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했는데도 불구하고, ~~했다면, ~~하겠다. 너무 복잡하다. 진리는 심플하다. ‘사랑한다’고 하면 그만이다. 만약 ~~하면, 그러면 그때는 사랑할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유희다. ‘If ~~, then ~~’형식의 조건문이다. 조건문의 형식으로 된 화법은 진정성이 없다. 그래서 칸트는 도덕법칙이 조건명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조건적으로만 타당한 행위는 도덕적일 수 없다. ‘당신이 원한다면 내가 약속을 지킬께’라고 한다면 이건 도덕법칙일 수 없다. 도덕법칙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해야 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 자체가 도덕법칙이라서 지키는 것이지 다른 조건 때문에 지키는 건 아니다. 신용을 얻어 돈을 잘 벌기 위해 약속을 잘 지키는 건 도덕적일 수 없다. 아무 조건이 없는 화법이 갖는 진정성이다.
만약 내일 비가 오면, 소풍 가지 않는다. 내일 비가 오면 소풍을 가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 그런데 내일 비가 안 오면 소풍을 가야 한다. 적어도 논리적으론 그렇다. 그런데 눈이 오면 가야 하는가? 야구공 크기의 우박이 떨어져도 가야 하는가? 눈도 우박도 안 오지만 심한 미세먼지가 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조건이 많을수록 따질 일이 많아진다.
나는 옳은 방향으로 가는데, 만약 당신이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러면 당신 뜻을 잘 헤아리겠다는 식의 상황이 복잡한 화법은 듣는 사람에게 진정성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또렷하다. 아무 조건 없이 내가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앞으론 내 생각을 바꾸겠다. 그래야 진정성을 느낀다. 속도보단 방향이 중요하다. 좀 느리면 어떤가? 그런데 그 방향이 옳지 않다면, 당장 바꾸어야 한다.
소통 화법 중 가장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말이 ‘설득’이다. 설득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자신의 주장이 참이라고 설득하는 화법이다. 내가 가는 방향이 옳으니 따라와 달라는 식의 설득은 자기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정해 놓고 설득하는 건 마차가 말을 끄는 형국이다. 상대는설득의 대상이 아니다. 상대를 설득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그 상대를 설득되기 좋은 대상으로 만드는 어법을 동원해야 한다. 상대 입장을 헤아리지 않고 설득하기 좋은 대상으로 가공된 일종의 허수아비와 소통하는 꼴이 된다.
설득은 소통이 아니다. 소통의 형식을 취하더라도 일방적 소통은 결국 설득이다. 연출된 소통 역시 계량된 설득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씩 내어주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결과를 끌어내는 걸 연출하는 것 역시 소통으로 위장된 밀당이다. 연출된 기자회견이 그렇다. 진정한 소통은 내 생각이 상대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그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성 있는 소통의 문이 열린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과 소통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건 말만 소통이지 독백이다.
뮌히하우젠이 말을 타고 가다가 늪에 빠졌다. 늪에서 빠져나가려면 위에서 잡아당겨야 하고, 위에서 당기려고 하면 늪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형국이다. 독백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독백의 늪으로 빠져든다. 《뮌히하우젠》은 18세기 독일의 실존 인물인 허풍쟁이 뮌히하우젠 남작을 소재로 쓴 소설로 당시의 부패한 상류계층을 풍자한 작품이다.
우린 서로에게 진정성을 느낄 때 감동한다. 색바랜 거친 이념적 어휘는 이제 더 이상 국민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누군 옳고 누군 나쁘다는 이분법적인 분열의 언어는 국민을 피곤하게 한다. 자고 나니 후진국인 대한민국을 힘겹게 살아내는 국민에게 정작 필요한 건 온기 가득한 라떼 한 잔 같은 공감의 언어다. 이제 광기 가득한 언어를 거두어들일 때다.
첫댓글 아무리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정보화시대라지만,
여전히 진정성이 가장 귀한 것임을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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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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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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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