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며 사는 것보다 슬픈 것은 없더라.
오래전부터 퇴직해 뒷전으로 밀려나 티브이나 보는 친구들에 비해,
그래도 현역으로 사는 것이 한 가닥 위안이었으나, 그 위안마저 끝나버렸다.
세상사,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는 숙명인 걸 어쩌겠는가?
살아 온 길을 돌아보니,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사명감이나 가진 듯, 가족까지 내쳐가며 한가지 목적에만 전전긍긍한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사진협회에 적을 둔 아마추어 사진인 더러 사시장철 피고 지는 꽃이나 풍경만 찍지말고
의미 있는 사진 좀 찍으라고 타박했던 일도 돌이켜 생각하니, 그들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전국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니며 즐기고 싶은 사람에게 강요할 일은 아니잖은가?
죽고 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을 누굴 위해 종을 울린단 말인가?
사람이 좋아 사람을 찍은 놈이 당치 않는 정의감에 사로잡혀,
가까운 사람까지 바로잡으려고 까발리다 보니 그 많은 친구마저 등을 돌려버렸다.
사람 사귀는 것을 낙으로 살며 살았으나, 다 허사였다.
더 귀가 막힌 것은 나 역시 그들의 삶과 별반 다른 점이 없다는 점이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처럼, 제 눈에 똥은 보지 않고 남의 똥만 본 것이다.
나는 별을 네 개나 단 전과 4범이다.
70년대 음악에 빠져 음악실을 운영할 때, 잘 아는 디스크쟈키 후배가
당시 구하기 힘든 블랙라이트를 하나 가져와 샀더니,
나중에 경찰이 찾아와 장물취득죄로 벌금 내라며 첫 별을 달아 주었다.
두 번째는 대마초 피워 대마관리법을 위반했다며 같이 피운 놈 대라며 몹쓸 고문까지 하다 잡아넣었다.
세 번째는 90년대 중반, ‘예총’직원들이 마련한 일일 주점에서 공무집행 방해로 들어갔다.
구입한 티켓으로 '캡틴큐' 한 병을 받아, 어떻게 ‘예총’에서 예술적 감흥도 없는 이런 술장사를 하냐며
옷을 벗어 모자로 구걸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경찰이 들이닥쳐 혜화동 파출소로 끌고 갔다.
마침 '동대문경찰서'에 근무하던 사진 하는 친구가 찾아와
내일 아침 경찰서장이 출근하면 훈방될 사건이라며 걱정하지 말랬는데,
자정이 가까워 케이비에스 기자가 찾아온 것이다.
이것저것 물어 답했더니, 아침 방송에서 나팔을 불었던 모양이다.
웬걸, 훈방은커녕 연행할 때 밀고 당긴 것으로 공무집행 방해죄까지 덮어 씌워 구속해 버렸다.
조경희 예총 회장을 엿 먹인 괘씸죄가 더 큰 것 같았다.
네 번째는 나쁜 놈을 나쁜 놈이라 했더니 명예훼손이라며 벌금을 200만원이나 내란다.
자연을 보호하도록 가르쳐야 할 원로사진가란 작자가 사진을 찍기 위해 동강할미꽃에 물을 뿌려
말라 죽게 만든 일을 까발렸더니, 명예훼손죄로 고발한 것이다.
후배가 벌금 내라고 돈까지 내놓았으나 도저히 승복할 수 없어 구치소에 들어갔다.
하나같이 사람을 위한 법인지 법을 위한 법인지 헷갈려 법을 우습게 본다.
그래도 걸리기만 하면 천하의 죽일 놈으로 매장시켜 버리는 미투에는 걸리지 않았다.
난, 성 개방주의자라 성적인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지만, 돈과 명예가 없어 그런지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전과 4범에다 이런 천하에 잡놈이 무슨 자격으로 남을 탓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8년 전 폐쇄적인 쪽방촌에 들어가며 남을 탓하는 병이 심해진 것 같다.
본디 사람이 물러터져 상대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남의 잘못을 탓하기는커녕 하기 싫은 일도 거절하지 못해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놈인데,
그런 성격까지 야멸차게 바뀌어 버렸다.
일찍부터 언론의 폐해를 알아, 방송이나 신문의 인터뷰는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모르는 기자는 당연히 사절하지만, 이젠 잘 아는 분의 요청까지 깔아뭉게 버린다.
신문은 아니지만, ‘사진예술’ 윤세영주간의 인터뷰 요청까지 묵살한 것이다.
더구나 그분은 오랜 사우인 김녕만씨 부인이 아니던가?
사진판에서 긴 세월 함께한 분의 청탁을 면전에서 무시한 것은 큰 결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며칠 전에는 정선 귤암리의 서덕웅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올해 ‘동강할미꽃축제’에 ‘두메산골 사람들’ 사진전을 유치하려는 이장 부탁을 중재했지만,
정선집 불날 때 모두 탔다고 거절했다. 예전 같으면 고리채를 빌려서라도 만들어 주었겠지만, 이젠 못한다.
그리고 인사동에서 몇십 년을 가깝게 지낸 조준영 시인의 부탁까지 사양했다.
40여 년 찍은 ‘인사동 사람들’에서 자기 사진들을 찾아주면 소정의 고료를 주겠다지만 거절했다.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원판 찾는 일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 것은 죽을 때가 되어 자성하며 변명하느라 온갖 주접을 떤 것이다.
요즘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바람에 밤낮이 뒤바뀌어, 사는 게 뒤죽박죽이다.
지난달부터 40여 년 동안 매달려 왔던 인사동 기록과 전시 안내에서 손을 놓은 것을 시작으로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쪽방에서 지낸다.
유일한 낙이 녹번동 정동지 집을 찾는 일인데, 그곳은 잠드는 시간이 정해져 피차 불편했다.
그래서 아산 작업실과 동자동만 오가기 위해 녹번동 있던 짐을 아산으로 옮겨버렸다.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동자동에서 머물고, 목요일부터 주말까지 아산에서 지내기로 했다.
동자동은 죽는 날까지 지켜보며 관찰하기로 한 스스로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살다 보니 정도 들었다.
서울역에서 1호선 타고 아산온천역까지 공짜로 태워주는데다, 두곳 모두 컴퓨터와 잠자리가 붙어 있어
밤늦도록 컴퓨터와 지내다, 잠 오면 바로 잠자리에 들 수 있어 어려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 많은 짐을 정선 귤암리 화재 때 모두 태웠건만 무슨 짐이 그리 많은지 오 갈때마다 몇 차례나 옮겼다.
아산의 김선우는 나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딸 같은 여자다.
오래전에는 아산 온천동에 ‘공유공간 마임’을 만들어 성설 전시장까지 만들어 주었다.
무슨 전생에 연이 있는지, 현충사 둘레길에 있는 ‘백암길185미술관’을 작업실로 사용하도록
프린트기와 여러 집기까지 마련해 준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 정선집 불났을 때는 트럭을 몰고 와 타버린 잔재까지 아산으로 실어 날랐다.
불탄 잔재를 뒤져도 나올 것이 없는 것을 모를리 없으나, 안타까운 마음일 게다.
그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뒷간에 쌓아둔 애살에 눈시울이 뜨거웠다.
지난 주말 짐을 모두 옮긴 후 실내 정리를 했다.
오래된 필름을 스캔 받아 정리해줄 선우 방과 일하다 쓰러져 잘 잠자리를 정리하다 보니
8년 전 주문해 놓고 찾아가지 않아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대형 사진 10점도 쓸모가 있었다.
코구멍한 녹번동 정동지 집의 숨통을 막았으나, 이곳에 걸어 놓으니 한결 분위기가 살아난다.
마음에 걸렸던 조준영시인의 인사동 사진 원본을 찾다 새벽 녘에야 간신히 잠들었는데,
정권마저 집어삼킨 그 무지막지한 검찰이 들이닥쳐 대마초를 피웠다며 수갑 채우는 악몽에 잠을 깨,
두 시간밖에 자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다시 자려고 노력해도 잠은 오지 않았다.
이런저런 주변 사진이나 찍어 글을 써서 올리며, 죽을 준비로 유언장까지 서랍에 넣어 두었다.
별것 아닌 인생 호들갑 떨며 살았던 지난날들이 후회막급이다.
사람을 망치는 돈에 얽매여 살지 말고, 다들 즐겁게 사시길 바란다.
노랫말처럼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사진, 글 / 조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