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광역시] 조방을 밝히다 2017 조방 LOVE U 빛축제

[나나]

머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다.

정수리에서 뻗어내려 온 머리 전체가 지끈지끈 아프는데 죽지 살지는 못하겠다.

머리가 구정물 같이 탁하고 멍멍하여 앞도 안 보이고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다.

책을 볼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다,

죽을 쑤어 먹어봐도 안 되고 사과를 먹어봐도 안 되고 커피를 마셔봐도 안 되고,

도저히 아파서 살 수가 없어서 "죽겠습니다." 하고 이불덮고 죽었는데 죽지도 않는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죽으려고 했으면 죽는 데만 열중하지 다른 소리는 왜 들을까?

아픈 머리를 싸매고 누워서 You Tuve에 올라온 시사뉴스를 바짝 신경을 쓰고 들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정치인들의 국민 속이는 사기 짓에 화가 치밀어 죽을 것 같다.

이런 내가 하고 있는 꼬라지를 보니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할 것 같았다.

살려면 화끈하게 살고 죽으려면 딸깍 죽어야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고 이게 뭔가?

벽을 잡고 일어나 세면장으로 나와서 뜨거운 물을 온몸에 들어부었다. 화끈하게 살려고.

그리고 진통제 사리돈 한알을 찾아서 먹고, 거울을 보고 앉아서 곱게 화장을 했다. 

진통제로 신경을 둔하게 하고 가라앉혀서 밖으로 나가서 바람을 좀 쐬면 나을 것 같아서.

그리고 절대 나가고 싶지 않은 유진에게 "꼭 같이 갈데가 있다." 하여 억지로 끌고 나왔다.

     (2017 조방 LOVE U 빛축제)

그리하여 나온 곳이 '2017 조방 LOVE U 빛축제'가 열리고 있는 조방거리다.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전과 달라진 조방거리를 꼭 한번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던 차,

누가 올린 글에서 조방거리에서 조방 LOVE U 빛축제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머리가 구정물같이 탁하고 멍멍하고 속이 울렁울렁한 속에서도 빛은 빛났다.

무슨 모양이 보이면 저게 무슨 모양인가 하고 가까이 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이렇게 머리가 심하게 아픈데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싶어서 사진도 찍고,

기상대를 믿고 두꺼운 외투에 내복까지 입고 나왔더니 몸에서 열이 펄펄 난다.

의심이 갔지만 혹시나 하고 입고 나왔더니 역시나 기상대는 다 믿으면 다 당한다.

춥고 더운 것을 이겨내지 못하니 한겨울에 두꺼운 옷이 짐이 되어버렸다.

지퍼를 열어 열을 식혀가면서 빛을 바라보고 빛거리를 걸어간다.

다른 유명한 빛축제들을 많이 봐서 크게 감동은 없지만 소박하고 좋다.

나름대로 적은 예산으로 멋지게 꾸민다고 애쓴 흔적이 군데군데 보인다.

     (실타래)

보도블록도 새로 깔고, 차선도 변경시키고, 나름대로 꽤 신경을 많이 썼다. 

옛 조방(조선방직)을 연상하는 실타래도 있고, 진시장을 알리는 자수 장미도 있고, 

범일동의 유래를 말하는 호랑이도 있고, 신발과 봉재를 뜻하는 신발과 타올도 있고,

     (꽃 자수)

그냥 빛만 번쩍번쩍 하는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다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공부를 하지 않고 와도 불빛의 모양을 보면 조방이 어떤 곳이었는지 알 수 있다.

불빛 하나하나를 보면서 의미를 생각하고 그시절 그때를 상상하면서 걷는다.

     (호랑이)

이왕이면 자가용도 통제하지, 쉴새없이 지나가는 자가용이 몹시 거슬린다.

버스 노선까지 변경하면서 주말에 자가용 하나 통제하지 못할까, 이유가 뭘까?

불빛에 빠져 정신없이 불빛을 감상하고 있으면 자가용이 내궁둥이에 딱 붙어 있다.

옛날처럼 크략숀을 빵빵 울리거나 인상을 쓰고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지는 않지만,

사람보다 차가 우선인 세상이 아직 그대로다. 차가 먼저 사람을 비켜 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자가용이 다 있어 이런 데를 자가용을 끌고 다니면서 방해를 하는가 싶다.

진통제 효과인지 바깥공기 때문인지 자신의 기분 탓인지 알수는 없지만,

아픈 것이 조금 덜하고 지끈거리던 것도 멍멍하던 것도 현저하게 약해졌다.

조금씩 글자가 눈에 보이고 불빛이 아름답고 죽음이라는 단어가 멀어졌다.

아무리 보아도 인간의 능력은 무한대다.

무슨 재주로 저렇게 밝은 빛을 개발하여 세상을 밝히는가 싶다.

감사하다 감사하다. 이세상의 과학자들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호롱불 켜놓고 공부하다 잠이 들어 책상(나무 판) 태워 먹은 때가 옛날이다.

아마 요즘 아이들은 그런 어두운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보니 나도 엄청 오래 살았다. 나도 이젠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만능의 세상이 되었다.

부족한 것은 딱 한 가지, 내 자신이 부족할 뿐이다.

발전하는 세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부족하다.

오, 나왔구나 엿장수 아저씨, 축제에 엿장수가 빠지면 섭섭해서 안되지.

때를 알고 각설이 옷이 아닌 산타클루즈할아버지 복장을 하고 나왔구나.

그러면서 노래는 또 어깨가 들썩들썩하는 흘러간 대중가요를 틀어놓았다.

뭐 어쨌거나 엿이 잘 팔려야 되는데, 장사는 무조건 많이 팔아야 되는데...

한참을 지켜보아도 엿 사는 사람이 없다, 요즘 사람들은 엿을 잘 먹지 않는가?

나는 엿장수만 보이면 엿을 사는데 오늘은 머리가 아파서 엿을 먹을 수가 없다.

메인무대를 다 둘러보고 이제 북쪽 서면방향 평화시장 쪽으로 내려간다.

빨간 삐에로가 문앞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어서 오십쇼" 하고 인사를 한다. 

폭 넓은 제스처로 유쾌하게 맞이하는 삐에로의 시원한 인사에 마음 흐뭇하다.  

그런데 유진은 아직까지도 이유없이 끌려나온 것이 많이 못마땅 하다.

조금이라도 걷는 데 걸리거나 사진 찍는데 방해를 하거나 자가용이 얼른거리면,

그만 무서운 호랑이로 변하여 "무식한 새끼 예의도 없이" 하면서 성질을 팍 낸다.

참 딱하다 싶었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나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유진의 불평도, 예의도 없는 새끼들의 짓들도, 나는 그냥 속으로 삼킨다.

아마 나의 두통도 이렇게 모든 것을 참기만 하고 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빛은 여전히 번쩍번쩍 빛난다.

인간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어떤 못된 짓을 해도 빛은 빛의 존재를 지킨다. 

나도 네넘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어떤 못된 짓을 해도 나는 빛만 볼 것이다.

오, 요건 비누 방울이다. 비눗방울이 동글동글 모여 있다.

오늘 본 것 중에서 제일 아름답고 신기하고 멋있는 불빛이다.

입으로 호 불면 하늘 높이 확 퍼지면서 동글동글 날아갈 것 같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 여러가지 색깔로 변해가면서 빛을 낸다.

그런데 왜 파란색 하나 뿐일까, 분명히 여러가지 색을 다 찍은 것 같은데...

아무튼 아름답고 신기하고 멋있는 비눗방울 빛이 나를 웃을 수 있게 했다.

오, 요건 영화 '친구'에서 책가방 옆구리 끼고 우산 쓰고 등교하는 모습이다.

그 시절에는 저렇게 각 학교별로 까만교복 까만모자 학생가방이 따로 있었다. 

그런데 우산이 고급이다. 그때는 저런 대가 실한 고급 우산은 많이 쓰지 못했다.

옛날 생각나서 우산 속에 들어가 보았더니 바짓가랑이에 물이 튄다.

멀건 하늘에 무슨 빈가 싶어서 보았더니 우산이라고 비를 내리게 연출했다.

꼼꼼하게 신경을 썼는데 키가 너무 낮아서 옆에 서니 허리가 구부려 진다.

벌써 20시가 지났나 보다. 가게의 불빛들이 더욱 선명해 지고 촘촘해졌다.

여러군데 불빛축제를 다녀 본 경험상 불빛은 20시가 넘어야 선명하고 좋더라.

그 사이 죽음을 생각했던 두통은 진정되고 이제 좀 살겠다 싶으니 배가 고프다.

부산의 맛집 중에 조방앞 할매낙지볶음이 유명하다.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되고, 조방앞에 나온 김에 할매낙지볶음 먹고 갈까?"

나의 제의에 유진도 이견없이 "그래" 하고 조방앞 할매낙지볶음으로 결정했다.

    (평화시장앞 광장)

뜨거운 불에 쫙 오그라 들면서 달달한 육즙을 확 뿜는 매콤한 낙지볶음!

이세상에 먹는 것만큼 즐거울까, 먹는 것 생각하니 그만 입에 침이 고인다.

맛있는 낙지볶음 먹을 것을 생각하니 걸음도 빨라진다.

     (조방 GOLD THEME STREET)

앞에 보이는 저 골목은 GOLD THEME STREET로 금방골목이라고 부른다.

한때는 금보다 낙지가 더 성행했는데 비싼 점포세로 낙지집이 많이 없어졌다.

먹자골목으로 음식점이 많았는데 다 없어지고 낙지집도 딱 두집 남았더라

그런데, 금방골목은 왜 빛축제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같은 조방거리인데.

같은 조방거리에서 금방만 축제에서 쏙 빠져버리면 그것도 얌체 짓 아닌가?

금방도 낙지집도 워낙 장사가 잘되니 그까짓 축제따위는 열 필요도 없었는가?

(낙지볶음 7,500원×2인분+우동사리 1,000원=16,000원)

아, 드디어 맛있는 할매낙지볶음집에 들어왔다.

오늘도 여전히 손님이 많아 문을 염과 동시에 몇 명이냐고 인원 수부터 묻는다.

손가락으로 2를 펴보였더니 자리가 없다고 문앞 옆자리에 붙어 앉으라고 한다.

불위에 낙지팬이 얹히고, 따딱따닥 지글지글 낙지 익어가는 소리가 기분좋다.

아름답고 신기한 불빛을 보고 와서 그러리라. 오늘은 다른 때보다 맛도 더 있다.

"음~ 맛있다" 낙지를 좋아하지 않는 유진도 오늘은 맛있다면서 쓱쓱 잘 먹는다.

이제 배도 부르고, 두통도 완전히 사라졌다.

머리가 안 아프니 아무 걱정이 없고 아무 무서운 것도 없다.

세상 좋기만 하고 그 어떤 어려운 일도 못할 게 없을 것 같다.

     (평화시장앞 광장에 포장마차)

불룩 튀어오른 배를 내밀고 나오니 옆의 포장마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온다.

힐끔 쳐다보니 매운 떡볶이와 매운 고추튀김을 먹고 쩔쩔 끓는 오뎅국물을 마신다.

역시, 부산사람들은 성격만 화끈한 것이 아니라 먹는 것도 화끈하다. 뒤끝이 없다.

머리가 아프고 힘이 딸릴 때가 그렇지, 건강한데 시간이 좀 늦으면 어때.

소화도 시킬겸 조방거리 한 바퀴 더 돌아서 빛축제 좀 더 보고 가기로 했다. 

금방골목에서 평화시장을 보고 자유시장으로 해서 시민회관으로 걸어간다. 

     (부산시민회관)

한때는 12월 딱 들어서면 망년회다 뭐다 하여 거리에 사람들이 왁작왁작 하고,

음식점도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가고 그랬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조용해졌는지,

제발 손님 좀 오라고 없는 돈 긁어서 빛축제까지 열어놨는데도 사람이 별로 없다.

시민회관도 행사가 있든 없든 항상 사람들이 들끓고 포장마차가 줄을 섰는데,

옛날 일이다. 호시절 다 지나갔다. 시민회관앞에 사람도 포장마차도 다 사라졌다.

잠이 오지 않거나 속이 출출하면 벌떡 일어나 시민회관으로 왔는데 쓸쓸하게 됐다.

     (호박나이트)

어슬렁어슬렁 걸어서 빛축제가 시작되는 호박나이트 앞까지 왔다.

어떤 중년의 여인이 혀꼬부라진 소리로 비틀비틀 "닥시 닥시" 하고 소리 지른다.

술도 알맞게 먹어야 태워주지, 택시들이 여인을 보더니 그만 횡 달아나버린다.

또 어떤 사람들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나오나 한참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아직 귀가 시간이 멀었는지 사람은 아무도 안 나오고 방구만한 호박만 보인다.

누런 호박을 싣고 시내를 돌면서 "호박" "호박" 하고 외치던 호박나이트가 한산하다.

아까 보았던 빛 작품들을 두 번째 보면서 빛거리를 걸어간다.

남포동만큼 꽉 차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포토포인트도 많이 만들어 놓았다.

마음이 느긋하니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또 다른 사람들 사진도 찍어주고.

     (부산진시장)

아까는 두통으로 보이지 않았던 진시장도 밝게 보인다.

부산 경남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 부산 진시장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옷가지부터 이불, 가방, 신발, 가전제품까지 없는 것 없이 다 있는 시장이니까.

나는 "우아하게 커피 한잔 하자" 라는 말은 잘해도 실제로는 커피를 잘 안 마신다.

기분이 이상하거나, 춥고 속이 떨리면 한 사발 타서 뜨거운 물 대용으로 마신다.

그런데 유진은 목이 말라도 커피, 분위기가 어색해도 커피, 기분이 상해도 커피다.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하는데 내가 볼때는 완전 커피 중독자다.

금방 밥먹고 배부른데 또 커피 한잔 해야된다고 해서 길거리 커피집에 들어갔다.

커피 내리는데 옆에서 보니 문에 '영화 친구 촬영지' 하고 코팅을 해서 붙여놓았다.

그래서 "아 이집 앞에서도 친구를 촬영했구나, 자랑한다고 써붙여 놓았군" 했더니,

주인아저씨,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와서 영화 '친구' 촬영이야기 한다고 시끄럽다.

묻지도 않았고 듣고 싶지도 않은데 이쪽 저쪽 손짓을 해가면서 혼자 영화에 빠졌다.

아니, 사람들은 왜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않고 묻지 않은 말에 열을 올리고 그럴까?

알고 싶지 않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우리 가게앞에서 촬영했어" 하고 혼자 신났다.

커피 한잔 마시러 갔다가 우리 가게앞에서 촬영했어 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다.

영화 '친구'는 부산 전 지역에서 촬영했는데 자기 집앞에서만 촬영했는줄 안다.

좋아서 하는 말인데 화를 낼수도 없고 "아 그렇습니까 축하합니다 예 예 예 예 예 ..." 

산에서도 그렇고 시내를 돌아다녀 봐도 그렇고 참 웃기는 사람들이 많다.

     (공중전화박스)

요건 드물게 보는 공중전화박스다. 최근 들어 처음 보는 것 같다.

전화박스 색깔도 세월이 흐름과 함께 색깔도 따라서 바뀌었다.

휴대폰이 없는 이들을 위하여 공중전화기를 설치해준 것이 감사하다.

이제 어느 정도 소화도 된 것 같고, 구석구석 사진도 어지간히 찍었다.

머리가 많이 아플 때는 그 어떤 것도 반갑지도 않고 고맙지도 않았는데,

마음에 없었지만 같이 따라와 준 유진이 고맙고, 불빛축제가 감사하다.

두통으로 괴로웠던 저녁시간 조방빛축제와 함께 편안하게 잘 보냈다.

이세상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하고, 싫었지만 같이해준 유진이 감사하다.

내일은 고통없는 편안한 다른 내일이 오기를 기도하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2017. 12. 9. 토. 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