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술 이야기5 : 맛없는 물, 맛있는 물

[이윤배]

물과 술 이야기5 : 맛없는 물, 맛있는 물

노성열 前 문화일보 부장(과학 선임기자)

ⓒ픽사베이

오늘은 맛있는 물, 즉 술의 세계 탐험 시리즈 마지막 편입니다. 그동안 가장 보편적인 주종인 맥주와 포도주에 이어 지난번에 증류주, ‘스피릿(spirit)’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우선 주니퍼 열매로 만든 진과 폴란드·러시아산 보드카를 공부해봤죠. 오늘은 위스키, 테킬라, 압생트, 럼, 브랜디 같은 나머지 다양한 증류주를 차례로 살펴봅시다.

‘생명의 물’에서 유래, 3년 숙성해야 명칭 붙일 수 있어

위스키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자랑하는 세계적 술이지요. 스카치(Scotch) 위스키와 아이리쉬(Irish) 위스키가 가장 유명하고 대중적으로 많이 보급됐지만 미국의 버번(bourbon), 캐나다의 캐나디안(Canadian) 위스키처럼 다른 지역에서도 훌륭한 위스키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주류회사 산토리도 세계 위스키 대회에서 상을 받은 상급품 위스키의 제조 솜씨를 뽐낸 바 있습니다.

위스키는 게일(옛 아일랜드) 언어로 ‘생명의 물’을 뜻하는 ‘우스게 바하(uisge beatha)’란 말에서 유래된 명칭이라는 게 통설입니다. 12세기 수도승들에 의해 처음 제조돼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전파됐다는 겁니다. 오리지널 위스키는 맥주의 원료인 맥아를 발효시켜 여러 차례 증류시킨 후 오크통에 담아 숙성시키는 방법으로 만듭니다. 미국은 주재료인 옥수수와 밀, 호밀을 배합한 주정(酒精)을 사용하죠. 바로 이 주정의 차이가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의 차이를 만듭니다.

몰트(malt)는 맥아를 의미하는 단어로, 싱글 몰트 위스키는 단일 증류소의 원액만을 사용해 만든 위스키입니다. 물, 보리, 효모의 3개 재료만 써서 가장 순수한 맛을 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맥아를 건조시킬 때 이탄(泥炭, peat)과 해탄(海炭, cokes)을 태워 그 열과 연기가 배어들게 되므로 특유의 석탄 냄새 같은 향(smokey)이 납니다. 그레인 위스키는 옥수수·밀·호밀 등 다른 곡물을 주정으로 써서 만든 위스키입니다. 몰트 위스키와 그레인 위스키를 마스터가 적정 비율로 섞은 혼합(blended) 위스키는 스카치 위스키의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가격을 낮추고 맛도 복잡하게 만들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하네요. 오크통에서 최소 3년 이상 숙성시켜야 위스키란 명칭을 붙일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연중 저온의 자연환경 덕분에 숙성 과정에서 자연 건조로 증발돼 사라지는 ‘천사의 몫(angel’s share)’이 가장 적어 유리하다고 합니다.

남미를 대표하는 정열의 술, 과거엔 병에 애벌레 넣어 마시기도

위스키가 유럽을 대표하는 독주라면, 테킬라는 남미의 선두 주자입니다. 테킬라는 아가베(용설란)를 주원료로 한 멕시코의 전통 증류주입니다. 테킬라는 멕시코의 대도시 과달라하라 북서쪽 마을 이름이라고 하네요. 16세기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미에 들이닥치기 전부터 전통적인 아가베 술이 있었으며, 이를 증류해 현대식 스피릿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테킬라는 화끈한 정열의 술로 알려져 숙취로 악명이 높죠. 하지만 과음에 고통이 따르는 것은 모든 술이 마찬가지이니 누명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남미를 대표하는 술 ‘테킬라’ ⓒ픽사베이

테킬라가 위스키나 브랜디에 비해 저급한 술로 인식된 것은 제국주의 시절의 편견이라 하겠습니다. 테킬라의 사촌 격인 메즈칼은 같은 용설란 술이지만 좀 더 향토색이 짙은 스피릿입니다. 가끔 병 속에서 발견되는 벌레는 아가베에 기생하는 바구미 또는 나방의 애벌레입니다. 그냥 눈에 띄기 위해 마케팅용으로 넣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특별히 해롭진 않지만 이로 인해 메즈칼이나 테킬라 음주를 꺼리는 이도 많죠. 현대 테킬라위원회는 애벌레, 전갈 등을 병입(甁入)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병 안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 술이 있죠. 강한 생명력을 지닌 동물을 알코올 속에 숙성시켜 그 힘을 빌리고자 하는 욕망은 만국 공통인 것 같습니다

화가와 작가들이 즐겨 마시던 ‘초록요정’

압생트는 프랑스인들이 ‘초록요정’이라고 부르는 유럽산 증류주입니다. 약쑥의 라틴어 학명(學名)인 아르테미시아 앱신튬에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우리에겐 별로 익숙지 않지만 고흐, 랭보 등 화가와 작가들이 즐겨 마시던 독주라고 합니다. 알코올 함량이 무려 70%에 달하는 데다, 주재료인 쑥의 쌉싸름한 향기 때문에 접근하기 좀 어려운 주종입니다.

압생트는 약쑥, 영어로 ‘그랜드 웜우드(grand wormwood)’로 불리는 약초가 향정신성 화합물 ‘튜존’을 함유하고 있어 예술적 영감과 창의성을 북돋아준다는 믿음 때문에 더 유명해졌습니다. 하지만 너무 독해서 범죄 등 사회문제를 초래한다는 비판으로 인해 한동안 금주령의 철퇴를 맞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지나친 보드카 음주가 국민 건강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죠. 프랑스로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이 초록색 독주를 작은 잔으로 음미하며 고흐의 기분을 느껴보는 정도로 즐기면 되겠습니다.

선원들의 술 ‘럼’, 불에 태운 와인 ‘브랜디’

럼은 쿠바 등 카리브해 섬나라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래한 스피릿입니다. 사탕수수의 당밀이나 즙을 주원료로 해 달콤하지만 도수는 높은 독주입니다. 해군과 해적 등 선원들의 술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럼은 오크통에 담겨 숙성되는 기간에 따라 화이트에서 골든으로 가는 백색, 황색의 시기를 거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상표인 ‘바카디 럼’도 화이트에서 골드, 블랙까지 숙성도에 따라 색깔이 다양합니다.

포도와 다른 과일을 증류한 브랜디에 대해서도 알아봅시다. 네덜란드어 ‘불에 태운 와인(브란데바인)’에서 명칭이 유래한 데서 알 수 있듯, 와인을 배로 교역할 때 양을 줄이기 위해 증류하기 시작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브랜디는 포도주를 비롯한 과일주의 증류식 스피릿이라고 알면 되겠습니다. 프랑스 브랜디의 지존 코냑과 아르마냑은 특정 지역의 이름입니다. 샴페인이 프랑스 상파뉴 지역에서 나는 스파클링 와인만 따로 부르는 명칭인 것처럼요. 그 생산지의 토양과 기후, 포도나무 같은 종합적 지력(地力)을 일컫는 ‘테루아(terroir)’가 바로 차별성의 포인트입니다. 이들 말고도 노르망디 지방의 칼바도스 같은 사과 주정 브랜디, 독일의 체리 베이스 브랜디 키르쉬도 있습니다.

증류주의 한 종류인 ‘럼’ ⓒ픽사베이

세계의 다양한 전통 스피릿들, 약이 될 만큼만 활용해야

마지막으로 소규모 지역에서만 선호되는 전통 스피릿도 있습니다. 중국의 백주(白酒, 빼갈)나 일본의 쇼츄(燒酒)는 그 나라에서 사랑받는 독주입니다. 한국인의 국민 술인 소주도 한류 붐을 타고 국내뿐 아니라 해외로 조금씩 보급되고 있습니다. 소주 중에서도 화학적 제조방식이 아니라 전통 주정을 사용한 안동소주, 홍주, 소곡주 같은 향토 소주가 더 다양하게 유통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북유럽의 노르웨이에는 감자와 밀, 호밀 등을 재료로 한 아쿠아비트가 있죠. 모든 나라는 자기 풍토에 맞는 신토불이 스피릿을 갖고 있습니다.

효모가 발효시킨 천연 술의 알코올을 강화한 스피릿은 천사와 악마의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 독하기 때문에 쉽게 취하고 위나 장에도 부담을 줍니다. 하지만 약한 발효주든 독한 증류주든 약이 될 만큼만 활용하는 게 현자의 지혜겠지요.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물,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가장 무서운 물인 술에 관한 문화사적 배경과 과학에 기반한 고찰을 다섯 번으로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글부터는 가장 달콤한 먹거리, 디저트의 과학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공부해보겠습니다. 쓴맛의 술과 단맛의 디저트를 모두 알게 되면 인생 공부를 다 한 셈이 되겠군요.

※ 이 원고는 월간 <과학과기술> 6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