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파와 아버지
낙동강 하구 명지 대저大渚 삼각주 (제주 -> 김해 공항 랜딩 기어 스타트 직전)
명지 대파밭
낙동강 하구河口 집 떠난 다슬기와 재첩의 살점은 어디로 갔는지 휑하니 남아있던 껍데기는 뭔가라도 해야 되겠기에 물살에 씻기우고 물결에 갈라지고 부셔지고 몇 만 번 갈고 다듬었더니 반짝이는 모래가 되었습니다.
바다로 가던 강물이 한 줌 모여 봉곳한 백설로 빛나는 '명지鳴旨' 밭고랑을 모래흙으로 돋우고 돋우고 하여 수북한 곳에 하얗고 푸르른 대파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저쪽 모래톱 곁에는 파종播種의 몸 실어왔던 뗏목이 실같은 강물에 일렁이고 오늘처럼 파밭에 눈이라도 풀풀 나릴라 치면 흐르는 물빛도 파빛도 그렇게 파랄 수가 없습니다.
재첩( 네이버 백과사전 인용)
비봉 남 능선 오르면서 구기동, 남산, 관악산 방향
불광역을 나와서 이북 5도청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바람이라는 것이 밀려오는데, 내 얼굴이며 코끝에 다가오는 바람은 가는 모래알이거나 메뚜기의 발처럼 날카로왔습니다.
차가운 그 바람을 가슴 깊숙이 빨아들이자 목에서 자꾸만 가는 헛기침이 나오는데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 산 어디 눈 내리는 날이면 바람은 그렇게 늘 나를 괴롭혔습니다.
겨울이라도 버스 안은 울긋불긋 등산복으로 물들었고 그 속에 유독히 파릇한 것이 도드라졌는데
언제 보고 다시 보는 것인지, 70년대 아주머니 시장 바구니에 하얗고 파란 대파가 키가 커서 실오라기 같은 뿌리며 이파리들이 달리는 버스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인왕산, 잠실, 송파 방향
구기동, 용산, 한강 대교, 상도동 방향
때에 따라서는 쪽파를 쓰기도 하지만, 미역 나물을 살짝 데쳐 무치거나 더운 여름에 머위로 쌈을 쌀 때 숟가락으로 얹어먹는 젓국에는 굵은 파의 하얀 허벅지를 아주 가늘게 동그랗게 썰어 버무리면 혀끝에서 공 굴리는 맛으로 맴돌고
소고기국을 끓이거나 고등어야 갈치를 조릴 때에는 노란 양은 냄비에 끓이면 맛을 더욱 감치게 할 수 있는데, 이 때 파는 국이나 조림이 다 끓어 먹기 직전에 툭 던지듯이 금세 얹어야만 파릇하거나 톡 쏘는 특유의 파맛을 살릴 수 있게 되고,
썰어넣을 때에도 파의 몸통을 손가락으로 모으되 곧추세워 약간 비스듬히 잡고서는 빗살로 길게 썰어 얹어야 씹히는 파맛의 식감이 혀에 착 달라붙습니다.
비봉 남 능선 오르면서 보현봉 능선 방향
비봉 남 능선 발 아래 야트막한 안산, 남산, 인왕산이 올망졸망 봉곳봉곳 부풀어 있습니다. 제주도 한라산 아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름으로 앉아있는 '오름'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제주도에서 운명하신 아버지 아궁이 부지깽이에 기댄 석쇠에 누워 #무늬를 남기며 노릇히 구워지는 고등어나 갈치 구이, 빨간 고추장을 풀고 큼지막히 썰어넣은 대파랑 무에다 복닥복닥 끓여진 찌개를 무척이나 즐겨드셨는데, 저 발 밑이 제주도 아닌가, 한라산 어디쯤 '윗세 오름, 사라 오름' 오름, 오름 아닌가 아득한 적막감이 밀려왔습니다.
아버지 식성을 닮아서 그런지 발갛게 타오르는 연탄불, 아궁이에 구운 생선을 나도 좋아했는데, 언젠가부터 구운 생선이 상차림에 올라오면 맛있게 먹질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라산 백록담 가는 길
삶의 격조格調
村上春樹 일본 1949년생, 와세다대 연극영화과 시골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봄 나무 한 그루 이름이 참말로 컨트리하죠잉? 흡사 작은 시골 마을 이장 통장 이름에나 어울립니다.
클래식과 서양 대중 음악 애호가로서 그의 글의 바탕에는 LP판 돌아가는 리듬과 율동이 깔려 한층 리드미컬합니다.
대학을 다니던 직후부터 몇 년 동안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그의 아내와 재즈 카페를 운영하면서 틈틈이 습작을 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비록 일본 작가이지만 그의 문체에는 끈적끈적한 흑인들의 삶 같은 것들이 묻어있습니다.
초고草稿를 일어로 글을 쓰고는 다시 영어 문장으로 바꿔 썼다가 그 영어 문장을 다시 일어 문체로 옮겨쓰는 형극荊棘의 과정을 겪었기에 일본 작가이면서도 독특한 어메리칸 스타일을 휘날리는 깔끔한 문체의 소유자가 되었겠죠!
서른 초반이던가, 내 손에 쥐어진 그의 출세작 '상실의 시대' 한 권으로 나는 꽤나 고독했고 허전했고 얼마간 멍한 일상 속에서 헤맨 적 있었습니다.
알랭 드 보통 Alian de Botton 프랑스 1969년생, 킹스 칼리지 런던 철학, 케임브리지대 역사학 철학 전공자답게 무거운 철학적 소재를 소소한 일상의 일들로 가볍게, 그렇지만 생기 넘치는 문체로 풀어나가는 구성은 치밀하고 센텐스는 소프트하게 엮어나가는 기교가 탁월하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다소 말의 유희라고도 할 수 있는 갸우뚱거릴 문장들이, 깊지는 않아서 난해하지는 않지만 생활 철학이랄 수 있는 주제들이 대화 속에 깨소금처럼 흩뿌려져 있다고나 할까요, '우리는 사랑일까?'도 그런 유형의 문체가 전반全般을 이룹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Parick SÜskind 독일 1949년생, 뮌헨대학 역사학 세상에 그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음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하는 작가
내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세상에 쟁쟁한 작가들이 밤하늘의 별만큼 많고도 많겠으나 나의 견지에서 스토리 컴포지션의 1인자를 꼽으라면 단연코 그의 작품 '향수' 香水임을 말하겠습니다.
비린내 진동하는 썩어가는 생선 시장 바닥에서 태어난 태생적 한계를 모티브로 하여, 지상 최고의 향수를 갈구하는 파탄자의 기괴한 역정을 만장萬丈하게 그린 작품이죠!
향수 Perfume, 향기 혹은 냄새 Scent, 향 Fragrance 같은 향기, 냄새, 향수라 하더라도 미묘하면서도 엄연히 다른 의미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역작 '향수'로 인해 향을 구분하려는 의지가 생겼으며, 곳곳에 산재한 그 어떤 것 만이 지닌 향을 찾고 느끼는 감각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음]..........이라는 것
단순히 속으로 삼키는 딸꾹질 같은 것인지 그래서 어느 때는 밖으로 드러나 누군가에게 들키기도 하는 짧은 내재적인 음성이라 할 수도 있고, 우리의 청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묵음Silent syllable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는 자신의 감정을 씹어보는 찰라의 테크닉 같은 것이거나 시간을 벌거나 또는 간격을 벌리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의성어이거나 새로운 논지論旨를 서칭하는 과정에서 불타는 담론을 펼치기 위한 공격의 실마리를 풀거나 논점을 정리하기 위하여 꿀꺽 침 한 번 삼키는 통과 의례이거나 판단의 유보적留保的 '인터메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의 독자적인 '음음' 이라는 의성어擬聲語의 정의定義)
음음...... 예를 들면, 산길 내 앞의 사람이 집을 나서며 장미 향수야 로즈 마리 향수를 몸에 발랐음으로 인해 뒤따르는 내게로 전해주는 체취는 그야말로 Perfume이고, 나를 스쳐 지나간 발걸음이 날려보내는 자연의 생머릿결 냄새는 Scent요, 아침에 샤워할 때 바디야 머릿결에 문지른 오일 냄새가 남아 바람에 실려올 때 그것은 Fragrance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세상 제1의 향수로 꼽는 것이란 열일곱 숫처녀의 몸에서 우러나는 자연의 체취라 했는데, 나는 그의 주장에 상당히 동감하는 입장입니다.
그가 쓴 '깊이에의 강요', '좀머 씨 이야기', '콘트라베이스', '비둘기'도 한 장 한 장 그냥 넘기기엔 아깝다, 아껴 읽고 싶은 책들입니다.
김훈 1948년생, 고대 영문과 중퇴 내가 그를 지면으로 알게 된지도 어언 이십 몇 년인가 흘렀습니다. 그 당시 '칼의 노래' 와 시골 정경을 그린 그림엽서 같은 소설 '개'를 읽게 되면서 평생 그의 독자가 되었죠.
어디에도 도저히 비할 수 없는 필력, 한 마리 개를 매우 섬세하게 의인화(擬人化, personification)한, 한 편의 동화 같은 소설의 정수精髓라고 단언하고 싶군요.
뭐라고 할까요, 그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목수가 나무의 결을 곱게 하기 위해 대패질로 다듬고 다듬고 다듬고 다듬다 보니 소설의 문장 한 줄 한 줄이 시詩로 승화된 흔적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작품 전부 다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그게 신가 소설인가 헷갈리는 것이죠.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 습작을 하던 시절에 자신 만의 독특한 문체를 갖추기 위하여 일어로 썼다가 영어 문장으로 변환했다가 다시금 일어로 써왔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한 과정들은 그야말로 손가락 깨물어 혈서를 쓰는 고통과 다름 없지 않았겠나 싶어요.
김훈의 문체는 알랭 드 보통에게서 느낄 수 있는 브라이트한 면이나 생기발랄한 면은 거의 없이 뭐랄까 음울하달까, 전반적으로 글루미 하달까, 적어도 20년 전 '칼의 노래'나 그의 후속작 '현의 노래', '개'에게서는 흐르던, 탄탄한 구성력에다 깔끔한 문장들이 무척이나 돋보였는데......
어떤 대상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태생부터 성장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면밀히 탐색해야 알 수 있듯이, 그림이든 음악이든 문학이든 그의 모든 작품들을 샅샅이 훑어야 합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에게서 받은 진한 감동의 향수를 기대하며 그의 '콘트라베이스' 외에 그가 내놓은 모든 것들을 찾아서 읽게 되었는데요,
그게 글쎄, 얼마 전에 김훈 작가가 그의 아버지의 지난하고도 신산했던 삶의 흔적을 담은 '공터에서'라는 책을 출판했다기에 큰 기대를 걸며 사서 보았더니, '콘트라베이스'나 '공터에서'나 굉장히 평범하고도 무딘 펜끝으로 써내려간 것이라.....
김훈은 일찌기 20년 전부터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습니다.
책의 서문이고 후기고 인삿말이고, '공터에서' 책의 말미에도 남은 시간이 길지 않으니 아껴써야 겠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러 발표한 '22년 6월 작 옴니버스 형태의 소설 '저만치 혼자서'도 첫편 '명태와 고래' 외에는 필력이 예전 같지 않고,
적어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에 버금가는 필름 돌아가는 듯한 생생한 서스팬스와 스펙타클을 기대했던 '22년 8월 발표작, 안중근安重根의 이등박문伊藤博文 저격 사건을 다룬 '하얼빈'도 표기하는 지명地名조차 정확치 않으면서 급조한 흔적들이 역력하고 예전처럼 컴포가 다듬어지지도 치밀하지도 않습니다.
급한 마음에 초판 인쇄 당일 구입한 '하얼빈'에서 제목만으로도 글발 빛나는 백서帛書를 기대했으나 그 값어치는 목면서木綿書였습니다.
남은 시간도 시간이지만, 초장 끗발인가요, 일세를 풍미하던 쟁쟁한 글발도 사상도 일정한 시기에 정점頂點을 찍고 나면 세월 앞에서는 녹이 스는가 봅니다. 나이 드는 만큼 더욱 치밀해진다거나 노련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나는 늘 어떤 사람의 격조格調라는 것이 연륜에 비례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굳이 내 아버지의 일생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나보다 10년 앞선 김훈 작가도 그의 앞에 시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음을 실감하듯이 내 앞에서 버티고 서 있는 시간과 격조라는 것이, 정적靜寂과 고독만이 흐르는 지금, 그리 길게 유효有效 않은 듯합니다.
저들처럼, 지상에 왔다가 사라져간 무수한 사상가, 작가, 시인, 철학자들 신체의 유한성은 당연한 것이고, 한 사람의 정신적 활동의 가치 등급이랄 수 있는 격조格調마저도 세월 앞에서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무참히 흔들립니다.
한라산 아래 봉곳하면서 높고 낮은 '오름'들이 370개나 된다고 하는데, 더 늦기 전에 내 일생 그곳을 느릿한 발걸음으로라도 둘러 보려고 합니다. 내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시간을 아껴아껴 쓰더라도 그것 만큼은 아깝지 않을.....
한라산의 오름(丘陵), 백록담 오름길에서
2022.8.9일
丁寧愁誰語 書 |
첫댓글
어떤 공간에 공개되어 있는 것을 '아까' 님 요청으로 다시 올립니다.
참말로 대단합니다.
묘사에 동원된 어휘들이 얼마나 풍부하고 감칠 맛이 나는 지.
어떤 소설에서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문장들입니다.
빼어난 미문의 글들 볼 수 있는 행운이
내년에도 이어지길, 부탁드립니다.
얼마간 잊고 살았는데,
괜히 다시 읽도록 만들어설랑
눈물 나잖아요.......
눈물이 나는건
대파 때문이 아니고...
작가들의 세계..
얼만큼 많은 책을 읽으며 비교하고 생각해야 그런 판단이 서고 글로 표현이 될까요?
오름에 대한 표현과
파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나 맘에 닿습니다.
한 해 동안 독서일기방에 생기를 북돋우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해에도 많은 산우님들 문전성시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오늘에서야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보았습니다.
한 번 보고선 뭐라 말하기 어려운, 심오한 무언가가 있을 거 같아 다음에 다시 또 찬찬히 보려 합니다.
색깔이 다른 소재들의 이음이건만 뭔가 오묘함이 있는 거 같습니다.
김훈의 '공터에서'를 읽고 '칼의노래'와 같은 감동이 없었던 건 그래서(무딘 펜끝...)였군요.
《음음》이라는 의성어에 대한 부분을 놀라움을 갖고 읽었습니다.
대파밭, 연륜, 격조, 한라산 오름,,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단어입니다.
글, 감사합니다.
고향 산길에는 꽃들은 지고 사철 무명 상록의 관목들만 드문드문 서 있어,
지나간 추억의 애환이 솔향 잣향으로 여기저기 불어옵니다.
여전히 바다는 넘실거렸고 푸르렀고 망망茫茫했습니다.
고향 땅에 닿으면 지난 일들이 떠오릅니다.
옛일들을 되새겨 보는 게 좋아서 일부러 찾아가는 곳이 고향산천입니다.
먼 곳을 다녀오느라 답장이 늦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산길에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