 위해 아리랑을 열창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킨 것입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정말 “아리랑”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노래입니다. 제가 12년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알베르게’라고 하는 숙소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쉬고 잠을 자게 되는데, ‘나헤라’라고 하는 공립 알베르게에서 하루를 머물렀는데, 큰 방 하나에 남녀 구분 없이 약 200명이 함께 머무는 숙소였는데, 나라별로 각자 저녁 식사를 준비해서 한 식탁에서 먹고 와인 한 잔 하면서 각자 자기 나라를 소개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만남의 시간을 가졌는데, 이태리, 영국, 독일 등 유럽 국가와 함께 남미 콜롬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태평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순례객 등 약 20명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 차례가 와서 대한민국 소개를 하고 “아리랑”을 불렀는데,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이 아리랑을 알고 따라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민족 최대, 최고의 비극인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보내며, 단순히 ‘종전 선언’으로 휴전 상황이 끝나고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평화 통일만이 우리의 살 길이요, 참된 통일임을 기억하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평화 통일이 이뤄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하존(비전)의 사람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골 1:1-14)은 로마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이 에바브라를 통해 듣게 된 골로새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골로새 교회를 향한 고마운 마음과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그래서 감옥의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골로새 교회를 향한 기도에 얼마나 많이 마음을 쏟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론에서 아리랑을 부른 콜린 태커리 씨가 70여년 전에 하늘나라로 먼저 간 동료를 생각하며 “아리랑”을 불렀듯이, 감옥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들과 교회를 위해 어떤 마음을 품고 기도해야 하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 골로새 교회의 설립과 기록 목적 :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며(3:1),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3년간 집중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던 기간에 세워졌는데, 에바브라의 전도 사역에 의해서 세워졌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1:7-8, 4:12-13).
본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골로새 교회의 일꾼인 에바브라의 방문을 받고, 그로부터 골로새 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되고, 그 어려운 문제 해결을 위해 기록한 글입니다. 따라서 골로새서의 기록 목적은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을 반박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를 위해 ‘그리스도론(기독론)’을 강조하고 있다.
에바브라가 바울에게 보고한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무엇보다 그 교회에 침투해온 이단 문제였습니다(2:4, 8,9,18,21,23). 이 이단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부인하고(1:15-18비교 참조), 신적인 계시보다는 별개의 공허한 사색들, 즉 인간의 철학을 강조했으며(2:8, “철학과 헛된 속임수”), 유대교의 요소들, 즉 할례(2:11, 3:1), 랍비의 전통(2:8), 금식 규정들과 안식일 준수 및 절기 준수(2:16) 등을 답습했습니다. 그리고 지고의 신(神)이 물질과 접촉함으로써 더렵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하는 천사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은밀성과 우월성을 중심으로 한 배타적인 분위기를 자랑했습니다(1:20,23,28, 3:11 비교 참조). 이 이단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규정하기가 어렵지만, 대체적으로 유대교적 영지주의(Jewish Gnosticism)라고 봅니다.
이 골로새 교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만유보다 우월하신 분으로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시라고 강조합니다.그리고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1:13),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1:15),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1:15), ‘만물을 창조하신 분’(1:16), ‘교회의 머리’(1:18),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하신 분’(1:19, 2:9), ‘화목 제물’(1:20-22), ‘영광의 소망’(1:27), ‘하나님의 비밀’(2:2),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2:10), ‘성도의 생명’(3:4),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 분’(3:11) 등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묘사들은 그리스도가 절대적 주권자이며 유일한 구속자임을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그래서 매우 교리적이요 그리스도론적인 골로새서의 주제를 “그리스도의 우월성과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삶”이라고 합니다.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요, 큰 일을 감당한 교회였던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서문에 해당 되는 오늘 우리의 본문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문안 인사’(1-2), ‘골로새 교회 성도를 향한 바울의 감사’(3-8), ‘골로새 교인들의 성장을 소망하는 기도와 그리스도인이 받을 영적인 복’(9-14)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1. 사도 바울의 감사(3-8) :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한 삶에 대한 감사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뻤습니다. 다름 아닌 복음을 듣고 이를 믿은 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4-5절에 “이는 ①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②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③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감사하는 세 가지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4), ②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4), ③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5)등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믿음, 소망, 사랑”이 복음의 은혜로써 그 중요성에 따라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골로새는 이 세 가지 은혜들이 논리적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데, 믿음은 과거에 기초하셨고, 사랑은 현재에 속한 것이고, 소망은 미래를 품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4a)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시작되는 초두에 나옵니다. 믿음은 사랑과 소망을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한편, 소망은 본문에서 사랑과 믿음의 촉진제로 제시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해서 하늘에 마련해 두신 축복에 대한 소망에서 나온 것입니다.”(5, 공동번역) 소망은 논리적으로 보면 믿음의 결과이지만, 믿음은 또한 소망을 유지하고 새롭게 하며 더 굳게 붙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만 그치지 않고, 예수님 안에 사는 믿음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움직이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산 믿음을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적극적입니다. 바울도 빌립보서 4:13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예수님도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했으며, “믿는 대로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을 힘있게 삽니다. 열심히 삽니다. 보람 있게 삽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면 사명을 압니다.모세가 믿음으로 장성해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거절하고 자기 민족,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자기 민족을 위해 나섰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오히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얼마나 가졌느냐? 무엇을 성취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이 세상에 무슨 심부름을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의미 없이 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명적 존재입니다.
2)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4)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느니라”(4b)
이것은 골로새 교인들의 생활 속에 드러난 두 번째 은혜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보완하는 필수적이며, 자연적인 요소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것은 실천적인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이론적이거나 신비적이거나 혹은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마가복음 2장에 보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고 계셨는데, 입추의 여지가 없이 사람이 모였습니다. 이때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을 그의 친구들이 들것에 메고 왔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지붕을 뜯고 환자를 내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5)고 했습니다. 이 믿음은 사랑의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에 속합니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능력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산 믿음과 생명의 열매’였습니다. 이 사랑은 ‘성령의 열매’였습니다.
8절에 “(에바브라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 가운데 넘치게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5)
오늘 우리의 본문 5절 말씀에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말미암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믿음에서 비롯되고 소망으로 지속되듯이, 사랑을 격려하고, 새롭게 하며, 소생시키고, 또한 영원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소망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일에 소망이 없다면 사랑은 곧 증발되고 낙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슴속에 영원에 대한 사모함을 넣어 주셨습니다. 이 사모함은 소망에서만 충족될 수 있습니다. 이런 소망이 없는 세상은 의미도, 목적도 없습니다. 소망이 없으면 만사가 붕괴되고 맙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니라”(고전 15:19)
참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그 소망은 영혼의 닻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풍파와 환난, 역경과 질고, 실패가 있을지라도 절대로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영혼의 닻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리면, 절대로 세상의 파도에 밀려 떠내려가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5-6)
2. 사도 바울의 기도(9-11) :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신령한 지혜와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 주목해야 할 것은 바울의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폭넓은 기도 내용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골로새 교회는 자신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그의 제자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그 교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으며, 골로새 교인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었습니다. 단지 에바브라를 통해서 그 사정을 조금 아는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관심을 애정 어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9)
거짓 교사들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만일 새 교훈(영지주의)을 받아들이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지식’이나 ‘지혜’ 그리고 ‘영적인 깨달음’ 같은 낱말들은 거짓 교사들이 사용하는 종교적인 낱말들이었습니다.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속이는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는 안됨을 말해 줍니다. 오늘도 수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전에 들어보지 못하던 말을 하면, 많은 성도들의 신앙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우리도 흔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으로”(에피그노신, ἐπίγωωσιν)는 6절의 “깨달은”(에페그노테, ἐπίγωωτε)과 동일한 어근을 가진 명사로 ‘정밀하고 정확한 지식’, ‘완전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관해서는 항상 더, 정확하게 알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아는 것이 있다면 바닷가에서 장난치며 놀고 있는 어린아이가 바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했는데, ‘채운다’, ‘충만하여진다’(플레로오, πληρόω)는 골로새서의 핵심이 되는 낱말로, ‘가득하게 하다’, ‘충분하게 하다’. ‘완전하게 하다’라는 뜻으로,‘완전히 갖추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며, ‘항해를 위해 준비된 배’를 말할 때 사용한 낱말입니다. 배가 오랜 항해를 하려면 선원이 충당되어야 하고, 모든 기구를 점검하고, 고장 난 것 있으면 고치고, 물과 식량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 항해를 위한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돛이 있어야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생의 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장으로 모셔야 합니다. 인생의 배가 내 뜻대로 항해하다가는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앞서가신 예수님을 선장으로 모시고, 그분의 지시대로만 따르면, 영원한 피안으로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항해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충만하다’는 말은 ‘그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분노가 가득 채워지면 우리는 분노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 안에 물욕이 가득 채워지면 자연히 물욕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우리 안에 음욕이 가득 채워지면 우리의 생활이 음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18에 보면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했는데 이 말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는 충만한 지식으로 지배받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한 열매를 맺게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10).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10)
사도 바울은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합당하게”(악시오스,ἀξίως)는 ‘칭찬받을 만하게’, ‘당연히 보답할 만하게’, ‘건강하게’란 뜻이며, ‘행한다’(페리파테오, περιπατέω)는 바울의 애용어로(엡 4:1, 살전 2:12), 인생의 일반적 행로와 영적 여행을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쁘시게”(아레스케이아, σἀρέσκεια)는‘자기의 의지를 굽히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만 순종하는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이어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라고 말합니다. 이는‘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요 15:8). 그리고 “열매를 맺게”(카르포포룬테스, καρποφοροῦντες)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성도의 삶이 계속해서 열매 맺는것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열매를 “모든 선한 일”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선한 일”(에르고 아가도, ἔργῳ ἀγαθῷ)은 단수형으로 성도의 모든 삶의 전체성을 가리킵니다(고후 9:8). 즉 “모든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삶의 전체적 특징을 가리키며, 성도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선한 일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가져야 하며, 이런 선한 일에는 아름다운 열매와 같은 합당한 결과물들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선한 일”은NEB의 번역에서와 같이 ‘모든 종류의 활동적인 선(善)’을 말하며, ‘선한 일에 열매 맺는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과 더불어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의 구체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앞서 말한 ‘선한 일에 열매 맺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고, 그 결과로 생기는 것입니다. 즉 밖으로 진리대로 순종함에 따라 안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라게 하시고”(아웈사노메노이, αὐξανόμενοι) 역시 “열매를 맺게”와 같이 현재 시제이며, 이 역시 습관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적 생활이 성장하고 원숙해지는데 있어 하나님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자연계의 식물이 자라기 위해서는 비와 햇빛이 필요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성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야 하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11)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영적으로 총명해지며, 그로 인해 실제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성숙한 삶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물론 지식과 행동, 봉사 그리고 인격이 다 구비된, 균형을 갖추기는 어렵지만 노력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11절에 그 사실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데에 두 가지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먼저 “힘”으로 ‘크라토스’(κρατός)인데, 원래 ‘능력’, ‘권능’, ‘세력’ 등의 뜻으로, 성경에서는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된 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외적으로 드러난 힘’(might), ‘신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다음은 “능력”으로 ‘뒤나미스’(δυνάμις)인데, ‘내적인 능력’, ‘영적이나 윤리적인 덕’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특히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능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이렇게 영광의 힘과 능력으로 능하게 되면,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나타나는 은혜와 영광은 단지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고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릴 때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도 이것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할 영적 능력을 소유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바울은 이를 알고 그들을 위해 이 능력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도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능력도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결국 건강한 신앙생활은 기도 생활에 달려있다는 것을 바울이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로 세상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 심야기도회 등). 그러나 그 기도의 내용이 과연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답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열심히 추구하는 교회,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열심인 교회로 새롭게 변신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교회 분위기를 바꾸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인간의 지혜로 움직여지는 육적인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생각, 지혜, 경험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빈손으로 주님께 나아가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나를 먼저 비우지 않는 성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내 계획과 내 소원에 맞춰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헛된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억지성 기도, 협박성 기도... 이제 자숙하면서 욕심으로 꽉 찬 입을 좀 다물고 하나님의 뜻을 들을 귀를 열어야 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교회, 능력있는 성도들이 됩시다.
3.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세 가지 영적인 복(12-14)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2-14)
마지막으로 바울이 언급한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복에 관한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힘과 능력을 소유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 세 가지 복을 주십니다.
1) 성도의 기업을 받게 되는 복입니다(12).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민족입니다. 여기서 “성도의 기업”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기업’(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받은 ‘육적인 기업’과 비교하여)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 기업을 유업으로 받기 위해 선택된 성민이었습니다(신 7:6). 이 복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
2)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 아들의 나라로 옮기어지는 복입니다(13).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은 흑암에 놓인 삶입니다.‘흑암의 세계’란 바로 사탄의 거짓 유혹에 농락 당하고 있는 삶이요, 한치의 앞을 분간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삶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우리는 진리 안에서 우리들의 존재 목적과 삶의 바른 방법과 분명한 삶의 목적지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복을 받은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3) 속량 곧 죄사함의 복입니다(14).
인간이 죄를 저지른 후 가장 먼저 나타난 죄의 결과가 바로 죄책감입니다. 죄를 범한 후 아담과 하와가 보인 첫 행동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보고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자신들의 몸을 가린 것이었습니다(창 3:7). 이 죄책감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역사를 통해 보여온 몸부림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인도인들은 이 죄책감에서 해방 받기 위해 매년 갠지스강을 찾아갑니다. 목욕을 하면 죄를 씻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의지하여 매년 수백만 명의 군중이 그 강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세상 어느 민족이나 부족에서도 모양과 풍습은 달라도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종교적 의식들을 행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인간이 죄책감으로부터 받는 고통은 참으로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저주를 복음이 간단히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이 놀라운 복을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십니다. 이 세 가지 놀라운 영적인 복을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면서 그들의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4. 결(結) :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으로 충성을 다하는 성도가 됩시다(7).
오늘 본문 말씀 7절에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성실한 일꾼이요”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에바브라를 “함께 종 된” 자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그를 복음 사역의 동역자로 인정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너희를 위한”은 많은 사본에서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대신해서”, 공동번역)라고 번역되며, 이 구절과 “배웠나니”를 통해서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회 설립자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즉 에바브라는 골로새에 갈 수 없는 바울을 대신하여 골로새에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한편 바울이 에바브라를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묘사한 것은 그가 이단 사설을 전파하는 거짓 교사와 달리 참 교사이며, 또한 그의 전한 복음 역시 참된 진리임을 증거해 주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역하실 때 바울과 같은 사도나 전담 사역자만을 통해서 하시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의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훌륭한 건물이나 거대한 조직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에바브라와 같은 이름 없는 일꾼을 통해 교회를 세우고, 교인들을 가르치고 격려해서 이단 사이비들과 싸우게 하고, 선한 일을 하게 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충만하게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부름받은 일꾼으로 주님의 뜻을 깨닫고 이뤄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일꾼의 삶을 살아갑시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III.
서론에서 6.25전쟁 정전 70주년 이야기를 드리면서 노병의 아리랑 노래 영상을 보며 큰 감동을 받았는데, 설교를 마치면서도 지구촌교회에서 만든 영상을 보면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 “전쟁 중에도 쉬지 않았던 기도” 동영상 보고)
이 기도의 힘 때문에 대한민국이 살아남았고,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의 전장에서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 되어, 이 땅을 위해 피 흘린 노병들에게 큰 자부심과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4년전 코로나19가 시작될 때 말씀드렸듯이 세계대전 전쟁 중에도, 중세 흑사병이 유행할 때도 예배와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고 말씀드리면서, 강제로 폐쇄되지 않는 한 주일 예배는 쉬지 않고 드리겠다고 말씀드렸고,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일 예배를 한 번도 쉬지 않고 드릴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통일의 날이 가까이 온 것이 아니라 더 멀어진 것을 느끼게 됩니다. 비단 남북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대힌민국 내부의 문제와 어려움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작은 공동체인 하존교회도 참으로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골로새 교회는 이방인들도 구성된 작은 교회이며 세워진지 얼마되지 아니한 개척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골로새 교회는 작지만 아름다운 교회요, 큰 일을 감당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3)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4)과 하늘에 쌓아둔 소망(5)... 사도 바울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신령한 지혜와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더하여 에바브라와 같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충성하면, 성도의 기업을 받고, 흑암의 권세에서 하늘나라로 옮겨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얻는 복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7-18)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께 정직하게 기도하고 간구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신령한 지혜와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받고, 이 능력으로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함으로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 천국을 확장시켜 나가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첫댓글
2023년 7월 30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https://www.facebook.com/hongjoon.kang/videos/1500504204122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