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색촬요(通塞撮要)》 해제(解題)
- 조선조 서얼 차대(差待)의 실상과 허통(許通) 정책의 추이 -
김성우 대구한의대학교 역사학 교수
아들을 낳았다고 남들은 모두 기뻐하나
내 마음 홀로 그렇지 않다네
세간의 한없는 괴로움이
앞으로 너에게 또 전해지리라
《규사(葵史)》 권1, 서얼 진사 이휘(李翬)가 아들 출산 소식에 지은 시
1. 머리말
《통색촬요(通塞撮要)》는 ‘폐색(閉塞)된 자들을 허통(許通)해 주는 전말을 기록한 개요’라는 의미로, 조선 시대 서얼(庶孼) 차대(差待) 규정과 허통에 관한 기록을 모아 놓은 책이다. ‘해바라기의 곁가지요’, ‘쭈글쭈글한 목덜미에 누렇게 뜬 얼굴로 자기 집 아랫목에서 나란히 누워 죽고 말’ 운명을 타고난 이들의 피눈물 어린 울분의 기록이다. 한평생 차별만 당하던 서얼은 혹 운 좋게 성군(聖君)이라도 만나면 그들의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서얼에게 주어진 관직은 기껏해야 문관직 몇 개, 무관직 몇 개, 그리고 음관직 몇 개뿐이었다. 이나마도 성군이 승하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회수되고는 했다.
서얼에게 성군은 탕평 군주(蕩平君主)로 알려진 영조(英祖)와 정조(正祖)였다. 하늘이 부여한 지상(地上) 권력의 중심이라 굳게 믿었던 이들은 군왕이 차별 없이 신민을 두루두루 보살필 때만 황극 정치(皇極政治)가 실현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 영조와 정조가 재위했던 18세기는 신분 차별이라는 고질적 폐단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시련을 겪었다. 집권 세력인 노론(老論)을 제외한 기타 정파의 사람들이 그들이었고, 서울의 경화 사족(京華士族)이 아닌 지역의 사족이 그들이었으며, 양반(兩班)이 아닌 서얼과 평민이 그들이었다. 두 군주는 조선 사회 전면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던 신분 차별이라는 사회 문제에 대해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도전장을 던졌다. 소론(少論)과 남인(南人), 소북계(小北系) 정치 세력, 지방 양반, 그리고 서얼과 평민은 이들이 주도하는 황극 정치가 실현되기를 학수고대했다.
문벌 세력(門閥勢力)에 의해 포위되어 있던 두 군주가 그들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들이 있었다. 이들의 개혁을 가로막은 이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경화 사족 출신의 집권 노론 세력이었다. 이들은 왕실과 혼인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강력한 문벌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주-D001 이들은 왕위 계승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여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이를 군주로 내세웠고, 왕실 혼인을 독점함으로써 조선의 정치와 경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벌열 집단(閥閱集團)의 강고한 장벽을 깨기 위한 군주의 이상이 황극이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이 탕평(蕩平)이었다. 영조와 정조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능력을 끊임없이 실험했으며, 각자의 재능에 맞는 관직에 임명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이들은 갓난아이인 백성을 어루만지는 자애로운 어버이와 같은 군주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두 군주는 성군이었다.
그렇지만 성군의 개혁 정치는 소수의 외척(外戚) 벌열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된 강고한 문벌 집단을 깨뜨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이유로 성군의 죽음과 함께 사회적 소수자들의 희망은 일장춘몽이 되었다. 《통색촬요》는 사족의 첩(妾)의 후손들로 영원히 폐색된 존재였던 이들이 점점 잊혀 가는 좋은 시절의 짧았던 꿈을 회상하면서 기록한 책이다. 그들은 서얼이라 불렸고, 가끔씩 일명(一名)이라 불리기도 했다.주-D002
이 책의 저자들은 영조와 정조가 재위하던 시절, 성군이 그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애정을 보여 주었는지, 그리고 문벌 세력에 맞서 그들의 권리를 어떻게 대변하려 했는지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했다. 해제에서는 17세기, 18세기 탕평 군주인 영조대ㆍ정조대 세 시기로 나누어 수록 내용들을 살펴보고, 저자들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들의 집필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
2. 17세기 서얼 허통 정책의 추이
서얼 허통 논의가 조정에서 최초로 시작된 시점은 1625년(인조3)이었다. 그해 9월 부제학(副提學) 최명길(崔鳴吉)을 위시한 홍문관(弘文館) 관원들은 ‘재능에 따라 인재를 거두어 써서 서얼의 억울함을 펴 주고 인재를 등용하는 길을 넓혀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를 접한 인조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고위 관료의 수의(收議)를 지시했다. 그해 11월 비변사(備邊司)는 재상들의 견해를 종합한 끝에 “양첩(良妾) 소생은 손자로부터, 천첩(賤妾) 소생은 증손으로부터 문과(文科)ㆍ무과(武科) 및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의 응시 자격을 허용한다.”라는 조항을 만들었다. 그리고 문과 합격자에게는 “요직(要職)을 허락하되 청직(淸職)은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제한을 두었다.주-D003
그렇지만 실제 관직 운용에서는 이 조처가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문과에 급제한 서얼 문관에게 정부가 허용한 중앙 관직은 봉상시(奉常寺)와 교서관(校書館)의 서너 자리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1633년(인조11) 이조 판서로 재직 중이던 최명길은 서얼에게 개방할 ‘요직’의 범주를 명확히 할 것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때 정부가 개방한 요직은 호조, 형조, 공조 등 삼조(三曹)의 낭청(郎廳 정랑(正郎) 및 좌랑(佐郎))과 중앙 각 관사의 판관(判官 종5품) 이하 관직이었다. 그해 말 실시한 인사에서 신희계(辛喜季)와 심일준(沈日遵)이 형조 좌랑, 김굉(金宏)과 이경선(李慶善)이 공조 좌랑, 이현(李礥)이 호조 좌랑에 각각 임명되었다.주-D004 그렇지만 서얼 문관의 요직 임용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1670년 대에 이르러, 공조 참의 김수홍(金壽弘)이 서얼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1676년(숙종2) 대사헌(大司憲) 이무(李袤)가 다시 이 문제를 꺼냈다. 그렇지만 이무의 상소는 도승지(都承旨) 김휘(金徽)가 봉입(捧入)을 거부하면서 숙종에게 끝내 진달되지 못했다.주-D005 1695년 또다시 서얼 허통을 요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소두(疏頭)는 경상도의 서얼 생원 남극정(南極井)이었고, 988인의 경상도 서얼이 이 운동에 대거 동참했다. 이 상소에 따르면, 문과ㆍ무과의 응시 자격이 주어진 1625년 이래 70년 동안 서얼 출신으로 문과 급제자는 100여 명, 무과 급제자는 수백 명이 배출되었다. 그렇지만 1633년 서얼 문관이 삼조(三曹)의 좌랑(佐郎)에 임명된 이래 단 한 명의 문관도 낭관직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동안 그들에게 용인된 관직은 내직으로는 정6품 전적(典籍)과 종6품 주부(主簿), 외직으로는 종6품 찰방과 종6품 현감이 전부였다. 무관에게는 종3품 첨사(僉使)와 종4품 만호(萬戶) 몇 자리만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이들은 상소를 통해, 쌀을 받고〔納粟〕허통(許通)을 허락하는 현 규정을 없앨 것, 허통 관직 수를 늘려서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용될 수 있는 길을 넓혀 줄 것 등 두 가지 사항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번에도 승정원(承政院)에서 상소 접수를 완강히 거부한 탓에, 이들은 4개월 동안이나 대궐 앞에서 복합(伏閤)을 시도한 끝에 가까스로 숙종에게 상소를 올릴 수 있었다.주-D006
1696년(숙종22) 7월 이조 판서 최석정(崔錫鼎)이 서얼 허통을 주장하는 차자(箚子)를 숙종에게 올렸다. 그는 규정에 의거하여 서얼 문관에게는 중앙 관직으로 삼조와 각 시(寺)의 관직을, 지방 관직으로 주군(州郡)의 벼슬을 주고, 음관(蔭官)과 무관(武官)에게도 관로(官路)를 좀 더 넓혀 줄 것, 그리고 명목이 구차한 납속(納粟) 후 허통하는 규정을 혁파할 것 등 두 가지를 건의했다. 최석정의 차자는 1년 앞서 제출되었던 남극정의 요청을 대체로 수용한 것이었다.주-D007
이상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인조대(1623~1649) 이후 숙종대(1674~1720)에 이르는 100여 년은 서얼 허통에 관한 한 조정의 적극적인 조처가 거의 없었다. 인조대 최명길, 숙종대 김수홍과 이무, 그리고 최석정 등 극히 소수의 관료들만이 서얼 허통을 주장했을 뿐이다. 서얼의 집단 상소 운동도 남극정, 유일상(柳日祥) 등이 소두(疏頭)가 되어 올린 두 차례의 상소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숙종대 관료와 서얼 유생이 올린 상소는 대부분 승정원에서 봉입(捧入)하지 않거나, 설령 봉입에 성공했다 해도 국왕으로부터 시원한 답변을 얻어 내지 못했다.
다만 1696년(숙종22) 최석정의 건의 이후 서얼의 ‘납미허통(納米許通)’ 규정이 혁파되었고, 서얼의 직역(職役)이 확정되는 성과를 거둔 것이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양첩(良妾)의 아들과 천첩(賤妾)의 손자는 업유(業儒) 혹은 업무(業武)라는 직역을 사용해도 좋다는 정부의 결정이 그것이었다. 1708년에는 서얼 당대(當代)만 업유나 업무를 사용하고, 아들 대부터는 유학(幼學) 직역의 사용을 허락하는 추가 조처가 내려지기도 했다.주-D008
3. 18세기 탕평 군주의 서얼 정책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영조가 즉위하자 서얼은 숙종의 정비(正妃)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의 무수리였던 숙빈(淑嬪) 최씨(崔氏) 소생인 영조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들은 영조야말로 자신들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는 인물, 곧 국서(國庶)라 여겼다. 그렇지만 영조는 그를 왕좌로 이끈 문벌 세력(門閥勢力)의 동향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런 사정을 1725년(영조1) 12월 서얼 진사 정진교(鄭震僑)를 소두(疏頭)로 한 260명의 연명 상소에 대한 그의 처리 방식에서 읽을 수 있다. 그들은 1년 4개월 동안 무려 13차례나 상소를 올렸지만 그들의 상소는 끝내 봉입되지 못했다. 서얼이 한 달 동안이나 대궐 앞에서 복합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영조는 상소 봉입을 저지한 당시 승지 윤유(尹游)를 엄하게 추고했다. 그는 서얼 금고가 오래된 관행이어서 갑작스럽게 개혁할 수는 없지만 “인조(仁祖)의 수교에 따라 서얼을 삼조(三曹) 정랑(正郎)에 의망(擬望)하도록 하겠다.”라는 좀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그들에게 전달해 주었을 뿐이다.주-D009
서얼 허통에 관한 영조의 입장은 이처럼 신중했고 그의 조처는 매우 더뎠다. 그는 1736년(영조12) 5월이 되어서야 서얼 출신 무관 김윤(金潤)과 이용신(李龍臣)을 주읍(主邑)의 수령에 임명하는 조처를 내렸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739년 5월에는 서얼 무관에게 수문장(守門將)직을 개방했다.주-D010 이 조처는 1633년(인조11) 서얼 문관의 중앙 요직 개방 이후 서얼 무관에게도 동일한 조처가 내려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서얼 무관에게 개방될 요직이 확정되기까지 무려 100여 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서얼 허통을 위한 영조의 노력들은 이런 몇 가지 조처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좌절되었다. 1770년 부사직(副司直) 이수득(李秀得)의 상소에 따르면, 도목 정사(都目政事)가 거행될 때마다 서얼 문관은 내직으로 교서관과 봉상시의 4, 5자리, 외직으로 작은 고을의 현감이나 찰방 몇 자리에 임명될 뿐이었고, 무관은 수문장 한 자리만이 허락되었다. 서얼 음관은 상환법(相換法)에 구애되어 경사(京司)의 부령(部令) 같은 사송(詞訟) 담당 관직의 진출이 불가능했다. 서얼의 관직 임용은 17세기 초반 이래 150여 년 동안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수득은 영조의 탕평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서얼 문관에게는 삼관(三館) 분관(分館)을, 무관에게는 삼청(三廳) 시천(始薦)을, 음관에게는 상환법과 사송직 제한 규정의 철폐를 주장하고, 성균관 유생에게는 적서(嫡庶) 구별 없이 치좌법(齒坐法)을 실시하라는 주장을 내놓았다.주-D011 이 제안은 사실상 사족과 서얼을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렇지만 영조는 이번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경과한 1772년(영조48) 8월 15일 이후 대반전이 시작되었다. 이날 저녁 영조는 서얼 출신 문관 여귀주(呂龜周)를 정5품직인 사헌부 지평(持平), 윤밀(尹謐)과 오준근(吳濬根)을 정6품직인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하는 한편, 무관 김취대(金就大)를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했다. 문관 청직(淸職)인 대간(臺諫)과 무관 청직인 선전관직을 서얼 문관ㆍ무관에게 전격 개방한 것이었다. 청직 개방이라는 점에서 이 조처를 통청(通淸)이라 부른다.주-D012 이튿날인 8월 16일에는 서얼의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가해 주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9월 9일에는 족보(族譜) 작성 시 적서를 구분하는 폐단을 혁파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이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역류(逆類)로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주-D013
영조는 그가 조정에서 추진한 이러한 파격적 조처들이 지방에도 확산되기를 내심 기대했다. 지방 서얼도 마찬가지였다. 영조의 처분에 한껏 고무된 서얼은 이제 그들도 향청(鄕廳), 향교(鄕校), 서원(書院) 등 이른바 삼소(三所)의 허통 및 향교와 서원의 치좌법 적용의 대상이 되리라 희망했다. 중앙의 삼사(三司)가 청직(淸職)이라면 지방의 삼소(三所)가 그것이라는 점에서, 특히 향교와 서원의 통청에 대한 기대를 크게 걸었다. 그렇지만 영조와 서얼의 이러한 기대가 오판이라는 것이 조만간 판명되었다.
지방의 사족은 ‘성균관에서는 서얼에게 치좌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조정(朝廷)만 통청한 것이지, 향곡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라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서얼 진사를 향안(鄕案), 교안(校案), 원안(院案) 등 삼안(三案)에 입록(入錄)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12월 27일 경상도의 서얼 진사 전성천(全性天), 황경헌(黃景憲) 등은 ‘삼안의 통록(通錄)이 가능하도록 사목(事目)을 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영조는 “조정의 벼슬부터 청금(靑衿 유생(儒生))에 이르기까지 모두 허통하겠다.”라는 비답을 내리면서, 성균관에서 먼저 치좌법을 거행하고 팔도의 향학(鄕學)에서도 이 예에 따라 나이순으로 차례를 정할 것을 지시했다.
그렇지만 영조의 이런 조처들은 여전히 지방에까지 전일적으로 시행되지 않았다. 그해 12월 30일 호조 판서 채제공(蔡濟恭)이 아뢴 것으로 인하여 비답하기를 “조정은 조정이고, 향당은 향당이다.〔朝廷自朝廷鄕黨自鄕黨〕”라고 하면서, 향당의 문제는 향당에 자율적으로 맡기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 또한 국왕이 성심을 다해 조정에서 교화를 펼치면, 바람에 풀이 눕듯이 팔도 전체가 국왕의 교화를 따를 것이라고 보았다. 주-D014
영조가 서얼 통청 문제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조정의 관료와 지방의 사족은 지방에서 서얼 허통을 저지할 수 있는 얼마간의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영조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지방에서는 사족의 완강한 거부로 인해 서얼 통청이 끝내 실현되지 않았다. 서얼이 받은 상처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서얼은 지방 사족이 구축하고 있는 사족 지배 구조라는 장벽이 생각 이상으로 두텁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러한 냉혹한 현실 앞에서 그들이 매달릴 수 있는 대상은 국왕밖에 없었고,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은 상소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773년(영조49) 1월 서얼 유생의 집단 상소가 또다시 제출되었다. 그들은 상소에서 향교와 서원의 통록을 위한 전제로서 성균관에서 치좌법을 실시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주-D015
중앙 관료와 지방 사족의 저항 강도가 예상보다 강하다는 것을 확인한 영조는 그의 명령이 미치는 중앙 정부와 서울을 대상으로 서얼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일 것을 결심했다. 그리하여 이튿날인 1월 27일 그는 서얼 출신 무관의 선전관 임명을 강행했다. 선전관의 책임자인 당상 선전관(堂上宣傳官) 백동준(白東俊)이 그의 지시를 거부하고 나서자, 그는 백동준을 체포, 곤장 12대를 친 뒤 경상도 거제부에 충군(充軍)하게 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이문덕(李文德)을 행수 장무 선전관(行首掌務宣傳官)에 임명했지만, 그 또한 무관 9명만을 추천했을 뿐이었다. 영조는 추천된 무관 가운데 이항림(李恒林), 김길행(金吉行), 김익대(金益大) 등 3명을 선전관에 임명한 다음,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이문덕에게도 곤장 20대를 치고 강화도 교동에 충군하게 하였다. 이문덕의 항명에 동조한 나머지 선전관에게도 같은 처벌을 내렸다.주-D016
같은 날 영조는 성균관의 동반(東班)과 서반의 우두머리 유생을 불러 치좌법의 실시를 주문했다. 그러자 충청도 음죽 출신의 동반의 우두머리 김식(金植)은 국왕의 명령을 면전에서 거부했다. 영조는 그를 강하게 질타한 뒤 유적(儒籍)에서 이름을 삭제하게 하는 한편, 제주도 대정현(大靜縣)에 충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동조한 유생도 모두 정거(停擧)시키고, 그의 출신지인 음죽 유생에게도 같은 형벌을 내렸다.주-D017 그해 2월 3일 석전제(釋奠祭)를 3일 앞둔 시점에서, 서얼 유생을 포함하는 성균관 유생의 치좌법이 마침내 거행되었다. 그리고 이날 서얼 유생 8명이 봉향(奉香), 봉로(奉爐), 도진설(都陳設), 전내 집사(殿內執事) 등, 석전제의 제관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주-D018
1774년(영조50) 4월 경기 유생이 서얼도 적자(嫡子)의 가계를 이을 수 있도록 양자(養子) 자격을 부여해 줄 것을 요청하자, 영조는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을 들어 법전에 의거하여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주-D019 이 조처로 인해 그동안 서얼의 사회적ㆍ경제적 지위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던 가계 계승 불허 관행이 소멸되었다.
영조는 중앙 정부에서 시작된 이러한 조처들이 지역 사회에도 영향을 미쳐, 서얼 허통 문제가 순조롭게 풀리기를 기대했다. 그렇지만 지역 사회에서는 영조의 바람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많은 지역에서 영조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여 서얼의 유적(儒籍) 통록(通錄)이 이루어졌지만,주-D020 더 많은 지역에서는 사족의 완강한 저항 속에 여전히 난항을 겪었다.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 경상도였고, 그중에서도 경주 사족의 저항이 가장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1774년 6월 18일 경주의 서얼 유생 이희겸(李希謙)이, 경주 사족이 정책 집행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희겸의 상소를 접한 영조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영조는 조정에서 문관직과 무관직의 옛 제도를 회복하고, 태학에서 치좌법을 실시했으니, 향안(鄕案)만 감히 다르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며 지방 서얼의 향록(鄕錄)과 원록(院錄) 등재를 지시했다. 또 정부의 지시에 불복하는 사족에게는 3대에 한하여 과거를 못 보게 하고 향민(鄕民)으로 만들라는 지시도 아울러 내렸다.주-D021 이후 서얼 허통 상소가 더 이상 제출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많은 지역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서얼의 허통 조처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영조가 승하하기 1년 9개월 전의 일이었다.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정조가 그의 치세기 서얼 관련 정책의 청사진을 제시한 시점은 1777년(정조1) 3월이었다. 정조는 즉위 이래 1년 가까이 이조와 병조의 인사 담당자들의 서얼 출신 문관과 무관에 대한 인사 방식을 예의주시했다. 서얼 문관은 시종신(侍從臣) 같은 청직(淸職)은 말할 것도 없고, 봉상시와 교서관 같은 요직(要職)에도 거의 임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서얼 유생까지 포함하는 성균관 치좌법 또한 사족 유생의 집단 반발로 인해 번복된 채 폐기되고만 형편이었다. 1772년(영조48) 가을부터 1773년 여름까지 정계를 몰아쳤던 영조의 서얼 정책들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정조는 즉위 1년을 즈음하여 대신들과 이조 및 병조 관원에게 그동안의 서얼 허통 규정을 전면 재검토하여 절목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 나온 것이 ‘정유년 절목(丁酉年節目, 1777)’이었다. 전체 10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 절목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주-D022
제2조: 문과 출신 문관의 분관(分館)은 교서관에서, 무과 출신 무관의 시천(始薦)은 수문장(守門將), 부장(部將)에서 시작한다.
제3조: 요직의 범위는 문관 참상직으로는 호조ㆍ형조ㆍ공조의 낭관(郎官 정랑(正郎), 좌랑(佐郎)), 음관과 무관의 참상직으로는 해당 관사의 판관(判官 종5품) 이하 관직으로 한다. 단 오상사(五上司 능(陵), 종묘서(宗廟署), 전(殿), 사직서(社稷署), 종부시(宗簿寺))의 낭관과 사헌부 감찰, 의금부 도사는 제외한다.
제4조: 오위장(五衛將)에는 문관, 무관, 음관의 당상관(堂上官)이 모두 임용될 수 있고, 무관은 우후(虞候 종3품)까지 허용한다.
제7조: 지방 관직은 문무(文武) 당하관(堂下官)에게는 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까지, 문무 당상관에게는 목사(牧使 정3품)까지, 음관 가운데 생원ㆍ진사 출신은 군수(郡守 종4품)까지, 음관으로 생원ㆍ진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자 및 인의(引儀 종6품) 출신은 현령(縣令 종5품)까지 허용한다.
제9조: 지방 향임(鄕任)은 수임(首任)을 제외한 다른 여러 자리는 섞어 쓰는 것을 허용한다.
‘정유년 절목’은 1625년(인조3) 서얼의 문무과 응시 자격 부여, 1633년 문관의 요직 진출 조처 이후 영조 말년까지 150여 년 동안 정부가 시행해 온 각종 서얼 정책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제2조의 문관과 무관의 분관(分館) 및 시천(始薦) 규정, 제3조의 문관ㆍ무관ㆍ음관의 참상(參上) 요직(要職) 범위, 제9조의 향임(鄕任) 통청 규정이 그런 것이었다. 제4조의 오위장(五衛將) 및 우후(虞候) 허통 규정, 제7조의 지방 관직 규정은 이때 와서 새롭게 추가된 조항들이었다.
‘정유년 절목’의 반포에도 불구하고 서얼 정책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중앙 정계에서는 이조와 병조의 관원이 서얼의 관료 등용을 조직적으로 방해했고, 삼사(三司)는 이들의 임용을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막아섰다.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절목이 반포된 지 1년이 지나도록 지방 사족의 완강한 저항 속에 서얼 유생의 향임(鄕任) 임용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778년(정조2) 봄, 하삼도의 서얼이 연합하여 대규모 상소 운동을 전개했다. 이 상소에는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서얼 유생이 동참했다. 이 상소에 서명한 이들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유생으로 3268명이나 되었다.주-D023 이들은 ‘국학(國學)으로부터 향학(鄕學)에 이르기까지 모두 참록(參錄)하여 나이순으로 차례를 정하도록 할 것’, ‘사족 유생과 나란히 유안(儒案)에 이름을 올려 동등한 지위를 얻게 해 줄 것’ 등 두 가지 사안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올린 상소는 승정원의 거부로 정조에게 전달되지 못했다.주-D024
그로부터 4년이 경과한 1782년 6월이 되어서야, 정조는 서얼 유생의 유임(儒任) 및 향임 임용 조처를 다시 한 번 강하게 촉구하고 나섰다. 정조는 이 조처를 경상도에서 가장 먼저 실시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주-D025 경상도야말로 전통적으로 서얼 문제에 관한 한 가장 보수적 입장을 견지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경상도에서 서얼의 향임직이 허용된다면, 그것을 팔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중앙 정계에서도 서얼 통청 실적은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정조는 즉위 이래 6월과 12월 등 1년 두 차례 실시되는 도목 정사를 앞두고 언제나 서얼의 적극적인 등용을 이조와 병조 관원에게 주문하곤 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러한 지시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다.주-D026 국왕의 지시가 번번이 인사 담당 관원에게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1785년(정조9) 1월까지도 이런 암울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의 권위는 형편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조는 즉위 10년째인 1785년 2월부터 문벌 세력들의 견고한 정치적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조는 1785년 2월 6일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을 비롯한 대신들, 2품 이상 재상들을 소집하여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서얼의 관직 임용 문제를 점검하는 회의를 개최했다. 지역 사족인 향족(鄕族)을 포함해서 서얼, 잡류(雜類), 서북인(西北人)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참상직 이상으로 승진시키기 위해서는 이전의 인사 방식을 개선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참상직 운용 시스템은 경화 사족이나 문벌 가문 출신의 관직 후보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개선책으로 제시한 것은 신분이나 지역의 구별 없이 관료의 근무 일수에 따라 차례로 승진시키는 통동주의(通同注擬)주-D027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실제 참하직 관원의 선발과 승진 방식으로 이미 활용되던 것이었다.
이날 정조는 참상직에도 참하직과 마찬가지로 통동주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어떠한지를 고위 관료에게 물었다. 정조의 견해에 찬성한 이는 행 사직(行司直) 정창성(鄭昌聖)뿐이었다. 영의정 서명선을 포함한 나머지 관료는 모두 난색을 표했다. 이들은 서얼의 참상직 임용 문제는 ‘정유년 절목’에 의거하여 실시하면 족하다는 견해를 제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이날 ‘통동주의를 한 뒤에야 서얼을 요직에 기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은 채, 이조 판서 이명식(李命植)에게 인사를 지시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날 정조는 유홍지(柳弘之)를 형조 좌랑에, 유득공(柳得恭)을 군자감 판관에 각각 임명할 수 있었다.주-D028
이 조처 이후 정조의 서얼 임용에 대한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1785년(정조9) 3월 순장(巡將)직도 서얼이 임용될 수 있도록 허가했고, 11월에는 성균관의 참상직도 개방하라고 지시했다.주-D029 순장과 성균관 참상직은 ‘정유년 절목’의 규정에 없는 내용이었다. 1787년 12월 도목 정사에서는 정의 현감 허서(許
)를 거제 부사에 파격적으로 임명하고, 전라 병영의 종2품인 중군(中軍) 자리도 개방하도록 지시했다.주-D030 1789년 1월에는 이조 판서에게 대간(臺諫)을 역임한 서얼 문관을 돈녕부 도정에 임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해 2월 윤밀(尹謐), 오정근(吳正根) 등 두 명의 서얼 문관이 천망(薦望)되었고, 윤밀이 도정에 임명되었다.주-D031 그해 10월에는 교서관에 정3품인 판교(判校)직을 신설했다.주-D032
이 밖에도 정조는 문재(文才)가 있는 서얼 음관을 규장각의 검서관(檢書官)에 임명하는 등, 서얼 문사(文士)의 등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주-D033 그뿐만 아니라 서얼 음관의 허통직 확대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서울의 사송(詞訟) 담당 부서인 종5품 오부(五部)의 영(令)과 종9품 도사(都事)직을 서얼 음관에게 개방한 것이었다. 음관의 참상직 진출을 위한 계제직(階梯職)으로 활용되어 온 영ㆍ도사직의 개방은 서얼 음관도 이제 경화 사족과 더불어 중앙과 지방의 참상직에 임명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조처 또한 1791년 4월 대신들과 회의를 거쳐 최종 확정되었다.주-D034
1791년 5월 정조는 서얼 유생을 포함하는 성균관 유생의 치좌법(齒坐法)을 재추진했다. 1773년(영조49)에 실시한 적이 있던 성균관 치좌법은 정조 즉위 이후 사족 유생의 집단 반발로 철폐되었고 더 이상 복구되지 않았다. 정조는 이것을 복구하려는 계획을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좌의정으로 재직 중이던 채제공(蔡濟恭)이었다. 남인(南人)의 영수로서 경상도 사족의 정서를 꿰뚫고 있던 그는 영조 말년 영조가 추진했던 서얼 정책들을 반대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이 무렵 그는 정조가 탕평 정책의 일환으로 들고 나온 서얼 정책을 거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채제공의 암묵적 동의를 이끌어낸 정조는 바로 비변사(備邊司)에 통고하고, 성균관 치좌법의 거행 사실을 중외에 널리 알릴 것을 지시했다.주-D035
탕평 정치를 넘어 황극 정치(皇極政治)를 실현하려 했던 정조의 의지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정조는 1791년 6월 군문(軍門)의 기사장(騎士將)직을 서얼 무관에게 전격 개방했다. 기사장은 청현직(淸顯職)이 아닐 뿐만 아니라, ‘정유년 절목’에서 개방한 바 있던 오위장보다 낮은 관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주-D036 정조의 서얼 무관 허통 범위는 한층 더 확대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이(李珥)의 서계(庶系)인 무관 이항림(李恒林)의 발탁이었다. 정조는 그를 장용영(壯勇營)과 훈련원(訓鍊院)의 초관(哨官)에 임명하여 재능을 시험한 다음, 1791년 8월 만포 첨사(滿浦僉使)에 임명했다가 그해 11월에는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에 발탁했으며, 1792년 9월에는 충청 병사(忠淸兵使)에 임명했다.주-D037 이로써 서얼 무관도 ‘무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병사와 수사까지 진출할 길이 열리게 되었다.
1792년 이후 탕평 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넘어서 황극 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조의 인재 등용 방식은 더욱 거리낌이 없었고 또 파격적이었다. 그해 11월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재궁(齋宮)인 경모궁(景慕宮)과 국가 제례인 종묘(宗廟) 제사의 제관(祭官)에 서얼 출신 문사를 임명했다.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서이수(徐理修), 이집기(李集箕), 김기남(金箕南), 서유년(徐有年) 등이 그들이다.주-D038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제사인 종묘 제향과 가장 정성을 드렸던 경모궁 제사의 제관에까지 서얼 음관을 대거 발탁한 상황에서, 더 이상 서얼을 가로막을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노론 문벌도 이제 정조가 추진하는 파격적인 서얼 정책에 대해 더 이상 시비 걸기가 어려웠다. 이런 파격은 그가 급서한 1800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
4. 《통색촬요》의 저자와 집필 의도
《통색촬요》는 모두 4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제1권은 도입부로서 조선 초기 서얼의 금고(禁錮) 과정으로부터 숙종대까지 서얼 허통 관련 주요 논의나 정책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책의 사실상의 본론은 제2~4권이다. 제2권은 영조대 서얼 허통 정책들을 정리한 것이고, 제3~4권은 정조대의 정책들을 기록한 것이다. 제4권 말미에 있는 〈칠조문답(七條問答)〉은 서얼의 입장에서 허통의 당위성과 역사적 논거들을 종합한 것으로,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한다.
이 책의 편찬 시기는 정조대였다. 정조의 정책들을 수록한 제3권과 제4권에서, 도입 기사의 연도가 ‘당저(當宁) 정유년(1777, 정조1)’과 ‘당저 신해년(1791)’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796년 7월 7일 이완(李浣)의 봉사손(奉祀孫) 이득형(李得馨)을 선전관으로 천망하는 기사를 끝으로 종결되었다.주-D039 정조는 그 이후에도 4년을 더 재위했고 탕평 정치를 한층 더 강화했다는 점에서,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서얼 관련 정책들이 더 많이 쏟아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정조의 서얼 정책을 꼼꼼하게 정리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었다면, 1796년 7월 이후 1800년 6월까지 4년 동안의 기록들이 실려야만 했다. 그렇지만 정조 말년 4년의 기록은 모두 생략된 채, 1801년(순조1)과 1804년의 단편 기록들이 책의 말미를 장식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이 책이 두 차례에 걸쳐 집필되었음을 의미한다. 1차 집필이 완료된 시점은 1796년 7월 이후였고, 2차 집필의 완료 시점은 1804년 11월 이후였다. 그렇지만 이 책은 1차 집필에서 대체로 마무리되었고, 2차 집필에서는 순조 초반 서얼 정책 관련 3개의 기사만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책은 저자들과 관련된 아무런 정보도 알려 주고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하여 각 권의 기록들을 참고한 자료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1권은 주로 서얼 금고 및 허통을 논의했던 다양한 기록들을 개인 문집이나 《국조보감(國朝寶鑑)》 같은 정부 문적에서 추출하여 수록하였다. 제1권에서 참고한 문헌들은 《춘관지(春官志)》(1744), 《문헌비고(文獻備考》(1770), 《보감별고(寶鑑別考)》,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같은 관찬 자료,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이이(李珥)의 《율곡집(栗谷集)》, 성혼(成渾)의 《우계집(牛溪集)》, 조헌(趙憲)의 《중봉집(重峯集)》ㆍ《조야문록(朝野聞錄)》,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 박세채(朴世采)의 《계고록(稽古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ㆍ《감은록(感恩錄)》, ‘남극정(南極井)의 상소’ 같은 개인 문집이나 야사류이다. 따라서 제1권은 서얼 허통 관련 논의를 주도했던 명사들의 기록이나 영조대ㆍ정조대에 편찬된 주요 관찬 자료들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조대 서얼 정책을 수록한 제2권은 대부분 《승정원일기》에서 자료를 추출했다는 점에서 참고 자료의 성격이 제1권과는 아주 다르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소과(小科)에서 서얼 출신 유생에게 생원 3등, 진사 6등으로 성적을 매기는 ‘생삼(生三)ㆍ진육(進六)’ 관행을 소개한 1747년(영조23)의 기사이다. 이 기사는 《문헌비고》에서 추출했다. 그런 점에서 제2권은 《승정원일기》를 자유자재로 접근할 수 있었던 서얼 출신 문관(文官)이나 문사(文士)가 작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원칙은 정조대 서얼 정책의 추이를 기록한 제3권과 제4권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시험 대책문(對策文)을 모아 놓은 《임헌공령(臨軒功令)》에서 추출한 1784년(정조8) 4월 초계 문신(抄啓文臣) 김희조(金熙朝)의 시권(試券), 서얼 무관을 중군(中軍)에 임용한 내용이 실린 1788년 1월 1일자 조보(朝報) 정도가 예외였을 뿐이다.
제4권은 정조 즉위 이래 그가 양성했던 서얼 출신 문관이나 문사가 남긴 다수의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1791년 정조가 100세 노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신의청(申義淸)을 만나 본 뒤에 감흥을 적은 서문(序文)을 규장각 검서(奎章閣檢書) 이공무(李功懋)를 통해 전달한 사실, 1792년 규장각 각신(閣臣)과 검서관(檢書官), 그리고 초계 문신을 대상으로 실시한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성대중(成大中)의 〈감은문(感恩文)〉, 오정근(吳正根)의 〈감은문〉, 박제가(朴齊家)의 〈송건문(訟愆文)〉이 기록된 사실 등이 그런 것들이다. 문과 출신 성대중과 오정근, 검서관 박제가 등은 뛰어난 문장으로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고, 또 그러한 재능을 인정받아 1793년(정조17) 이후 북청 부사, 보령 현감, 부여 현감 같은 지방 관직을 각각 역임했다.
서얼 문사의 3편의 ‘감은문’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은 이 책의 저자와 관련하여 중대한 시사점을 던져 준다. 이들 이외에도 검서관 출신 유득공, 이덕무는 1789년 6월 이가환(李家煥)과 이서구(李書九)가 주도한 《해동읍지(海東邑誌)》의 편찬 작업에 참여한 바 있다. 그리고 경모궁(景慕宮)의 동지 제향(冬至祭享)의 제관(祭官)에 임명된 서이수(徐理修), 이집기(李集箕), 김기남(金箕南), 서유년(徐有年) 등 검서관들도 주목되는 인물들이다. 당시 정조가 추진했던 중요 관찬 사업에 참여하고, 중요한 국가 제례의 제관으로 차출되었으며, 또 각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이들이야말로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각종 정부 기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던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정조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던 이들은 성대중, 오정근,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 혹은 여러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오정근과 이덕무는 1796년 이전에 이미 사망했으므로 이 책의 저자는 성대중, 박제가, 유득공 등 세 사람으로 모아진다. 물론 서이수 등도 넓은 범위의 후보군들이다.
이 책을 단독 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누군가가 편찬 작업을 주도하면서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또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여 수합된 자료들을 교정하는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 작업이 이러했음을 보여 주는 사례가 제1권의 말미에, 박세채(朴世采)가 주강(晝講)에서 서얼 허통을 주장하는 기사이다. 이 기사의 끝에 “이 아래에는 응당 〈진계고록차(進稽古錄箚)〉가 있어야 한다.”라고 부기(附記)하고 있다. 결론을 대신하여 이 책의 끝 부분에 수록해 둔 〈칠조문답(七條問答)〉 또한 수정의 흔적이 보인다. 〈칠조문답〉에는 서얼 허통의 당위성 관련 7개 조항을 수록한 문답 이외에도 2개 조항이 추가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1796년(정조20) 이후 언젠가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서얼 출신 문관 성대중이나 규장각 검서관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이집기, 김기남, 서유년 가운데 누군가가 단독 혹은 공동으로 집필을 시작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교정에 참여한 공동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정조 20년 7월 이후의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미완성본이다. 공동 집필자들은 1796년 7월 이후 어느 시점에서 정조대 서얼 정책의 전말을 보여 주는 책자를 편찬하기 위해 초고를 만들었을 것이다. 이들은 아마도 정조 사후 최종본을 완성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저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후 정치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1800년 6월 30일 정조가 급서(急逝)하면서 노론벽파(老論僻派) 정권이 들어섰고, 최대 정적이었던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金氏)가 수렴청정을 개시했기 때문이다.
노론벽파 정권의 출범 이후 정조가 총애했던 서얼 출신 문관이나 검서관은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언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암담한 처지로 내몰렸다. 극도로 불투명했던 그들의 운명은 1804년(순조4) 순조(純祖)의 친정(親政)과 더불어 비로소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노론벽파 정권이 주도했던 공포 정치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저자들은 이후 미완으로 남아 있던 이 책을 어떤 형태로든 완성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정부의 각종 자료들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정조 말년의 서얼 정책 관련 기사들이 모두 누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정조 사후에도 서얼 정책이 지속되어 그들과 같은 서얼의 억울함이 다소나마 풀리고, 또 재능을 인정받을 수 있기를 염원했다. 이러한 그들의 희망의 흔적을 1801년 1월 이조 판서 윤행임(尹行恁)의 서얼 허통 건의, 1804년 11월 좌의정 서매수(徐邁修)의 문벌 출신 서얼에 대한 제한적 관직 허통 조처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1804년의 기록을 끝으로 종결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여전히 미완성본으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책의 말미에 발문(跋文)이 생략된 채, 신만(申曼)이 스승 송시열(宋時烈)에게 서얼 허통 정책을 조정에 건의해 달라고 부탁하는 편지, 유형원(柳馨遠)의 서족숙(庶族叔)으로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역임한 유무(柳懋)에 대한 단편적 기록이 추가된 채 말미를 장식한 것도 1804년 이후 언젠가 이 책을 마무리하려 했던 공동 집필자들의 다급했던 사정을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전해 준다.
결국 이 책은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한 서얼 출신 문관과 문사가 찬란했던 그들의 성세기에, 그들을 사랑했던 성군(聖君)의 치적을 그들의 시각에서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조 사후 영ㆍ정조 치적이 점차 잊혀 가고 외척 벌열 세력에 의한 세도정치가 전개되었듯이, 그들도 이제 문벌 세력에 의해 또다시 금고되고 폐색된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통색촬요》는 영조대ㆍ정조대의 찬란했던 기억과 19세기 초반 비참한 처지가 착종된 서얼 출신 문사들의 피눈물 어린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주-D001] : 18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를 경화 사족(京華士族)과 노론(老論)을 공통분모로 하는 문벌사회(門閥社會)로 이해한 연구가 있다. 《김성우, 조선시대 사회구조의 변화와 농암 유수원의 신분제 개혁론, 농암 유수원 연구, 사람의 무늬, 2014》[주-D002] : 조선 후기 서얼 관련 중요 연구서는 다음과 같다. 《배재홍, 조선후기의 서얼 허통, 경북사학10, 1987》 《배재홍,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 서얼의 존재 양태와 鄕戰, 경북사학15, 1992》 《배재홍, 조선후기 서얼 과거합격자의 성분과 官歷, 조선사연구2, 1993》 《이종일, 조선후기 양반서얼의 통청 운동, 한국사34, 국사편찬위원회, 1995》 《이수환, 18~19세기 경주 玉山書院 院任職 소통을 둘러싼 嫡庶 간의 鄕戰, 조선후기 서원 연구, 일조각, 2001》[주-D003] : 《通塞撮要》 卷1, 仁祖3年乙丑 命大臣及二品以上議庶孼許通 因玉堂箚子也; 同年 9月14日 副提學崔鳴吉與同僚……等聯名上疏; 同年 11月 上命招大臣二品以上于賓廳 議庶孼許通事 令廟堂酌定.[주-D004] : 《通塞撮要》 卷1, 仁祖癸酉 吏曹判書崔鳴吉啓曰; 同年 月政.[주-D005] : 《通塞撮要》 卷1, 肅廟丙辰 大司憲李袤上疏.[주-D006] : 《通塞撮要》 卷1, 肅廟乙亥, 嶺南生員南極井等上疏; 同年 進士柳日祥等上疏.[주-D007] : 《通塞撮要》 卷1, 肅廟丙子 7月 崔錫鼎上箚.[주-D008] : 《배재홍, 조선후기의 서얼 허통, 127~130쪽》[주-D009] : 《通塞撮要》 卷2, 英宗登極甲辰 12月 17日 儒生鄭震僑等上疏.[주-D010] : 《通塞撮要》 卷2, 英宗丙辰 5月 晝講入侍時; 己未 5月 10日 春塘臺親臨別試才時.[주-D011] : 《通塞撮要》 卷2, 英宗二十三年 副司直李秀得上疏.[주-D012] : 《通塞撮要》 卷2, 英宗壬辰 8月 15日 還宮後傳曰.[주-D013] : 《通塞撮要》 卷2, 英宗壬辰 8月 16日 傳曰; 同日 又下敎; 同年 9月 9日 綸音.[주-D014] : 《通塞撮要》 卷2, 英宗壬辰 12月 27日 嶺儒進士全性天等上疏; 同日 嶺儒持封章入侍 命嶺儒及承旨爲入侍.[주-D015] : 《通塞撮要》 卷2, 癸巳 正月 26日 嶺儒黃景憲等再疏.[주-D016] : 《通塞撮要》 卷2, 癸巳 正月 27日 備忘記.[주-D017] : 《通塞撮要》 卷2, 癸巳 正月 27日 太學儒生入侍殿座時.[주-D018] : 《通塞撮要》 卷2, 癸巳 2月 釋菜前三日.[주-D019] : 《通塞撮要》 卷2, 甲午 4月 17日 時原任大臣備堂三司入侍時.[주-D020] : 이 무렵 新案과 舊案이 合錄된 대표적인 지역으로 경상도의 상주ㆍ거창, 충청도 청주, 강원도 강릉 등이 있었다. 《배재홍, 조선후기 향촌사회에서 庶孼의 존재 양태와 鄕戰, 경북사학15, 48~50쪽》[주-D021] : 《通塞撮要》 卷2, 甲午 6月 18日 慶尙道慶州儒生 李希謙上疏.[주-D022] : 《通塞撮要》 卷3, 正祖 丁酉 3月 丁酉節目.[주-D023] : 《通塞撮要》 卷3, 戊戌春 三南儒生李之忠等上疏.[주-D024] : 《通塞撮要》 卷3, 戊戌春 三南儒生李之忠等上疏.[주-D025] : 《通塞撮要》 卷3, 壬寅 6月 10日 大臣備局堂上入侍時.[주-D026] : 《通塞撮要》卷3, 庚子 12月 20日 都政時; 辛丑 6月 22日 親政時; 癸卯 正月 5日 朝參入侍時; 同年 6月 24日 親政時; 甲辰 6月 29日 傳曰.[주-D027] : 《通塞撮要》 卷3, 乙巳 2月 17日 次對入侍時 傳曰.[주-D028] : 《通塞撮要》 卷3, 乙巳 2月 17日 次對入侍時 傳曰.[주-D029] : 《通塞撮要》 卷3, 乙巳 3月 6日 摛文院齋宿入侍時; 同年 11月 26日 以刑曹正郎鄭良翰望筒 傳曰.[주-D030] : 《通塞撮要》 卷3, 丁未 12月 29日 大臣備局堂上入侍時.[주-D031] : 《通塞撮要》 卷3, 己酉 正月 22日 傳曰.[주-D032] : 《通塞撮要》 卷3, 己酉 正月 22日 前 3日 傳曰.[주-D033] : 《通塞撮要》 卷3, 己酉 6月 18日 傳曰.[주-D034] : 《通塞撮要》 卷4, 辛亥 4月 9日 吏曹啓曰.[주-D035] : 《通塞撮要》 卷4, 辛亥 5月 8日 時原任大臣入侍時 左議政蔡濟恭所啓.[주-D036] : 《通塞撮要》 卷4, 辛亥 6月 4日 右承旨(李晩秀)入侍時.[주-D037] : 《通塞撮要》 卷4, 辛亥 8月 13日 傳曰; 同年 11月 24日 政事; 壬子 9月 2日 政事.[주-D038] : 《通塞撮要》 卷4, 壬子 11月 8日 親行冬至享祭于景慕宮 申飭銓部.[주-D039] : 《通塞撮要》 卷4, 丙辰 7月 22日 禮曹判書閔鍾顯入侍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