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기념일 [0529] (한국복자124위)
2마카베오 6,18.21.24-31 요한 12,24-26
2024. 5. 29. (수).
주제 : 삶의 본보기를 드러내는 일
사람은 죽어서 할 수 있는 일보다 살아 있을 때,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면서 복자와 성인을 기억하면서 그들에 관한 말을 하면, 교회는 산 것보다 죽음을 더 가까이하고 더 나은 일로 찬양하는 듯하여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당연히 죽은 일보다는 살아있을 때 하는 일이 더 크고 의미가 있다는 표현합니다만, 신앙인에게 죽음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하는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 삶은 당연하고 죽음은 누구나 한 번만 맞이하는 것이기에 그 의미를 다르게 느끼는 것일까요?
오늘은 우리나라 신앙의 역사에서 아직은 성인으로 공경하지 못하는 복자들로 124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전례의 명칭으로는 ‘복자 윤지충과 동료 123위’를 말합니다만, 짧은 몇 마디의 표현로서 그분들의 삶을 요약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신앙을 드러내다가 목이 잘려 죽은 분들을 왜 위대한 분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지금 말씀드린 이 질문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드러내거나 증거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누구나 신앙의 삶보다는 세상의 삶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그 세상의 일에서 더 좋고 더 많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증거하는 방법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차원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먼저 말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가 가진 신앙 혹은 내가 드러내는 신앙이 참으로 나의 삶에 중요하고, 그래서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신앙이 중요하다고 내 목숨을 내놓는 일은 웬만한 마음과 정신을 가진 사람이 하는 행동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로 만난 내용은 마카베오서에 나오는 엘아자르 노인사제의 삶에 관한 내용입니다. 신앙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 신앙을 배교하라고 권고했을까요? 배교라는 행동을 똑같이 하지 않는 사람이 그 사정을 알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배교하는 행동을 보이라는 유혹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보일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은 자기 목숨을 내놓거나, 같은 씨앗으로 머물기를 원하지 않아야 더 많은 결실을 얻게 합니다. 이 내용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의 순리는 그대로 실행됩니다만, 이 진리를 대하면서 우리도 좋은 삶의 결실을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삶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