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G삽화(이철원기자)폭550(480),고192(152) /출처,조선닷컴-#6b9431
[박해현의 문학산책] 素月을 읽으면 民謠가 들린다
가수 임재범이 히트곡 '너를 위해'를 부른 동영상이 인터넷에서 조회수 400만건을 넘었다. 일찍이 플라톤은 입맞춤을 가리켜 "가여운
내 마음이 입술 너머 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네"라고 노래했다. 한국인에게 노래는 연인뿐 아니라 인생과 자연과 나누는 입맞춤이다.
한국인은 노래로 정(情)과 한(恨)을 공기 속에 띄워 타인의 가슴속에 스며들게 해야 자기 가슴에 맺힌 게 풀리는 모양이다. 임재범의
동영상처럼 대중적 인기는 없지만,요즘 문인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유튜브에 돌아다닌다.'노찾사' 출신 가수 조경옥이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여 재작년 발표한 '비단 안개' 동영상이다. 같은 이름의 가곡(歌曲)과는 전혀 다른 비가(悲歌)다."눈들이 비단 안개에 둘리울 때,
그때는 차마 잊지 못할 때러라"고 시작한다. 눈이 녹을 때 첫사랑을 이뤘지만,꼭 그맘때 영이별도 겪었기에 종달새 솟을 적마다
슬픈 심정을 읊는다. "들에랴, 바다에랴,하늘에서랴, 아지 못할 무엇에 취(醉)할 때러라"처럼 '~러라(~던가)'는 예스러운 종결어미가
처연하다. 주로 마흔을 넘긴 글쟁이들이 청승맞게 즐겨 부른다. 여리여리한 외모에 가냘픈 고음의 시인들이 불러야 제맛이다. 김소월
처럼 노래의 날개를 숱하게 단 시인도 보기 드물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라며 시작하는 '부모'를 비롯해 '개여울'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등등 대중가요의 고전이 많다.1934년 김소월이 세상을 뜨자 언론이 '민요시인 소월 김정식씨 돌연 사망'이라고 보도했듯이,
그는 그냥 시인이 아니었다.평안도가 고향인 김소월은 어릴적 듣고 자란 민요뿐 아니라 우연히 얻어들은 민요도 열심히 채록했다.
소월이 남긴 산문 '팔벼개 노래조(調)'는 갓 스무 살 기생이 부른 노래를 소개했다."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중략) 영남의 진주는 자라난 내고향, 돌아갈 고향은 우리님 팔벼개."소월은 채란이란 기생이 열세살에 돈에 팔려 유녀(遊女)가
된 기구한 사연을 직접 들었다.그는"작금도 매양 내 잠아니 오는 긴밤에 나 홀로 거니는 감도는 들길에서 가만히 이 노래를 읊으면 스
스로 금치 못할 가련한 느낌이 있음을 취(取)하였을 뿐이라"고 회상했다.소월의 시는 귓가에 맴돌던 말이 가련한 소리가 돼 서걱거리며
종이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문학평론가 하응백은 최근 민요를 비롯한 가사,시조창(唱),잡가의 노랫말을 모은 책 '창악집성(唱樂集成)'
을 냈다. 5년 동안 작업한 끝에 1100쪽이 넘는 책을 3000만원 넘게 들여 자신이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냈다. 그는 소월의 시를 읽으면
평북 아리랑인 '긴아리'가 들린다고 했다. '긴아리'는 "비야 뭐 올래면 소낙비 좋지, 실실이 늘여서 내 속을 왜 얽나"고 한다. 가는 비가
아니라 소낙비가 쏟아져 답답한 자기 속을 씻어달라는 노래다. 소월의 시 '왕십리' 첫 연"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도 비슷한 가사와 음조,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뒷문 밖에야 시라리 타레, 바람만 불어도"라는 민요를 듣고 자란 소월은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란 시구(詩句)를 쓸수 있었다.하응백은 우리 민요에서 현대시 뺨치게 세련된 수사학을 숱하게 찾았다고 했다.
"물 위에 계시기에 물 아래 살지,할레도 두번씩 들쎌물 있구나"는 민요가 있다.연인이 헤어져 물 위와 아래에 나뉘어 사는데,"하루에도
두번씩 교차하는 밀물 썰물처럼 만나지 못한다"는 노래다. "조개는 잡아 젓 들이고, 가는 임 잡아 정(情) 들이자"는 말놀이는 절묘하다.
지금껏 민요 노랫말은 상당수가 뜻을 알수 없는채 전해왔고, 해독(解讀)작업도 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이 홀로 자기
돈을 들여낸 '창악집성'이 민요 재발견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건달'이란 우리말은 불교에서 음악의 신(神)을 뜻하는'건달바'에서 나왔다.
'나는 가수다' 열풍을 일으킨 우리민족의 '건달' 유전자 운반체는 오랫동안 민요가 맡아왔다.소월의 시가 빼어난 가요로 바뀌기 쉬운것은
민요와 현대시를 서정적으로 결합했기 때문이다.요즘 나는 소월의 노래 '비단 안개' 동영상을 보고 또 본다.노래는 발라드풍(風)이지만
원래 시는 3음보 민요풍이었다."아지 못할 무엇에 취(醉)할 때더라"며 남이 볼세라 낮게 읊조린다. ▶출처;조선닷컴 chosun.com/2011/06/30
♣IMG삽화'꽃잔디동산(이철원기자)폭550(480),고192(152) -#6b9431
[오태진의 길 위에서] 진안 원연장마을 꽃잔디 동산과 마을 박물관
"마이산 북쪽 2만평 구릉 온통 분홍빛 꽃사태 일흔명 사는 이 마을에 어린이날 1만명 몰려 일흔넷 出鄕인사가 고향에 가꾼 꽃잔디 동산
입장료 받지 않고 누구나 꽃길 걸을 수 있어" 말 귀처럼 솟은 마이산(馬耳山), 그 두 봉우리가 지척인 듯 바라다보이는 산비탈에 분홍빛
꽃융단이 깔렸다.7㏊,2만여 평 구릉에 온통 꽃사태가 났다. 분홍 꽃물결이 언덕을 뒤덮고서 흘러내린다.전북진안군 진안읍 연장리
원연장마을 뒷동산엔 4월 중순부터 한 달 남짓 꽃잔디가 지천으로 핀다. 도시 찻길가에서도 흔히 보는 꽃잔디가 장관을 이룰 수 있다는
걸 이곳에 와 보면 안다. 꽃잔디밭 이랑 따라 자줏빛 박태기나무꽃, 빨간 철쭉과 겹복사꽃, 때늦은 산벚꽃·겹벚꽃까지 피어 어질어질 꽃
멀미가 난다. 이 별천지는 관광농원도 아니고 입장료를 받지도 않는다. 누구나 와서 꽃길을 거닐며 즐길 수 있다.주차장도 닦고 간이화
장실도 마련해놓았다.원연장마을 꽃잔디 동산엔 한 출향(出鄕)인사의 고향사랑과 정성이 배어 있다.일흔네 살 이기선씨는 1945년 여덟
살에 마을을 떠났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고 공무원을 거쳐 사업을 해 성공했다. 그는 아버지가 "선산(先山)을 만남의 장소 삼아 친척,
고향 이웃들과 우애를 다져라"고 이른 유언을 기억했다.선산발치에 주말 주택을 짓고 2002년부터 꽃잔디를 심었다.공원처럼 꽃이 만발
했던 오스트리아 빈의 공동묘지처럼 꾸며보고 싶었다.꽃잔디를 택한 건 우선 꽃이 한달 넘게 피는 게 좋아서였다.겨울에 모질게 추워도
푸른 빛이 생생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선산 주변 땅을 사들여 계속 넓히면서 꽃잔디를 채워나갔다. 독일에서 사는 독일인 매제가
와서 보더니 "여기 묻히고 싶다"고 했다. 매제는 4년 전 숨진 뒤 운구돼 와 이곳에 잠들었다.
꽃잔디밭이 커가면서 이씨와 마을 사람들은 '우리끼리만 보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이름 내건 축제를 꾸려보자고 자연스럽게
뜻을 모았다. 2009년 '원연장마을 꽃잔디축제'가 시작됐고,올해 세 번째 축제가 지난 5일부터 나흘 열렸다.잔디밭에 천막 몇 채가 전부인
축제장은 마을 사람들의 축제장이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전 부칠 파를 다듬고 김밥을 말았다. 할아버지들은 도시 꼬마들 앞에서 짚으로
달걀 꾸러미를 엮어 보이고 달걀을 담아 선물했다. 어린이날엔 서른여덟 가구 일흔 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 1만명이 몰려들었다. 꽃잔디
동산 주변 주차장 셋이 꽉 차는 바람에 차를 마을 마당에 세우게 하고 '셔틀 트랙터'에 손님들을 태워 날랐다. 마을 노인들이 나무로 짜
만든 객차 한 칸을 트랙터가 끄는 원연장식 셔틀버스다. 객차엔 색색깔 조화(造花)를 걸어 장식했다. 거기엔 손님을 진심으로 반기고 잘
대접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어떤 생화(生花)보다 아름다운 조화다. 축제장에서 만난 축제추진위원장 겸 이장 신애숙씨도 신바람이
나 있었다. 마흔아홉 살인 그가 마을에서 가장 어리다고 했다. 신씨에게 마을을 구경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정자가 있는 복판 마당엔 꽃
잔디로 장식한 꽃탑에 마이산 탑사(塔寺)를 본뜬 돌탑이 손님을 맞는다. 마을 사람들이 일구고 거둔 배추를 절여 파는 작업장, 농촌 체험
온 단체를 먹이고 재우는 체험관도 구경했다. 체험관 옆 황토 흙집엔 방 둘, 화장실 둘에 깔끔한 입식 부엌이 마련돼 있다. 귀농(歸農)을
꿈꾸는 도시민이 묵으면서 농촌생활을 실제로 겪어보는 '귀농인의 집'이다. 한 달 빌리는 값이 30만원인데, 신청자가 밀려 1~2주 단위로
만 빌려준다고 한다. 원연장마을에서 접한 농촌의 모습은 뜻밖에 활기찼다.주민 대부분이 60~70대인 마을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의욕
과 생기가 넘쳤다.마을 복판을 흐르는 개천 건너엔 초가지붕을 얹은 하얀 집이 서있다.쓰레기 집하장을 고치고 단장해 만든 '꽃잔디마을
박물관'이다. 명색이 박물관인데 함석지붕이어서야 되겠느냐며 마을 어른들이 짚을 엮어 올렸다고 한다. 아담한 공간에 놓인 소장품을
보자마자 푸근한 미소부터 떠오른다. 괘종시계,됫박,다듬이 방망이,남폿불, 옷 담는 대나무 상자 도방구리, 소 발에 씌웠던 소 짚신까지.
이젠 쓸모없어졌지만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긴 세월을 보낸 소중한 물건들이다.무엇보다 빛바랜 흑백사진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녹여버린
다. 병풍 앞에 서서 사모관대 쓰고 띠 색종이에 파묻힌 신랑 신부,구례 화엄사에 나들이 간 마을 사람들이 대웅전 계단에 앉아 찍은 기념
사진…. 가난했어도 이웃끼리 아끼던 그 시절을 미소로 돌아보게 한다. 명찰 달린 교복에 머리보다 더 큰 교모를 쓴 국민학생 형이 동생
들을 거느리고 찍은 사진을 보면서는 "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원연장마을 박물관엔 그 어떤 번듯한 박물관도 흉내 내지 못할 따사로운
정이 가득했다.마을 마당 돌탑에 할아버지 한 분이 또박또박 정성껏 쓴 기원문을 걸어놓는다. '원연장 꽃잔디마을 거부마을 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걸 보며 마을 분들 모두 거부(巨富) 되시라고 빌었다. ▶출처;조선닷컴 news.chosun.com/2011/05/23
♣IMG삽화'천리포수목원의목련(이철원기자)폭550(480),고192(152) /출처,조선닷컴-#6b9431
[오태진의 길 위에서] 천리포수목원의 목련과 개구리
김치 없인 밥 못먹고 라면 안주 삼아 소주잔 기울이던 수목원 개척자 민병갈 목련의 '시크릿 가든' 오붓이 거닐며 마지막 남은 육신마저
거름으로 쓰라던 그를 추억한다. 길게 늘어뜨린 진홍빛 꽃잎이 봄바람에 나풀거린다. 꽃떨기가 사람 얼굴만하다. 키7m 가까운 나무엔
빛나는 별같이 하얀 꽃이 소복하게 내려앉았다.국화처럼 꽃잎이 자잘하고 빽빽한 꽃도 봄 속으로 머리를 내밀었다.하얀색과 자주색은
물론이고 주홍·꽃 자주·연보라· 분홍에 노랑 꽃까지, 세상에 이런 목련도 있나. 듣도 보도 못한 온갖 목련꽃이 작은 동산에 벙그러지고
있다. 4월 천리포수목원 목련원은 꽃들의 숨은 천국, 목련의 샹그릴라다. 지난 주말인 23일 충남태안 천리포수목원에 후원회원들이
모여들었다.이 바닷가 수목원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며 한 해 몇 만원에서 몇 백만원씩을 보태는 사람들이다. 해마다 '회원의 날'은
목련꽃 만발하는 4월중순에 맞춘다.올해는 추위 탓에 꽃이 더뎌 날을 한 주(週)쯤 늦게 잡고도 아직 망울만 맺은 목련이 많다. 냉해를
입어 다 피지도 못한 채 누렇게 시들어버린 꽃도 있다. 그래도 꽃망울이 솜털 보송보송한 갈색 껍질에 감싸인 채 빠끔히 원색 꽃빛을
내비치는 건 그지없는 사랑스러움이다. 나비가 허물 벗듯 찬란한 꽃잎을 펼치며 세상으로 나서는 건 벅찬 경이로움이다. 수목원 생태
교육원 북쪽 목련원은 일반 관람객의 발길이 뜸한 비원(秘苑)이다. 덕분에 목련 아래 풀밭에도 온통 봄 생명이다. 파란 큰개불알풀 꽃
과 노란 민들레 꽃이 융단처럼 깔려 있어 발 디딜 곳이 없다. 쇠뜨기가 뱀머리처럼 생긴 홀씨 대를 일제히 밀어올리고 있다. 회원들은
이 시크릿가든을 거닐며 한 사람을 생각한다. 9년 전 목련꽃 피는 4월에 떠나간 민병갈을 떠올린다.그는 1945년 스물넷에 미군 장교
칼 페리스 밀러로 이 땅에 왔다가 이 땅이 좋아서 눌러앉았다. 60년대부터 천리포에 조금씩 땅을 장만해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일궜다.
나무와 꽃 2만5000종을 심고 그중 1만2000종을 키워냈다. 세계를 통틀어 500종 남짓한 목련 중 420여종이 이곳에 있다. 호랑가시
나무는 370종, 동백은 380종, 단풍은 200종,무궁화는 250종이 자란다. 그가 각별히 사랑했던 꽃이 목련이다.미국에 계신 어머니가
좋아했던 꽃이기도 하다.그는 목련꽃 피는 4월이면 꽃망울 터지는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깥 약속을 끊었다. 망울이 맺히면 새들이
따먹지 못하도록 일일이 작은 모기장을 쳐 줬다. 민병갈은 김치 없인 밥을 못 먹고 밤참 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기울였다. 수목원 안
에 기와집을 짓고 온돌에서 잤다. 그는 우리 개구리도 사랑했다. 개구리들이 합창하는 시절이 오면 밤늦도록 연못가에 앉아 귀를 기울
였다. 그는 "죽으면 개구리가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수목원 본원인 '밀러스 가든' 못가엔 그의 소원대로 개구리 석상이 놓였다.
목련원을 내려다보는 산중턱,그가 살던 '후박나무집' 마당에 목련 한 그루가 아직 꽃 피울 생각도 않은 채 서 있다. 그가 키워 세계목련
학회에 등록한 큰별목련 새 품종이다.그는 자기가 좋아했던 나무딸기에서 이름을 따 '라스베리 펀(Raspberry Fun)'이라고 붙였다.
팻말에 "사랑하는 어머니 에드나 밀러에게 바친다"고 쓰여 있다. 후박나무집 뒷산엔 그의 무덤이 있다. '회원의 날'을 맞아 그를 사랑
했던 친구와 후배들이 소주잔을 올려 놓았다. 한 장년 신사가 따스한 봄볕에 자리를 펴고 앉아 상념에 잠겨 있다.아마도 민병갈을 생각
하고 있을 것이다.묘소 앞에도 자그마한 개구리상과 '라스베리펀' 한 그루가 있다. 민병갈은 생전에 언론인 임준수와 이런 문답을 나눈
적이 있다.- 돌아가시면 한국에 묻히시겠습니까. "그럴 땅이 있으면 나무를 심어야지요."- 화장을 원하시나요. "뼛가루도 땅에 묻으면
안 됩니다." - 천리포 앞바다에 뿌리길 원합니까. "그것도 안 돼요. 나무 거름으로 써야지요." 하지만 양아들과 주변 사람들이 묘를 쓰
면서 그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묘석에 새긴 글을 읽어 본다."… 세계적인 자연동산을 일궈놓고 이곳에 잠드니 푸른 눈의 영원한
한국인 민병갈이 남긴 천리포수목원은 앞으로 천년을 더 푸르러 갈 것이다."그가 떠난 이듬해 봄 '라스베리 펀'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
고 한다. 임준수는 민병갈 평전에 "나무에게도 슬픔을 견뎌낼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라고 썼다. 목련꽃은 이번 주말쯤 절정에 오를
것이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고 지면서 5월중순까지도 꽃을 보여 줄 것이다. 천리포수목원에 가거든 목련 한그루도 무심히 지나치지
말자. 개구리상도 찾아보자. 어떤 한국사람보다 이 땅과 이 땅의 자연을 사랑했던 민병갈, 이토록 찬란한 자연을 누릴 수 있게 해 준
그를 떠올려 보자. ▶출처;조선닷컴 news.chosun.com/2011/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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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글이라서 그런가... 좋은 글을 공유하는 게 그리 마뜩찮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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