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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 16,1-13
그 무렵
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하고만 있을 셈이냐?
나는 이미 사울을 이스라엘의 임금 자리에서 밀어냈다.
그러니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떠나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
2 사무엘이 여쭈었다.
“제가 어떻게 갑니까?
사울이 그 소식을 들으면 저를 죽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하여라.
3 그러면서 이사이를 제사에 초청하여라.
그다음에 네가 할 일을 내가 알려 주겠다.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
4 사무엘은 주님께서 이르시는 대로 하였다.
그가 베들레헴에 다다르자 그 성읍의 원로들이 떨면서 그를 맞았다.
그들은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 하고 물었다.
5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물론 좋은 일이지요.
나는 주님께 제사를 드리러 온 것이오.
그러니 몸을 거룩하게 하고 제사를 드리러 함께 갑시다.”
사무엘은 이사이와 그의 아들들을 거룩하게 한 다음 그들을 제사에 초청하였다.
6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7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8 다음으로 이사이는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9 이사이가 다시 삼마를 지나가게 하였지만, 사무엘은 “이 아이도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 하였다.
10 이렇게 이사이가 아들 일곱을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였으나,
사무엘은 이사이에게 “이들 가운데에는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없소.” 하였다.
11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말하였다.
“사람을 보내 데려오시오.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식탁에 앉을 수가 없소.”
12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
사무엘은 그곳을 떠나 라마로 갔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긴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마르 2,24)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우선하는 사람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
(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8)
주님!
안식일에는 단죄가 아니라,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당신 계약의 표로 삼으시어, 제가 당신 자녀임을 드러내소서.
자비를 베푸는 저를 보고, 사람들이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주인이 되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우리에게는 세 가지 날이 있습니다.
일요일, 안식일, 주일.
신자인데도 주일이라고 하지 않고 일요일이라고 하고, 그래서 이들은 주일을 일요일로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정도만 말씀드려도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아시겠지요?
그런데 ‘신자인데 주일을 지내지 않고 안식일로 지내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말이 뭔지, 그 차이가 뭔지 모를 분 있겠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사람’과 ‘신약의 사람’ 차이를 말하는 것이지요.
구약의 사람 곧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냈지만, 신약의 사람 곧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일을 지냈잖습니까?
사실 주일인데도 일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에겐 주일이 그저 일요일일 뿐입니다.
이 말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살 만한데도 욕심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나, 더 나아가 주일이 주님의 날이라는 의식이 없어 일하는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주일에 일을 쉬는 사람도 많습니다.
요즘 들어 삶의 질을 따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합니다.
이런 추세를 드러내듯 많은 사람이 주일이면 캠핑카를 끌고 놀러 다닙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주일은 그저 일을 쉬는 것이요, 자기 삶을 넉넉하게하기 위해 그저 일을 쉬는 것이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정도는 못 됩니다.
이에 비해 하루를 주님 안에서 안식을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신앙적으로 꽤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 말씀은 이것 이상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루를 일하지 않는 날로 지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님 안에서 쉬며 하루를 거룩히 지내는 것도 뛰어넘는 말입니다.
의식 혁명입니다.
의식을 완전히 바꾸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어떤 것도 인간의 주인일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일의 노예가 되지 말고 창조적으로 살고,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고 사랑하며 살고,
관습이나 습관의 노예가 되지 말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의 정신으로 살고,
주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정신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심은 사람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하기 위함이고,
그래서 그 무엇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 살게 하기 위함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감사드리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물러진 법>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당분간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 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 1248조1항)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으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옛날에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이 한글도 몰랐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기에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서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가까운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면 성숙한 신앙인으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8)라고 하셨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법조문보다 우선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고,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되는 날이 아니라 선과 생명에 도움이 되는 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함께 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길래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지켜야 하지만 그 의미, 내용,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 날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안식일 법을 확대 해석하여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바람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자로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생각하셨습니다.
사랑을 규제하는 법은 없습니다.
분명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부부임을 자주 잊을 때 더 부부가 된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안식일에 밀이삭을 뜯어먹는 제자들을 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두둔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법은 상당히 엄격합니다.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발걸음 숫자가 정해져 있고, 엘리베이터 층수도 누를 수 없으며, 에어컨이 꺼져도 다시 켤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집중하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백성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집중할수록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법에 집중할수록 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결혼에 집중할수록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집니다.
경계에 집중할수록 차는 경계선 밖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만약 물고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고양이가 무서워 어항 유리가 튼튼한지만 집중하고 있다면 그 안에서 다른 물고기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법은 이 어항과 같습니다.
그냥 그 안에 머물면 되지 그것에 신경 쓰면 정작 법을 주신 분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왓챠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줄거리입니다.
창욱은 40대입니다.
그는 번역가와 인문학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출판사 사장이고 아내는 남편의 글솜씨가 맘에 안 들고 남편은 아내가 가정에 소홀한 것 같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둘은 얼마간의 별거를 하게 되었고 남자가 아내 없이 사는 것이 너무 편했는지 먼저 이혼장을 들고 왔습니다.
아내도 도장을 찍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말기 대장암 판정을 받습니다.
소화기 문제로 먹는 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녀는 창욱에게 매일 요리를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창욱은 라면밖에 할 줄 모릅니다.
창욱은 의리 때문인지 당분간 아내를 위해 요리를 배워가며 하기로 합니다.
창욱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요리해보지 않았지만, 오직 아내의 소중한 한 끼를 위해 좋은 식재료와 건강한 레시피를 개발하는 데 온 힘을 쓰며, 서투르지만 조금씩 가족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아가기 시작합니다.
물론 아내는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사랑해주는 남편과 아들을 바라보며 슬프지만, 괜찮게 죽습니다.
이 모든 것은 부부임을 잊고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부부라면 여자가 음식을 하고 남자가 돈을 버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평소 삶은 이 반대였습니다.
남편이 가정일을 열심히 한 것은 아니지만, 바깥일에만 열중하는 아내에게 불만을 품었었습니다.
아내도 자신보다 돈을 못 버는 남편에게 불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부부는 이래야 한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부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선일 뿐입니다.
차의 양쪽 차선에 집중하면 차가 뒤뚱거리다 결국엔 차선을 넘습니다.
운전을 잘하려면 차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중앙을 봐야 합니다.
그러면 차선을 넘는 일이 없습니다.
부부가 되었다면 더는 부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만 생각하면 됩니다.
상대를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까만을.
결혼은 왜 하는 것일까요?
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어떨까요?
사람은 결혼이란 틀에 맞추기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모든 것은 사랑을 지향합니다.
이 지향을 잊으면 안식일 법을 위해 사람이 희생하다 결국엔 지쳐 그것마저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율법은 금붕어에게는 어항과 같고 운전자에게는 차선과 같습니다.
그 안에 들어와 있다면 그것을 만들어준 이유, 곧 사랑만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살면 됩니다.
그러면 선을 넘지 않습니다.
율법주의자가 되지 맙시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가 자주 빠져들게 되는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확대해석, 침소봉대, 과잉 일반화입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한 강의 시간인데, 제일 앞에 앉아 계신 분이 강의 시간 내내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만지작만지작하고 계셨습니다.
시종일관 그러시니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강의 시간에 도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검색하십니까? 게임 하고 계십니까?" 그랬더니, 그분께서 화들짝 놀라면서, 하시는 말씀!
“그게 아니라 스마트폰 메모장에 강의 내용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깨갱 하며 그랬습니다.
“아! 네 알았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계속 적으세요.”
또 다른 제 착각이랄까, 과잉 일반화 증세가 떠오릅니다.
특강을 끝내고 나오는데, 한 자매님이 유튜브 강의 잘 활용하고 있다고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셨습니다.
어깨가 우쭐해졌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자매님은 잠 안올 때면 즉시 제 유튜브 강의를 트신답니다.
잠 오기 적절한 목소리라 불면증 치료제로 최고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적당히 알이 맺히기 시작한 밀밭 사이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격무에 무척이나 굶주렸던 제자들은 그것으로라도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밀이삭을 좀 뜯기 시작했습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큰소리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마르코 복음 2장 24절)
바리사이들 역시 저처럼 확대해석 내지는 침소봉대를 한 것입니다.
이미 꼬일대로 꼬인 바리사이들의 마음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어제에 못지않은 강펀치 하나를 시원하게 날리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코 복음 2장 27~28절)
안식일과 관련된 세부적이고 지엽적인 규정 하나 하나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안식일 제정의 근본 취지를 망각해버린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이 참으로 뜨끔합니다.
안식일은 원래 인간을 비롯한 이 세상 모든 창조물, 심지어 무생물에게까지 휴식과 평화를 누리게 하려는 의도로 생겨났습니다.
주인도 쉬지만, 종도 쉬게 합니다.
사람도 쉬지만, 가축도 쉬게 합니다.
농부도 쉬지만 경작지도 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안식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창조물인 백성들과 모든 피조물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생명과 자유를 경축하는 날인 안식일을 속박의 날, 억압의 날로 변질시켜버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절대 원치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위해서라면서 안식일과 관련된 수많은 규칙과 관습들을 만들었습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노동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곡식을 추수하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따진 것은 제자들이 밀 이삭 몇개를 건드린 것인데, 그것을 지나치게 확대해석 및 과잉 일반화를 시켜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인간에 대한 소홀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동료 인간 존재의 가치를 무시했습니다.
신앙 행위 안에서 하느님 사랑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모상인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안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 인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의 적극적인 준수보다도 동료 인간에 대한 사랑을 더 강조하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예닮(예수님을 닮아감)의 여정 - 날마다 영적승리의 삶>
“주님만 바라고 너는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시편 37,3)
이런저런 묵상으로 두서없이 강론을 시작합니다.
<올해 104세, 시인이 되고 싶다> 1920년생으로 올해 104세되는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새해 소망을 밝힌 글 제목입니다.
제가 반세기전 1970년대 20대 청년기 대학시절 안병욱 교수와 쌍벽을 이뤘던 분으로 참 애독했던 글이 바로 이분의 글이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다니 참 고상한 소망이요, 이 강론을 읽는 모든 분에게 시인이 되라 권하고 싶습니다.
문득 오래전 ‘시인(詩人)’이란 자작시가 생각나네요.
“시인(詩人)이
어디 따로 있나요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답니다
당신 향한
그리움
끊임없이 송이송이 꽃으로 피어나
시(詩)가 됩니다”
-1998.5.4
다음은 김형석 명예교수의 새해 소망을 밝힌 글의 요약입니다.
윤동주 시인과 동급생이었다 하니 참 놀랍고 신기합니다.
“지난 연말 문학인들이 모이는 남산 ‘문학의 집, 서울’ 행사에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낭독했다.
윤동주는 중학교 3학년 같은 반에서 공부한 내 인생의 첫 시인이다.
긴 세월이 지난후에 구상 시인이 마지막 시인이었다.
앞으로 5년의 삶이 더 주어진다면 시를 쓰다 가고 싶다.
아름다움과 사랑이 있는 인생이 더 소중함을 이제야 알았다.
내 새해 소망은 시인이다.
100세가 넘으면 1년이 과거의 10년만큼 소중하다.”
제가 간혹 손님을 맞으면 정갈한(깨끗하고 깔끔한) 음식에 안내하는 수도원 부근의 “남도(南道)의 향(香)’ 음식점입니다.
이름도 시적(詩的)이다 싶었는데 참으로 평범해 보이는 남자 주인이 알고 보니 불자(佛者) 시인이었고 경이로웠습니다.
안에 보물을 숨기고 살아 온 분입니다.
음식점을 찾았던 수도형제가 전해준 시집을 보고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분이 쓴 ‘연꽃받침’이란 시입니다.
“불암산 자락 불암사
수많은 외세
불심으로 이겨내고
처마밑 풍경울림
바람에 실려 구름타고 멀리멀리
불자를 보듬어 주는
보살들의 연꽃받침 속세를 밝게 비추리”
어제 면담성사를 본 자매도 잊지 못합니다.
‘승희(勝喜) 클라라’란 이름 뜻을 풀이하며 격려의 덕담과 더불어 드린 조언입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살라고 승희에 빛을 뜻하는 클라라 성녀 세례명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영적승리로 빛나는 기쁨을 사세요.
이런저런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으니 개의치 마세요.
감정따라, 기분따라, 마음따라 살지 말고, 하느님만을 향해 일상의 평범한 ‘삶의 궤도’ 따라 한결같이 중심과 질서가 잡힌 삶에 항구하세요.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가면서 감정의 파도는 잔잔해지고 마음도 순수해지고 고요해질 것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힘들수록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 사랑 안에 고요히 머무르는 시간과 장소 마련이 필수입니다.
나름대로의 외딴곳, 오솔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문득 오래전 써놓은 ‘너 오솔길 있는가?’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너
밖에든 안에든 오솔길 있는가?
아무도 모르는
임과 나만이 아는 오솔길
임이 그리워 목마를 때 찾는 오솔길
임과 함께 걷는 오솔길
늘 걸어도 늘 그립고 아늑한 오솔길
너 있는가?”
-1998.7.28.
저에겐 수십년간 걷는 하늘과 불암산에 활짝 열려있는 배밭사이 오솔길, 하늘길입니다.
26년전 시를 이렇게 강론에 인용하니 참 놀랍고 신기하니 이 또한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늘 읽을 때 마다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는 제가 참 좋아하는 시편 성구를 어제 낮기도 성무일도 시간에 만나 기뻤습니다.
“오 내 하느님, 당신 뜻을 행하는 것이 내 기쁨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To your will, O my God, my delight, and your law is within my heart
(시편 40,9)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마음마다 새겨져 있는 주님의 법, 사랑의 법입니다.
그러니 바로 참기쁨, 참행복은 주님의 법, 사랑의 법에 따른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길 말고는 연목구어(緣木求魚)일뿐 참기쁨, 참행복에 이르는 길은 없습니다.
바로 이를 깨달아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며 날로 주님과 사랑과 신뢰를 깊이했던 주님의 절친(切親)인 성인들이요 주님의 절친이 되는 것은 제 간절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무지도 허무도 탐욕도 아닌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누구나의 마음깊이 새겨져 있는 주님의 법, 사랑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랑밖엔 답이 없다, 길이 없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다윗을 비교하는 것이 이해의 핵심입니다.
다윗의 자유로운 처신을 능가하는 예수님의 저 자유로운 처신은, 안식일법을 상대화시키는 저 자유로움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할까요?
신기하고도 부럽지 않습니까?
답은 하나입니다.
이분들의 주님과 참으로 깊은 절친 관계에 있기에 저토록 자신감이 넘치고 확신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에 대한 주님의 신뢰와 사랑을 철석같이 믿는 자존감 충일한 삶이기에 저리도 추호의 망서림이나 두려움, 불안이 없이 당당합니다.
그대로 주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반영합니다.
주님의 신뢰와 사랑을 확신할뿐 아니라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던 두 분이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와 일치의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반영인 것입니다.
그러니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하닮의 여정이요,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분별의 잣대임이 오늘 복음 말씀이 그대로 입증합니다.
예수님 마음이 하느님 마음이요 예수님 사랑이 하느님 사랑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절대적 법은 ‘사람이 먼저’라는 사랑의 법이요, 사랑의 법 자체인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과연 어떻게 처신하였을까 생각하면 곧 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예닮의 여정중에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이 자유와 행복의, 분별의 요체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자유, 참행복, 참 분별의 지혜도 주님과의 깊어가는 우정과 함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안타깝고 아쉽지만 이점에서 실패한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사울입니다.
사무엘의 슬퍼하는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하느님께서 참 너무하시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우리에게 참 좋은 경고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주님의 마음은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떠났고 이 또한 엄중한 현실입니다.
사울의 부주의와 불순종으로 자초한 불행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매순간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보살펴야 한다는 진리를 배웁니다.
즉각적인 회개와 실행입니다.
하루하루 연장되는 날은 주님과 사랑을 새로이 깊이하라 주어지는 선물과 같습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공부와 사랑, 찬미와 감사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하고 있겠는지요?
이건 제가 참 많이 누누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성찰이 오늘 지금 여기서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나 교만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과의 사랑과 신뢰의 우정을 깊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주시리라.”
(시편 37,5)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천동설’과 ‘지동설’이 있습니다.
인류는 550년 전까지는 ‘천동설’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일출(Sunrise)와 일몰(Sunset)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천체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천동설’입니다.
이는 상식이고, 자명한 이치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천동설을 통해 별들의 움직임을 바라볼 때 몇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별의 ‘연주 시차’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계절 변화인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인류가 우주선을 발사하면서 우리는 아름다운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동설’은 지구 중심이라는 사고의 폭을 우주로 향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코페르니쿠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을 말할 때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코페르니쿠스의 발상의 전환보다 1500년 전에 이미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습니다.
왕이 사는 곳이 궁궐이 되듯이, 하느님의 아들이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고, 하느님의 아들이 지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성공, 재력, 권력, 명예, 능력, 지위, 업적은 우리들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서 섬기라고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하는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웃에게 주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가난한 사람, 박해를 받는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시는 행복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획일적인 가치와 제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은 기존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어떻게 해석하고 싶으신지요?
교회의 법과 규정은 별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까요?
‘안식일의 규정은 최소한의 것이지 좀 더 사랑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해석을 할까요?
저는 두 번째 의견에 저의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교회는 60년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공의회는 교회의 많은 규정과 법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하였고, 시대에 맞도록 바꾸었습니다.
전례, 신학, 타종교에 대한 교회의 시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들에 대한 해석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와 쇄신이 어떤 결과들을 가져왔는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우리가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교회의 전통과 관습을 너무 쉽게 버리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것들이 분명 도움이 되고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너무 절대시 하면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것들도 언젠가는 지나간 것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해석 기준은 좀 더 온전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 규정과 법을 넘어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자기 SNS 계정에 사람들은 많은 사진을 올립니다.
맛집을 찾아가 음식 사진을 찍고, 예쁜 카페에 가서 인증사진을 찍는 것도 필수라고 합니다.
멋진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 역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사진을 SNS 계정에 올려서 ‘좋아요’ 버튼이 눌러지면 기뻐합니다.
결국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올리는 것이 아닐까요?
즉, “나 이렇게 재미있게 살고 있다.”, “나 잘살고 있다.”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입니다.
저 역시 2,000년 초반부터 인터넷 안에서 활동하며 많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정보 제공이라는 목적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처럼 잘 살고 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비밀 없는 삶이 사제에게 필요하다면서, 사실은 저를 드러낼 수 있는 것만을 인터넷에 올리곤 했습니다.
지금은 제 사진을 잘 올리지 않습니다.
비밀 없는 삶은 사진을 올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마음에 담는 사진이 더 중요함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를 내려놓으니 훨씬 편안한 마음입니다.
새벽 묵상 글을 올린 뒤에도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지 않습니다.
오탈자가 있다고, 문장이 이상하다며 사람들이 메일이나 쪽지 등을 보내시고 댓글에 글도 남겨주시지만,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잘 확인하지 않습니다.
편하게 사는 삶은 나를 드러내는 삶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면서 내면의 나를 성숙시키는 삶이 가장 편안한 삶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강조하시고 또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이유도 우리가 이 세상을 편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신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드러내기보다 주님을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어 먹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항의합니다.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즉, 자기들은 이렇게 열심히 안식일 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고, 그에 반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형편없는 사람인 것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그런데 안식일에서 인간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열심’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도 남은 틀렸고 나만 옳다는 식의 생각을 갖곤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편하게 살지 못합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의 삶을 살 때, 주님과 함께하면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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