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에서 만나는 의사과학자
조동찬 SBS 의학전문기
나의 형이 건물이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 아버지는 키가 크는 꿈이라고 했다. 형처럼 내게도 부쩍 키가 크는 시기가 찾아왔고, 나 또한 떨어지는 꿈을 자주 꿨다. 그런데 떨어지는 장소가 달랐다. 절벽, 다리 등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별들이 가득한 우주 속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TV 〈스타워즈〉 시리즈를 유독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인지 별이 가득한 하늘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 난 후에는 행복감까지 느꼈다
수학으로 푸는 옐로스톤의 황홀경
미국 연수 시절, 7월 한여름에 ‘옐로스톤’을 찾았다. 연수생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호텔 대신 캠핑을 선택했다. 주변 호텔은 하루에 50만 원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웠지만 옐로스톤 내부의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한 캠핑장은 하루에 2만 5천 원 정도면 이용할 수 있었다. 월마트에서 8만 원짜리 텐트를 구입했고, 겨울옷 몇 개를 챙겼다. 일교차가 크다고 해도 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으니, 방한용품을 따로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첫날 밤, 저렴한 텐트는 바깥 찬 바람을 막아주지 못했다. 바닥에서는 땅의 찬기운이 고스란히 올라왔다. 겨울 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지만 더는 견딜 수 없어 자동차로 이동해야겠다고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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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로스톤 국립공원의 파이어홀 강 ⓒ옐로스톤국립공원 제공 by Neal Herbert |
텐트 문의 지퍼를 내리는 순간, 황홀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밤하늘이 온통 노란 별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옐로스톤이란 이름이 노란 밤하늘에서 따온 것처럼 느껴졌달까? 고개를 들자 별들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별의 바다로 떨어지는 꿈을 깨어 있는 상태로 꾼 듯했다.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주인공 오펜하이머는 우주 속으로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그는 그 꿈을 수학적으로 되새긴다. 그 결과 별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블랙홀을 풀이한다. 우주의 원리로 통하는 사다리가 오펜하이머에게는 바로 수학이었던 것이다. 핵분열과 핵융합, 이것의 결과물이 인류에게 이로운 것인지에 대한 논란은 그대로 두더라도, 분명 미분과 적분을 기본으로 하는 수학의 성과였다. 내가 밤하늘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서도 우주의 원리에 접근하지 못했던 것은 수학의 사다리에 오를 생각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폐암을 미리 진단하는 AI
정상으로 판독된 2만 7천여 장의 폐 컴퓨터단층촬영(CT) 사진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모두 몇 년 전에 촬영된 것들이라서 이후 폐암이 새로 생긴 사례도 있었다. 미국 MIT대학교 연구팀은 자신이 개발한 인공지능(AI) 시빌(Sybil)에게 폐 CT를 다시 판독하게 했다. 정상으로 판독된 과거의 CT 사진으로 누가 폐암에 걸릴 것인지를 묻기 위해서였다. 시빌은 평면으로 찍힌 CT 사진을 3차원으로 재구성했다. 단층 촬영은 3차원 물체를 평면으로 잘라 나열한 것이라서 이를 다시 3차원으로 되돌리는 일이 시빌에게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단순한 작업이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냈다. 시빌은 정상으로 판독된 폐 CT 사진을 보고 1년 이내에 폐암 발병 여부를 86~94%까지 정확하게 예측했다(Sybil: A Validated Deep Learning Model to Predict Future Lung Cancer Risk From a Single Low-Dose Chest Computed Tomography). 폐암의 사망률이 유독 높은 것은 초기 진단이 어렵기 때문인데, 이는 폐암의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성과였다. 인공지능의 기본이 수학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고, 인공지능이 사람의 직관적 상상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것도 수학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3차원 공간에서 살아온 인간은 4차원, 5차원을 떠올리기 어렵지만 수학적으로 4차, 5차 방정식을 만드는 건 쉬운 것과 같은 원리다. 연구팀이 “시빌은 전문의가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스캔 결과를 분석한다”라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금은 정년 퇴임한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신창수 교수가 기억과 망각에 관한 방정식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이 논문에서 신 교수는 ‘사람의 기억은 과거에서 온다’는 정신분석학 이론과 ‘모든 존재는 확률적으로 자리한다’는 양자역학을 전제로 하고, 사람의 기억의 축적을 적분 방정식으로 만들었다. 같은 일에 대해서도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점에 따라 다르다. 기억은 개별 사람의 적분 방정식에서 특정 시점에 대한 미분값이라고 할 수 있다. 망각은 바로 미분값이 제로가 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 교수는 제로가 되는 시점을 책 한 권 분량의 수학적 풀이로 밝혀냈다. 바로 현실 세계 시간의 흐름이 뒤죽박죽됐을 때였다. 예를 들어 ‘t1, t2, t3, t4…’의 흐름이 유지되면 중간중간 기억이 사라질지라도 미분값이 0이 되지는 않았지만, ‘t4, t1, t3, t2…’처럼 시간의 흐름이 바뀌면 0이 되었다.
이 수학 방정식은 놀랍게도 현대 의학이 풀지 못했던 치매 현상을 최초로 설명했다. 치매의 3대 증상은 시간, 장소, 사람에 대한 ‘혼돈(disorientation)’인데, 시간에 대한 혼돈이 먼저 오고 그 이후 장소, 사람에 대한 혼돈이 뒤따른다. 의사들은 치매 환자 경험을 통해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그런데 뚱딴지처럼 나타난 수학 방정식은 ‘망각은 기억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기억의 순서가 뒤바뀔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가설로 평가받고 있지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들은 신 교수를 초청해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수학이 치매 연구와 처음으로 마주한 역사적인 자리로 기록될 것이다
의사과학자 양성이 성공하려면
의과대학 증원을 두고 의료 대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의사과학자 얘기도 자주 등장한다. 의사과학자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생리학, 약리학, 생화학 등 과학을 전공하는 의사를 말한다. 미국, 독일, 일본처럼 항암제, MRI, 중입자 치료기 등 현대 의학의 성과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의사과학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연수를 가기 전까지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국 MIT대학교에서 의학과 과학이 융합하는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그곳에서는 과학이 의학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을 탄탄하게 전공한 과학자들이 의사들과 이야기하며 의사들이 생각하지 못한 과학적 접근법으로 인체의 신비를 풀어내고 있었고, 그들의 칠판에는 수학 공식이 가득했다.
“암세포는 보통 세포보다 음전하 값이 큽니다. 그래서 음전하를 띤 약물이 암세포에 도달하지 못하는 거예요. 이걸 해결하면 항암제가 훨씬 잘 들을 거예요. 또 몸 전체에 정상적인 음전하 지도를 만들어내면, 음전하가 커지는 순간 바로 암을 진단할 수도 있을 거예요.”
자신의 박사 논문 주제를 설명하는 MIT 공학도에게 의사 면허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빌 논문의 제1, 2 저자는 의사 면허가 없다. 의사과학자 양성에 반대하지 않지만, 이것이 성공하려면 과학자가 먼저 활개를 쳐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에서 수학이 번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 이 원고는 월간 <과학과기술> 5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