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술꾼들 이야기
여전히 대한민국의 정세는 시끄럽기만 했다.
제 5 공화국은 국민의 시선을 정치가 아닌 사회이슈로 돌리기에 항상 바빴다.
서진 룸 사롱 사건으로 8월과 9월을 고스란히 언론을 빼곡히 장식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영화 '대부' 에서나 있을법한 깡패조직 들의 파벌 싸움은
신동아 라는 월간 잡지에 까지 특별히 기고된 히라소니 이후의 최고 쌈꾼의 죽음 이라고
개재가 되면서 한동안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시류(時流)는 이런 삼류 만화 같은 이야기만으로는
민주화를 부르짖는 국민의 열망 앞에 그렇게 오래 가진 못했다.
이 정권의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대학생들 이였다.
봄부터 시작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화 운동이 고양되기 시작 하더니
결국 전국26개 대학생들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애학투)’ 결성식을 가졌다.
제 5 공화국 정권으로서는 대학생들이 대립 되는 가장 거추장스러운 세력 이였다.
경찰이 겹겹이 포위하여 빠져 나갈 구멍이 없게 밀어붙이자
학생들은 모두 건물로 밀려들어 갔고 전원 연행 구속 되어 결국 굴비 엮듯이 끌려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 금강산 댐 사건을 발표 하였다.
보수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건대 사태'를 있는 힘껏 왜곡되고 과장 되게 보도 했고
T. V 에서는 음산한 음악과 함께 건대 옥상에서 구호를 외치는 학생들의 모습과 함께
'북괴는 물 침략까지 준비 하는데 철딱서니 없는 학생 놈들이 뭘 믿고 그러느냐' 라고
마치 학생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행동 하는 것처럼 일제히 보도했다.
급기야 재야 민주화 운동의 산실 이라고 할 수 있는 '민통련' 까지 해산 명령이 떨어지면서
격렬하고 투쟁적 이던 민주화 운동가들의 모습은
하나 둘씩 주위에서 모습이 사라지는 형국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건설부 장관은 기자 회견을 발표 하고 북괴가 쌓으려는 2백억 톤의 물을 담은
거대한 금강산댐이 무너질 경우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완전히 황폐화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이 올수 있다고 경고 했고,
언론은 수공(물 침략)과 물 폭탄에 대한 불안과 공포 분위기를 확대 하였다.
댐이 터지면 중부권 일대가 물바다가 되고 서울의 63 빌딩이 허리까지,
그리고 국회 의사당은 그 형태를 볼 수 없게 된다고 가상의 그림 까지 만들어
방송 하였고 급기야 T. V 카메라가 어린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돼지 저금통을 깨서 성금을 내고 봉급에서 본인들의 의사도 확인 하지 않고
성금을 원천 징수 하게 되었다.
대응댐 으로 평화의 댐을 쌓자는 성금 걷기는 범국민 운동의 일환이 되어 가고 있었다.
여전히 5 공화국의 언론은 정확한 판단과 이성의 잣대를 깊은 골방에 쑤셔 넣어 두고 보이는
현상만으로 검증 없이 그 역할에 충실 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아침이면 700호실로 출근 하여
한중사가 가져다주는 대한민국에서 발행 되는 모든 일간지로
오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런 저런 기사를 보면서도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애국 이라는 큰 명제로 일한다는
나도 모르는 잠재의식이 있었다.
그렇다고 고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선은 이방을 채울 직원들부터 뽑아야 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일에 대한 확실한 계획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을 하는 직원들 보다 일에 대한 큰 밑그림을 그리는 게 급선무 이었다.
그 그림에 맞추어 직원도 뽑아야 할일 이였다.
과연 어떻게 해야 그림을 회수 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의 부터 찾아야만 했다.
기삼이 에게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책상에 있는 부저를 눌러 한 중사를 불렀다.
"오늘은 좀 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하는 일 없이 출근 했다가 줄창 담배만 피우다 가는 사장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 하지 않아?"
"저는 군인이고 사장님은 제 직속상관입니다. 괜찮습니다."
"군인이라도 한 중사는 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은데…
뭐랄까 처음 시집가면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하는 식으로 모든 걸 꾹 참고 묵묵히 일만 한다고 해야 하나?
처녀 에게 시집 이야기해서 그렇긴 하지만…"
"팀장님께서는 사장님께서 한 3개월 이렇게 고민 하실 거라고 하던데… "
"그래? 3개월씩 이렇게 머리 싸 메고 고민해야 된다고? ㅎㅎㅎ "
그놈은 벌써 내가 어떻게 할 거 라는걸 이미 짐작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놈은 벌써 방법도 연구를 해 놨을지 모른다.
"그래 한 중사… 일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도통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실마리를 찾을 수 가 없다…
이럴 땐 어떻게 하라고 지시 한건 없었나?"
"예. 그런 건 없었습니다."
"한 중사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 내 입장 이라면 말야."
"저라면… 답답한 사무실 책상 보다는 제주도나 탁 트인 곳으로 여행을 하시면서
구상 하 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탄성이 나왔다. 뒤를 이어 이야기 하는 한 중사의 간단한 조언은
나를 사무실 밖으로 밀어 내기에 충분 했다.
"어디에 계셔도 저에게 연락 주시면 무엇이든지 도와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남에게 명함을 드릴 때는 꼭 준 사람에 대해
저에게 이야기만 해 주시면 제가 참고하고 전화 받는데 실수가 없게 하겠습니다."
마치 당장 떠나라는 명령 같았다.
그래 당장 떠나 보자.
그녀는 경험이 많은 노련한 투우사처럼 나를 자기가 유도 하는 방향으로
빨간 천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빨간 천 뒤에 더 붉은 피를 뽑아 낼 수 있는 칼이 있을 것 같기도 한
한중사의 날카로움 까지 느껴졌다.
그래. 이 혼란스러운 서울의 도심을 떠나서 좀 여유로운 곳에서 계획을 짜 보자.
부동자세로 서 있는 한 중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한중사 라면 이럴 때 어디로 여행을 떠날 것 같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망설이지 않고 짧게 끊어서 대답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일요일 같은 때 한중사와 연락을 하려면 어떻게 하지? 긴급 하게 말야."
"어느 곳에 계시든지 114에 전화를 걸어서
지금 사장님께서 가지고 계신 조사원 신분증의 일련번호를 이야기 하시고
녹음을 부탁드리면 됩니다.
제가 4시간에 한 번씩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런 것도 가능 한가?"
"예. 전화국에서 저희 요원들의 음성을 직접 녹음 시켜서 전달 해 줍니다."
속으로 많이 놀랐다.
전국 어디서나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가 연락을 할 수 있는 기가 막힌 통신 수단 이였다.
114는 요금이 전혀 들지 않는 번호 였다.
공중전화 에서는 동전이 다시 흘러나오는 번호다.
"한번 시연해 줄 수 있나? 이 자리에서. 난 한 번도 사용해 보지를 않아서 말이야."
"간단합니다. 114 에 전화 하셔서 '통신 보안 좌표 NS' 다음에
사장님의 신분증 번호를 이야기 하시고 녹음을 부탁드리면
그쪽에서 녹음 준비 되었다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그러면 저에게 하시고 싶은 말을 하시면 됩니다."
"통신 보안 NS? "
"예 그렇습니다.N.S 는 National Security 약자 입니다."
"그러면 한 중사는?"
"예. 저는 사장님 신분증 번호로 입력된 음성을 다시 확인 할 수 있습니다.
24시간이 지나 면 음성은 자동 삭제되고, 2
4시간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으면 다시 녹음해야 합니다.
지금은 통신 보안 때문에 잘 사용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 방법은 보안이 되질 않습니다.
꼭 전화국 직원을 통해야 하고 그 직원들 자체가 위험한 노출 상태라 잘 사용 하지 않는
고전적 수법입니다만 사장님 같은 분은 공개가 되어도
큰 무리가 없는 보안 이라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용 하시는 데는 약간의 주의는 필요 합니다."
고전적 수법 이라는 말에 처음 놀랬던 느낌 보다 더 놀라운 느낌 이였다.
아마 지금은 내가알지 못하는 더 빠른 연락 체제로 서로가 연락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런걸 꼬치꼬치 묻는 것도 사장으로서의 체통이 아니겠다는 생각에 묻지 않았다.
"고마워요.
그리고 한 중사 말처럼 며칠 사무실 밖에서 좀 차분하게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돌아 올 테니까…
내가 궁금 한게 있으면 그때그때 연락을 할 테니까 좀 알려 줘요. 나가 봐요."
"예"
이제 진짜 이 사무실을 벗어나야 할 것 같다.
차분하게 평소에 들고 다니던 다이어리 하나와 카메라를 가방에 챙겨 넣고 700 호실을 빠져 나왔다.
딱히 갈 곳은 없었다.
공항으로 가야 할지 강남의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야 할지
아니면 서울역에 가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버릇처럼 버스 타는 곳으로 걸어갔지만 어느 버스를 타야 할지 몰라 다시 지하철역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지하철의 1호선을 탔다….
마치 내 몸은 기차를 타야 하는 운명처럼 서울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래. 전번에 갔던 목포에 다시 한 번 가보자,
그 수더분하고 구수한 전라도의 방언과 그리고 간이 맞는다는
남도의 음식에 취해 보자‘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서울역에서 내렸다.
목포행 열차를 타기 위해 표를 끊고 기차가 오기를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역사 안에는 대학생 몇 명이 전단지를 흩뿌리고 빠른 모습으로 모습을 감췄고
사람들은 그 전단지를 하나씩 주워서 보곤 했다.
나도 한 장을 주워들고 내용을 읽어 봤다.
그러던 잠시 후 전경들과 경찰들이 역사로 우르르 몰려 들어와
사람들이 읽고 있던 전단지를 모두 회수 해 가기 시작 했다.
사람들은 순순히 전단지를 모두 경찰들에게 돌려주었지만
나는 그걸 접어서 주머니 속에 넣어 버렸다.
제목은 '부천 성고문 사건의 진실을 알립니다!'였고
언론에는 권양 이라고만 알려 지던 이름이 이번에는 권 인숙 이라고
실명을 밝히며 사건의 전모를 소상하게 써 놓은 깨알 같은 글씨의 전단지 였다.
7월3일 권인숙은 문 귀동을 고소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 했지만
바로 그날 그녀는 공, 사문서위조 협의 등으로 구속기소 된다.
문 귀동은 이를 틈타 곧바로 명예훼손과 무고 협의로 권 인숙을 맞고소 했고,
검찰은 며칠 뒤 수사 발표에서 권 인숙은 성적 불량자, 가출자 이며
급진좌경 사상에 물들어 '혁명을 위해 성적 수치심까지 이용' 하는 거짓말쟁이 라며 매도했고,
그녀의 고소, 고발에 나타난 문귀동의 협의는 인정되지 않아 기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5 공화국의 언론은 '성적 모욕은 없었고 폭언, 폭행만 있었다.'라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야당과 재야가 연대하여 결성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 위원회'는
명동성당에 모여범국민 폭로 대회를 개최 했고 명동은 경찰과 집회 참가자들 사이의
격렬한 몸싸움과 자욱한 최루탄 연기에 휩싸였다.
변호사 166명으로 재정신청 대리인단을 구성하고 법원에 재정신청을 내긴 했지만
이 재정신청을 심리한 서울고법은 '이유 없다'며 기각 했었다.
기각 결정문은 스스로 모순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권인숙양 고발장의 범죄 내용을 대부분인정 했지만 '문 귀동이 손으로
그녀의 음부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를 꺼내 그녀의 음부에 대어 수회 비비는 등 추행하였다는
권인숙의 진술은 목격한 증인이 없으므로 인정 할 수 없고
따라서 문 귀동에 대한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 하다는 것이었다.
검찰이나 사법부가 군사 독재의 시녀 일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영리한 시녀는 되지 못했던 암울한 시기임 에는 틀림없었다.
최소한 권인숙 사건은 검찰의 결정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의 총체적 부도덕과 인권유린의 실상을 국내외에 알린 부끄러운 사건 이였고
권력의 수족으로 변한 검찰과 경찰 그리고 불의한 권력 앞에 한없이 나약해진
사법부 등등의 추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사건 이였다.
열차가 출발 한다는 신호와 함께 개찰구가 열리고 다 읽은 전단지를 구겨서 주머니에 넣으면서
왜 기삼이가 검사나 판사가 되지 않았음을 조금은 이해가 되기도 했다.
열차가 목포에 도착할 때 까지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눈을 감고 내가해야할 일들은 떠 올려 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물에 대한 경이로움도 그 어떤 특별한 생각도 없이 그냥 목포 까지 내려 왔다.
처음 왔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게 목포의 풍경이다.
항상 경계의 대상 이였던 경찰도 이곳에서는 그냥 친절한 경찰 아저씨 정도일 뿐이었다.
최루가스나 전경들의 닭장차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렇게 바쁘지 않는 걸음으로
한가해 보이기까지 한 그런 도시가 목포 였다.
일제 강점기 때 전국 7대 도시 이었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 였다.
평온해 보이고 군사독재의 힘마저도 이곳에 까지 미치지 않아 보이는 조용한 도시로만 보일뿐 이였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목포에 오면 꼭 보고 싶은 사람이 한 사람 있었다.
쌍식이 형님 이였다. 그 에게 서는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작정 가게로 찾아 갔다. 역시 쌍식이 형님은 반갑게 날 맞아 주었다.
"음마. 기자 양반 아니여? 저짝에서 올때 부터 긴가민가 했그만. 아 근디 뭔일이여?"
악수도 생략 하고 바로 의자부터 권한다.
"앙거(앉아). 요새 서울이 시끄럽드만… 바람 쇠러 온거여? "
"예. 진짜 바람 쏘이러 왔습니다.
세발낙지도 먹고 싶고 형님 입담이 그리워서 아무 생각 없이 며칠 쉬러 왔습니다."
"원 사람도 싱겁기는…진짜 뭔 일 없어?"
"예. 진짜 별일 없습니다. 며칠 쉬었다 갈 생각으로 왔습니다."
"그래? 그라믄 가드라고… 좀 있으믄 마누라 나온께 인자 일어 나야제….
잘못 걸리믄 또 코 끼여가꼬 움직이도 못한께…
저 뒷개 선창에 가서 사시미나 한 사라 함서 왜 왔는지 이야기나 들어 보드라고…"
쌍식이 형님은 항상 마누라 에게 잡히는걸 '코 끼인다'라고 표현 했다.
"예. 형님 오늘은 내가 목포 온 기념으로 한잔 사겠습니다."
"그 말 나올 줄 알았어.…
나는 고무신 팔아서 사시미 사줄 돈 없어 ㅎㅎㅎ
이렇게 말만 하믄 동상(동생)이 사줄 것 같아서 그렇게 말은 했제 ㅎㅎㅎ"
"설마 형님 하고 같이 있는데… 돈 없다고 누가 어떻게 하기야 하겠습니까?"
"그런 소리 말어… 차라리 룸살롱이나 고급 요정은 얼굴로 그냥 문대고 나오믄 된디...
짜잔한 막걸리집 이나 소주 먹음서 외상 달아 노믄 그것도 성가셔…
그라고 인자 이 나이에 그런데 가믄 미친놈 이제… "
"한사람 더 오라고 그럴까요? 단둘이 갈게 아니라…"
"누구를?? 아는 사람 있어?"
"아니 그냥요. 전번에 그림 주었던 우석이 아저씨라도…왔으니까 사례는 해야할 것 같아서 요."
"우석이? 그놈 지금 골치 아프게 생겼어…경찰에 쫓기는 판이라…"
"왜요?"
"가짜 그림 사간 놈이 인자사 고소를 했는 모양인디…
법원에 출두 하라고 그래도 안가고 지랄 하드만 여즉 도망 다닌다고
극장 간판도 못 그리고 있는 모양이든디…
우석이가 보고 싶으믄 내가 찾을 수는 있제…왜 둘이 마시는 건 싫어?"
"아니요 그냥 생각나서요…"
"그라믄 한사람 불러 보까? 내 꼬치친구…왜 전번에 그 집에서 잤담서? "
"아- 그 여인숙 주인아저씨! 예. 오라고 그러세요. 어차피 또 그 집에서 잘 생각 이였는데…"
"그라믄 그라까? 그라믄 내가 전화 한번 해 보고…"
전화를 걸더니 한참을 웃으며 이야기 했다.
그리고 온다는 약속을 받았는지 웃으며 나에게 이야기 한다.
"그놈이 술이 고팠는가 온다고 그러네…
자네 이야기를 했드만 잘 기억 하고 있네.…
왐마 이라다 진짜 마누라 와블믄 좆 되야븐디….빨리 가자고…"
성큼성큼 가게를 나와서 손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를 세웠다.
함께 '뒷개 선창' 이라는 곳 은 좀 음침하고 사람이 많지 않았다.
뒷개 선창 이라는 곳은 뒷개라고 불리는 바닷가 였다.
그리고 횟집도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중에 제일 괜찮아 보이는 가게로 들어갔다.
여전히 종업원 들은 쌍식이 형님을 아는 듯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방 안으로 우리를 안내 했다.
"아그야. 느그 사장 어디 갔냐? 좀 오라 그래라."
"예 사장님 지금 배에 고기 받으로 갔는디…좀 있어야 오실건디… 불러 주까라?"
"그라믄 오믄 방에 들어오라고 그라고… 전어(錢魚) 싱싱하냐? 요새 철이 좀 가브렀다만.
올 가을에 전어 구경도 못하고 넘어 갈뻔 해가꼬 일부러 먹으러 왔다."
"예 끝물이긴 해도 아직은 잡술만 할 것이요.
어떻게 해 드리까라?"
"포를 떠 가꼬 오니라. 뼈채 새꼬시 하지 말고…
그라고 비실비실 한놈들 댓마리 구워 오 고…
그라고 소주 세병만 가꼬 온나."
주문을 받은 아가씨는 상위에 흰 종이를 깔아서 상을 덮고 주방을 향해 걸어 나갔다.
"전어가 요새 철인디…
좀 철이 지났어…한 보름 전에 이게 제맛 이었제….
그라고 경상도는 새꼬시 라고 해가꼬 고기 뼈를 통째로 칼로 쪼사가꼬 먹든디…
전어는 그렇게 먹는 게 아니여…
그것이 횟집 주인들이 성가셔서 뼈까지 칼질을 해서 그런디…
이 전어 뼈가 무쟈게 빡세고 잔가시도 많은 고기 거든…
그라고 원래 전어가 집나간 며느리가 기어 들어온다는 고기 아녀?
그거는 이 사시미가 아니고 연탄불에 구워 먹었을 때 이야기제…
사시미 떠서 먹은 지는 최근에 일이고…
전어의 전은 돈을 뜻하는 돈전(錢)자 를 쓰기도 하고 화살전(箭)자를 쓰기도 허는디
이것이 움직이믄 화살이 날아 가는 것 같다고 해서 그렇게 쓰기도 허고…
돈 주고 살수 없을 정도로 맛이 있다 해서 돈전(錢)자 를 쓰기도 허는디…
이것이 젓갈을 담아 놓으믄 가격이 비싸게 치인다고 옛날에는 다들 젓갈로 담아서 먹고 그랬제…
요사이들 회로도 먹긴 하고…"
예전에 세발낙지를 먹을 때 세발 낙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 했던 기억이 났다.
역시 바닷가에 살아서 인지 생선에 관해서는 좀 박식한 구석이 많았다.
"형님..참 고기는 많이 아시는것 같네요. "
"음마…이것이 내가 유식해서가 아니고…
갯가에 살믄 기본이여… 지나가는 목포 사람 다 잡고 물어봐…
좆만 했을때 부터 듣고 살아온 게 이런것 밖에 없은께…
이 동네는 그런 소리는 상식 이라고 봐야제…
그라고 전어는 고기가 크지 않은께 포를 떠 놓으면 그렇게 많지 않거든…
그래서 얄팍한 상술에 횟집 주인들은 새꼬시 라고 해가꼬 뼈째 썰어 놓을 라고 그라제…
그라고 이집은 전어를 무 채 썰듯 안하고 걍 고기 포 멩키로 크게 떠서 온께 먹을만 할 것이여…"
사실 소문만 들었지 전어는 먹어 보지 않았다.
서울 에서는 꼭 먹고 싶다면 인천 까지 발걸음을 해야 먹을 수 있는 생선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큰 쟁반에 밑반찬을 가지고와서 진열 하듯 흰 종위가 덮인 상위에 깔아 놓기 시작 했다.
역시 전라도 음식은 맛에 관계없이 풍성 했다.
막장이나 마늘, 고추는 기본 이지만 전혀 생소한 처음 보는
김치와 상추 이외에도 쑥갓, 깻잎 그리고 알 수 없는 푸성귀가 나오고 복어의 껍질,
그리고 일식집 에서나 볼 수 있는 전복죽이 작은 그릇에 담겨져 나왔다.
그리고 소주 세병 과 물수건 몇 개를 상위에 예쁘게 정리 하고
아가씨는 상의 가운데 부분을 전어를 놓을 생각으로 비워 두고 갔다.
내가 이곳으로 발길을 돌린 이유가 아마 이렇듯 풍성한 남도의 음식 때문 인지도 몰랐다.
"자- 한잔 하드라고…내가 한잔 따라 줄텡께…
그 담부터는 자기잔 자기가 따라서 마시는 거여 알겄어?
지 소주 지가 마시는 건께 아껴 먹든 부족 하믄 더 시키든 알아서 해브러… 자 잔 받어."
"아니 제가 먼저."
내가 소주병을 뺏으려 하자 손을 공중에 흔들었다.
"그래도 자네가 손님인디…
한잔만 받고…그라고 자네도 자네 술병 따가꼬 나 한잔 주고
그라고 인자 지술 지가 먹는 거여…
첨에는 이상해도 자꾸 이렇게 마시다 보믄 괜찮아."
나는 잔을 앞으로 내밀어 술을 한잔 받아 머리를 돌려서 잠깐 입술만 적시고
잔을 상위에 놓고 앞에 있는 새로운 소주를 따서 두 손으로 쌍식이 형님 잔에 따라 주었다.
"자 한잔해… 나는 나한티 사정 하러 오는 놈은 많아도
나 좋다고 찿아 오는 사람은 별로 없은께….
내가 오늘 상당히 기분이 좋그만.“
잔도 부딪치지 않고 시원하게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나도 한잔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마시고 잔을 놓으며 웃으며 한마디 했다.
"저도 사정 하러 왔는데요? "
"ㅎㅎㅎ 이야기 해봐. 내가 공부 좀 했다는 학삐리들 사정 들어 줄 거는 별로 없을건디…."
"형님은 뭐든지 다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야제..
나는 자네 같이 두꺼운 안경 쓰고 착실하게 세상을 살았을 것 같은 사람들 부탁은
기를 쓰고 도와주는 편이기는 헌디…
자네 부탁이라면 뭔지 몰라도 들어 줄팅께… 돈 드는거 아니믄…"
"형님…돈은 제가 많이 있습니다. 살다 보믄 돈으로 안되는 것도 많이 있잖아요.…."
"그라믄 주먹쓸 일이여? "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괜찮은 사람 있으면 직원으로 쓸려고 그렇습니다."
"당췌 뭔소린가 모르겄네…
며칠 있을거믄 지금 당장 이야기 하지 말고 차분하게 이야기 하고.
뭔소리냐 하믄 심각한 이야기는 이런 술집에서 해가꼬는 공수표 될 수 있응께 하는 소리여.
여그 까지 와가꼬 첫날인디…오늘은 편하게 마시고… 낼 이나 봐서 시간을 내자고…"
"예. 며칠 있을 겁니다."
참 고마운 분 이였다.
벌써 내가 해야 할 고민이 돈이나 건달들 동원해서 해결 하는 일이 아님을 알고 계신 듯 했다.
물론 내가 어떤 고민을 말해도 해결 까지는 아니더라도 참고가 될 만한 조언은 해줄 것 같았다.
"형님께서는 매일 이렇게 술을 드세요?"
"그렇다고 봐야제… 세상 돌아 가는거 보믄 답답하기도 하고,
옛날일 생각하믄 인생이 서글퍼지기도 하고…그래도 인자 몸 생각 해야제…
마누라 등살에 인자 술도 줄여야 겄어."
"형님 같은 분도 마누라가 겁납니까?ㅎㅎㅎ"
"ㅎㅎㅎ 마누라 이길 장사 없제…
안 그래도 엊그제 '살살이 서영춘'이 간암으로 죽었잖아…
마누라가 서영춘이 술 많이 먹어서 죽었다고 술좀 그만 마시라고 요새 더 잔소리가 많그만…"
"참 재미있는 분인데 가셨어요.…서영춘 선생님… 후배가 문병을 갔는데
그분은 죽을 때 까지 사람을 웃겼다고 그러네요."
"뭘 어쨌는데?"
"그분이 그랬다네요…
'야 임마…니는 인기가 없어서 죽지 못해 사냐? 나는 살지 못해서 죽는다.
이놈아' 그랬다네요…
옆에 있는 사람들이 죽는 순간 까지 웃으며 그분을 보냈다고 하드만요."
"하기는 대단 했제… 서영춘이 리사이틀 한다! 그라믄 여그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응 께….
그란디 다른 건 다 외설스럽다고 잡아 가고 했는디
군인들도 서영춘이 하는 거는 재미가 있어서 봐 주는 모양 이드라고…
나이도 좀 먹고 원로라 봐 주는 모양이여…."
"젊은 애들 같이 데모나 선동 같은 거와는 거리가 멀어서 그렇겠죠."
"언젠가 윤복희가 청와대 가가꼬 '여러분' 인가하는 노래 부르다 고생을 많이 했다고 그러 든디…
기자들은 그런 거 몰라?"
'여러분' 이라는 노래는 윤복희의 오빠인 윤항기씨가 작곡 하고 동생인 윤복희가 불러서
서울국제 가요제 에서 대상을 차지한 곡 이였다.
'여러분' 이라는 말에 대한 그 당시 정서는 그렇게 중요 하지 않았다.
여러분의 의미가 고통 받는 다수의 국민을 의미 한다거나 노동자를 대표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윤복희의 무대 매너가 문제 였다.
실제로 청와대에 가수 조영남씨와 초청 되었을 때 가사를 바꿔 달라는 주문이 있었다고 한다.
'네가' 또는 '너는' 하는 단어가 대통령 앞에서 부르기는 좀 경망스러워서
다른 말로 가사를 바꿔 줄 것을 요청 했다고 하지만
윤 복희씨가 완강히 거절 했고 대체 단어로 나왔던 '당신' 이라는 말 역시
경망스럽기는 마찬 가지 였다고 한다.
문제는 노래 부르는 도중에 대통령 내외를 향하여 손가락을 까딱대는
그녀의 특유한 무대매너 때문에 일반인 에게는 아무런 거부감이 없음에도
그 당시 연회장 분위기가 어색하고 당혹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불경도 보통 불경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그 이후 서서히 T.V에서 윤복희씨의 모습은 사라지기 시작 했다.
지금 쌍식이 형님은 사건이라면 사건이랄 수 있는
그 윤복희씨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 이였다.
계 속
댓글 없으면 소설 중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