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초등학교를 그만졸업하고 광릉 중학교로 입학해야 하는데 여건이
여의치가 않아서 광릉초로 달리기를 하러갔습니다. 5-6학년쯤 되 보이는
조무래기들이 편 가르기 '장 깨 미'를 하는데 하마터면 저도 가위 바위 보를
할 뻔했습니다. 저는 5-6학년 때 A매치는 한 번도 못해봤고 골목 축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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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했습니다. 요새 길거리 농구처럼 인원수 되는대로 1;1부터 다했습니다.
길거리 축구나 농구는 팀워크 보다는 슈퍼 울트라 캡 짱 한명이면 승패가
좌우됩니다. 캡 짱은 뭐든 잘합니다. 농구, 배구, 축구, 돈치기, 통이야,
갱 깡, 나이 살 먹기, 못하는 게 없으니 울트라 캡 짱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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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누나 아들이 농구로 대학을 갔는데 종종 서울로 시합을 올 때마다 저는
코치를 자처하며 음료수 박스를 날랐고 대학 농구에서 트레이드를 할 때 제가
J대랑 K대를 놓고 막판 협상을 했습니다. 조카놈 포지션이 포드였는데 195m키에
덩치가 그다지 크지 않아서인지 러브콜은 왔지만 어째 배팅이 시원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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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감독은 1년 골 보이 시키고 2년부터 주전으로 해준다고 하고 2학년인 백넘버
5번을 끼워치기 해주랍니다. 김 감독은 바로 포지션 주겠다고 해서 J대에 2,000에
팔아버렸습니다.참고로 김 승현이 대학 몸값이 8000이었지요. 조카 녀석에게 제가
보디빌딩으로 몸을 키우라고 했고 만, 연애질하고 다니더니 부상으로 입대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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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기릿까이 해서 K대 학위만 간신히 받았습니다. 예체능을 꿈꾸는 모든 학부형
들이여, 공부가 제일 쉽습니다. 동네에서 캡 짱 정도는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편이
났습니다. 제가 반세기쯤 살아보니 평범한 것이 가장 특별하다는 것 아닙니까?
5-6학년 때 심부름은 제 직업이었습니다. 그래봤자 잘해야 사온 물품을 얻어먹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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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름돈 갖는 것이 다였는데 말입니다. 욕을 먹거나 쥐어 박히는 것보다 빨리 다녀
오는 편이 낫다는 것을 안 저는 대체적으로 심부름을 잘하는 착한 아이였습니다.
해동주조장에 노란 주전자를 들고 막 걸리 한 대박을 사러 갈 때는 지침 리 살 때나
천변 리 살 때의 거리가 거의 똑같았습니다. 그 때 걸음으로 10분 쯤 걸어서 막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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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들고 왔는데 아버지는 술을 잘 드시지 못해서 종종 막걸리를 끓여서 드셨습니다.
물론 저도 끓인 막걸리를 그 때부터 먹었고 술은 어른이 되어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울 어머니 때문입니다. 울 어머니는 술을 드시면 무조건 노래를 부르시다가
우는 것으로 끝을 냈습니다. 결혼생활이 재미가 없으셨는지 걸핏하면 술을 먹고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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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 집에서 사교춤을 추시는 것도 자주 보았습니다. 저는 장남이 어머니를 돌보는
것으로 알고 어머니가 토해 놓은 오물을 군소리 없이 뒤처리를 하였는데 아마도 18살
무렵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술 마시면 우리 집 네로 왕이었습니다.
아니, 술주정을 다 받아내는 제 뺨은 왜 때린답니까? 어머니가 왜 그렇게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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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셨는지 제가 어른이 돼서 물어보았더니“네가 오죽 말 안 듣고 속을 썩였으면
때렸겠냐?”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칩니다. 제가 맞을 짖을 안 할 때도 맞았지만
대부분은 맞을 만해서 맞았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어머니께서 계돈
가져다주라고 한 돈3,000원을 써버리고 무서워서 집을 들어가지 못하고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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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들과 함께 논두렁에 짚 다발을 쌓고 밤을 샜는데 정말 춥고 긴 하루였습니다.
별명이 형사인 어머니는 나를 수배해서 체포, 판결한 후에 그날 태형에 처했습니다.
우리 어머니 식 태형은 독방에 저를 가두고 문을 걸어 잠근 다음, 팬티 바람에
손발을 묶고 회초리나 한복 할 때 쓰는 1 M 정도 되는 대나무 자로 직성이 풀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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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까지 때렸고 어떤 때는 면도칼 갈 때 쓰는 가죽 벨트로 고대의 노예처럼 맞았으니
육 남매는 어머니의 집합 소리에 오금을 저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내가 잡히던 그 날은 어머니가 독방에 끌고 가기도 전에 제 팔뚝을 물어뜯으면서
오열하였습니다. 왜 우시는지 몰랐지만 통증보다는 죄스러움과 빨리 이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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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갔으면 하는 생각밖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서서히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익혀가고 있었는데 천변 리 시절에는 5분 거리에 있는 두만이네
아저씨 만화방에 출입을 하면서 돈이라는 자본주의가 주는 달콤함을 만화방에서
알게 되었지요. ‘신비한 아흔 아홉 째‘문’ 을 넘기면서 먹는 ‘달고나‘의 달달함은 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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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가 멋져 보일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샤워하고 만화책을 보는 즐거움은
그때 터득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일찌감치 불법을 준비한 것입니다. 절도,
가출, 독방, 만화방 출입, 돈내기 축구 등등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왜 일까?
2014.9.11.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