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북의 진격
북의 공격은 순식간에 한반도 전역을 휩쓸어 버렸다.
전선은 점점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다.
낙동강의 지리적인 잇점과 미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벌교에서도 국군이 물러간 곳에 인민군이 들어왔다.
산에서 활동하던 남로당 공산주의자들도 들어왔다.
그들은 곧 전쟁이 그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것에 한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때문에 염상진을 비롯한 그들은 인민해방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먼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지주와 권력에 빌붙어 백성을 괴롭힌 자들에 대한 인민재판을 실시하여 처단하였다.
이로 인해 공산주의자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너무나 엄격한 원칙이
간혹 백성들에게 반감을 주기도 하였다.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융통성이 필요한 것인데,
이제 막 갖추어진 사회주의 시스템은 자신의 시스템이 완벽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싶다.
모든 사회 시스템은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됨을 인지해야 한다.
아무튼, 벌교에 자리잡은 좌익 세력은 더욱 조직을 강화하였다.
그것은 남자들 뿐만 아니라 아녀자들도 포함되었다.
이지숙은 벌교에 다시 돌아와 여맹위원장을 맡고, 여맹을 하였다.
이 여맹에는 소화도,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도, 죽은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도 가입하였다.
그들 또한 전쟁은 북의 승리로 한반도가 통일되면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염상진의 아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염상진의 아내라는 이유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확실히 전쟁이 끝나지 않을 때까지 좌익활동에 동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여맹도 가입하지 않았다.
한편, 일제시대때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갔다가 행방불명이었던
김범우의 형 김범준이 벌교에 돌아왔다.
그는 인민군 장교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김범준의 출현은 벌교의 좌익활동에 더욱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다.
1. 남의 반격
김범우는 손승호와 함께 귀향하기로 하였다.
이제 완전히 공산주의 세상에 된 마당에 손승호는 김범우에 당원이 될 것을 부탁하지만,
김범우는 끝내 거절한다.
하지만, 손승호의 일을 도와주기는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리에서 박두병을 만나 공산당의 문화선전부에 일을 맡게 된다.
박두병.
그는 김범우와 일제시대 미국에서 OSS첩보원 교육을 함께 받고,
해방이 되면서 함께 포로수용소로 넘어가 같이 있던 친구였다.
박두병과 연락이 끊어졌었는데,
그를 그곳에서 만난 것이다.
박두병도 산으로 들어가 좌익활동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뜻밖의 소식이 날라온 것이다.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그것이다.
북에서 온 사람들의 방심인가?
정보력 부족인가?
막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인천을 공격한 미군에 대항할 수 없었다.
인천 상륙에 성공한 연합군은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여
3달만에 다시 서울 점령에 성공한다.
이것이 1950년 9월 28일 있었던 서울수복이다.
예상치 못했던 공격에 공산당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단단할 것만 같았던 조직력은 와해되었다.
그러다보니 낙동강전선에서도 더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거기에 미군은 전투기까지 투입하면서 인민군의 후퇴는
얼마 전의 전진만큼 빨랐다.
김범우와 손승호 일행도 급격하게 움직였다.
사태파악을 위해 김범우는 군산에 다녀왔는데,
이리에 도착하자, 손승호, 박두병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대피한 것이다.
김범우에는 아무런 쪽지도 남기지 않았다.
김범우는 그런 그들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들이 자신을 위해 일부러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김범우는 우선 발을 고향으로 돌리기로 하였다.
이미 점령군이 된 미군이 아녀자를 폭행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저지하였다.
그는 미군들과 실랑이를 벌였는데, 지나가던 미군장교까지 끼어들었다.
김범우의 영어실력을 보고 미군장교가 그에게 추궁하자,
김범우는 OSS첩보훈련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였다.
미군장교는 김범우를 데리고 가 통역을 시켰고,
그 명령에 김범우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김범우는 다시 미군들과 함께 북으로 향하게 되었다.
한편, 손승호, 박두병은 북으로 넘어가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하여 산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는 그들 뿐만 아니라 벌교에 있는 염상진 일행도 마찬가지 방법이었다.
그들이 국군의 공격을 피하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인민군이 주둔했을 때 이미 많은 백성들이 공산당에 입당하여
이번에 산으로 대피할 때는 그 수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위험을 무릎쓰고, 곧 겨울이 다가올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염상진은 30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산으로 대피하게 된다.
...
서울에 있던 이학송은 해방신문사에서 같이 일하던
김미선 등과 함께 평양을 향해 피난을 갔다.
전투기를 앞세운 연합군과 국군의 기세는 쉼없이 북진하고 있었다.
이학송 일행은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평양을 지나 계속 북쪽으로 향했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시작된 그들의 피난길은
압록강까지 이어졌고, 거기서 중공군을 만나게 되었다.
2. 복수의 복수
인민군의 후퇴하면서, 벌교도 다시 국군이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피난갔던 지주들도 돌아왔고, 경찰들도 돌아왔고, 청년단 염상구도 돌아왔다.
지주들은 토지개혁했던 땅을 다시 빼앗았다.
그리고, 국군들은 좌익이 차지했던 3달 동안 좌익을 도왔던 사람들, 즉 부역자를 색출하였다.
이는 국군이 다시 점령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다시 복수의 칼을 든 것이다.
인민군이 점령할 때는 국군에 도움을 준자가 도망을 가고,
국군이 점령할 때는 인민군에 도움을 준자가 도망을 가고,
가운데서 백성들만 죽어났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남쪽에 살고 있는 이들의 처지에서 북은 적이었다.
북쪽에 살고 있는 이들은 처지에서 남은 적이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남에 살고 있는 힘없는 백성들,
북에 살고 있는 힘없는 백성들,
그들은 아무 죄가 없다.
단지 그곳에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인민군의 손에, 국군에 손에, 그리고 미군의 손에
너무많이 죽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 이후로 남북이 갈라져 지금까지 왔다.
후세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까?
'남북한 시대'로 정의할까?
한나라 두개의 정부?
우리는 씁쓸한 현실을 살고 있다.
거대한 대륙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에서 그깟 사상의 벽때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발이 묶여
출발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좁은 땅에서 살고 우리 백성들의 생각 또한 점점 작아지는 게 아닌가 싶다.
생각없는 백성이 되기 싫다.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태백산맥>을 다시 읽으면서,
다시한번 우리 현대사의 억울하고 안타까운 순간들이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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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 태백산맥 7
지은이 : 조정래
펴낸곳 : 해냄
펴낸날 : 1995년 1월 15일 (2판본)
정가 : 6,800
독서기간: 2007.12.19 - 2007.12.22
페이지: 371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