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AI의 역사] #7. 게임에서 발견한 AI의 가능성
진용주
데미스 하사비스, 체스 천재에서 인공지능의 새로운 개척자로
게임업계에서 맛본 성공과 실패, 대중의 몰이해에 실망한 천재
기억과 상상력의 관계, 하사비스가 인지신경과학에서 주목한 것
딥마인드 설립, 알파고 vs 이세돌 대국으로 세계적으로 조명받기 시작
사람들에게 AI의 충격적인 등장을 상징하는 장면은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알파고가 간단히 이세돌 9단을 제압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바둑은 인류가 만들어낸 게임 중 가장 복잡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기는 것이 어려울 거라 예상되던 가운데 나온 결과였다. 이는 구글 딥마인드가 거둔 성공이었고, 이 뒤에는 체스 천재로 어려서부터 재능을 뽐냈던 데미스 하사비스의 도전이 있었다. 학자들의 세계에서 게임 키드의 세계로 내려온 AI의 새로운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편집자 주]
인류는 어느 순간 신과 같은 전능한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과 조우하게 될까? '신의 관점에서' 운영하고 플레이하는 게임 <테마파크>의 개발자 데미스 하사비스가 인공지능 발전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자기만의 역할을 했다는 건 기묘한 아이러니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 사진=셔터스톡
영국에서 태어난 또 하나의 천재
1976년, 영국 런던에서 한 천재가 태어났다. 키프로스 출신의 그리스인 아버지와 싱가포르 출신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데미스 하사비스가 그 주인공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자란 하사비스는 어릴 적부터 특별한 재능이 엿보였다.
4살 때 처음 체스판을 접한 하사비스는 순식간에 두각을 나타냈다. 놀라운 속도로 실력을 쌓은 그는 13세 때 이미 세계적인 고수 수준에 도달했고, 영국 주니어 챔피언십을 휩쓸며 체스계의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재능은 체스만이 아니어서 수학과 과학에서도 또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고등학생이 된 하사비스는 체스 대회 상금을 모아 싱클레어 ZX 스펙트럼을 구매했다. ZX 스펙트럼은 1980년대 초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8비트 컴퓨터였다.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ZX 스펙트럼으로 처음 프로그래밍을 접했는데, 사용자들은 BASIC이나 어셈블리어를 통해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다. ZX 스펙트럼을 손에 넣은 하사비스는 프로그래밍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밤늦게까지 코딩에 열중했다. 체스에서 보여준 놀라운 집중력은 프로그래밍에서도 이어졌다.
하사비스의 비범한 재능은 학업에서도 빛을 발했다. 또래들이 고등학교 과정을 밟을 때, 그는 이미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국의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하사비스에게 작은 난관이 찾아왔다. 너무 어린 나이였던 탓에 입학을 1년 미뤄야 하게 됐다. 케임브리지행은 좌절됐지만 하사비스는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그리고 운명처럼 기회가 찾아왔다. 불프로그 프로덕션에서의 인턴십은 그의 미래를 바꾸는 첫 번째 계기였다. 바로 비디오 게임과의 만남이다.
불프로그 프로덕션의 스타
1987년, 피터 몰리뉴와 레스 에드가가 공동 설립한 불프로그 프로덕션은 영국 게임 업계의 신흥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특히 1989년 발표한 ‘포퓰러스(Populous)’는 획기적인 신개념 게임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포퓰러스는 신의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가 세계를 경영하고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독특한 콘셉트로, 많은 게이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사비스는 불프로그에서 ‘테마파크’라는 게임을 통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테마파크를 신의 관점에서 디자인하고 경영을 시뮬레이션하는 것으로 유명한 롤러코스터 타이쿤류 게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이 게임에서 하사비스는 뛰어난 게임 디자인 감각을 발휘했다. 아이디어 하나하나에 그의 창의성이 빛났고, 게임 메커니즘은 세심한 디테일로 작동했다. 또한, 까다로운 게임 로직도 놀랍도록 간결하고 효율적인 코드로 구현해내고, 나이에 걸맞지 않은 리더십까지 보여주면서 불프로그의 피터 몰리뉴의 눈에도 최고의 인재로 각인되기 시작한다. '테마파크'는 출시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데미스 하사비스라는 이름 역시 영국의 게임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프로그에서의 경험은 하사비스에게 게임 디자인의 기본기를 다지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도 키워주었다.
불프로그에서의 성공적인 경험은 하사비스에게 자신감과 열정을 심어주었다. 게임 업계에서 충분히 커리어를 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학업에 대한 미련도 남아있었다. 결국 그는 캠브리지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1997년, 하사비스는 캠브리지대학교를 컴퓨터 과학 전공으로 졸업했다. 졸업하면서 마치 전리품처럼 2개의 업적도 획득했는데, 캠브리지 트리포스(Cambridge Tripos)와 더블 퍼스트(Double First)가 그것이다. 캠브리지 트리포스는 캠브리지대학교의 독특한 시험 체계로, 한 마디로 하자면 만능교양인, 척척박사를 인증해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매우 어렵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하사비스는 뛰어난 실력으로 이 시험을 통과했고, 심지어 최우등 성적인 더블 퍼스트(Double First)까지 받았다.
불프로그에서 쌓은 실전 경험과 캠브리지에서 다진 이론적 지식. 이 두 가지는 하사비스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 큰 자산이 되어주었다. 게임 업계에서의 성공과 학업에서의 우수성을 모두 잡은 하사비스의 다음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불프로그의 전설적인 게임 <테마파크>의 게임 속 장면.
세계적 이슈가 된 게임들의 개발과 창업의 길
캠브리지 졸업 후, 하사비스는 피터 몰리뉴, 마크 웹리, 팀 랜스, 스티브 잭슨이 1997년 설립한 라이언헤드 스튜디오에 합류했다. 이 스튜디오는 '갓 장르(God Genre)'로 불리는 독특한 게임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 중 대표작이 바로 '블랙 & 화이트'였다.
하사비스는 이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하며 게임 디자인과 프로그래밍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그가 구현한 AI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이었다. 플레이어의 행동을 학습하고 반응하는 크리쳐의 지능적인 행동은 게이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블랙 & 화이트'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하사비스의 역량도 크게 주목받았다.
그러나 하사비스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1998년, '블랙 & 화이트' 개발이 한창이던 중 엘릭서 스튜디오를 설립한다.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실현시킬 수 있는 독립 스튜디오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엘릭서 스튜디오의 시작은 순조로웠다. 하사비스의 이름값 덕분에 비방디, 마이크로소프트 등 대형 퍼블리셔들과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특히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 '리퍼블릭: 더 리볼루션'은 업계의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지나치게 혁신을 추구한 나머지 개발 기간이 계속 늘어났고, 예산 역시 초과되기 일쑤였다. 결국 '리퍼블릭: 더 리볼루션'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완성도로 출시되고 말았다. 하사비스는 야심찬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또 하나의 기대작이었던 '이블 지니어스' 역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다. 게임성보다는 기술혁신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대중성을 잃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엘릭서 스튜디오의 두 프로젝트는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하사비스는 큰 좌절을 맛보았다.
엘릭서 스튜디오에서의 실패는 하사비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특히 '리퍼블릭: 더 리볼루션'의 실패는 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 게임에 심혈을 기울였고, 게임 디자인에 자신만의 철학을 담고자 했다. 정치, 사회, 경제 등 복잡한 주제를 게임 메커니즘에 녹여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게이머들은 '리퍼블릭'의 심오한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순히 재미와 쾌감을 찾았지, 게임 속에 담긴 하사비스의 통찰을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이는 하사비스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다. 자신이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대중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하사비스는 게이머들의 이런 반응을 보며 회의감을 느꼈다. 그들의 '경박함'에 실망했고, 게임이라는 매체의 한계를 절감했다. 아무리 혁신적인 게임을 만들어도 대중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런 좌절감은 하사비스로 하여금 게임업계 자체를 떠나게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게임 개발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그는 인공지능 연구에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게임보다는 AI야말로 자신의 아이디어와 철학을 구현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사비스는 곧 AI 연구에 있어 인간 두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처럼 사고하고 학습하는 AI를 만들기 위해서는 뇌의 작동 방식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그는 인공지능 연구에 뇌과학이라는 기초를 다지기로 마음먹는다.
세계적인 인지신경과학 분야 연구자
데미스 하사비스는 게임업계에서 좌절을 겪은 후, 2009년 런던대학교(University College London, UCL)에서 인지신경과학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그의 지도교수는 엘리너 마과이어(Eleanor Maguire)였다. 박사과정에서 하사비스는 상상력, 기억 그리고 기억상실증에 대해 깊이 있게 연구했다. 특히 그는 기억상실증 환자들의 미래 상상 능력 저하에 주목했다. 이는 기억과 상상력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하사비스는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마음의 시뮬레이션 엔진(simulation engine of the mind)'이라는 개념을 정립했다. 이는 우리의 뇌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시뮬레이션하는 일종의 '가상 기계'라는 아이디어였다.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연구로는 과거 경험의 회상이 미래에 대한 상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탐구한 것이다. 이 연구에서 하사비스 팀은 기억과 상상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 사이에 밀접한 연결고리가 있음을 밝혀냈다. 이는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상상하는 우리 뇌의 놀라운 능력을 설명하는 단서가 되었다.
박사 과정 동안 하사비스가 발표한 논문들은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네이처》, 《사이언스》, 《뉴런》 등 저명한 학술지에 그의 연구 결과가 속속 게재되었고, 동료 과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하사비스가 신경과학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통찰력을 가진 인물임을 입증한 것이었다.
박사 후 연구로 미국의 UCL을 선택한 이후 하사비스의 연구는 MIT, 하버드 등에서 계속 이어졌다. 이 시기 하사비스는 인지신경과학 연구의 지평을 더욱 넓혀갔고, 인간 두뇌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했다. 그가 제시한 '마음의 시뮬레이션 엔진'은 기억과 상상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는 이후 그가 딥마인드를 통해 혁신적인 AI 기술을 개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개념적 토대가 되었다.
인지신경과학자로서 빼어난 성과를 보여준 하사비스의 업적은 단순히 AI 기술의 발전을 넘어, 인간 마음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뇌에 대한 그의 통찰은 기계가 어떻게 인간처럼 사고하고 학습할 수 있을지에 대한 난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되고 있다. 게임에서 좌절을 맛본 그에게 인지신경과학은 새로운 희망이자 창조의 원천이 되어준 셈이다. '마음의 시뮬레이션 엔진'이라는 독창적 개념의 정립은 하사비스가 이뤄낸 인지신경과학계의 한 획을 그은 성과로 기억될 것이다
딥마인드의 시작
2010년, 데미스 하사비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 중 하나를 내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딥마인드(DeepMind)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UCL에서 인지신경과학 연구를 진행하며 쌓은 통찰을 바탕으로, 그는 이제 인공지능 분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사비스가 딥마인드를 설립하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인간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을 모사한 AI 시스템을 구현하고 싶었다. 기존의 AI 연구가 특정 도메인에 국한된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면, 하사비스는 보다 일반적이고 유연한 지능을 가진 AI, 즉 AGI(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를 목표로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하사비스는 뜻을 같이할 동료들이 필요했다. 그는 쉐인 레그(Shane Legg)와 무스타파 슐레이만(Mustafa Suleyman)을 공동창업자로 영입했다. 레그는 뉴질랜드 출신의 컴퓨터 과학자로, AGI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슐레이만은 옥스포드대를 졸업한 엔트리프레너로, 사회적 임팩트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AI의 가능성과 그것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다. 레그의 이론적 전문성, 슐레이만의 비즈니스 감각, 그리고 하사비스의 창의적 리더십이 합쳐지면서 딥마인드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창업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충분한 자금을 확보하는 일이나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는 것 등등 과정이 험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움 속에서 더욱 단단해졌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더해갔다. 딥마인드의 시작은 AI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하사비스와 그의 동료들이 씨앗을 뿌린 그날부터, AI 기술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들이 걸어갈 길은 멀고도 험난할 것이었지만, 그 끝에는 인류의 미래를 바꿀 혁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딥마인드의 여정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우주 시대가 임박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우리 세대의 가장 큰 개척지는 마음과 뇌, 즉 내면의 공간입니다.” WIRED2014 무대에 데미스 하사비스(왼쪽)와 함께 연단에 오른 구글 머신러닝 전문가 블레이즈 아구에라 이 아르카스의 말이다. 하사비스와 아르카스는 체스를 좋아하고 우주 침략자를 좋아하며 차세대 인공지능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는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