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두꺼운 편지가 들어 있었다.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은 당시 부통령으로, 고향이 전북 고창이었다. 지리산에서 벌어지는 토벌 작전에 부통령으로서, 또 고향 사람으로서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편지에 담았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다. “주민들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군경의 민폐가 심한 현실을 직시하고 부디 국민을 애호하여 민간에 폐를 끼치지 말고 치안을 확보해 국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1952년 2월에 촬영한 전남 나주 다도의 경찰지서(위쪽). 군부대처럼 요새화돼 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남원 운봉에 빨치산 포로수용소(가운데 사진)를 만들어 공비의 생포를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아래쪽은 지리산 지도를 보며 작전을 지시하고 있는 백선엽 장군.
나는 작전 내내 김 부통령의 이러한 당부를 잊지 않았다. 전쟁이 벌어지고 토벌이 진행되는 상황은 국민에게 큰 고통이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 군대와 경찰이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민폐를 염려하는 분위기가 그렇게 강했다. 나는 그 점을 잘 알았고, 그에 충분한 대비를 했다. 수용소를 짓는 것은 그래서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과거의 빨치산 토벌 작전은 대개 1개 사단이 나서서 빨치산이 숨어 있는 지역을 초토화(焦土化)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가 토벌에 나서기 전에 벌어졌던 다른 작전에서는 ‘빨치산 생포’라는 개념이 없었다. 붙잡아서 알토란 같은 정보를 캐낸다는 의미가 없는 한 빨치산은 다루기 귀찮은 존재였다.
게다가 빨치산을 주로 토벌했던 경찰의 입장은 군대와 달랐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에서, 가족들이 저들에 의해 맞아 죽었던 경험이 비일비재했던 경찰은 빨치산을 증오심으로 대했다. 자연스레 빨치산을 발견하면 즉석에서 사살해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빨치산들은 ‘토벌대에 잡히면 그 자리에서 죽는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고, 토벌대를 만날 경우에는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덤볐던 것이다. 우리의 작전이 펼쳐지고 나서도 빨치산은 한동안 이런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포로수용소부터 짓고 있었다. 더 많은 빨치산,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따랐던 사람들을 하나라도 건져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각 부대에 “가능한 한 빨치산을 생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적을 생포한 장병에게는 사흘 동안의 포상휴가를 준다고 약속도 했다. 그런 준비를 마쳤지만, 마음속으로 드는 불안감은 여전했다. ‘적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날까. 미리 도망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D데이를 며칠 앞두고 드디어 교전이 벌어졌다. 수도사단이 포진해 있던 지역에서였다. 우연히 경남 하동군 악양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남부군 직속인 81, 92사단과 경남 도당의 57사단 무장 병력 300여 명이 11월 29일 새벽 악양면을 기습 공격했다. 악양은 왼쪽으로 형제봉과 신선봉을 잇는 능선을 경계로, 화개면과 오른쪽으로 칠성봉과 구재봉 등이 늘어서 있는, 섬진강가의 비옥한 분지였다.
악양이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수도사단의 26연대가 출동했다. 당시 군대가 출동할 때까지 현지의 경찰은 그저 빨치산들이 주민들로부터 곡식을 빼앗아 소와 함께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있어야만 했다. 그 정도로 빨치산의 병력과 화력은 경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래도 경찰은 국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잘 버텼다. 경찰서 안에서 포위된 채로 버티면서, 끝내 물이 떨어지자 오줌까지 받아 마시면서 저항을 펼치고 있었다.
마침 그때 부대를 순시하고 있던 나는 소식을 접한 뒤, 바로 화개장터로 가서 형제봉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빨치산과의 전투를 지켜볼 수 있었다. 형제봉 쪽에 자리를 잡은 빨치산 부대의 화력은 여느 정규부대 못지않았다. 기관총에 박격포까지 동원해 수도사단 26연대를 맞아 싸우는 장면이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전투는 오전 8시쯤에 시작해 오후 4시까지 벌어졌다. 26연대가 형제봉과 구재봉을 장악하고 악양을 되찾았을 때, 적들은 이미 50여 마리의 소와 수백 명의 주민을 끌고 청학이골을 지나 청암면으로 넘어서고 있었다.
적들을 끝까지 추격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청암면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간혹 흰옷을 입은 주민들이 대열을 이탈해 도망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박격포 등을 동원해 포격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주민들이 그 가운데에 많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적은 놓쳤지만 나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적들이 아직 이 산에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적이 펼치는 화력으로 볼 때, 저들은 빨치산의 주력임이 확실했다. 박격포와 기관총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적의 주력은 아직 지리산 일대를 빠져나가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더구나 국군 토벌대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상황인데도 ‘보급 투쟁’을 위해 산 아래로 내려와 공격을 감행했다는 점은 그들 말고 산속에 먹여야 할 ‘식구’들이 대량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적이 이미 사라지고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나의 우려는 이 악양 피습 사건으로 단번에 씻기고 말았다. 이제는 진짜 싸움을 제대로 펼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어느덧 D데이가 닥쳤다. 12월 2일 오전 6시 나는 전 부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리산 주변은 남북으로 수도사단과 8사단의 각 연대가 그물망을 펼치는 식의 수색작업에 들어갔다. 부대원들은 상공의 비행기에서 육안(肉眼)으로 식별할 수 있는 대공포판(對空布板)을 등에 붙이고 움직였다. 빨간색과 흰색이었다.
그 후방으로는 예비 3개 연대 국군 병력과 3개 연대의 전투경찰 병력이 거점(據點)을 마련한 뒤, 그물망을 빠져나오는 빨치산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방송팀은 전파를 날려 귀순 선무공작을 벌였고, 지리산 위로는 수많은 전단이 뿌려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