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 가는 길
연미숙
매미 소리 힘차게 들리는 이 뜨거운 여름.
아이들은 올 여름방학도 엄마 아빠와 함께 몇 군데 박물관을
관람하고, 숙제 다 했다고 방학 끝나기 며칠 전에 여행이나 해수
욕장을 갈 테고, 저희들끼리 모래사장에서 뒹굴다가 '즐거운 여름
방학'을 보낼 것이다. 여름방학이라고 들떠 있는 아이들을 보
고 있자니 내 어릴 적 여름방학이 생각난다.
외갓집 가는 길.
아득한 옛날처럼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 길은, 가벼운 흥분으로
뛰다 걷다 하면서도 누군가를 만난다는 기쁨에 어깨춤이 절로 나
오고 행복감으로 가득 차곤 하던 길이다. 그 길을 생각하면 쇠
라도 녹일 듯한 이 더위 속에서도 한줄기 시원한 비가 되어 촉촉히
내 마음을 적신다.
외갓집은 음성군 보천면 덕정리인데 어른들은 그곳을 ‘독징이’
라고 불렀다. 진천군과 괴산군, 음성군의 군 경계가 합쳐지는 이
곳은 일제 36년 동안에도 일본 헌병을 직접 구경하기 힘들었고,
6. 25전쟁에서 패한 북한군이 이곳을 통과해서 월북하던 길목이
된 오지 중의 오지이다. 큰산을 두 번이나 넘어야 나타나는 이
곳은 한 번 가기도 힘들고, 이곳에 사시는 어른들도 읍내로 나가
볼일을 보려면 꼬박 하루를 잡아야 하는 곳이다.
매년 돌아오는 여름방학이면 어머니께서 늘 여행겸 놀이 삼아
넷이나 되는 우리 형제를 외갓집에 보내셨다. 그 시절 아이들에
게는 버스를 타 보는 것이 큰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자랑거리가
되던 때다. 우리는 함께 가는 어른도 없이 아이들끼리 똘똘 뭉
쳐서 버스를 탄다는 것이 한편 두렵기도 하지만 얼마나 신명이
나던지......
떠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낭만적인가. 낯선 곳으로
의 여행. 새로운 세계 신비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상상으로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하느라 터미널에서 차를 기
다리며 조금만 씹으면 딱딱해지는 고무처럼 질긴 껌을 사서 씹는
다든지, 어머니께서 ‘혹시 돈이 모자랄까’하여 용돈이라며 덤으로
우리들 주머니마다 조금씩 넣어 주시던 동전을 잃어버릴까 봐 어
린 마음에 자꾸만 들여다보곤 하였었다.
노을마저 검푸른 하늘과 척척 늘어진 담뱃잎의 검은 그림자들
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들을 더욱 가슴 졸이게 하고, 골 깊
은 밭이랑마다 눈부시게 쏟아져 들던 달빛, 속살같이 뽀오얗게
드러난 외길 위에 우리 4형제는 서로 의지가 되어 걸어가다가 까
막 까마귀 두어 마리라도 푸드득 날아오르면 가뜩이나 겁에 질린
우리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마을 어귀
둥구나무가 보이는 곳까지 숨도 쉬지 않고 내달리던 길.
길 가다가 심심하면 장난 삼아 길가의 잡초에 풀 매듭을 짓기
도 하고, 운 좋게 달구지라도 얻어 타는 날이면 왠지 웃음이 자
꾸만 나오다가도 경사진 비탈길에서 딸리는 소를 돕느라 주인
이나 우리나 낑낑대며 온힘을 다해 밀던 일. 안개 끼어 산꼭대
기만 빼꼼히 보일 때면 산수화 같은 아름다운 주위 풍경에 넋을
잃다가도 걱정반 두려움 반으로 동네 어른들 만날 때까지 길가에
서 쭈그리고 기다리던 일. 죽어 있는 뱀이 길 한가운데 길게 누
워 있는 날이면 꿈에 나타날까 봐 밤잠까지 설치던 지금도 눈에
선한 그 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은 동네를 들어설 때 비쳐 드는 한
줄기 불빛이다. 품속으로 달려들던 우리들을 진심으로 반갑게
맞아 주던 외할아버지, 외삼촌과 외삼촌 아주머니, 놀 친구가 왔
다고 신나하던 외사촌 형제들과 장가도 가지 않은 외삼촌들의 귀
여움을 독차지하던 우리. 누구 하나 반갑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늘 보고 싶어하던 얼굴들이다.
외갓집은 담배를 따고 찌는 일로 하루해가 짧기만 했다. 우리
들도 처음 해 보는 일에 신이 나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파란
담뱃잎을 줄에다 꼬였는데, 잘한다는 칭찬 속에 서로의 실력을
겨루기도했다. 쑥을 넣어 피운 모깃불의 매캐한 연기 속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일을 하고 나면 외삼촌 아주머니가 부엌에서 솥단지 채
내온 찐 옥수수를 한 개씩 물고, 펼쳐 놓은 멍석에 누워 언니와 외
사촌 언니, 나 셋이서 까만 하늘에서 우리 머리위로 쏟아져 내
리는 별빛을 바라보며 ‘내 별 찾기’ 놀이도 했었다.
한 번은 밤중에 잠이 깨었는데 건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담뱃잎을 쪄내느라고 외삼촌들이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불을 지피
고 있었다. 센 온도를 꾸준히 유지해야 깨끗한 1등품이 나온다는
말과 함께 감기 들기 전에 어여 들어가 자라고 걱정을 하면서도
불꽃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던 뒷모습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던
가. 불 앞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외삼촌들과 함께 날을 새겠다
고 고집을 부리다 깜빡 졸았는지 깨어보니 따스한 안방이었다.
외갓집에 가면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간간이 도와 드리는 우
리들이 무색할 정도로 정성껏 마련해 주시는 감자나 옥수수는 매
일 먹어도 좋았고, 그때는 옥수수 대를 씹어도 왜그리 맛있는 국
물이 줄줄 나오는지...... 모두가 이웃사촌이라 내 밭 네 밭을 가리
지 않고 때가 되어 맛있게 익어 가면 아무개네 참외밭이나 수박
밭에 들어선 원두막은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그래서
인지 밤에 출출할 때면 참외나 수박서리보다는 내기 화투를 해서
남의 부엌에 남겨 둔 찬밥과 반찬을 들키지 않고 훔쳐 와 비벼
먹는 밤참서리가 더 재미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외삼촌 때문이었는지 외갓집은 농사짓는 집답
지 않게 기타와 하모니카가 있었다. 나는 외삼촌들이 기타를 들
고 화음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도, 하모니카로 불어 주는 ‘하숙생’
이나 '신라의 달밤' 같은 구성진 연주도 무척 좋아했다. 막내 외
삼촌은 동네의 명물로 꼽혔다. 한번은 면민 노래자랑이 있었는데
거기에 출전한다고 기타를 치면서 앨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연
습하는데, 노래도 노래지만 다리를 비비다 온몸을 흔드는 트위스
트 춤 때문에 얼마나 우리들을 웃겼는지...... 구민 아저씨의 구수
한 목소리로 ‘옛날 옛날 어떤 마을에~'하면서 우리를 긴장시키던
외삼촌의 옛날 이야기는 또 얼마나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었던가.
외할아버지가 거처하시는 사랑방은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집성촌이던 마을의 웃어른이면서도 훈장 선생님이
어서 사랑방은 늘 집안의 대소사며, 농사일까지 의논하는 동네
사람들로 붐볐다. 외할아버지는 글도 많이 배우셨지만 지혜로운
분이셨다. 젊은 시절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가난한 선비 살림을
벗어나시려고 금산에서 강원도를 오가시면서 인삼과 꿀을 팔아
많은 돈을 버셨다. 땅을 사서 직접 농사를 지으시면서 해방 전
까지 어린 학동들을 가르치셨다. 그래서인지 낡은 책상 위아래
에는 옛날 서책들이 많았는데, 누구의 시를 베꼈는지도 알 수 없
는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써진 서책을 발견하고는 외할아버지 흉
내를 내어 책표지를 쓱쓱 닦아 곰팡이 냄새나는 책장을 넘기면
‘너는 책이 좋으냐?” 하고 다정한 미소로 물어 오셨는데......
그 책들과 옛날 농기구들은 외할아버지가 앓아 누우시자 슬그
머니 없어졌고, 외삼촌들도 결혼하여 제 식구들과 살길을 찾아
도회지로 나가 빈집처럼 휑하니 바람이 이는데, 이제는 힘든 농
사 일로 생긴 관절염으로 수술조차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으신
외삼촌 아주머니와 뒷바라지로 노심초사하실 큰외삼촌이 함께 정
든 외갓집을 지키고 있다.
세월이란 사람의 따뜻한 인정마저 가져가는 것일까.
어머니가 처녀 때 쓰시던 베틀이 골방 윗목에서 누에치던 방으
로 또 뒤뜰 처마 밑으로 옮겨져 비를 맞더니 어느 해이던가 아예
장작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처럼, 그렇게 건조실도 서책들도 통
기타도 없어진 지 오래다. 만남의 설레임을 간직하던 그 길도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더러운 흙먼지나 잡초도 나지 않는 깨끗한
길이 되었고 푸근한 옛 정취도 찾기 힘들어졌다.
하긴 인심도 옛 인심이 아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아이들을 마
음놓고 친척에게 맡기기도 힘드니 더욱 그렇다. 아이들은 '인정
(人情)’을 배울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고 나조차도 아이들의 즐거
운 추억을 키워 줄 만큼 시간 낼 마음의 준비도 덜 되었으니, 눈
에 비치는 회색 빛 도시 풍경만큼이나 서로의 마음이 메마른 탓
인게다.
지금도 내 마음속 외갓집 가는 길은 까막 까마귀가 날아오르고
하늘에는 숨막힐 듯 쏟아지는 별들로 가득 차 있다. 귓가에 들
려 오는 하모니카 소리와 필사본의 까만 붓글씨들이 가슴에 가득
살아 숨쉬는데, 아이들 마음속에 ‘인생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담
아 주어야 할 엄마가 여름방학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들뜬 마음을
다잡기 위해 목소리를 밑으로 착 깔면서도 한구석 미안함이 슬며
시 고개를 든다.
1999. 5집
첫댓글 인심도 옛 인심이 아니다. 이제는 옛날처럼 아이들을 마음놓고 친척에게 맡기기도 힘드니 더욱 그렇다. 아이들은 '인정(人情)’을 배울 기회가 그만큼 줄어들고 나조차도 아이들의 즐거운 추억을 키워 줄 만큼 시간 낼 마음의 준비도 덜 되었으니, 눈에 비치는 회색 빛 도시 풍경만큼이나 서로의 마음이 메마른 탓인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