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6개년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자마자 북한 산업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선전을 하기 시작했다.
朴 대통령의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도전에 대한 대항이었을 것이다. 농수산업을 비롯해서 제조업과 수송, 관광산업까지 총망라한 영화를 제작해서 북한 내는 물론 각국에 나가 있는 공관을 통해서 전 세계에 공개했다. 우리의 중앙정보부에서는 이 영화를 입수해서 朴 대통령과 전 국무위원, 정계 중진을 모시고 시사회를 개최했다. 1972년 초였다. 이 영화는 약 3시간에 걸친 장편물로서 분야별로 되어 있었다. 우선 벼농사를 짓는 광경부터 나왔는데, 바둑판 같이 경지 정리가 잘된 논에서 부녀자가 트랙터로 논을 갈고 자동기계로 모를 이양하고 있었다. 곡식을 수확하는 것도 모두 기계로 하고 있는데, 그 광경은 미국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석탄은 자동화된 거대한 기계로 채굴해서, 벨트 컨베이어로 운반하고 있었고, 용광로에서는 쇳물이 쏟아져 나와 곧바로 철강재가 되어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각종 기계들이 제작되어 나오는 장면이 연속적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자동차, 트랙터, TV, 냉장고, 세탁기가 대량 생산되고 있었다. 비료 공장이나 시멘트 공장에는 제품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고 비닐론 공장과 직물 공장에서는 각종 섬유제품이 쉴새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선소에서는 거대한 선박이 진수되고 있었고, 전기 기관차가 국내에서 생산되고 있었으며, 심지어 5만 KW 발전기까지 국산화되고 있었다. 이런 광경을 연속적으로 3시간이나 보고 있으니 관람자들은 완전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장내는 조용하기만 하고 숨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이런 적막을 깨려는 듯 朴 대통령은 최형섭(崔亨燮) 과학기술처 장관에게 "崔 장관 어떻게 생각하시오?"라고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질문을 받은 崔 장관은 얼떨결에 "대단합니다"라고 답변했다. 朴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이날의 시사회였다.
다음 날 필자가 결재를 받으러 서재에 올라가니 朴 대통령은 필자에게 다짜고짜 "임자! 어제 본 영화 어떻게 생각해?" 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어제 영화를 보고 심기가 아주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결론부터 먼저 대답해야 되겠다고 느꼈다. 그래서 "각하! 영화는 잘 찍었습니다만, 내용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훨씬 앞서고 있습니다. 중공업 분야가 좀 뒤졌는데 2∼3년 내에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朴 대통령은 "그래?" 하고는 필자를 쳐다보는데, 그 내용에 대해 무척 궁금한 것 같았다. 필자가 설명을 계속하려고 하자 "吳 수석! 딴 사람도 모두 알아야 해. 이 다음 안보대책회의 때 임자가 직접 설명토록 해!"라고 했다.
안보대책회의는 朴 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회의로, 정부에서는 국무총리, 외무부 장관,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하고 청와대에서는 비서실장과 관계되는 대통령 특별보좌관 및 관계 수석비서관이 참석한다.
다음 글은 안보대책회의 때의 보고를 요약한 것이다. 브리핑 차트로 약 30매 되는 양인데 약 2시간 소요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한에 관계되는 사항은 국내에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으며, 이들 자료는 중앙정보부가 총괄하고 3급 비밀로 취급하고 있을 때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날의 브리핑이 북한 경제에 관한 한 우리나라로서는 처음으로 분석·보고하는 기회였다. 이 보고서는 필자가 김광모(金光模) 비서관과 함께 작성했는데, 먼저 남북한 경제정책의 기본 이념을 도출하고 이 기본 이념에 따라 문제를 풀어나갔다. 브리핑의 제목은 「북한의 자력갱생 및 자급자족 정책」으로 했다(註: 여기서는 당시의 브리핑을 회상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보충설명을 추가하면서 설명한다. 기본 골격은 동일하다. 註는 필자가 새로 붙인 것이다).
북한 경제정책의 기본 이념은 「자력갱생」이다. 북한의 모든 경제정책은 자력갱생 이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김일성의 경제면에서의 주체사상이다.
자력갱생이라는 단어는 일정 말기 일본 총독부의 행정 용어였다. 자력갱생이라는 말은 「남에게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생활을 개선해 나가는 일」을 뜻한다. 다른 사람의 원조 없이 자립한다는 뜻이니 자주자립 경제와 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일정 말기에 물자가 점차 귀해지니 자력갱생에다가 자급자족이라는 말을 더 추가하게 됐다. 자급자족이라는 말은 「교환에 의하지 않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가 생산하여 충당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일정 말기에는 「자력갱생·자급자족」은 한 단어 같이 사용되어 왔다. 당시 초등학교 학생들까지도 습관적으로 쓰던 말이다(물론 일본 말이다).
그런데 북한에서의 자력갱생이라는 용어는 「북한에서 생산되는 자원을 갖고 북한의 기술, 북한의 인력을 활용해서 북한이 필요로 하는 모든 제품을 생산하는 정책」을 뜻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에서 사용하는 자력갱생이라는 말에는 자급자족이 함께 따라 다닌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자급자족 정책에서는 수입이라는 개념이 없으니, 이로 인해 북한은 정책적으로 결정적인 과오를 범하게 된다. 북한은 남한보다는 천연자원 면에서 유리한 것은 사실이다. 우선 에너지 부문에서는 수력자원이 풍부해서 일정 때부터 전력 생산이 많았고, 석탄(일부 유연탄)의 매장량도 많아서 에너지 분야에서는 남한보다 월등히 유리하다.
철광, 비철금속 등 광산자원도 많다. 더욱이 이들 자원을 활용한 중화학 공장들이 193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해서 북한의 동해안 일대는 일정 말기에는 거의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의 공업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이런 기반 위에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을 끌고 나갔다는 결론이 된다. 그렇다면 북한 경제의 뿌리라는 것은 「① 몇 백만 KW의 수력자원, ② 석탄, ③ 철광석 및 약간의 광산자원, ④ 일정 때의 구식 공장, ⑤ 북한의 인력」 등 이상 다섯 가지의 원천자원이 전부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원천자원을 활용해서 모든 기초원료를 만들고 이 기초원료를 갖고 중간 제품을 만들며, 북한이 필요로 하는 모든 최종 제품까지 생산하겠다는 정책이 북한의 자력갱생 정책인 것이다.
1. 북한의 경제정책
(2) 북한 자력갱생 · 자급자족 정책의 근원
이런 정책은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는 것인데, 이 정책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면 2차대전 말기 일본 군국주의식 행정으로 귀착된다. 당시 고립된 일본은 필요한 외국산 원료를 수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꼭 필요한 물품, 특히 군수품은 비합리적인 제조공법이라도 채택할 수밖에 없었고, 값이 비싸게 먹히더라도 보상금을 지불하면서까지 생산해야 했고, 대용품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으니 만족해야만 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필요한 원료를 수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국산 원료를 사용해서 만들어 내는 기술 즉, 대용공법과 대용품을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게 됐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과학자, 기술자를 총동원해서 『기술총동원요강』(技術總動員要綱)이라는 책을 발간해서 배포했다(註: 이 책은 필자가 상공부에 근무할 때(1960년대)까지도 비치되어 있었다. 약 500페이지 되는 책이었는데, 그 내용에는 북한의 아오지 탄광에서 산출되는 갈탄을 이용해서 석유를 만드는 방법, 입철식 제철법, 심지어 피마자 씨나 소나무 뿌리로 윤활유를 만드는 방법, 목재를 건류해서 메탄올을 만드는 방법 등 수 백 가지의 방법이 적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일정 때의 자력갱생식 기술이었다. 해방이 되자 이런 공장들은 북한 당국으로 넘어갔다. 북한 당국은 이들 공장을 가동시키기 위해 일본인 기술자를 귀국시키지 않고 우대해 가며 활용했다. 이때 자력갱생 방식에 익숙하고 현장에서 오래 근무하던 과학기술자들이 일본인 기술자와 더불어 북한에 인계된 공장을 가동하게 됐다. 이런 자력갱생식 과학기술자가 출세를 해서 점차 북한의 공업 행정가로서 또는 현장에서 지도층을 이루게 됐으니 북한의 기술은 자연히 자력갱생식 기술이 정착을 하고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에 비해서 남한에서는 해방 직후 미군으로부터 미국식 사고방식과 행정방식을 도입하게 됐다. 학교 교육, 특히 공과대학에서는 미국 교과서를 그대로 사용했으니 자연히 서구식 최신 기술을 익히게 됐다. 더욱이 일정 때부터 남아있던 공장들은 비효율적이라서 대부분 제대로 가동을 못했고, 미국이나 일본, 유럽 등에서 새로운 시설을 도입해서 새 공장을 건설했다. 이 때 구미식 최신 기술도 함께 들어왔다. 그리고 행정 관료나 현장 기술자들도 구미식 교육을 받은 젊은 층이 차지하게 됐다.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에서는 「기술혁명을 보다 높은 단계로 전진시킨다」고 발표했고, 남한의 제3차 5개년 계획에는 「과학기술을 향상시키겠다」고 나와 있다. 양쪽 모두 과학기술 혁신이 중요한 정책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에는 큰 차이가 있다. 북한은 당시 가동하고 있는 공장 가동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력갱생식 기술혁명을 하겠다는 것이고 남한의 기술혁신은 세계 최신 기술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이 점이 북한과 남한의 경제가 서로 상반된 길을 가게 되는 결정적 동기가 된다(註: 북한 당국은 일본인 기술자가 귀국하게 되면 생산에 큰 지장이 생길 것을 우려해서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인 기술자는 귀국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북한에 남게 된 일본인 기술자는 1946년 11월 현재 868명이나 됐고, 이들의 가족은 2,095명이었다(1947년에는 기술자 405명, 가족 943명). <도표 12-1> 참조. 일본인 기술자에 대해서는 대우가 더 좋았는데 <도표 12-2>와 같다.
1. 북한의 경제정책
(3) 북한 자력갱생 · 자급자족 정책의 결과
그렇다면 북한의 자력갱생 정책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① 북한에서는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원천자원을 활용하는 공업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합당한 사업이고 애국적 사업이 된다. 즉, 선(善)의 행위이다. 역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사업은 악(惡)의 행위가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② 다섯 가지 원천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선의 행위가 된다면, 이들 기초 자원(전력, 석탄, 철, 인력 등)의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갈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부존자원에는 한계가 있다. 이들 기초 자원을 공급 못하게 될 때는 경제파탄이 오게 되는 것이다.
③ 북한에서 구할 수 있는 다섯 가지 원천자원은 극히 한정된 자원이다. 이 다섯 가지의 원천자원 갖고는 만들 수 없는 물건도 허다하고, 만든다 해도 비효율적일 때가 많다. 그 한 예가 석유화학 제품이다.
④
기술이나 경영까지도 자력갱생·자급자족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억지로 강행한다면 세계 수준과의 격차는 벌어져만 갈
것이다.
세계 수준과 격차가 크다는 것은 국제경쟁력이 없다는 뜻이며 물건을 생산해도 수출을 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경제가 발달해 감에
따라 북한도 외국에서 수입해야 할 물품이 늘어갈 것인데, 수출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외화는 바닥이 나고 나라가 파산하게
된다.
⑤ 결론적으로 북한이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을 쓰는 한 북한의 공업은 세계 조류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2.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
다음에는 이상과 같은 기초적 판단을 갖고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살펴보기로 한다. 북한의 6개년 계획에서는(註:『한국형 경제건설』7권 p.353 <도표 3-5> 참조) 8개의 공산품과 곡물 생산 즉, 9개 항목만이 수량적으로 발표되고 있다. 북한으로서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품목이다. 그래서 이 9개 품목을 갖고 북한의 원천적 경제구조를 구성해 보았다. <도표 12-3>과 같다.
북한의 원천자원은 석탄, 전력, 철광석, 기존 공장, 인력의 다섯 가지이다. 이 <도표 12-3>에서 보면 에너지로서는 전력(1)과 석탄(2)이 있다(註: 번호는 북한의 6개년 계획상의 주요 생산 9개 품목).
전력에는 수력도 있지만 수력에는 한정이 있다. 그래서 화력발전소를 가동해야 하는데, 이 때 연료는 석탄이 된다. 이 석탄과 전력이 에너지로서 공장에 공급이 된다. 공업 원료로는 석탄과 철광석이 있는데, 석탄을 원료로 사용하는 공업을 석탄화학공업이라고 한다.
비료(4)와 시멘트(5)와 섬유(6) 등이 생산된다. 주로 국민의 의식주에 관계되는 제품이 포함된다. 그리고 철광석으로는 철강(3)이 생산되는데, 이 철강을 갖고 공작기계(7)를 만들고, 이 공작기계를 써서 기계장비를 제작해서 각 공장에 공급한다.
끝으로 국민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야 통치할 수 있다. 우선 식(食) 문제로서 곡물(9) 생산이 중요하다. 그리고 곡물을 생산하자면 비료가 필요하다. 주(住) 문제로는 시멘트, 의(衣) 문제로는 섬유 생산이 중요하다. 그래서 9개 품목에 이들 항목이 포함된 것이다. 그리고 의식주 문제가 해결돼야 국민을 인력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농촌의 인력자원을 공장으로 빼돌리기 위해서는 트랙터(8)를 공급해 주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석탄, 전력, 철강, 공작기계, 곡물, 비료, 시멘트, 직물, 트랙터의 9개 품종이 북한으로서는 얼마나 중요한 품목인가 알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의 다섯 가지 원천자원과의 관계도 명확해진다.
다음에는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에 나와 있는 8개의 공산품을 남한의 제3차 5개년 계획과 비교해 보기로 한다. 물론 곧바로 비교하면 혼선을 일으킬 수도 있으니, 대충 감각적으로 느낄 정도의 숫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8개의 품목을 (1) 에너지 분야(전력과 석탄), (2) 국민의 의식주 분야(비료, 직물, 시멘트), (3) 중공업 분야(철강, 공작기계), (4) 인력 분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한다.
2.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
(1) 에너지분야
1) 북한의 전력 과소비 공업구조
우선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으로 인해 북한 경제가 전력 과소비 공업구조로 치닫게 되는 경우를 설명한다. 북한의 수력 자원은 풍부하다.
경제성을 도외시하면 약 1,000만 KW까지 개발 가능하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일정 때 이미 수풍(70만 KW), 부전강(22만 6천 KW), 장진강(40만 KW) 등 대규모 발전소가 가동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국내에 이만큼의 전력 소비가 없었다. 그래서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공업들이 북한에 건설되었는데, 이는 풍부한 ―당시로서는 남아도는― 전기를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북한의 공업구조는 출발 시부터 전력 과소비 구조였던 것이다. 몇 가지 예를 든다.
북한에서는 일정 때부터 많은 비료 생산을 해 왔는데, 그중 가장 많이 생산하는 것이 유안(硫安)비료이다. 유안비료를 만들 때는 우선 수소를 만들고, 이 수소로 암모니아를 만들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수소를 만들 때 엄청나게 전기가 많이 소요되는 전기분해법을 사용하는 공법을 썼다. 일정 때 행하던 구식 방법을 그대로 쓴 것이다. 그 후 수소를 만드는 방법으로 석탄가스화법이라는 공법이 생겼는데, 우리나라의 호남비료에서 사용하던 방법이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국산 석탄을 사용하라는 강력한 지시를 내려 이 공법을 사용하게 됐던 것인데 李 대통령의 자급자족 정책의 산물이었다. 이 방법은 전기분해법보다는 개량됐으나 역시 구식 공법이다. 이 공법에서는 질소를 생산할 때 공기를 액체화시켜서 질소를 분리했으니 전기 소요가 아직도 크다는 결점이 있었다. 5·16 혁명 후 호남비료 공장에서는 석탄대신 중유를 쓰는 방법으로 교체했는데, 이 공법은 忠肥에서도 사용됐던 공법이다. 공기를 액화하기 때문에 전기 소요는 여전히 크다.
그러나 3肥, 4肥, 5肥에서는 더 발달된 최신 공법인 「나프타가스화법」을 채택하고 있다. 석유화학분야가 된다. 나프타를 사용하면 전기 사용이 전혀 필요없게 되며 비료 생산비도 싸진다(註: 결국 호남비료나 충주비료는 비료생산비가 비싸서 생산시설이 폐기되었다). 20∼30년 사이에 이 만큼의 기술혁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도 세계조류에 따라가려면, 유안비료 생산 공장을 하루 속히 폐기하고 석유(나프타)를 사용하는 요소비료 공장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자력갱생·자급자족 원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석탄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전기를 과다하게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예가 섬유 원료 생산이다. 북한에서는 「비날론」이라는 섬유를 자체 기술 갖고 생산한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비날론 섬유를 생산하는데, 카바이드 공법을 쓰고 있다. 카바이드는 석탄과 석회석과 전력만 있으면 생산이 가능하다. 그러니 북한의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에 꼭 맞아떨어지는 사업이었고, 따라서 비날론 섬유공장이 대대적으로 건설됐던 것이다. 그러나 카바이드 생산에는 엄청나게 많은 전기가 소요된다.
북한에서는 석회질소라는 비료도 생산하고 있는데, 이것도 카바이드가 원료이고 PVC 수지, 주정(카바이드 술), 기타 여러 가지 물건을 카바이드 법으로 생산했다. 자력갱생 정책의 당연한 결과이다. 당시 카바이드를 연간 약 50만 톤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카바이드의 제조에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데 카바이드 50만 톤을 생산하자면 약 30만 KW의 화력발전소를 한 개 더 건설해야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북한에서는 철 생산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입철(粒鐵)이라는 방식을 많이 썼다. 이 방법은 일본 기술자들도 불합리한 방식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전쟁 때라 철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일정 말기 부득이 사용하던 방법이다. 철광석을 가루로 해서 석탄가루와 혼합한 다음 시멘트 회전로와 같은 기계로 구워내는 방식인데 현재 전 세계에서 북한에만 쓰고 있는 방법이다. 여기서 나오는 입철은 완전히 철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기로에 넣어서 다시 작업을 해야 하니 전기를 많이 쓰는 구식 공법인 것이다.
2) 남북한의 전력사정
이렇듯 북한은 전력 과소비 구조가 심화되어 나갔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남북한간의 전력 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70년 당시 김일(金一) 부주석 보고에 의하면 북한의 발전 시설 능력은 280만 KW라고 했다. 이 때 남한의 발전 시설 용량은 251만 KW였고 총 발전량은 92억 KWH였다. 북한의 통계에는 문제점이 있지만 여하간 70년대 초까지 북한은 전기를 많이 생산하고 많이 써 왔던 것은 사실이다.
북한의 6개년 계획상 전력 개발 목표를 보면 「총 발전능력을 500여 만 KW로 증가시키되 그중 화력발전소의 비율을 50%까지 제고시킨다. 그리고 목표 년도인 76년에 280∼300억 KWH의 발전을 한다」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남한의 제3차 5개년 계획에서는 「제3차 5개년 계획 기간 중에 화력 232만 4천 KW, 수력 32만 8천 KW, 원자력 59만 5천 KW, 합계 324만 7천 KW의 발전소 건설을 완료함으로써 1976년도의 시설용량은 607만 5천 KW로 늘어나게 된다」로 나와 있다.
좀 더 설명을 덧붙이면 ① 첫 번째가 발전용량인데, 북한은 76년도에 500만 KW까지 갖고 가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남한은 건설 중에 있는 발전소가 완공되면 76년도에 607만 KW의 발전시설을 확보하게 된다는 계획이다. 따라서 남한은 76년도에 가면 발전능력에 있어서는 북한을 크게 앞선다는 뜻이다. ② 두 번째가 북한은 화력발전소 건설을 서둘러서 화력 대 수력의 비율을 약 50 대 50 정도로 하겠다는 대목이다. 수력발전소는 저수지에 물이 없으면 발전할 수가 없다. 특히 10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의 갈수기에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수력발전량이 뚝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북한과 같이 수력발전소의 비중이 높을 때에는 계절에 따라 발전량의 기복이 심해져서 공장 가동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수력발전소는 전기가 많이 필요한 피크 타임에만 발전을 하고 있는데, 북한은 수력발전이 기조가 되는 전력구조이기 때문에 문제가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화력발전소를 건설해야겠다는 계획이 나오게 된 것이다.
북한은 6개년 계획 중에 120만 KW의 북창(北倉) 화력발전소를 위시해서 평양 화력발전소 (50만 KW), 청천강 화력발전소 (20만 KW), 웅기(雄基) 화력발전소 (20만 KW), 청진(淸津) 화력발전소 (15만 KW) 등이 계획됐는데, 연료로는 국산 석탄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북한은 전력 공급의 안정을 위해 6개년 계획 기간 중에 화력발전소를 대대적으로 건설키로 했는데, 그 중 약 200만 KW의 발전소는 국산 석탄을 사용하도록 계획을 짰다. 그런데 200만 KW의 발전소를 북한에서 가동시키자면 연간 소요되는 석탄의 양은 약 500만 톤이 필요할 것이다. 이만큼 석탄을 더 캐야 하는 것이다.
남한에서는 72년부터 76년까지 324만 KW의 발전소가 새로 가동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 중 약 60만 KW는 원자력 발전이다. 남한에서는 연료의 안정적 공급, 발전 단가의 안정을 위해 이미 원자력 발전 쪽으로 방향을 바꿔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력 발전소가 232만 KW 포함되었는데 모두 유류 사용 발전소이다. 결국 남한은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유류나 원자력 연료를 수입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하다. 따라서 남한에서는 수출 증대만 하면 된다는 결론이 되는데, 거꾸로 말하면 수출을 증대시켜야만 경제를 지탱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에 비해 북한은 발전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석탄을 증산해야 하고, 석탄을 증산하자면 막대한 인력과 기계 및 자재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즉, 북한은 「전력 증산 → 석탄 증산 → 인력 및 기계, 자재 증산」이라는 자원 동원의 고리가 심화되어 가는 것이다. 이 점이 북한과 같이 빈약한 부존자원을 갖는 나라가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을 쓸 때 빠져 들어가게 되는 굴레인 것이다.
3) 남북한의 석탄사정
다음이 석탄 문제인데, 이 분야는 북한이 크게 앞서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북한은 6개년 계획의 목표가 5,000만 톤(내지 5,300만 톤)이었는데, 남한은 1,780만 톤이 목표였다. 북한의 약 1/3 수준에 불과하다. 남한으로서는 2,000만 톤 정도가 석탄생산의 한계라고 보고 있었다. 나머지는 석유를 수입해서 충당토록 되어 있다(76년에는 총 에너지를 100으로 했을 때 석탄 26.3%, 석유 59.1%, 수력·원자력 19%, 신탄 12.8%). 결국 76년에 북한은 5,000만 톤이라는 석탄 생산을 해야 하고, 남한은 1,800만 톤의 석탄만 생산하고 나머지 에너지는 석유를 수입하겠다는 계획이다. 남한의 석탄 수요는 거의 전부가 가정 난방용(구공탄)이다. 그래서 석탄을 수요지까지 수송을 해 주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문제될 것이 없다. 발전용이나 산업용 에너지로는 유류를 사용하니 간편하며 효율도 높다. 남한은 수출을 해서 외화만 벌어들이면 에너지 분야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북한은 5,000만 톤의 석탄을 생산하자면 채탄 문제, 수송 문제, 전기 공급 문제, 기계시설 공급 문제, 자재 공급 문제, 인력 공급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하게 된다. 석탄 생산량이 많아질수록 이러한 문제는 심각해진다. 종국에 가서는 석탄이 있어야 발전을 할 수 있는데, 석탄이 부족해서 전력 생산이 줄게 되고, 전력이 부족해서 석탄 생산을 못하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註: 현재의 북한 실정일 수도 있다).
4) 북한의 정유공장과 석유화학공장 건설 추진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을 보면 특이한 점을 한가지 발견할 수 있다. 공업 부문의 기본 방침은 「새로운 공업 건설은 되도록 피하고 공업의 내부구조를 완비해서 공업의 주체성을 더욱 강화한다」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예외가 있었다. 정유공장과 석유화학공업만은 새로운 공업이지만 6개년 계획 기간 내에 꼭 건설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 내용으로는 「현재 추진 중(註: 건설중이라는 뜻이 아님)에 있는 200만 톤 능력의 웅기(雄基) 정유공장 건설을 조속히 마무리짓고, 남흥(南興) 지구에 새로운 대규모 석유화학 기지를 창설하는 데 적극 노력을 하겠다」라고 했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북한에서 석유를 수입한다는 것은 자력갱생·자급자족 원칙에 위배된다. 그래서 석유 사용을 극도로 억제했다. 그러니 북한은 더욱 더 전력에 의존하게 됐다. 예를 들어 휘발유 구하기가 힘드니 시내버스도 전기 버스로 했다. 화물 수송도 트럭으로 운송하자면 석유가 필요하게 되니 철도에 더욱 의존하게 됐다. (그리고 철도 수송량을 늘리자니 부득이 기관차를 대형화해야만 했는데 ― 그 방법으로는 대형 디젤 기관차를 사용하던가 전기 기관차로 바꾸어야 하는데 ― 남한에서는 대형 디젤 기관차를 채택했고 북한은 석유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철화를 했다.) 이래저래 북한은 더욱 더 전력에 의존하게 됐는데, 전기를 더 많이 생산하자면 더 많은 석탄을 캐야 했고, 석탄을 위시해서 늘어만 가는 수송량은 철도에만 의존해야 했으니 결국 철도 수송이 한계점에 도달하게 됐다.
석탄 5천만 톤을 수송하는 데만 매일 30톤 화차 5천 량이 필요하다. 이 외에 시멘트, 비료, 곡물, 공업제품 등의 수송량을 합치면 철도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렇다고 선박에 의한 연안 수송을 할 처지도 못된다. 북한의 공업지구는 완전히 동서로 갈라져 있으므로 선박수송은 불가능하다. 항만 사정도 정비가 안된 상태였다. 더욱이 북한에는 안보상 목적으로 산악 오지에다 공장을 건설한 곳도 많다(例 자강도). 이래저래 북한은 수송 문제로 큰 애로에 봉착하게 됐다. 수송 문제가 해결 안되면 나라 운영을 할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트럭 수송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됐다.
결국 석유를 쓰지 않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북한은 정유공장이 없기 때문에 석유제품을 소련이나 루마니아에서 구입해 왔다. 그런데 소련이 석유의 공급수단을 갖고 북한을 통제코자 했으니 북한으로서는 이러한 통제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소련과 냉각관계에 있던 시절에는 뼈아픈 고통이었을 것이다. 국가안보상으로도 정유공장만은 꼭 필요했다. 당시 북한에 가장 아쉬운 공업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 정유공업이었을 것이다. 북한은 7개년 계획을 수립할 때(1959년),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웅기에다 연산 200만 톤의 정유공장을 건설하려고 (구)소련과 경제기술협정을 체결했었다. 그런데 이 협정은 소련과의 관계 악화로 중단돼 버렸고 7년 후인 67년 3월에 가서야 (이 협정에 대한) 실시협정을 다시 체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3년이 지난 70년까지도 200만 톤 정유공장의 진척사항은 없었다. 그래서 북한의 정준택 부수상은 6개년 계획을 발표하기 전(1970년 9월 15일), 모스크바로 가서 북한과 (구)소련 간에 새로운 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정유공장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 때에도 정유공장이나 석유화학공업 건설에는 찬성을 하지 않았고 과거식대로 소련이나 루마니아에서 공급받으면 된다고 권했다. 할 수 없이 정준택 부수상은 다음달인 10월 14일 북경을 방문했으며 중국과 「주요 물자 상호공급협정」에 조인을 했다. 이 때 북경방송은 "정준택 부수상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대표단이 북경 유기화학공업공장(즉, 석유화학공장)을 시찰했다"고 특별 보도했다.
중국의 실무자급 교섭 담당자도 석유화학분야 담당이었던 것을 보더라도, 북경을 방문한 목적이 정유공장 및 석유화학 분야에 있었던 것이 확실했다. 결국 북한은 6개년 계획의 중추사업인 정유 및 석유화학에 대해서 중국으로부터 뒷받침을 얻게 되었고, 곧바로 다음 달 11월에 제5회 당 대회를 개최하여 6개년 계획을 발표했던 것이다.
당초 5회 당 대회는 10월에 개최될 예정이었는데, 중도에서 돌연 1개월 연장되었다. 아마도 소련과의 교섭이 여의치 않아 연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69년 하반기부터 북한은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급속히 화해하고자 노력하는데,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6개년 계획 추진, 특히 정유 및 석유화학 공업 육성에 있어 중국의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상이 6개년 계획상에 석유화학공업 육성이 특이 사항으로 기록되는 연유이다.
이에 반해 남한에서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62년부터 시작했는데도 60년대 중반에는 이미 울산에다 공장 건설을 완료하고 가동 중에 있었으며 확장공사까지 진행 중에 있었다(연산 200만 톤 공장은 울산에다 건설한 제1차 공장 3만 5천 배럴과 거의 동일한 규모).
우리나라에서는 3차 5개년 계획의 목표 년도(1976년)의 석유류 수요를 2,600만㎘로 예측했다. 그러니 북한의 100∼200만 톤 정유공장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註: 석유류는 액체이기 때문에 ㎘로 따진다. 1㎘는 약 0.9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수요만 있으면 정유공장은 자동적으로 확장되어 갔다).
정유공장이나 석유화학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은 주체사상이나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으로 보면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결국 북한 경제는 한계점에 도달하기 시작한 것이고 부득이 정책 변경을 한 것이다. 우선 북한은 정유공장을 건설한 다음에는 여기서 생산되는 유류를 갖고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서부 지역에는 평양 화력발전소(50만 KW), 동부 지역에는 웅기 발전소(20만 KW)를 건설하기로 했다. 석탄에서 석유로의 연료 전환이다. 정유공장을 가동하기 위해서는 원유를 도입하게 되는데, 이 때 외화가 필요하게 된다.
결국 북한도 수출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북한은 이 때까지만 해도 수출의 중요성을 절실하게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이나 (구)소련에 의존할 생각만 했다. 이 점이 후에 북한을 파산으로까지 몰고 가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2.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
(2) 의식주의 문제
북한은 중화학공업에 치중한다고 하면서 화학공업 자체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화학공업이 건실하지 못하면 국민의 의식주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
우선 북한은 6개년 계획에서 직물을 5∼6억 미터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식의 숫자로는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다만 남흥 지구에다 석유화학공업 기지를 건설해서 「폴리에틸렌 필름」과 「아니론과 테트론」섬유를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북한에서는 농업용으로 폴리에틸렌 필름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폴리에틸렌 수지를 수입해서 필름으로 만들어 농사용에 공급했는데, 이 수지를 자체 생산코자 한 것이다. 아니론이란 북한 용어로 우리나라에서는 아크릴 섬유, 카시미론 섬유 등으로 부르는 양모(羊毛) 대용으로 사용하는 섬유이다. 스웨터, 내의, 동복 등 겨울 옷감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북한의 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천연섬유인 양모 생산은 거의 없으며, 합성섬유로는 비날론밖에 생산 못하고 있는데, 비날론은 방한용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아니론 공장 건설이 절실해졌던 것이다.
다음이 테트론인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폴리에스텔 섬유라고 한다. 면과 혼방해서 와이셔츠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북한에서는 목화 생산을 장려했지만 기후 조건이 나빠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필요한 수요를 생산해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테트론 공장 건설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결국 이 3개 공장은 국민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들이다.
다만 나일론 섬유가 빠져 있다. 나일론은 의류에도 사용되지만 어망 등 공업용에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석유화학공업은 10여 개 이상의 공장군이 한 곳에 위치하게 되며 일시에 가동하게 된다. 그런데 북한의 6개년 계획에서 건설코자 하는 석유화학공업은 아니론, 테트론, 폴리에틸렌 수지만 생산하는 소단위 시설이다. 그리고 공장 규모도 국제 규모의 1/10 정도의 소규모 공장이니 국제 가격으로는 생산할 수 없는 공장들이었다. 상세한 내용은 발표된 적이 없다. 다만 중요한 점은 북한의 경우 석탄과 전기로 카바이드를 만들어서 각종 제품을 생산하는 석탄화학공업만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이요 자력갱생 방법인데, 이렇게 석유화학을 건설하는 것은 주체 사상에는 큰 모순이 되지만 부득이 정책 변경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남한에서는 76년에 면사 18만 4천 톤, 나일론사 5만 3천 톤, 아크릴 섬유 4만 2천 톤, 폴리에스텔 섬유 12만 9천 톤을 생산하기로 했다. 그리고 석유화학공업을 완성시켜 기초원료부터 국산화할 수 있도록 당시 울산에 공장을 건설 중이었다. 섬유제품은 목표 년도인 1976년에 12억 3천여 만 달러를 수출할 계획을 짜놓고 있었으니 정유 분야, 석유화학 분야, 그리고 섬유 분야에서는 북한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발표하는 통계에서조차 비료생산만큼은 북한이 월등히 앞서고 있다고 발표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기술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온 착오이다. 북한에서 생산하는 비료에는 유효 성분이 적게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생산하는 질소질 비료는 유안 비료와 석회질소 비료가 위주인데, 포함된 순 질소 성분은 18∼20%이다. 그런데 남한에서 생산하는 질소질 비료인 요소 비료에는 유효 성분이 46%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 바로 비교해서는 안되고 꼭 유효 성분으로 고쳐서 비교해야 한다. 인산질 비료나 카리질 비료도 똑같다. 북한에서 생산되는 인회석(燐灰石)이나 카리명반석을 원료로 하는 비료에는 유효 성분이 10% 미만이다. 남한에서 생산되는 복합비료 18-18-18은 질소질, 인산질, 카리질 모두 18%씩 포함됐다는 뜻으로 총 54%의 유효 성분이 포함된 비료이다.
우리나라는 70년에 비료 생산 능력이 58만 5천 (成分) 톤에 달해 국내 수요의 충족은 물론 수출 여력도 갖게 됐으며, 각 비료공장의 창고에는 오히려 비료가 남아돌아 보관이 문제되고 있었다. 북한은 76년에 비료를 280∼300만 톤 생산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북한에서 생산하는 비료의 유효 성분을 계산하면 약 50만 成分 톤이 되는데, 이 수량은 70년의 우리나라 비료 생산량(58만 5천 成分 톤)과 거의 같은 양이다. 인구가 남한의 절반인데, 이 만큼의 비료를 생산하겠다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어딘가에 모순이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나라는 3차 5개년 계획에서는 목표 년도(1976년)의 비료 수요를 농업 생산 증대를 위한 시비량이 증가할 것을 감안해서 91만 6천 成分 톤으로 잡았다.
시멘트는 1976년의 목표 년도에 북한이 750∼800만 톤을 계획하는 데 비해 남한에서는 1,300만 톤을 생산할 계획이었다. 수요만 생겨나면 우리나라의 시멘트 공장은 정부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커져 나가는 분야가 되어 있었다.
2.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
(3) 중공업
중공업 분야에서는 북한 계획이 수량적으로는 약간 앞서고 있었다. 철강 생산은 북한이 380∼400만 톤, 남한은 76년도에 358만 9천 톤을 계획했다. 공작기계 생산은 북한 2만 7천여 대, 남한 1만 4천여 대이다.
그러나 북한의 제철공업에는 문제가 많다. 철강공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공정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철광석에서 조강(粗鋼)을 만드는 제철 과정, 불순물을 없애고 각종 원소를 가입해서 여러 수천 가지 종류의 재질을 만드는 제강 과정, 그리고 각종 형태의 모양을 만드는 (주강 또는) 압연 과정이 있다. 종류가 너무 많아서 어떤 나라든 간에 모든 제품을 다 생산하는 국가는 없다. 따라서 철강재는 남는 것은 수출하고 못 만드는 것은 수입해서 쓰게 마련이다. 그리고 한 가지씩 국산화해 나가는 것이 우리나라와 같은 자유경제체제 하의 국가가 가고 있는 길이다. 그러니 품질과 가격 면에서 국제경쟁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철강공업의 철칙인 것이다.
이에 비해 북한에서는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을 쓰고 있으니 북한에서 생산되는 철강재만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에서 생산 못하는 재질이나 모양의 철강재는 구할 길이 없으니 대용품을 쓸 수밖에 없다. 서두에서 언급한 북한 영화를 보니 선박을 건조하는 데 철판 크기가 작아 조각조각 모아서 용접하여 쓰고 있는 장면이 있었다. 큰 철판이 생산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남한에서는 큰 철판을 수입해서 쓰면 되는 것이다. 고급 특수강이 필요할 때도 북한은 대용품 (또는 규격 미달품)을 사용해야 하고, 남한에서는 수입품을 쓰게 되는 것이다.
또 한 예를 들자. 자동차나 냉장고를 만들 때 쓰이는 냉각압연 철판은 「핫 코일」(Hot Coil)이라는 철판 두루마리를 압연해서 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시) 핫 코일을 수입해서 냉각박판을 생산해서 국내에서 사용하고 수출도 하고 있었다. 이 때 핫 코일은 수입을 했으니 우리나라의 제강 생산 통계에는 나타나지 않고 압연 분야에 대한 통계에만 나온다. 장차 냉각박판의 수요가 늘어나서 핫 코일의 수입량이 국제 규모의 공장을 건설할 수 있는 단위가 되면 그 때 가서 핫 코일 공장도 건설하게 된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핫 코일이 먼저 생산되어야 비로소 냉각압연 공장을 생각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생산도 안되고, 보지도 못한 냉간압연 철판의 수요가 늘어날 리가 없다. 결국은 핫 코일 공장이나 냉각압연 공장은 영영 건설할 수가 없게 되며 북한은 냉각박판을 쓰지 못하는 나라가 되는 것이다.
또 한 예로 우리나라에서는 고철을 수입해서 주강 제품을 만들고 압연재도 만든다. 고철을 회수해서 쓸 수도 있다. 그래서 제철소에서 생산되는 조강 생산능력보다는 주강 및 압연재 생산량이 훨씬 많게 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통계상 우리나라는 제강 능력은 북한에 뒤떨어지지만 압연 생산 철강재 사용량은 북한보다 월등히 많다. 이상 몇 가지 예만 들었는데, 제강 능력만을 갖고 곧바로 비교해서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註: 우리나라에서는 73년부터 중화학공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78년 남한의 철강 생산실적은 조강 기준으로 760만 톤, 79년에는 890만 톤이었다).
2. 북한의 인민경제 6개년 계획
(4) 인력
북한이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으로 인해서 전력과 석탄 그리고 인력의 과소비 구조가 심화됐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북한에서 인력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게 된 것은 66년부터이다.
김일성조차도 1967년 12월 "농촌에는 청·장년층 노동력이 적고 여자와 노인층이 대부분이다. 농업을 기계화해도 공업으로 흡수할 농촌 인구가 없다"라고 말했다. 북한은 「농업의 수리화, 전기화, 기계화, 화학화」를 농촌의 기술혁명노선으로 채택했는데, 이 정책도 따지고 보면 농촌에서 인력을 뽑아내어 공장이나 광산으로 돌리려 했던 것이나, 농촌에도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60년대에 사회에서 노동을 할 수 있는 연령층(만 18세 이상)이라면 적어도 1950년도 이전에 출생했어야 한다. 그런데 북한의 출생아 수는 (50년대의 숫자는 구할 수 없고) 60년에는 41만 명, 65년에 53만 명, 70년에 65만 명으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50년대에는 40만 명이 못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간단하게 계산하기 위해 매해 40만 명의 신생아가 출산한다고 가정해 보자. 40만 명의 신생아 중에는 유아 사망자도 있고 신체장애자도 있겠지만, 40만 명이 모두 건강하게 성장했다고 가정하더라도 40만 명 중 남자는 약 20만 명이다. 북한은 현역만 약 100만 명의 軍을 유지하고 있으니 남자 20만 명을 모두 軍에 입대시킨다 해도 100만 명을 채우려면 최소한 5년이라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즉 방대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남자는 최소한 5년은 군 복무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더욱이 북한은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으로 인해 인력 과소비 구조가 됐으니 농촌이나 공장에서 일하는 생산직 근로자의 부족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자명한 결론이 된다(註: ① 공업국이 되려면 인구가 최소한도 5천만 명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이 정도가 되어야 구매력이 생겨나서 공업 기반을 구축할 수 있다. 북한의 총 인구는 1953년에는 849만 명, 56년 935만 명, 60년 1,056만 명, 65년 1,217만 명, 70년에는 1,438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중공업을 위시한 모든 공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인구 구조상 불가능하다. ② 그리고 북한은 국방을 위해 인력, 자원 등에서 능력 이상의 부담을 하고 있는데, 김일성도 "국방비에 사용되는 부담의 일부만이라도 경제 건설에 돌릴 수 있다면 인민경제는 더욱 빨리 발전하고 인민의 생활은 더욱 윤택해질 것이다"라고 자인하고 있다).
인력 부족 현상이 나오면 새로운 기술에 의한 기계화, 자동화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고급 상품 생산으로 전환해야 하는데, 북한은 이러한 기술혁신을 무시하고 「천리마 운동」 등 혁명사상으로 해결코자 했다(註: 일정 때의 근로 동원이나 근로 봉사를 연상케 한다). 인력이 부족하니 여성 노동력도 활용하게 됐는데, 여자가 공장에서 밤늦게까지 일하게 되니 밥 공장이 생겨났고 탁아소가 필요했으며 심지어 여자의 결혼 연령까지 연장시키게 된 것이다.
이러한 해결 방침은 북한의 공업기술을 해방 전인 1940년대의 기술로 고착시켜 북한의 국제경쟁력에 치명적 손상을 주게 되었다. 결국 북한은 많은 물품을 생산한다고는 하지만 수출할 수 있는 상품은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3. 결론
자력갱생·자급자족 정책은, 석유를 위시한 각종 자원을 모두 생산하고 인구가 몇 억씩이나 되고 국민의 의식주 문제가 해결이 가능한 소련이나 중국 같이 큰 나라에서나 시도할 수 있는 것이지, 북한과 같이 전력이나 석탄이 좀 있다고 해서 이것을 토대로 해서 국민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나라 경제를 경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곧 한계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그 이상의 발전은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註: 이 보고 때 자력갱생·자급자족식 경제발전 방식을 「자국의 부존자원이라는 뿌리만으로 폐쇄독립적 경제권을 구성한다」는 뜻에서「입목형(立木型, Independent Tree Type) 경제발전 방식」이라고 명명했는데, 이 때 처음으로 사용했다).
남한에서는 「수출제일주의」가 나라의 근본 전략이다. 수출할 수 있는 상품 개발, 국제경쟁력(품질과 가격) 강화, 품질의 고급화, 대량생산방식의 채택, 생산성 향상 등에 총력을 기울여서 70년에 10억 달러를 수출했고, 76년에는 35억 달러를 수출할 계획이었다(註: 실제로는 77년에 수출 100억 달러 달성).
수출 상품이 늘어나면 여기에 필요한 원자재 공장도 건설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 기본 소재 공장도 건설하게 된다. 이 때 기술이나 가격 면에서 국제경쟁력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리고 공장에서 필요한 기계도 국산화해야 한다. 즉, 중화학공업이 육성되어 공업구조가 완성되고 국제화가 되어 가는 것이다(註: 이 회의에서 수출산업을 먼저 출발하고 중간원료공업, 기초원료공업, 중공업 순으로 건설하는 경제개발 모델을 "피라미드형(Pyramid Type)"이라고 칭했다. 수출산업 즉, 국제경쟁력을 피라미드의 기반으로 해서 경제구조를 완성시킨다는 뜻인데, 이 단어 역시 이 날 창조한 단어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방향으로 공업 발전을 해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70년대 말이 되면 이러한 공업구조의 개편 작업이 마무리 될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의 경제 대결에서 남한이 승자로 결판이 날 것이며, 수출제일주의 정책이 자력갱생 정책보다 우월하다고 증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사회주의에 승리하는 역사적 순간이 될 것이다.
첫댓글 한총련이 이 글을 읽고 제대로 이해나 할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올려본다. 그중에 깨인 놈이 있으면 읽고 뭔가 좀 다르게 생각해볼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