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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불국사 석굴암 여행기
학창시절 단골 수학여행지였던 경주 세계문화유산으로 경주의 문화재 대부분이 등록되어 있는 천년 고도의 경주라지만 그곳에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가 않는다.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마련해준 콘도 이용권으로 첫 기착지인 경주에 다다르니 가랑비에 거센 바람이 인천보다 훨~씬 더 춥기만 하다. 와~우 경주가 이렇게 추운 곳이여?*^^
오전 11시 출발하여 수도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바람에 어두울녘의 5시경에 숙소인 보문단지의 켄싱턴 리조트에 도착을 한다. 처가 형제들이 부부동반으로 모두 모이고 막내처남이 건강을 찾아가는 모습에 안도하는데, 거제 사는 처제가 싱싱한 회를 얼마나 많이 사왔는지 먹다가 지쳐버릴 정도여서 나중에 회덮밥으로 겨우 마무리 지으니, 다른 형제가 준비한 맛 좋은 음식을들은 내일 해운대에 가서 풀자~~!!! 먼 산슭에 하얀눈이 쌓여있는 오전 불국사를 찾아가는 길에 만난 내 생각으로는 황룡사 9층석탑 모형이 저 건물안에 새겨져 있어서 차창으로 담았다. 주차장에서 바로 입장하는 불국사 후문이다. 길 아래의 낙엽이 고와서 한컷 경주 토함산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이후 극락전, 자하문, 범영루 등의 일부 건물만이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1969년에서 1973년에 걸친 발굴조사 뒤 복원을 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다보탑과, 석가탑으로 불리는 3층 석탑, 자하문으로 오르는 청운·백운교, 극락전으로 오르는 연화·칠보교가 국보로 지정, 보존되어 있다. 이러한 문화재는 당시 신라 사람들의 돌을 다루는 훌륭한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비로전에 모신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한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불국사하면 연상하게 되는 국보 제22호 연화교와 칠보교를 가까이에서^*^ 저~편의 아치형 다리가 청운교와 백운교다.
청운교 백운교는 국보 제23호로 자하문을 통하여 대웅전으로 연결된 다리이며, 다리 아래의 일반인의 세계와 다리 위로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극락전에 오르는 길이 서쪽의 안양문앞 사진의 바로앞에 보이듯이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나는 이것이 너무 혼동되어 구분 하느라 애를 먹어야 하였다^*^ 웹상에서는 대부분이 거꾸로 바꾸어 설명을 해놓았다. 저 편의 청운교 백운교는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33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다리를 통해 깨달음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의 다리’, ‘기쁨과 축복의 다리’로의 표현의지인 것이다. 아래로는 17단의 청운교가 있고 위로는 16단의 백운교가 있는데, 청운교를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를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빗대어 놓아 인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불국사 가람 배치도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정교하게 다듬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직선으로 딱딱해졌던 시선을 부드럽고 생동감있게 풀어주고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가장 가까이에서 담았다.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계단 왼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장치가 남아 있다. 이곳에서 물이 떨어지면 폭포처럼 부서지는 물보라에 의해 무지개가 떴다고 전하고 있어, 무척이나 아름다웠을 옛 불국사를 그려보게 된다.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보여지는 반원아치모양의 홍예교의 시작점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가랑비 내리는 불국사 앞의 소나무들이 오늘따라 더욱 푸르게 느껴진다. 자하문앞 청운교 백운교 앞에서 아내와 함께^*^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 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석가탑은 현재 복원 공사중이어서 그 모습을 담을수가 없어 웹상에서 가져온 사진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가탑은 ‘무영탑(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내가 군 입대전 KBS 백만인의 퀴즈에 나갔었는데, 이문제가 나와서 "Stop~!" 무영탑~! 네~~정답입니다. 하여서 주말 장원이 되고서 바로 입대하여 월말에는 도전하지 못하였었다^*^ 대웅전 불상 관음전의 천수여래관음불상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극락전 현판뒤에 있는 황금돼지를 웹상에서 가져왔다^*^ 경내에는 많은 목련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돌담이 하도 고와서 불국사 사리탑은 보물 제61호로 다른곳의 사리탑과는 다르게 4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때 해설사가 이끄는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전체모습을 못담았다. 「불국사사적기」에서 말하는 '광학부도'가 곧 이 사리탑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여래의 사리탑인지 승려의 사리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안에 여래상과 보살상을 돋을새김하여 모셔놓았다.
화려한 조형과 섬세한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1933년에 반환된 것으로, 일제시대 당시 모진 수난을 당한 우리 문화재의 아픈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경내의 감나무에는 아직도 감이 주렁 주렁^*^ 범종각의 모습 이번 경주 여행을 자세한 답사가 아닌 나들이 차원 이어서 사진도 많이 담지 아니하고 단지 그저 둘러보는 정도이니 불국사의 더욱 자세한 내용들은 웹상의 검색을 하면 잘 알수 있으리라^*^ 불국사를 나오면서 담은 모습이 더욱 이쁘다. 주차장에 서 있는 단풍나무는 아직도 그 자태가 너무 곱다^*^ 토함산 잦은 고개 돌고 돌아 매표를 하여 일주문을 통과한다. 보드라운 흙길이지만 생각보다 꽤 많이 걸어서 당도한다. 석굴암은 국보 제 24호로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넙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본래 모습에는 없던 전각을 지어서 석굴암의 앞을 가로막아 버렸다.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 반대편으로 한번 지나갈수밖에 없다. 내부에는 다시 유리 칸막이가 설치되어서 본존불을 자세히 살펴보기는 힘들고 사진도 못담게 하는데 아래 사진은 도촬이 되고 말았다^*^
중학교 3학년 수학여행때는 내부에 들어가 설명을 들으면서 둘러보았는데, 16년전 어머니 모시고 가족 여행 갔을땐 신도들만 유리막 안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유리막 출입문마저 자물통을 굳게 채워놓았다. 수 많은 관광객들이 내부 관찰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유리막 밖에서라도 제대로 볼수있게 바깥의 장애물좀 치우고 조명도 제대로 갖추어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재를 살펴볼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다. 유리막 바깥쪽에 초를 비롯한 각종 리본들이 반사되어 제모습을 살펴보기 힘들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석굴암의 본존 부처님은 높이 총 높이 326㎝, 대좌 높이 160㎝, 기단 상대석 폭 272㎝의 거대한 불상이다. 전체적인 얼굴 상은 안정감이 있으며 종교적인 숭고함을 띄고 있다.
1906년 일제가 파헤치기 전의 모습인데 석굴암 비밀은 '열린 통풍 구조'다.
경주 토함산의 중턱에 자리잡은 석굴암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의 문화유산이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굴암은 1,200년 동안 원형 상태로 완벽하게 보존됐다. 그러나 일제시대 콘크리트로 보수한 뒤 암벽에 물방울이 맺히고 하얀 부스러기가 생겨, 훼손되고 있지만 그 원인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공학과 송태호 교수는 석굴암이 1,000년 이상 원형을 보존하게 된 비밀을 과학적으로 추적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는 원형 석굴암 상부구조의 장마철 결로 및 열전달 현상의 실험적 연구를 발표해 최근 열린 공기조화냉동공학 학술대회에서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석굴암은 원래 출입구가 개방돼 외부 공기가 쉽게 드나드는 열린 구조였다. 본실 지붕인 천개석 위에는 직경 수십cm의 돌들이 1m 정도 쌓여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송교수는 석굴암의 독특한 덮개 구조에 주목했다. 그는 돌이 얼기설기 얽혀있는 다공성 구조물은 곳곳에 공기층을 함유하고 있어 외부 공기가 안으로 쉽게 드나들면서 열전달이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공층 구조물은 자연 대류의 영향으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다. 장마철 동안 비가 오면 다공층은 차갑게 식게 된다. 날이 개면서 고온다습한 공기가 외부에서 들어오더라도 다공층을 타고 내려오면서 수분이 응축된다.
이 과정에서 제습효과가 생겨 석실 내부에는 건조한 고익만 들어오게 된다. 밤이 되어 외부온도가 낮아지면 석실 안의 따뜻한 공기가 상승해 다공층을 따라 빠져나가면서 돌에 묻어 있던 물기를 증발시킨다. 그러므로 석굴암 내부는 항상 건조한 상태가 유지될 수 있다.
송교수는 석굴암의 통풍구조에는 수천년 내려온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며 이같은 과학유산을 생활에 활용하는 방안을 폭넓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경향신문>
***또한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보면 지금은 석굴암 아래 감로수라고 나오는 샘물이 석굴암 바닥의돌 밑을 흐르며 습기를 제거하여 결로현상을 막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무지한 일제가 해체복원 하면서 아연관을 뭍어 샘물을 빼내니 지금의 감로수가 그것이다. 숩기가 차고 이끼가 끼니 그것을 제거하려고 말하기조차 싫은 별의별 방법이 다 동원되다가 항온항습기를 설치하여 제습은 하였지만 그 진동으로 감실 천정이 금이가고 무너질 위기에 처하였다고 언젠가 TV에도 방송 되었던것 같다. 원래의 모습으로 제대로 복원하여 본존불이 저 멀리 동해를 굽어보며 국태민안을 보살펴 주실수 있기를 바랄뿐이다. 중학교 3학년 수학여행때는 저~ 멀리 동해바다의 노니는 선박들이 보였는데, 요즘 조건으로는 힘들겠지만 오늘따라 가랑비가 내리니 이정도만 조망한다. 바로 그 석굴암의 바닥 아래를 흐르며 습기를 제거해야할 감로수는 이렇게 되고 말았다. 한고비~~또 한고비 올라서면 넓은 한계~~ 석굴암을 되뇌이며 걸어서 나온다. 주차장 주변에 있는 범종을 관광객이 돈을 내고 칠수 있도록 해놓았나보다. 토함산 잦은 고개길은 내려와 이제 해운대를 향하여 달리는데 전봇대에 웬 까마귀떼가 저렇게도 많이 앉아 있을까?*^^ 불국사든 석굴암이든 더 자세히 해설을 할려면 한이 없으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해운편에서 또 뵈어요^*^
2012. 12. 2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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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석굴암 노래를 들으며 청산님의 토함산 여행기를 보노라니 더 실감나는군요
회사 퇴직후 여유있고 즐겁게 지내시는 모습 좋습니다.
근데요~~회사 퇴작한것은 분명한것 같은데 너무 바빠요^*^허허허*^^
회사에서 콘도 부탁을 하니 아~그 정도는 해드려야지요^*^
그래서 국내 퇴직여행이 되었네요^*^
경주기행문이 적나라해서 경주를 안가봐도 되겠읍니다 ^^
작년에 석굴암을 올라가다가 너무 멀어서 올라가다
되돌아 왔었더니 다음기회에는 꼭 가봐야겠읍니다 ^^
최재호님이 작시한 그 내용 그대로 한고비 또 한고비 오르고 또 올라야 되더군요^*^
꽤 지겹도록 힘들게 올라야 하는 그 길을을 중학교 3학년때는 불국사 인근 숙소에서
걸어서 올랐었는데 어떻게 그길을 올라서 일출을 보았는지 지금 생각하니 아득 합니다^*^
석굴암 최재호씨는 제고등학교다닐때 교장선생님이셨답니다...키도 자그만하시고,참 인자하셨답니다...그래서 늘 자부심을 가지고 다녔든 기억이나네요~~~
옛기억과 추억을 생각나게 해주신 청산님 감사합니다..멋지고 행복한 여행되시길~~~^^
호시님의 은사 이시군요^*^
이곡은 새로운 이미지로 곱게 꾸며볼려고 합니다^*^
불국사에 가면 언제나 그 애뜻한 사랑에 무영탑 한아름 껴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곤 하는데
지난 10월에~ 보수중이라~어루마져주지 못 했네요~~[ 10대 감수성이 사랑 안타까움에 흑흑 울며 읽던 현진건의 무영탑]~ㅎ
60년대 토함산 등산 가 석굴암 보았을 땐 말씀대로 전 위치에서 앞이 훤히 트였었는데요~
그무렵 불국사 앞 작은 못도 기억에~ 절마다 객축 신축하는 공사 수 십년간 그 그윽한 정서가 사라져 식상하더군요~
예~들어 수덕사 앞에도 예쁘장한 못 대신 건물 주차장이 버텨 일엽스님의 여운이 사라져 버리고
근처에 노래방 식당 카바레가 수십개 고요한 절간마져 상술의 장소같아 안식 할 곳 없더군요~자세한 기록 감사합니다
나드리님의 자상하신 말씀에 감사 드립니다.
69년 중3 수학여행때는 앞문을 열어서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을수 있도록 만든 전각은 있었지만
유리 칸막이는 없이 내부를 모두 돌아보았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