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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신명기의 말씀 18,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16 그것은 너희가 호렙에서 집회의 날에 주 너희 하느님께 청한 것이다.
그때에 너희는 이렇게 말하였다.
‘다시는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 불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지 않게 해 주십시오.’
17 그러자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한 말은 옳다.
18 나는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동족 가운데에서 너와 같은 예언자 하나를 일으켜, 나의 말을 그의 입에 담아 줄 것이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그들에게 일러 줄 것이다.
19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20 또한 내가 말하라고 명령하지도 않은 것을 주제넘게 내 이름으로 말하거나,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는 예언자가 있으면, 그 예언자는 죽어야 한다.’”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 7,32-35
형제 여러분,
32 나는 여러분이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랍니다.
혼인하지 않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 하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33 그러나 혼인한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4 그래서 그는 마음이 갈라집니다.
남편이 없는 여자와 처녀는 몸으로나 영으로나 거룩해지려고 주님의 일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혼인한 여자는 어떻게 하면 남편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세상일을 걱정합니다.
35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제1독서에서 모세는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지점에서, 새로운 예언자가 오실 것을 예고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 등장하는 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예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한 예언자”(요한 1,21), 곧 메시아를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갈림이 없이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길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잡히신 뒤에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시고,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후, 가파르나움으로 가시어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인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을 들려줍니다.
곧 “하늘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신 다음, 그 '하늘나라'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악마의 추방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혀로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킵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인간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악마가 혀로 하와를 속인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며,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곧 에덴으로의 회복입니다. 따라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 ‘첫 번째 행적’은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사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마르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였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가르치는 이라 하여 누구나 다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단어는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단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죽이거나 제거해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는 언제든지 또 다시 침범하고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완전한 문제 해결을 바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물러가게 할 뿐입니다.
마귀는 또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이는 단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당신의 권능에 의탁하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늘 당신 안에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과의 관계맺음을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악령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르 1,24)
그러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마귀를 쫓아내는 데에 있기보다, 그분과 친교와 유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곧 빛이신 당신의 권능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면 더러운 영은 더 이상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내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늘 빛이신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그분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우리 주님의 빛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다른 한편, 마르코복음에서는 ‘선포하다’와 ‘가르치다’라는 용어가 구분되어 사용되는데,
복음을 선포하는 주체는 예수님은 물론, 세례자 요한과 제자들이고, 나아가 그리스도교 공동체까지도 될 수 있는데 반해,
가르치는 것은 오직 예수님께만 유보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 자신을 점검해 봅니다.
‘나는 선포하는 사람인가? 가르치는 사람인가?’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참된 권위는 언행일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구원을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아욱토리타스 auctoritas’는 ‘아우제레 auge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하는데, 이 동사는 ‘자라게 하다.’ ‘증가시키다.’ ‘커지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또한 권위로 번역된 그리스어 원형 ‘엑수시아’(exousia)는 어떤 일을 행할 수 있는 ‘능력’, 곧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일으키는 살아있는 힘입니다.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자라게 합니다.
성장시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주신 권위는 사람들을 성장시키라고 주신 것이지 망가뜨리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2코린 10,8)하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마을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쳐주시며 마귀를 몰아내셨습니다.
이렇듯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예수님의 진정한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가르침과 행동의 일치입니다.
언행일치의 가르침과 삶,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라게 하는 권위, 악한 영을 복종시킬 수 있는 하느님에게서 나온 권위였습니다.
이 권위를 교회, 오늘 우리에게도 맡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령에게 ‘조용히 하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주님의 이름으로 호령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존경에서 따라오는 권위보다는 권력으로 사람들을 내리누르려 합니다.
나, 누군데... 의원인데... 용산에 있는데..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권력을 가지고 콧대를 세우려 합니다.
그것은 권위가 아니라 가식적으로 드러난 ‘권위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마음 안에서 나오는 권위를 지녀야지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악령에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느님을 이용하고 이웃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이가 있다면 악령 들린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국회의원이나 지방의회 의원들이 금배지를 답니다.
왜 금배지를 답니까?
그만큼 권위를 지녔다는 것을 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국민을 위한 대변자로 그들을 뽑아놓았더니 자기 잇속 챙기는 것에는, 발 빠르고 힘든 국민은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금배지 달 자격이 없습니다.
밥그릇 싸움에 민생은 항상 뒷전입니다.
여야가 다투다가도 자기 세비를 올리는 데에는 아무 이견 없이 소리소문없이 올립니다.
경찰이나 소방대 고위직의 모자를 보면 금테를 둘렀습니다.
그 금테를 두르는 것은 그처럼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수위실의 수위도 금테를 두르는데 마찬가지입니다.
충실히 고귀하게 봉사하겠다는 뜻입니다.
금테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금테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봉사하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만이 아니라 모두가 올바른 권위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희생, 봉사, 섬김, 말하는 바와 행동의 일치를 통해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가정에는 가장의 권위, 부모의 권위가, 학교는 선생님의 권위, 병원에는 의료진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하고, 국가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성직자는 성직자의 권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권위를 지키기보다 권력을 추구하는 욕심이 세상을 어둡게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행동, 이런 말 하고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권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대표적인 사회지도층인 율법 학자들은 배운 것도 많고 권력, 재력을 다 갖췄지만 속은 비어있고 겉모양을 중시하여 율법의 의미를 까다롭게 따지는 데 급급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마태 23,3 이하)
그들의 말은 죽어 있고 공허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더러운 영이 알아보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소리쳤습니다.
일종의 아부 혹은 타협의 제안입니다.
‘당신이 고수라는 것을 인정하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
예수님은 타협을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더러운 놈은 떠나갈 때에도 발악을 하며 떠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인정하면서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하며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 따로 행동 따로 하는 것이 더러운 영의 특징입니다.(손희송 주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소에 하느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요한 15,6)는 말씀처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잘린 가지처럼 입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따로국밥' 신앙인입니다.
국 따로 밥 따로이듯, ‘신앙 따로 생활 따로’여서는 안 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 앞에서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의 존재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멸망시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살리러 오셨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고 멸망시키러 오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더러운 영을 멸망시키는 것이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파멸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파멸시키는 악을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함으로써 그를 살리려고 오셨습니다.
죄악의 올가미에서 풀어주러 오셨습니다.
한 번 우리의 삶을 성찰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실천하려고 할 때 ‘이 말씀대로 산다면 살아남을 수 없다. 망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잖아요.
복음이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고 용서와 화해,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를 요구받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대로 한다면 분명 손해를 봐야 하고, 바보가 되어야 하며 때로는 생존의 위협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타협하길 원하고 나에게 손해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는 생각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모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실천한다는 것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사람이 ‘생명의 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 말씀은 듣기에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하고 모두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6,67).하고 물으셨고,
이에 시몬 베드로가 나서서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하고 대답하였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말씀, 희생이나 고통을 감당해야 할 말씀을 들었을 때 순명한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우리를 멸망시키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고 치유해 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믿고 받아들이게 될 때 나를 위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유광수 신부)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도록 얻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고 선언하셨습니다.
‘멸망시키러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생활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겠습니까?
나를 살리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권위 있는 말씀을 실행하는 기쁨을 차지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를 변화시키는 말: 고마운 사람의 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말의 권위는 말에 ‘사람을 바꿀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피 흘림 없이 말만 했기 때문입니다.
왜 피 흘림과 함께 하지 않는 말에는 권위가 없을까요?
하느님의 피 흘림이 성령이십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694 참조)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말씀의 권위를 말하다가 예수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옵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이 생기게 만드는 감정이 ‘감사’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는 항상 덜 고통스럽고 더 기쁘고 행복한 방향을 선택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행동은 ‘옳고 그름’이 아닌 ‘기분’이 좋을지, 나쁠지에 대한 자기 판단으로 이뤄집니다.
제가 어렸을 때 공부하려다 어머니가 공부하라고 하셨을 때 안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공부하게 되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저는 저를 기쁘게 하고 싶었습니다.
왜 어머니가 아닌 나 자신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을까요?
어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인이 되니 부모가 얼마나 어렵게 자녀를 키우는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가 되지 않는 이상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내가 우선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도 감사하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어떨까요?
사실 그럴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에게는 감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감사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은 ‘불안’입니다.
불안을 없애주는 대상에게 감사가 일어납니다.
만약 그것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나 “너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내 안의 자아에게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아를 기쁘게 하려고 삽니다.
문제는 자아의 정체가 뱀이란 데 있습니다.
뱀의 소굴에 갇혀 지옥을 살게 됩니다.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심리학자 ‘아른힐 레우뱅’의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라는 책에서 자신이 어떻게 자아에 봉사하며 살게 되었는지 잘 적었습니다.
레우뱅은 점점 부모와 친구와의 사이가 단절되자 자기 생존이 최우선이 됩니다.
이때 혼자라는 불안함을 해결해 준 유일한 존재가 있는데 자기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그녀는 그것을 ‘선장’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 때 선장은 유일한 구세주가 됩니다.
처음엔 선장에게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문제는 선장은 워낙 잔혹한 존재라 결국 레우뱅은 조현병에 걸려 벽지까지 뜯어먹는 상황에 이릅니다.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미쳐가는 것도 결국엔 자아에 감사하면서부터라는 사실입니다.
감사하면 빚을 진 것입니다.
그러면 보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문제는 자아는 잔혹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자아에게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감사한 존재를 외부에서 찾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아의 말보다 그 사람의 말을 더 따라주게 됩니다.
이렇게 자아에게서 해방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충고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박한상은 자기를 나무란다고 부모를 살해하였습니다.
부모의 말은 옳았습니다.
그런데 박한상은 너무 부자였던 부모가 자기를 키워준 것에 대해 어떤 감사한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를 기쁘게 하는 일이 아닌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자기만을 기쁘게 해주는 일에서 해방되려면 무조건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서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지 않은 사람에겐 감사가 생기지 않습니다.
불안은 피 흘림으로만 안정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에서도 한 병사를 구하기 위해 많은 베테랑 군인이 희생하였습니다.
밀러 대위는 죽어가면서도 라이언 일병의 귀에 대고 “값지게 살아. 값지게…. ”라고 속삭입니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가 된 라이언이 밀러 대위의 무덤 앞에서 “여보, 나 부끄럽지 않게 살았지?”라고 묻습니다.
값지게 살라는 밀러 대위의 말엔 그의 피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 피에 감사했기에 그 한마디가 평생 라이언을 변화시켰습니다.
모든 변화는 내가 감사하는 이가 해준 한마디 말씀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에 베이스캠프로 유명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그 어떤 도시보다도 더 자주 들르셨으며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이 카파르나움으로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 카파르나움 회당은 이미 익숙한 장소였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회당으로 들어가셔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회당 안에는 예수님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더러운 영이 들렸으니, 일단 외양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더러운 영에 시달리다 보니 얼굴도 초췌했을 것입이다.
눈동자도 충혈되고 행동거지도 남달랐을 것입니다.
다들 그를 슬슬 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를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 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윽고 능력과 권위로 가득 찬 예수님의 말씀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심연 깊숙한 곳에 꽂힙니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르코복음 1장 25절)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줄행랑을 놓았습니다.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랜 세월 더러운 영의 횡포와 올가미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고 있던 이를 자유롭게 해주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찬 모습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외친 것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영들에게 명령하지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단 한마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역사상 그 누구도 행할 수 없었던 전무후무한 기적과 치유를 행하시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의 힘>
오늘 복음에서 ‘권위’ 라는 말은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인간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꼈고,
자신들이 왜 그 힘에 압도당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해서 놀랐다는 뜻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아직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있었고, 예수님의 ‘신성’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몹시 놀랐지만,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은 예수님 말씀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시니,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 라는 말은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는 권위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이 했던 말을 인용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는 권위가(힘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읽은 책이 많아서 지식이 많다고 해도, 그 지식을 자랑하기만 하는 것은 잘난 척 하는 ‘교만’입니다.
성경 말씀을 해설할 때에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경 해석과 해설에 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오로 형제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지혜에 따라 여러분에게 써 보낸 바와 같습니다.
사실 그는 모든 편지에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더러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는데, 무식하고 믿음이 확고하지 못한 자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을 곡해하듯이 그것들도 곡해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옵니다."
(2베드 3,15-16)
이 말은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왜곡하는 것’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경고입니다.
어떻든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정말로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지식 자랑이 아니라 믿음을 증언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힘’이라는 말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가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루카 24,19.21ㄱ)
그 두 제자뿐만 아니라 사도들과 신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로, 즉 ‘메시아’로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사형 당해야 했는지, 제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돌아간 것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위를(힘을) 인간들을 구원하고 인간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 때에만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을 상대로 당신의 힘을 과시하신 적이 없고, 또 당신의 힘으로 인간들을 억압하신 적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힘과 권위를 모두 내려놓고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힘은 ‘구원의 힘’, ‘사랑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는 굉장히 단호하고 엄하게 당신의 힘을 사용하셨는데, 그것들의 억압에서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지만, 마귀들과 악의 세력에게는 대단히 무섭고 엄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귀들은 예수님을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는 말은 실제로는 마귀가 하는 말인데, 그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공포심, 적대감, 반항심이 들어 있습니다.
마귀는 자기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원래 지옥은 마귀들이 형벌을 받는 장소이고, 그것들이 몹시 무서워하는 곳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에 대해서 하는 말은 표현만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사실은 교묘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모독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말입니다.
- 전주교구 상지원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온전하고 건강하고 거룩한 삶을 삽시다 - “찾으라, 들어라, 섬겨라”>
어제 한낮은 겨울 한복판인데도 봄빛 완연한 참 따뜻하고 부드러운 날이었습니다.
수도원 하늘길을 사진에 담아 다음 “봄길”이란 시와 더불어 많은 지인들과 나눴고 행복했습니다.
“한겨울
봄꿈을 꾸고 나니
봄길이
열렸어요
봄향기 맡으며
봄님과 함께
봄빛받으며
봄길을 걷습니다”
-2024.1.27.
봄님이 상징하는 바 바로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으로 온전하고 건강한 삶으로 이끄시는 파스카 예수님입니다.
이어 지인들의 반갑고 따뜻한 답글도 마음을 환히 밝혔습니다.
몇편을 나눕니다.
“신부님 시는 항상 따스하게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저의 큰 아이도 항상 이때쯤 봄냄새가 난다는 말을 해요. 사진에서도 분명 겨울인데 봄기운이 느껴집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에게도 점점 하느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향기가 풍겨나오기 시작하면 좋겠어요.”
“와아 벌써 봄빛이 느껴지네요. 아무리 어려워도 얼어붙은 겨울은 가고 따뜻한 봄기운이 돌아오네요.”
“선생님!! 시를 읽으니 벌써 봄이 온듯합니다. 마음까지 따뜻해집니다!! 하늘길도 봄준비에 들어간 것 같네요. 평화로워보이는 수도원 풍경 감사합니다!!”
“아, 너무 감동이네요. 지금 막 상담마치면서 다음 상담까지 잠시 힐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시는 희망을 갖게 하네요. 따뜻함이 있어 치유가 되고 평화가 오네요. 신부님의 연인이자 절친이신 예수님과 언제나처럼 함께 하시네요.”
모두가 봄님 예수님을 찾고 기다리는 마음임을 느낍니다.
어제 카톨릭 신문의 “너무나 자비로운 하느님” 칼럼에서 교황님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만났습니다.
그 감동을 잊지 못해 그 기사를 소개해 드립니다.
“저는 지옥이 텅 비어 있기를 희망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1월14일, 이탈리아에서 주일마다 방영되는 채널9TV 토크쇼 ‘케 템포 케파(Che Tempo Che Fa;날씨는 어떤가요)’에서 한 말이다.
교황의 이말에 스튜디오는 환호로 가득 찼고, 340만명에 달하는 시청자들 여시 뜨거운 감동에 사로잡혔다.
얼마나 멋진 말씀에 장면인지 저도 감동했습니다.
바로 우리 하느님은,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주님은 텅 빈 지옥을 바라십니다.
오늘은 주일이면서 해외 원조 주일이자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이기도 합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축일이면 생각나는 예화가 있습니다.
동료수사가 경당에서 십자가의 주님과 성인이 나눈 대화를 듣고 전한 것입니다.
“토마스, 너는 나에 관해 참 말 잘했다. 무슨 상급이 좋겠니?”
“주님! 당신아닌 어떤 것도 원치 않습니다(Nothing but yourself, Lord!)”
예수님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다는 고백입니다.
이보다 더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사람은, 온전하고 건강한, 거룩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에게 물어도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요즘 희망이자 길이자 빛이신 주님을 잃고 방황하는 병든 이들이 참 많습니다.
거칠고 험한 생존경쟁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 각자도생의 광야여정을 살아갈 때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 되지만 잘못 세상 것들에 유혹, 중독되어 잘못 미치면 괴물도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상징하는 바, 잘못 미친 괴물이나 폐인입니다.
참으로 온전하고 건강한 전인적 삶을 위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이요 그 구체적 처방을 나눕니다.
첫째, “찾아라!”
찾아야 만납니다.
생명과 빛인, 희망이자 길이신 주님을 간절히 항구히 찾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온전한 치유의 구원입니다.
오늘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본능적으로 주님을 찾았으며 어둠의 더러운 영도 빛이신 주님 앞에 도저히 숨을수 없자 뛰쳐나와 자수하여 광명을 찾아 주님을 고백하지만 주님은 일언지하에 그를 쫓아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은 다음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
말씀을 통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 바람과 호수의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일화도 생각납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사람들의 이구동성의 반응을 통해 더러운 영들의 퇴치에 주님과의 만남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그러니 주님을 찾아 만날 때,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우리 내면에 잠재해 있는 더러운 영들은 달아나고 주변의 더러운 영들 역시 감히 우리에게 범접하지 못합니다.
유비무환, 늘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함께 살 때 비로소 온전하고 건강하고 거룩한 삶입니다.
잘못 미쳐 더러운 영에 들려 괴물이나 폐인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둘째, “들어라!”
들어야 순종합니다.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침묵중에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경청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영혼도 주님의 말씀을 만나야 살아납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들은 주님의 권위있는 가르침의 말씀에 몹시 놀랐다 합니다.
제1독서 신명기는 시공을 초월한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소개합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을 늘 귀기울여 듣고 실행하라는 것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 그가 내 이름으로 이르는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내가 직접 추궁할 것이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
셋째, “섬겨라!”
섬길 때 권위입니다.
섬김의 권위입니다.
혼자 살든, 부부가 함께 살든 상관없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독신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일을 걱정하며 주님만을 기쁘게 하고 주님만을 섬기며 갈림없는 마음으로 품위 있는 삶을 살라고 하지만, 누구든 참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님 중심의 삶을 살 때 부부공동체나 수도공동체도 품위를 유지하고 서로 섬기며 충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독신만이 아니라 부부 성인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1인 가구 형제자매들은 세상 안에서 교회공동체에 속한 주님의 은수자로 살고 2인 부부와 자녀들의 공동체라면 남편은 원장, 아내는 부원장, 나머지 자녀들은 수도형제들처럼 서로 섬기며 살아가면 얼마나 멋진 가정 수도공동체 같겠는지요.
혼자든 함께든 마음 갈리지 않고 주님을 섬기듯 서로 섬기며 주님 중심의 품위 있고 충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될 수 있는 한 서로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는,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참으로 성숙된 거룩한 무관심의 사랑이 긴요합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서로 배려하고 섬기고 존중하며 품위 있게 주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에게 굴레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1코린 7,35)
온전하고 건강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습니까?
험하고 거친 광야 인생 여정,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더러운 영이 들린 폐인이나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 세 말마디를 명심하며 한결같이 주님 중심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1.찾으라!
2.들어라!
3.섬겨라!
형제들과 함께 주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온전하고 건강하고 거룩한 주님 중심의 공동체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백조가 우아하게 호수를 다니기 위해서 물속에 있는 다리는 쉼 없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들은 사실 그렇게 되기까지 뒤에서 수고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될 수 있도록 수고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81년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 도시로 서울을 신청하였습니다.
당시 대한민국의 경쟁 국가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개최 도시는 나고야였습니다.
일본은 이미 1964년에 동경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경제적인 이유로 이미 개최하기로 했던 아시안 게임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면에서 대한민국은 올림픽 개최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의 힘이 강했고, 우리의 힘은 약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올림픽유치위원회의 위원장인 고 정주영 회장은 유치단을 이끌고 독일 바덴바덴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88 올림픽 개최장소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독일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있었습니다.
광부와 간호사들은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수상했던 손기정 선생님도, 당시 독일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차범근 선수도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 함께 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로 불리한 상황에서 우리 유치단은 올림픽 위원들을 만났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과 같은 선진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지금 경제성장을 이루면서 곧 선진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여러분의 나라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대한민국을 도와주십시오.”
선진국의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위원들을 만날 때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이 개발도상국입니다.
대한민국이 올림픽 유치를 하면 이제 곧 여러분의 나라도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발도상국이 위원들은 우리의 말에 점차 수긍하였다고 합니다.
일본은 올림픽 위원들에게 일본의 기술의 상징이었던 ‘소니’ 시계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올림픽 위원들의 방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았다고 합니다.
당시 바덴바덴에 있는 꽃집의 꽃들을 대부분 사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일본은 ‘시계’로 대한민국은 ‘꽃’으로 올림픽 위원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1981년 올림픽 위원회 사마린치 위원장은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을 선포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전 세계에 알린 ‘88 서울 올림픽’은 이렇게 헌신적으로 노력했던 분들의 땀과 눈물 위에서 개최될 수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 23항 ‘원리와 기초’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리와 기초’입니다.
원리와 기초는 4단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태어난 목적입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났다.’라고 말을 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듯이, 종은 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듯이, 사람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둘째는 세상의 재물입니다.
‘이 재물은 모두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들은 이 재물을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유익하면 쓸 것이고,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유익하지 않으면 버릴 것이다.’라고 말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사용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남을 해치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면서 사용하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셋째는 삶의 기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단명함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도 이 부분에서는 자신 없어 합니다.
극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라고 말을 합니다.
자는 것도, 사는 것도, 먹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와 같은 단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피정을 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길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도 바로 이런 원리와 기초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혼인을 한 사람도, 혼인을 하지 않은 사람도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혼자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내세울 것도 아닙니다.
혼인 생활을 해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비행기로 가는 길, 기차로 가는 길, 자동차로 가는 길, 걸어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로 가든지, 중요한 것은 부산이라는 목적지입니다.
비행기로 가도 목적지가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걸어간다 하더라도 목적지가 같으면 언젠가는 도착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가르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원리와 기초’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입니다.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기적을 행하는 것도, 악령을 내쫓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예언자는 자신의 권위와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말을 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달 것 같으면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누구는 너무나 먹음직스럽다고 말하지만, 달다고 생각되면 머리부터 아파오는 느낌입니다.
어떤 분께서 너무 맛있다면서 한 입만 먹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것을 싫어하는 제게는 한 입 먹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되고 맙니다.
이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 맛있는 것에 어떻게 손도 대지 않는다면서, 혹시 자기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음식에 대한 선호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보니, 초콜릿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고, 계란을 싫어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커피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이 커피를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자기 선호도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몸에 유익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지금 아파서 약을 먹어야 하는데, 약이 써서 싫다는 아이를 존중해서 약을 주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음식의 선호도가 다른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필요하다면 선호도의 차이가 있어도 억지로 먹게 합니다.
어쩌면 사랑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사랑의 선호도도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맛없어 보이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고, 오히려 상대에게 더 주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사랑을 우리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는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것처럼, 몸과 영혼을 건강하게 해주는 최고의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에 대해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증언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귀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악을 없애고,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실천하기 힘들다고 해서 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순간의 만족을 위해 마귀와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마귀의 유혹은 항상 그럴싸합니다.
가장 좋은 길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그런 사랑의 선호도를 갖춰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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