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사 낙관과 비관이 엇갈린다 할지라도 다가올 한 해를 말할 때는 누구라도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올 한 해 한국 영화계를 전망함에 있어서 희망은 단순히 의례적인 수사를 넘어선다. 2002년은 규모와 다양성, 시스템에서 어느 해보다 성장의 가속도를 붙여나갈 것이 확실해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 2002년 한국 영화계의 향방을 들여다볼 수 있는 12개의 문과 그 열쇠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2002년 벽두에 점쳐보는 올해의 영화계. 쌀알은 던져졌다.
키워드① 100,000,000
관객 1억 명 시대가 온다 | 지금으로선 불가능한 수치가 결코 아니다. 최근의 가파른 관객수의 상승세를 보면 오히려 충분히 가능한 수치다. 2002년은 국내 극장가가 처음으로 1억 명의 관객을 맞는 원년이 될 공산이 크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난 한 해 극장가에는 8천2백만 명의 관객이 찾았다. 2000년에 비해 무려 27%나 증가한 수치다. 관객수가 지난해와 같은 비율로 증가한다고 가정하면 올해 2천2백만 명의 관객이 더 늘어난다는 계산이 가능해진다. 합하면 1억4백만 명이 된다.
한국영화 점유율 50% + 알파? |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따라 붙는다. 가장 큰 변수는 한국영화다. 한국영화의 흥행세가 지난해만큼의 관객 유인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가 전체 시장 규모를 좌우하는 최대 변수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한국영화는 최근 몇 년 새 관객들의 기호를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능력을 인정받았다. 올해만 해도 제작비 60억 원을 훌쩍 넘기는 대작 프로젝트로부터 다양한 규모와 장르의 상업 영화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올 예정이다. 적극적인 장르 마케팅을 통해 한국영화가 폭발적인 관객몰이를 이어나갈 것이라는 예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영화 시장 점유율이 어렵지 않게 50%대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스크린의 홍수 | 또 한 가지 변수는 스크린수다. 2001년까지 전국적으로 820개 정도인 스크린수는 올 한 해 적어도 920개까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멀티플렉스 CGV가 서울 구로와 목동, 수원 등지로 공격적인 스크린 확장에 나서며,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 등도 대구와 부산, 창원, 전주 등의 대도시를 겨냥한 확장 경쟁에 가세할 예정이다. 이들 3대 메이저 극장이 추가 확보할 스크린수만 해도 80개가 넘는다. 이밖에 지역권을 중심으로 한 대형 극장들이 속속 멀티플렉스로의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렇게 봤을 때 스크린수 증가만으로 기대되는 관객수 증가효과는 최소 10%에 이를 것이라는 추산이다.
물론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극장 관계자들 가운데선 무시 못할 관객동원력을 가진 할리우드영화가 올해 어느 때보다 약한 라인업을 보이고 있다는 점과 한국영화에 대한 높아진 기대수준이 실망으로 돌아올 경우의 부작용 등을 들어 1억 명 돌파를 쉽게 낙관할 수 없다는 의견도 적지 않은 실정. 지난해 잇따라 쓴 잔을 마셔야 했던 이른바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의 성적표를 감안하면 올해 대거 선을 보일 SF 대작들의 미래도 마음 놓고 장담할 수만은 없는 처지다. 여기에다 월드컵이라는 거대 변수가 도사리고 있어 관객 이탈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내 영화계가 단순히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것을 떠나 숨겨진 관객들을 만들어 내는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객수 1억 명 시대는 이제 시간 문제가 되고 있다. 최광희 기자
키워드 ② 16강
피버노바 | 2002년 한일월드컵 공인구 '피버노바'가 공개됐을 때 모 시사주간지는 속도가 배가된 이 공이 골키퍼들 사이에서 '피보나봐'로 통한다는 우스갯소리를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월드컵이 두려운 것은 골키퍼들만이 아니다. 영화계는 월드컵 기간 동안 극장가가 피를 보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5월 31일 서울 개막을 시작으로 6월 30일 폐막까지 꼬박 한 달간 온 나라의 눈과 귀를 배타적으로 장악할 월드컵은 한 해 흥행의 성패를 판가름짓는 극장가 여름 시즌과 정확히 일치한다. 지난해의 경우 6월 1일 개봉한 <진주만>을 시작으로 <미이라 2> <툼레이더> <신라의 달밤> 등 내로라 하는 흥행 대작이 모두 이 기간에 선보였다. 바로 이 1년 중 최대의 성수기가 최악의 비수기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영화인들이 우려는 한낱 기우일까?
히딩크만 믿는다 | 어느 직배사의 한 관계자는 "각 회사마다 올해 개봉 스케줄을 짜면서 일단 6월은 비워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한다. 실제로 <스파이더맨> <스타워즈 에피소드 2> <맨 인 블랙 2>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 기대를 모으는 할리우드 여름 블록버스터들은 대부분 월드컵을 피해 7월 이후나 6월 이전으로 개봉 일정을 잡고 있다. 한국영화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현재 촬영이 진행중이거나 촬영 예정인 영화들마다 월드컵 기간 중 개봉 여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또한 매년 7월에 열리던 부천영화제 역시 월드컵 직후에 개최할 경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으기가 수월치 않을 것을 우려해 일정 조정을 신중하게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어디 그뿐인가. 비디오 업계의 한 관계자는 "극장도 극장이지만 비디오숍은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게 뻔하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다수 국민들과 달리 영화인들은 제발(?) 한국이 1차전에서 탈락해주기를 바라는 게 당연하다. 이 와중에 만에 하나 16강에라도 진출할 경우 영화계에 미칠 여파는 상상도 하기 싫다는 것이다. 그 마음은 관객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볼 만한 영화마저 없으면 온 나라가 축구라는 마약에 쩔어 지낼 한 달 내내 무슨 낙으로 견디누? 우리는 히딩크만 믿는다.
김세윤 기자
키워드 ③ SF
끝나지 않는 블록버스터 ㅣ 2002년 한국영화의 주류를 형성할 장르는 바로 사이언스 픽션, 곧 SF라는 단어로 압축된다. 올 한 해 한국영화 개봉작 라인업 가운데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예스터데이>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등 초대형 SF 대작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심판대에 오를 영화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2009년 일본 지배하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는 순수 제작비만 80억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11년 더 나아가 이번에는 2020년을 배경으로 한 <예스터데이>. 가상도시인 인터시티와 게토 지역에서 벌어지는 납치극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풀어나간 작품이다. 역시 제작비는 50억 원이 넘는다.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은 사이버 스페이스와 현실 세계를 오가며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일전을 펼치게 된다는 내용으로 한국영화 사상 가장 많은 제작비인 110억 원이 쓰였다. 이밖에 2월 말 크랭크인할 예정인 <내츄럴 시티>는 사이보그와 사람이 함께 공존하는 2080년을 배경으로 한 액션 영화로, 85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갈 예정이다. <텔미썸딩> 이후 2년 동안 장윤현 감독의 뇌리를 사로잡고 있는 <테슬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그 바깥의 또다른 세계간의 전이를 다루는 작품으로 적어도 50억 원 이상의 제작비가 들 것으로 보인다.
끝나지 않는 함정 ㅣ SF 장르인 만큼 올해 선보이는 이들 영화들은 모두 미래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제작비 규모가 장난이 아니라는 점 역시 대동소이하다. 할리우드의 정교한 세트와 컴퓨터 그래픽에 길들여진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선 쏟아붓는 돈의 규모가 당연히 많이 들어 갈 수밖에 없다. 이건 곧 그만큼 위험부담도 크다는 걸 의미한다. 110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경우 손익 분기점을 맞추기 위해선 적어도 서울 관객 200만 명 이상은 동원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얼마나 세련된 컴퓨터 그래픽과 특수촬영 효과를 달성해내느냐도 관건이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장르를 불문하고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느냐는 것. 이런 점에서는 지난해 꽤나 남다른 시각효과를 만들어 놓고도 흥행면에서는 기대치를 밑돌았던 <화산고>가 타산지석이 될 법하다. 이원 기자
키워드 ④ COMEBACK
그들이 돌아온다ㅣ 감독들에게도 사이클이라는 게 있는 걸까. 약속이라도 한 듯 이렇게 한꺼번에 돌아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작품성과 흥행력을 인정받은 충무로 파워 감독들이 올 한 해 줄줄이 개봉 대기명단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려 놓았다. 도대체 누구냐고? 수다맨에게 물어보자.
“자, 그럼 올해 개봉되는 중견 감독들의 영화들을 좌악 살펴볼까요. 우선 한국 영화계의 파워맨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이 있구요,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으로 뭔가를 보여줄 태세예요. 또 한국영화의 흥행신화를 다시 쓴 곽경택 감독의 <챔피언>도 가을엔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하네요. 이뿐만이 아니지요. 작가 영화를 지향하는 감독들의 영화들도 속속 개봉하는데요. 개나리 만개하는 5월쯤에는 <취화선>의 임권택 감독이 있구요,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도 있어요. 그리구요, 가을에는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가 있대요. 여기서 한마디 첨가하겠습니다. 아직 시나리오 작업중인 박광수 감독의 <방아쇠>(가제)와 정지영 감독의 <은지화>도 잘 하면 올해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취화선>과 <생활의 발견>은 올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을 노리는 작품들. 임권택 감독이나 홍상수 감독은 국제 영화계에서의 상당한 지명도를 바탕으로 어떤 부문이든 상 하나는 타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모으고 있다. 두 명의 흥행 감독, 박찬욱과 곽경택이 과연 어떤 결과를 보여줄지도 관심사. 흥행에 대한 부담을 버리고 촬영에 임했다고는 하지만 내심 신경이 쓰이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다. 꽤 오랫동안 시나리오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박광수 감독과 정지영 감독이 언제 차기작에 착수할 것인지도 올해 충무로 관심사 중의 하나.
2차 시도 ㅣ 물론 중견 감독들만 있는 건 아니다. 뛰어난 데뷔작으로 충무로의 기대를 받았던 신인급 감독들의 차기작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깔끔한 연출 실력을 선보였던 이정향 감독은 할머니와 손자의 따뜻한 이야기를 다룬 <집으로...>의 후반 작업에 여념이 없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일약 오버그라운드로 떠오른 류승완 감독의 <피도 눈물도 없이> 역시 2월 중순이면 만날 수 있다. 이원 기자
키워드⑤ 투(Two)
블록버스터급 속편들 | 돌아오는 여름과 겨울 시즌은 그야말로 별들의 전쟁이다. 영화 흥행사에 기록을 남긴 영화들의 속편이 속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각각 어떻게 기록을 갱신할지 눈여겨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일단 선제공격에 나서는 영화는 7월 개봉 예정인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에피소드 2>. 20세기 폭스 코리아의 한 관계자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은 개봉 당시 국내에서 미국과 같은 흥행 기록을 세우진 못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라고 장담한다. “<스타워즈 에피소드 2>에는 아미달라 여왕과 청년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로맨스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SF 서사 로맨스와 맞대결을 벌일 또 하나의 속편은 <맨 인 블랙 2>. 1편에서 은퇴했던 토미 리 존스가 다시 검은 양복을 입고 복싱으로 한층 몸을 단련한 윌 스미스와 함께 돌아온다.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로 씻을 수 없는 참패를 기록한 감독 배리 소넨필드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콜럼비아 트라이스타 코리아는 7월 <스타워즈 에피소드 2>와 격돌할 <맨 인 블랙 2>의 결과를 지켜본 후, 인간 가족에게 사랑받는 디지털 꼬마 생쥐 이야기 <스튜어트 리틀 2>의 개봉 일정을 조정할 계획이다.
판타지 속편, 보고 또 보고 | 요즘 극장가에서 이런 말을 하는 관객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1년을 기다리지?” 이것은 올 연말에 각각 2편을 내놓는 두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말이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은 전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이어 주인공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돌아와 두번째 해를 보내며 겪게되는 모험담을 다룬다. 전편의 출연진이 대부분 그대로 캐스팅됐고, 케네스 브래너가 호그와트의 새로운 교수 길드레이 록허트 역으로 합류한다. 또한 원작자 J.K. 롤링이 이 시리즈의 다섯번째 원작 소설을 올해 출간할 계획이라 <해리포터...>의 붐은 웬만해선 식지 않을 전망이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는 “향후 6년간 매해 11월 셋째 주 금요일을 ‘해리 포터 데이’로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따라서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이 미리 극장가를 선점한 후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할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과 스크린을 나눠 가지며 올해 초와 비슷한 모양새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2편인 <반지의 제왕 : 두 개의 탑>은 이미 편집중이다. 삼부작의 허리에 해당하는 만큼 시작도 아니고 끝도 아닌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다. 일단 주인공들이 각지로 흩어진다. 프로도 일행은 운명의 산을 향해 떠나고, 아라곤 일행과 백색의 마법사로 강력하게 부활한 간달프를 포함한 그의 일행은 호빗들의 임무를 측면 지원하게 된다.
위의 영화들이 관객들을 한껏 들뜨게 해주겠지만 그래도 못내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다. <매트릭스 2>를 올해 볼 수 없다니! 김혜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