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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스크랩 우린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
여왕벌(2학년정선례) 추천 0 조회 95 06.04.06 00:5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우린 왜 '최승희의 홍천'을 찾아야 하는가

함광복(전,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


 쥐손이풀 무덤의 전설

  들녘 양지쪽에 나는 여러해살이 들풀, 쥐손이풀은 배탈을 낫 게 한다고 '이질풀'이라고도 부른다.  옴, 악창, 하루 종일 논에 매달려 사는 농민들의 직업병인 발가락 물쿰에도 잘 듣는다 한방에서는 두루 약이 되는 그 풀을 현초(玄草)라고도 한다. 쥐손이풀은 제 몸무게를 못 이겨 누워서 사는 풀이다. 조신하게 몸을 낮춘 줄기에서 6~8월 작디작은 꽃을 피운다. '새색시'라는 꽃말을 가진 연분홍 꽃이다.

  홍천군 남면 제곡리 초입 '자터'를 자대(紫垈)라고 부른다. 그 옛날 자(紫)씨 성을 가진 중국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6.25 전쟁 전, 그 자터를 바라보며 무덤 하나가 산기슭에 앉아 있었다.

  그 무덤가에 여름이면 '새색시 꽃'을 피우는 쥐손이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전쟁 통에 미군이 산기슭을 밀어내며 길을 냈다. 무덤 위로 신작로가 났다. 무덤이 사라진 후 쥐손이풀도 사라졌다. 쥐손이풀 무덤을 아는 이들도 사라졌다. 단 한 사람 변병덕씨(邊炳德  · 75  · 홍천군 남면 제곡리)가 그 무덤에 대한 또렷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는 제곡리에서 태어나 4년제 용수간이학교를 졸업하고, 6년제 명덕보통학교에서 마저 학교를 마쳤다. 6.25 전쟁 때는 산에서 피신하면서도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평생 제곡리를 떠나 살지 않았다. 어려서 발새가 물커지는 병으로 고생을 했다. 부친은 쥐손이풀이 약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자터에 홍천 원의 소실(小室)의 묘가 있었다. 그 무덤가에 쥐손이풀이 많이 자랐다. 소년은 어른들로부터 소실의 외손녀에 대한 자자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소실의 딸이 해주최씨네 집으로 시집가 낳은 딸 하나가 춤꾼이 되어 일본 중국까지 이름을 날린다는 것이다.

  무덤 속의 그가 외손녀의 그런 명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름 무덤가엔 쥐손이풀만 '새색시 꽃'을 가득 피우고 있었다.

  최승희의 어머니 밀양 박씨는 박성녀 또는 박용경이라고 기록되어있다. 변씨의 쥐손이풀 무덤의 전설대로라면, 최승희의 부친 최준현은 밀양 박씨 성을 가진 홍천 원을 아버지로 둔 여인과 혼인 한 것이다. 그 무덤 자리는 해주 최씨 문중 소유다.

  음택 명당은 아니지만, 밖으로 내가 흐르는 양지바른 산 뿌리 끝이다. 따라서 최승희의 외조모는 사위 최준현에 의해  최씨 문중 산에 거둬졌을 가능성이 있다. 무려 100년도 넘는 옛일이다. 90여 년 전쯤 최준현은 서울로 솔가했다. 무덤은 돌보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최승희는 해방 이듬해 월북했다. 제곡리는 흉흉한 소문 속에서 6.25를 맞았다. 미군 불도저가 삽날을 들이 냈더라도 감히 빨갱이의 외조모 무덤 앞을 가로막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자 제곡리 해주최씨 집안은 서슬 퍼런 연좌제가 엄습했다. 쥐손이풀 무덤의 내력은 그렇게 시나브로 전설이 됐을 것이다. 

  "그동안 누구에게 발설할 수 없어서 가슴 속에 묻어 두었는데, 이젠 믿거나 말거나 전설의 고향이 되고 말았습니다."

  2006년 2월 22일, 비로소 쥐손이풀 무덤의 전설을 털어 놓던 변씨는 그렇게 말했다.

  홍천 원의 소실이었다는 최승희의 외조모는 관기(官妓)였을까. 한때 가무를 뽐냈을 그는 딸의 시댁붙이 이름 모를 산기슭에 외롭게 묻혔다. 쥐손이풀이 동무가 돼주던 그 쓸쓸한 무덤을 미군의 불도저가 흔적도 없이 밀고 가버렸다.

  사라진 그 무덤이 고향에서조차 잊혀 진 최승희의 모습 같다. 최승희가 제곡리에서 태어났다는 그 엄연한 사실이 또 하나 쥐손이풀 무덤의 전설이 될 찰나다.


홍천은 '韓流'의 발상지

  제곡리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양덕리에서 시동천을 따라 산 태극 수 태극의 구비를 돌아 20여리 골짜기에 숨어있는 마을이다. 용수를 지나면 홍천강 아우라지 나루다. 홍천강은 소매곡, 도사곡, 굴지, 남노일, 북노일, 어유포, 팔봉, 반곡, 개야, 도리소, 모곡, 마곡 등의 강마을들을 만들고, 북한강을 만난다. 그 옛날 그 강마을에는 청평과 홍천을 잇는 뱃길이 있었다. 아우라지 나루는 이들 강마을들을 내륙으로 소통시키는 길목인 셈이다. 따라서 발(足)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시대엔 제곡리는 벽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서울바람이 먼저 불던 곳이다. 그 '서울 바람'의 길목이어서 최승희는 첩첩산중을 훌훌 벗어나 지구 끝까지 날아갈 수 있는 행운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6년 현재 그가 태어난 1911년은 무려 95년의 한 세기 전 이야기다. 태어나서 불과 짧게는 5~6년, 길면 7~8년, 한 없이 날기만 하다가 곤두박질 한 그의 인생에 먼지처럼 묻어있을 그의 어린 시절을 찾아낸다는 것은 이미 세월이 너무 흘렀다. 그러나 '95년 전 해주최씨 집안에서 한 계집아이가 태어나던 제곡리 그 사건을 홍천에서 찾아놓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첫째, 그의 '서거'가 밝혀진 이상, 그의 '탄생'도 밝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2003년 2월, 북한 조선중앙TV는 최승희가 문인 한설야, 시인 박세영 등과 함께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됐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묘비엔 '1911년 11월 24일 생, 1969년 8월 8일 서거'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탈북자들의 증언과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그는 평남 북창 18호 수용소에서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 고향에 홍천강이 흐르듯이 그곳에도 대동강 상류가 흐른다. 홍천강가 장락산맥 팔봉산처럼 그 강가에도 장안산맥 팔봉산이 있다. 그는 그 강기슭 공동묘지에 34년 동안 묻혀 있다가 평양 대동강가로 이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이 밝혀졌는데도 정작 남쪽에서는 그의 출생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최승희도 만년엔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곳이 어딘지 몰랐다면 알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에게 고향을 가리켜 줘야 한다.

  둘째, 최승희는 지금 그의 가계에서조차 잊혀 진다는 절박감 때문이다. 북으로 간 최승희 가계는 몰락했다. 숙청돼 철도노동자로 전전하던 안막은 최승희보다 먼저 생을 마감했다. 그의 딸 안성희와 김일성대 공과대 교수이던 남편, 아들 안병권도 의문의 사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성희의 딸이 유일한 생존혈육이다. 평양음악대학 교원이던 그는 지방근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외손녀가 외조모의 출생지를 찾는다는 것은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제곡리의 최승희 가계에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이미 없다. 그동안 고향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이데올로기의 공갈에 주눅들어 있었다. 친인척들도 그에 대해 오랜 세월 입을 다물고 있다가 모두 저세상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최승희의 5촌 조카 최경희씨(崔敬姬)가 그를 기억하는 유일한 혈육이다. 그러나 최씨는 제곡리를 떠나 정선, 영월, 강릉을 전전하다가 이젠 88세의 고령의 몸을 서울 암사동 489-56번지에서 막내딸에 의지하고 있다. 맏사위 김평재씨(홍천 매산초등학교장)는 최근 장모의 우울한 근황을 고향에 전해왔다. 최씨는 최근 맏아들 권오상에 이어 둘째 아들 권오인을 잃었다.

  그 충격 때문인지 그는 가계사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천군 남면 일대 몇몇 촌로들은 최승희를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최승희는 제곡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전언일 뿐이다. 제곡리에는 최승희의 고향이 제곡리라고 믿는 30~40대도 적지 않다. 그러나 1989년 이래 꾸준히 시도된 '최승희 고향 찾기'가 유행병처럼 퍼뜨린 한낱 전설일 뿐이다.

  셋째, 무엇보다 최승희의 예술세계와 재회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2005년 10월, 무용연출가 김휘광은 그를 '한류(韓流)의 원조'라고 평가했다. 일본, 중국, 몽골 그리고 구라파와 남미까지 '조선의 춤'을 알린 그의 20세기 한류는 21세기 한류보다 훨씬 폭이 크고 깊었다. 중국의 다민족 춤을 체계화 했고, 일본의 현대무용에 최승희 춤이 흐르게 했다. 이는 한류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 갈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남쪽도 북쪽도 모두 최승희를 한 시대를 풍미하다 간 비운의 스타로 남겨놓고 있다. 미처 최승희 춤의 지지 않는 생명력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11년 11월 24일 최승희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에서 탄생했다는 그 사실을 밝혀놓는 것이 어쩌면 최승희가 개척해 완성한 한류부활의 동기가 될지 모른다. 그 첫 걸음을 그가 태어난 홍천에서 내딛고 싶다는 것이다. 



최승희는 홍천에서 태어났다

홍천의 맥(脈)의 3줄짜리 증언

  발단은 50쪽 짜리 작은 책 한 권이다. 1982년 7월 20일 홍천군은 '내 고장 전통 가꾸기'의 일환으로 '홍천의 맥(脈)'을 발행했다. 26쪽 '내 고장을 빛낸 사람들'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무용가 崔承喜 : 우리나라 현대고전무용의 대가인 최승희는 김백봉 여사의 스승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8.15 후에는 이북에서 활동하다 생존여부를 모른다. 남면이 고향이었으나 6.25 후 그 친척들이 모두 피신 후손은 찾아 볼 수 없다」

1년 전, 제5공화국이 출범했다. 당시 신생 군부 공화국의 대북 시각을 더 경직되게 한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1980년 3월, 한강입구 3인조 무장간첩 침투 사건을 필두로 1981년 6월 충남 서산 무장간섭선 격침 사건, 1982년 4월 중동부 전선 경계초소 교전 그리고 1983년 6월에는 문산천 침투간첩 사건, 8월 월성해안 무장간첩 침투 사건 그리고 10월 9일 아옹산 폭탄테러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북으로 간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다. 더구나 북으로 간 그를 남쪽에선 아직 용서하지 않고 있었다. 1946년 7월 20일 밤, 한강 마포나루에서 8톤짜리 발동선이 하류를 향해 빠져나갔다.

  안막 최승희 부부, 안제승 김백봉 부부, 김시학, 이원조 등 6명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북으로 갔을 때 김일성의 첫 질문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아니면 다니러 왔소?"였다.

  그때 최승희는 "살러왔어요."라고 대답했다고 알려졌다. 그 흉흉한 소문은 홍천사람들도 듣고 있었다. 그런데도 홍천 사람들은 「남면이 고향이었으나 6·25 후 그 친척들이 모두 피신 후손은 찾아 볼 수 없다」고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된 그를 내 이웃집 사람이라고 드러내놓고 있다. 더구나 '내 고장을 빛낸 사람' 이라고 추겨 세웠다. 그건 사실을 기록하겠다는 용기가 없으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최승희가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상식이 되다시피 됐다.

 「1911년 11월 24일에 경성에서 아버지 최준현씨와 어머니 박성녀씨(박용경이라고도 함)사이의 사형제의 막내딸로 태어난 최승희는」 최승희의 출생과 관련된 모든 문건은 대게 그렇게 시작됐다. 오빠 최승오가 대필한 것으로 알려진 '최승희 자서전'에서도 그는 자신을 '서울의 몰락한 양반집 자제'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의 최승희 연구가 이애순(연변대 예술대학 무용학과)은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했다. 

 「1911년 11월 24일 최승희는 윗대 선조가 정승판서를 지낸 조선반도 서울의 해주 최씨 명문가정에서 출생하였다. 최승희의 아버지 최준현은 고종조에 진사에 합격했으며 해주 최참봉으로 통했고 성격이 호방하고 한시에 능했으며 소리나 춤에도 취미가 있어 시인 묵객들과 자주 교류하는 이른바 봉건시대의 풍류시인이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대단히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아들이나 딸이나 할 것 없이 신식교육을 받게 했다.」

 그러나 '홍천의 맥(脈')은 그 상식을 정정하고 있다. 서울의 양반집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강원도 두메산골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이 사실이라면 최승희의 출생과 관련돼 알려져 있는 모든 것은 왜곡된 것이다. 무엇이 진실을 비틀어 놓았을까. '홍천의 맥(脈)'은 그 이유를 「6.25 후 그 친척들이 모두 피신해 후손은 찾아 볼 수 없다」란 말로 설명하고 있다. '최승희는 홍천사람'이란 확신이 없다면 무모하게 상식을 정정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월간太白'에 입을 연 친척들

  무엇이 그 친척들을 피신하게 했을까. 혹은 입을 다물게 했을까. '홍천의 맥(脈)'의 단 3줄짜리 최승희 증언은 최승희를 쫓는 사람들에게 무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1989년 드디어 '홍천의 맥(脈)'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이 함광복(咸光福  당시 강원일보 사회부장)에 의해 발굴됐다. 제곡리에는 최승희의 조카딸 최경희씨(崔敬姬)가 살고 있었다. 최승희 가계의 장손, 촌수로 손자 벌인 최재경씨(崔在慶)와 그의 어머니 심정순씨(沈貞順)도 살고 있었다. '홍천의 맥(脈)'의 증언처럼 '6.25 후 그 친척들이 모두 피신해 후손을 찾아 볼 수 없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들이 입을 열었다. 최승희는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 244번지(?)'에서 태어났으며, 부친 최준현(崔俊鉉)이 조카 최승삼(崔承三)을 따라 서울로 솔가할 때 제곡리를 떠났다. 빠르면5~6살, 늦으면 7~8살 때다.

  최승희가 작은 항아리를 이고 뱅글뱅글 춤을 추었다는 옻나무재 우물터가 제곡리에 남아있었으며, 친척들의 가슴에는 부친 최준현이 일본서 이름을 날리는 딸 자랑 모습이 남아있었다. 1989년 4월호 '월간太白'(강원일보 발행)이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북으로 간 최승희(崔承喜). 해방전 우리나라 신무용사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출생지는 의외로 홍천군 남면 제곡리(諸谷里)로 밝혀졌다.

  월북 예술인 최승희는 최근 북한을 방문했던 재미교표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녀의 화려한 예로(藝路)에 묻혀 사망사실 조차 밝혀지기 어려웠던 것처럼 그의 출생지는 거론되지 않았다.

   최승희에 대한 기록은 그녀의 출생지를 서울로 적어놓고 있다. 최승희를 좀 더 가깝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경기도 안성이나 문산 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제곡리에는 그녀의 유년시절이 탈색된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그녀가 태어난 40 칸짜리 ''자 집터와 물동이를 이고 춤을 추어 보였다는 옻나무재 우물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최승희의 가계(家系)도 남아있다. 최승희는 남편 안막(安漠)을 따라 월북하면서 승을 승오 두 오빠도 함께 떠나 사실상 남쪽에는 가까운 일가붙이가 없는 셈이다. 그러나 제곡리에는 그녀의 5촌 조카딸 최경희씨(71)가 생존해 최승희의 유년시절을 증언했다. 최승희와 5촌조카 경희씨와는 7살 차이다. 최승희는 7~8세 때쯤 홍천을 떠났기 때문에 조카딸 경희씨가 밝히는 그녀의 유년시절은 모두 가내에 구전돼 오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조카딸 경희씨의 증언은 이 지방 촌로들의 주장과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

  더구나 그녀의 조부, 부친, 4촌 형제들이 제곡리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해주(海州) 최씨(崔) 전한공파 세보에 기록돼 있어 최승희의 출생지가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라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승희씨는 내 5촌 아주머니이고 나는 승희씨의 4촌 오라버니인 승삼씨의 외동딸이지요. 일본에서 무용으로 날리던 시절 어른들로부터 5촌 아주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어요. 해방 이듬해인지 내겐 5촌 아저씨가 되고 승희씨에게는 친오라버니들이 되는 승일, 승오씨 와함께 이북으로 갔다는데, 그 후 김일성의 첩이 되었느니, 이북에서 권세가가 되었느니 하는 소리를 들었을 뿐 그 후 소식을 몰라요"

  최승희는 보통학교입학 정련기에 제곡리를 떠난 셈이다.

  최승희는 서울에서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을 테고, 나중에 숙명여고를 졸업하게 됐을 것이다. 이 같은 추리를 뒷받침하듯, 제곡리에는 최승희의 유년시절을 증언하는 얘기 거리가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소화 15년으로 기억합니다만, 내가 금융조합에 다닐 때지요. 남면 주재소 순사 '하야로 고노'와 함께 제곡리 출장을 나갔는데 촌로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하야로'가 최승희가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는데 어려서도 예뻤느냐고 묻더군요.

  촌로들은 '어려서 옻나무재 우물터에 아낙들이 모여 최승희에게 춤을 추어보라고 하면 물동이를 인 채 뱅글뱅글 돌며 춤을 춰 보여 재간동이란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들려줍디다.

  나는 그때 귀가 번쩍 뜨이더군. 최승희라면 당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어렴풋이 그녀의 고향이 제곡리라는 소리는 들어 왔었지요"(박경재 · 72  · 홍천군 남면 양덕원리) 소화 15년께이면 1940년대이다. 이미 최승희는 이 무렵 미국, 유럽, 남미 등 만 3년간의 외유공연을 마치고 일본에 재입성 했을 때다. 그녀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야로 고노'는 극구 옻나무재 우물터를 가보자고 했다.

  그리고 한 바가지 가득 샘물을 퍼 물맛을 음미하듯 들이켰다.

  "일본에 돌아가면 나도 얘기 거리가 하나 생겼다"면서. 옻나무재 우물터는 지금 용수골로 넘어가던 옛 고갯길 초입 잡초 속에 묻혀있다.

  제곡리 친족들에게 비친 최승희는 한 무용가의 예술인생보다는 '망신스럽고, 경망스런' 모습이었다. "내가 시집가기 전 15~16세쯤 됐을 때지요. 어른들이 승희씨 사진이 실린 신문을 구해 오셨어요. 망측스럽게도 요즘의 삼각팬티 같은 것을 입고, 웃통을 벗어 젓긴 모습의 사진을 박아 신문에 냈더라구요.

  우리들끼리 집안망신 다 시킨다고 수근 거렸지요"(최승희의 5촌조카 경희씨) 경희씨가 15 ~16세 때면 33~34년께다.이 무렵 최승희씨는 도일(度日) 무용수업을 마치고 귀국, 제 1 차 귀국공연을 경성공회당에서 가진 뒤, 4년간의 서울생활을 청산했을 때다. 1934년 5월 20일 최승희씨는 동경(東京)으로 돌아가 아오야마(靑山)청년회관에서 재기 제 1 회 공연을 가졌다. <중략>


  고향을 찾아온 부친영부씨는 이미 백발이었다. "어른들, 말씀 중에 큰 웃음소리가 납디다. 승희씨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는데 제 어미 닮아 까다롭기 이를 데 없고, 외갓집에 와서도 지저분해 옷에 먼지가 묻을까봐 안 앉는다고 하더군요."

1934년 최승희가 일본에서 재기의 제 1 회공연을 갖기 위해 도일(度日)했을 때는 이미 결혼과 출산을 했을 때이다. 최승희의 부친 영부씨가 홍천 고향을 다니러 왔을 때는 이미 그녀는 세계무대를 향해 발 돋음 하고 있을 때쯤이다. 최승희의 부친 영부씨는 "승희가 춤을 잘 춰 부자가 되었다"라든가 "일본을 내 집 드나들듯하고 있다든가"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는 것이다. 심할머니는 "어떻게 해서 춤을 추는데 돈이 생길까. 춤추고 장고 치는 것이 기생놀음인데, 기생이 뭐 대단하다고 신문에 나고, 부친이 동기간들에게 자랑을 한단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회상했다. 최근 작고한 (1989년 3월 3일) 제 3 대 강원도의회의장 허만훈옹(許萬壎  80)은 44년부터 815해방 때까지 홍천군 남면 면장을 지냈다. 당시 30대 초반의 허면장은 제곡리장 이(李)모씨(당시 60세)와 각별한 친분이 있었다. 이장 이씨(李)는 양덕원리(陽德院里)까지 시오리길을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 허면장은 이장 이씨로부터 최승희의 어린시절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노이장 얘기를 빌면 최승희는 어렸을 때부터 여간 재간둥이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이장이 '어렸을 때는 노래를 썩 잘 불렀는데 무슨 일로 무용으로 이름을 날리는 줄 모르겠다.'고 말하던 것도 기억납니다." 별세하기 하루전인 3월 2일 홍천읍 석화산, 새벽 등산길에서 만났던 허옹은 당시 전해지던 이야기들로 미루어 "최승희의 고향은 제곡리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남면사무소는 625때 불타버리면서 호적이 모두 소실됐다. 해주 최씨 종친회는 625직후 신축보(辛丑譜)를 새로 냈으나 최승희 남매는 등재되지 않았다. 최승희의 두 오빠까지 나란히 월북을 택함으로써, 최승희는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이 된 채 종친 세보(世譜)에서 조차 종적을 감춰버린 것이다.

  다만 최승희가 국내 순회 공연 중 고향을 찾아와 홍천읍 옛 서일여관 터에서 잠시 묵어갔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홍천지방을 중심으로 '그녀의 틀림없는 출생지'를 주장하는 구전이 흘러오는 것이다.  <중략>


  그가 태어난 제곡리에는 "그녀의 4촌 오빠이자 남면 갑부 승삼씨가 일제 때 명덕국교에 풍금을 기증할 만큼 음악을 이해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최승희의 잔영처럼 남아있는 것이다. 최승희의 5촌 조카딸 경희씨는 7순나이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운 몸매와 흩어지지 않은 음색이 돋보인다. 경희씨의 10촌 이내 친척들의 모두 훤칠한 키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윤곽도 무관하지 않게 눈길을 잡는다. "동네놀이에서는 내가 장구채를 잡아야 흥이 나요. 그 피가 어디가나?" 7순 답지 않은 구르는 목소리가 귓전에 와 닿는다.』

  그 후 15년이 흐르는 동안 최경희(崔敬姬)씨는 최승희에 대해 몇 가지 새로운 증언을 하기도 했다. 최승희는 숙명여고를 다닐 때 고향에서 다니러 온 경희씨에게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커다란 거울 앞에서 속옷 바람으로 춤을 추었는데, 어린 마음에 무섭기도 하고 망측스럽기도 했다는 것이다.

  최승희가 태어난 46칸 ''자 집 자리도 기억해 냈다. 지금까지 알려진 제곡리 244번지가 아니라, 경희씨의 시댁조카 권오일씨의 집 대문을 나오면 마주 보이는 집이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제곡리 이장 남궁양씨가 살고 있는 제곡리 237번지이거나 그 뒷집 'ㅁ'자 집인 제곡리 238번지다. 해주최씨 전한공파(典翰公派) 33세손이라고 주장하던 최재경씨(崔在慶)와 고향에 다니러 온 최승희 부친의 백발 모습을 기억하던 그의 모친 심정순씨는 작고했다.


최승희는 해주 崔氏 전한공파 31세손

  해주최씨 문중에서 최승희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천강 유역 노일, 용수, 어유포, 팔봉, 반곡, 개야리 등은 해주최씨들이 세거하고 있는 곳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최승희 직계가 해주최씨 세보(世譜)에 단 한줄 그 근거를 비추지 않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최승원(崔承元)은 작고한 장손 최재경(崔在慶)의 조부이고, 최승조(崔承祚)는 현재 제곡리에 살고 있는 최연섭씨(崔連燮)의 부친, 최승삼(崔承三)은 최경희(崔敬姬)씨의 부친이다. 최승희의 직계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제곡리에 실존했던 인물까지 해주최씨 족보 어느 파보에도 이름을 비추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의문이 해주최씨 명행도(항렬표)에 꽁꽁 매듭지어 있었다. 해주최씨 대령군공파보(大寧君公派譜  전 正言公派譜)의 항렬은 '28세 환(煥), 29세 재(載), 30세 현(鉉), 31세 승(承), 32세 식(植), 33세 광(光), 34세 수(壽)' 이다. 그리고 해주최씨 전한공파보(典翰公派譜) 항렬은 '28세 옥(玉), 29세 석(錫), 30세 부(溥), 31세 병(秉), 32세 섭(燮), 33세 노(老) 또는 재(在), 34세 호(鎬)'이다. '월간太白'에서는 최승희 가계를 전한공파라고 밝히고 있다. 또 최승희의 5촌 조카딸 최경희, 장손 최재경의 모친 심정순이 최승희의 부친을 '영부(暎溥)'라고 불렀다. 그리고 제곡리에 남아있는 최승희 가계의 유일한 친척 두 집의 항렬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장손 집은 '30세 은부(殷溥), 31세 승원(承元), 32세 창섭(昌燮), 33세 재경(在慶), 34세 호영(鎬英)'이다. 작은집은 '30세 태부(台溥), 31세 승조(承祚), 32세 연섭(崔連燮), 33세 재홍(在洪)'이다. 그러나 이들 두 집이 가지고 있는 가승(家乘)에는 31세손 승원과 승조가 각기 병원(秉元)과 병조(秉祚)로 기록돼 있다.

  전한공파보의 항렬대로다. 따라서 최승희 직계존속 계보를 보명(譜名)으로 기록했다면 '30세 영부(暎溥  최준현), 31세 병일(秉一  최승일) 병오(秉五  최승오) 병희(秉喜  최승희)가 되었을 것이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제곡리 전한공파 해주최씨들은 30세, 31세손의이 호적명을 족보대로 쓰지 않았다. 공교롭게 호적명의 항렬이 대령군공파 항렬과 일치하고 있다.

  제곡리를 제외한 홍천강 유역에 세거하고 있는 해주최씨들은 대부분 대령군공파이며 종손가계인 최승원씨(崔承元춘천시 효자 1동)씨는 구보(舊譜) '기미보정언공파보(己未譜正言公派譜)'를 간직하고 있다. 해주최씨 문중에서 구보까지 뒤적이며 30세손에서 최준현, 31세손에서 최승희 등을 찾으려다 실패한 것은 최승희가계가 이같이 보명과 호적명을 혼용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제곡리 최연섭씨(崔連燮 · 52)는 나이는 어리지만 촌수로 최재경의 당숙이 된다. 최승희와 6촌간인 최승조(崔承祚)의 아들이다. 연섭씨 가계의 가승(家乘)에는 28세손 근(瑾  顯圭)에 대해 '효행탁이 증조봉대부동몽교관(孝行卓異 贈朝奉大夫童蒙敎官)'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생전에 효행이 출중했던 그가 죽은 후에 종4품의 조봉대부로 품계를 올리면서 동몽교관이라는 참봉급 종9품직의 관직을 추증 받았다는 뜻이다. 제곡리 해주최씨 집안의 최참봉이 바로 그인 것이다. 동몽교관은 교육직이기 때문에 명예롭게 여겼던 관직이다. 제곡리 98번지 개울가엔 그가 글을 가르치던 곳으로 추정되는 서당 터가 남아있다. 폐가 한 채가 을씨년스럽지만 그 자리는 수려한 경관에 오래된 작은 연못도 갖추고 있다.

  근(瑾)은 29세손 홍석(泓錫)을 낳고, 홍석은 30세손으로 은부(殷溥), 태부(台溥) 두 형제를 두었다.

  은부(殷溥)는 병원(秉元), 창섭(昌燮) 재경(在慶)으로 대를 이어 제곡리 전한공파의 큰집으로 불리고 있고, 태부(台溥는 병조(秉祚), 연섭(連燮), 재홍(在洪)으로 작은 집의 대를 이었다. 가승은 직계존속 계보만을 수록하는 법이다. 따라서그 가승엔 최승희 직계에 대한 언급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최준현의 보명이 영부인 것으로 미루어 그는 29세손 홍석 형제의 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29세손 홍석 형제 중 맏이가 30세손 최준현(영부) 형제를 두었으며 형제 중 맏이가 최승삼의 부친, 막내가 최승희의 부친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최경희씨 증언대로 최준현(영부)이 장조카이자 경희씨의 부친인 최승삼을 따라 서울로 솔가했다면, 최승희 가계가 작은 집이라야 맞는다. 따라서 최승희에게는 4촌간인 최승삼이 가장 가까운 일가붙이다. 가승으로 추적하면 최승희는 제곡리 최참봉 근(瑾)의 증손녀이고, 부친 최준현(崔俊鉉), 일명 최영부(崔暎溥)는 해주최씨 전한공파 30세손, 최승일(崔承一), 최승오(崔承五), 최영희, 최승희(崔承喜)는 31세손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해주최씨 전한공파보에서 이 두 집이 감쪽같이 사라진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해주최씨 세보는 1774년 갑자보(甲子譜)를 간행했다. 그 보판이 홍천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1919년 기미보(己未譜)가 간행됐으나 남북 분단 후 세계(世系)도 혼란돼 새로운 족보를 만들 필요가 생겼다 1961년 9월 신축보(辛丑譜)가 간행됐다. 그러나 제곡리 해주최씨 집안, 즉 최참봉의 가계는 이 족보 전한공파보에 올라있지 않고 있다. 다시 1990년 10월 경오보(庚午譜)가 간행됐다. 그러나 이 족보에는 신축보에 올라있지 않던 최승희의 6촌간 최승원, 최승조가 각각 병원(秉元), 병조(秉祚)란 이름으로 올라있다. 최승희의 조부 아래 직계가계만 족보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신축보를 내던 당시 상황을 최재두씨가 기억해 냈다.

  해주최씨 집안은 6.25 전쟁 때 대부분 집이 불타면서 족보를 소실했거나 피란길에 분실해 대부분 족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1961년 신축보를 낼 당시 연좌제에 걸린 제곡리 최승희 가계에는 기관원의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마침 '4.19'에 이어 '5.16'이 일어나던 때다. 최승희 가계는 일거수일투족을 주목 받게 됐다. 자연히 제곡리 해주최씨들은 문중과도 교류가 잦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그 집들 족보가 어떻게 됐나 궁금해 누군가에게 물어봤더니 자신들은 해주 최씨지만 고죽공파(孤竹公派)라고 합디다. 집안이 다르다고 하는 데야 괜히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듭디다."

  최씨는 당시 최승희 가계가 극도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족보를 복원한다는 것 자체가 조상까지 연좌제의 폐해를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1990년 경오보를 낼 때는 상황이 달랐다. 최승원, 최승조는 이미 작고한 뒤다. 그 후손들은 가승을 토대로 족보를 복구했다. 지금 제곡리에 살고 있는 은부, 태부 형제의 후손들만 경오보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최승희의 4촌 최승삼 가계는 그가 작고한 후 족보를 복구할 후손이 없었다. 그는 아들 원식(0 植 : ,대령군공파 항렬을 썼음)과 딸 경희(敬姬)를 두었으나, 아들은 일찍 작고했다. 그렇다고 출가외인인 딸 최경희씨 친정 족보를 내는데 나서지는 못했을 것이다. 물론 최준현(영부)은 오래 전 작고했고 역시 북에서 생사를 모르는 최승희 형제들이 족보 복구에 참여할 리는 없었다. 최연섭씨는 당시 최승희나 최경희씨 친정이 친척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린나이에 그들의 족보를 복구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홍천의 맥(脈)'은 그때의 배경을 「6.25 후 그 친척들이 모두 피신 후손은 찾아 볼 수 없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승희의 출생사실은 홍천에서만 주장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은 해묵은 시비다. 당시 언론은 이미 그를 '홍천 출신'이라고 밝혀 놓았다.


LA 신한민보 '최준현은 홍천 출신'

  1937년 12월 5일, 동경 히비야공회당에서 도미(渡美)고별공연을 갖는다. 그의 미국 공연여행에는 남편 안막, 반주자 하야시가 동행했다. LA 첫 공연은 이듬해 2월 2일 오후 8시 45분 LA '이-벨극장'에서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일본 영사관은 '일미 친선의 밤' 행사에서 최승희 무용 감상회를 개최했다. 그런 것이 빌미가 돼 LA 공연장 앞에서는 재미교포들과 유태인들이 반일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국권회복운동과 일본제국주의 침략정책에 대한 비판 기사와 논설을 싣던 교포단체 신문 신한민보(新韓民報)는 오히려 최승희의 세계 공연을 손기정의 베르린올림픽 제패에 이어 한국을 세계에 선양하게 되는 계기라고 극찬했다. 1938년 2월 3일자(제 1565호, 2면)에 '삼한예술의 세계적 진출 최승희 여사' 제하의 칼럼은 최승희가 '강원도 홍천사람'이라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제 최여사의 약력을  듣건 데 그는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씨의 영애로 일찍이 경성 숙명여학교를 필업하였고 어려서부터 춤에 대하여 흥미를 가졌고 또한 특기가 있음으로 중학을 졸업한 후에 곳 무용을 전문하려 하메 춤은 기생 광대나 추는 천업이라 하여 구식사상에 가친인리 향당의 치소와 방해가 많았지만은 요행 동경에 유학하는 그의 남형의 성원을 얻어 동경에 건너가 무용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기사 넷째 단락에서 최승희를 소개하면서 그를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씨의 영애'로 밝힌 것이다. 최승희는 1936년 10월, 26살의 나이로 오빠 최승일이 대필한 '나의 자서전'을 발표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서울의 몰락한 양반 가계의 자제'로 표현했었다. 신한민보는 최승희가 '서울의 몰락한 양반 가계의 자제'가 아니라, '강원도 홍천군의 최준현씨의 영애'라고 정정했다. 최승희의 출생사실에 대해 유일하게 발굴된 신문 보도다. 자서전에서는 비록 '서울 출신'이라고 밝혔어도 당시 사회에서는 최승희가 홍천 출신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대목이다. 



"나는 홍천 사람" 그의 생애에 묻은 자국들

이재학 가계에 기억된 최승희

   최승희의 제곡리 어린 시절은 국회부의장을 지낸 동은(東恩) 이재학(李在鶴  작고)가계에도 새겨져 있다. 이재학은 홍천군 서면 팔봉리에서 태어나 홍천읍에서 자랐다. 바로 밑 동생 재곤(在)은 경성제대출신의 강원도 제1호 의학박사다.  원주 이씨인 그는 전주 이씨 이봉운 (李鳳雲)을 아내로 맞았다. 이봉운은 이덕세라는 남동생을 두고 있다. 따라서 집안에서는 이씨를 지칭할 때 '덕세 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덕세 누이'가 제곡리 최승희가에서도 등장되고 있다. '덕세 누이'네는 해주최씨네 사돈댁이고, 사돈댁에서 이재학가로 시집을 갔으니까 원주이씨네는 해주최씨네의 사돈에 사돈이 된다는 것이다. '사돈에 사돈''사돈에 팔촌'보다도 먼 촌수다. 사실 그런 촌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 촌수가 끈끈하게 강조되는 이유가 뭘까.  최승희 가계의 가승에  따르면 28세손 최참봉의 부인은 이종철(李鍾哲) 의 따님 전주 이씨다. 최승희 증조모인 것이다. 최참봉의 부인인 전주 이씨와  '덕세 누이'  친정과의 관계를 더듬게 하는 단서다. 이재곤의 아들 이종선씨(李鍾善  71)가 그런 추정이 가능할 만한 증언을 하고 있다. 어머니가 작고하기 전 들려준 얘기다.  

   '덕세 누이' 이봉운은 어려서(10살 전) 최승희와 제곡리에서 소꿉장난을 하며 함께 놀기도 했고, 이봉운과 최승희 집안과는 6.25 전쟁 때도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봉운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제곡리에 내려와 살았다. 할아버지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웃 친척집에도 같은 또래 소녀가 살고 있었다. 최승희였다. 두 소녀는 시냇가에 나가 놀기도 하고 어느 집 뒤란에서 소꿉장난도 하고 놀았다. 그러나 제곡리 생활은 길지 않았다. 최승희는 최참봉의 증손녀다. 그리고 그 집은 이봉운의 조부 또는 증조부의 여동생이나 누님이 시집가 있는 집이 된다. 따라서 두 사람은 최참봉 부인의 증손녀 딸과 친정 증손녀딸 사이로 만났을지 모른다. 가승에는 최참봉의 증손 승조(承祚)도 전주이씨를 아내로 맞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승조는 최승희와 6촌 간이다.

  '덕세누이'는 최승희의 그6촌 올케와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어쨌든 참봉가계의 사돈이 홍천 명문가의 사돈이 된 셈이다. 이점이 제곡리 해주최씨 집안에서 아직도 '덕세누이'가 등장하는 이유일 것으로 보인다.

  이종선씨는 모친 가계와 최승희 가계는 오랜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어머니가 최승희네가 서울에서 어렵게 살았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는 것이다.   두 집안이 매우 가까왔다는 사실을 증거 할 만 한 사건도 있었다. 6.25 때 이종선씨는 미처 피란을 가지 못했다.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16세 소년이 집에 있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어머니 '덕세 누이'는 아들에게 최승희의 집에 가 피신하라고 종용했다. 어머니는 월북자의 집을 인민군들이 가택수색을 한다거나, 사람을 잡아 가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어머니 분부대로 가회동 최승희네 집으로 갔지요. 최승희 아버지가 집을 지키고 있었으며, 남들처럼 공포에 떨며 지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이종선씨는 그때를 그렇게 회상했다. 이종선씨는  훤칠한 키의 미남형이며 예능에 소질이 있었던 외삼촌 이덕세가  최승희 공연은 모두 쫓아다니다시피 했으며, 공연 얘기를 자주 들려 주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전주 이씨 '덕세 누이'가 이재학가에서 최승희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게 한 진원지인 것이다.

  이재학이 태어난 팔봉리와 제곡리는 고개 하나 사이의 이웃이다. 최승희 보다 7년 연상의 이재학이 제곡리 출신 최승희를 모를 리 없다.

  최승희보다 3년 연하인 이재학의 누이동생 이순애(李順愛  전 서울보건전문대학장)는 한 인터뷰 기사(주간여성 1973. 12. 16호)에서 그의 부친은 '서울에 큰 기와집을 한 채 사서 9남매의 서울 유학을 위한 근거지로 삼았다.'고 말하고 있다. 재학, 재곤 두 오빠가 경성제대를 다닐 때 그는 홍천에서 300리 길을 가마를 타고 가 제일여중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이듬해 동생 순영(順英)과 함께 동덕여중에 합격해 같이 그 학교를 다녔다. 장남 이재학이 홍천매산공립보통학교(현 홍천초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에 들어가 15살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한 것처럼, 그들 남매들은 성장기를 모두 서울서 보낸 셈이다. 최승희 가계에서도 이웃마을 팔봉리 출신 이재학 형제자매들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는 마당에 그들을 모를 리 없다. 이재학의 부인 이정수(李正守)는 대구 명문가 출신이자 경기여고, 동경여자미술대학을 나온 인텔리다. 이재학과 약혼한 20살 되던 해 일본유학을 떠나 4년간 머물고 있을 때는 4살 연하의 최승희가 일본에서 춤 예술의 뿌리를 내리던 시기다. 최승희의 명성은 이정수도 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이종선씨의 모친 '덕세 누이'가 바로 손아래 동서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최승희가 시댁의 동향인 '홍천사람' 이상의 특별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재학의 장남 이응선씨(李應善  71 전 국회의원)는 "이상하게 내 모친이나 외삼촌들이 최승희 얘기를 자주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우리 형제들은 자라면서 제곡리와 최승희의 얘기를 자주 들었기 때문에 막연히 최승희의 고향이 제곡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최승희가 이재학가계와 오랜 인연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승희의 춘천공연과 春泉 이영일

   1931년 최승희는 '삼천리(三千里)' 2월호에서 신무용운동의 전개를 주장하는 칼럼 '공연무대에 서서'를 발표하면서 자신의 신작들을 들고 전국 순회공연에 나선다. 그가 전국 순회의 첫 공연지를 춘천으로 택한 이유가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대장정의 첫 걸음을 춘천에서 시작했다면 최승희는 새로운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고향 땅으로 잡고 싶었던 것일까. 지금도 그렇지만 엔터테인먼트와 강원도는 밀접하지 않다. 모든 순회공연에서 강원도편은 마지못해 끼워주는 것처럼 늘 뒷전이었다. 더구나 당시 춘천은 무용공연을 소화할 만한 여건도 변변히 되어있지 않았다. 8년 전 개설된 경춘도로에는 8인 승 승합차 10대가 서울과 춘천을 오가고 있었고, 경춘선은 아직 개통되기 전이다.

  최승희가 무용예술운동의 시발지를 춘천으로 택했다면, 춘천에는 무언가 강력한 흡인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일신보는 춘천 공연에서 '수백 명 군중들이 공연장 문을 밀치고 난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현 문화극장 자리 뒤편에 있었던 춘천공회당은 150평 남짓한 크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춘천 사람들이 강원도 출신 무용가였기 때문에 열광했던 것은 아닌지를 짐작하게 하고 있다.

  춘천에서는 한 사람의 후원자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가 있다면 당시 숙명여고 훈육주임교사이자 화가 춘천(春泉) 이영일(李英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월간 太白'1989년 4월호)

  이영일은 초대 강원도장관을 지낸 이규완(李圭完)의 3남이다. 맏형은 각일(覺一), 전일본 유도선수권대회를 휩쓴 선길(鮮吉)은 바로 위형이다. 마침 이영일의 형 이선길(은 조선 유도의 영웅으로 등장하던 무렵이다.

  1931년은 아직 '유성(柔聖)'이라고 불리던 때는 아니다. 그러나 일본 무용계의 샛별로 떠오르던 최승희의 명성을 그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최승희도 이선길의 명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춤과 유도로 일본을 흔든 강원도가 낳은 조선의 영웅이었다. 이규완이 그의 춘천공연을 주선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궁억 '최승희는 홍천이 낳은 무용신동'

   미국순회공연을 떠나기전 1937 3월 29일 서울 부민관에서는 숙명여자전문학교 창립기금마련 공연을 겸한 최승희의 '도구(渡歐)고별신작무용발표회'가 열렸다. 관객 대열에 14살 소녀도 꽃다발을 들고 마음을 설레고 있었다. 당시 춘여고 1학년이던 최봉현(崔鳳鉉) 전 춘천고등학교장의 부인 오금자씨(84 · 춘천시 서면 당임리)다. 10살 위의 4촌 언니 오정숙(작고)은 최승희와 숙명여고 단짝 친구였다. 무슨 이유였는지  공연장을 갈 수 없던 언니는 오씨에게 10엔(円)짜리 입장권 한 장과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단짝 동무 최승희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라는 부탁이었다.

  오씨는 당시 자신이 원주출신 강원 산(産)인 것처럼, 최승희가 홍천 출신 강원 산(産)이란 사실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오씨는 최승희가 홍천출신이라는 사실을 부친 오유영(吳惟泳)으로부터 자주 들어왔다. 한서(翰西 ) 남궁억(南宮檍) 선생은 1933년 일명 십자당 (十字黨)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까지 원주군수인 부친을 자주 찾아왔다. 그때마다 남궁억 선생은 최승희가 홍천 보리울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자랑삼아 한 모양이다. 군수는 딸에게 산골에서 인물이 나는 법이라며 최승희를 칭찬하곤 했다는 것이다. 오씨는 부친이 작고한 이듬해 원주 남산소학교 고등 1학년에 진학했다가 입학생 전원 이 춘천여고로 전학하게 돼 그 학교 4회 졸업생이 됐다. 

  그가 부민관 무대 뒤에서 최승희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춘천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는 최승희에 대한 또 다른 얘깃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춘천읍장 황도근의 집에 하숙하고 있었다. 춘천읍장은 원주군 산업과장을 하던 사람이어서 집안 간 교분이 두터웠다. 춘천여고 3학년이던 황계회라는 읍장 딸이 있었다. 그는 오씨에게 6년 전 춘천공회당에서 있었던 최승희 전국순회공연 이야기를 전해줬다. 공연장엔 들어갈 수 없었지만, 당시 공연은 춘천이 떠나갈 만큼 화제였고 최승희가 '평양냉면집'에서 자고 갔다는 것이다. 당시 '평양냉면'은 춘천시 요선동 현 강원부지사 관사 앞쪽에 있었던 방 많은 ''자 집이다. 주인 김족일은 평안도 사람이었지만 춘천 토호 이상으로 지역에 영향력이 있었고 3남3녀를 모두 서울에 유학시킬 만큼 재력이 단단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승오의 부인과 아들 강원도에

  1946년 7월 20일 최승희의 8톤짜리 월북 발동선엔 그의 딸 안승자(안성희)와 아들 안병건은 동승하지 않았다. 일부 기록에는 그해 8월 22일 최승희의 둘째 오빠 최승오가 조카 안승자, 안병건을 데리고 월북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정병호의 '춤추는 최승희'에서는 최승오의 월북 시기를 6.25 전쟁 때로 기록하고 있다. 최승오는 경상도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윤덕봉과 혼인 딸 정순, 정희, 정옥과 끝으로 아들 광섭을 두고 있었다. 최승오는 여동생의 아들과 딸을 데리고 월북하면서 부인과 아들딸은 남쪽에 남겨 두었다. 그 책속엔 이들 남기고 간 가족 중 부인과 아들이 '강원도에 살고 있다'고 적혀 있다. 강원도에 가족의 연고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광섭의 한자 이름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름의 뒤 글자를 ''으로 썼다면 해주최씨 전한공파 32세손인 그가 파보(派譜) 항렬대로 이름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가 지금도 강원도 어디엔가 살고 있다면, 한때 살다가 이주해 다른 지방에 살고 있더라도 제곡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최승희 가계의 뿌리를 복원해 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북한에서는 '서울 고향'이란 말 안 해

  2005년 11월, 강원도민일보 송광호(宋光浩)캐나다 특파원은 2003년 11월 탈북한 최승희 제자 김영순씨(70)를 서울에서 만났다. 그는 1937년 중국 선양(瀋陽)에서 태어났다.

  선대의 고향은 경북 안동이다. 평양종합예술학교 1기생으로 최승희로부터 '민족무용'등을 직접 배운 사람이다. 다음은 최승희의 출생과 관련된 인터뷰 내용.

- 최승희의 고향이 강원도 홍천이란 사실을 아는가?

"처음 듣는 얘기다. 선생님의 고향이 그곳인가?"

-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나?

"듣지 못했다. 워낙 엄해서 그런 말을 물어 볼 엄두도 못 냈다. 우리끼리(제자들)는 서울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전라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쪽에서 예술인들이 많이 나지 않는가."

  홍천군 북방면 능평리 능평주유소 김혜림씨(70)도 최승희 춤을 배운 사람이다. 1937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난 그는 사리원 은파인민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대표로 뽑혀 평양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순회 지도를 하는 선생들로부터 춤을 배웠으며, 6.25 때 월남했다.

  "최승희는 특별지도 명목으로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학생들은 최승희를 남쪽에서 온 '파랭이'라고만 수근 거렸지 서울에서 태어났다든가 하는 말은 듣지 못했다. 최승희를 개성사람, 또는 원래는 평양출신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김씨는 누구도 최승희를 서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같은 증언으로 미루어 최승희는 월북 후 출신지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월북 후 노동당 입당서 등에 그의 본적지 또는 출생지를 어떻게 기입했는지 관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출신 성분을 매우 중요시 하는 사회주의체제에서는 전통적으로 허위기재에 대한 귀책을 강하게 묻고 있다. 최승희가 당대 예술인이라고 하더라도 '서울은 곧 한국'이라는 식으로 "나는 서울의 몰락한 양반 자제"라고 출생지를 포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북한과 중국 내의 최승희 관련자료를 수집하는 익명의 인사가 2004년 북한 내 중요문서에서 최승희의 본적지가 '강원 홍천 제곡리 000번지'로 기록된 것을 보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다. 

  최승희 연구를 집대성한 정병호 선생은 그의 책 '춤추는 최승희'에서 최승희의 출생지가 서울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서울 출생'은 최승희 다닌 숙명여고 학적부의 현주소 기록을 따랐을 뿐, 자신도 그의 고향이 '북쪽의 어디'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최승희의 제자이자 최승희의 딸 안성희의 중국어 통역을 맡았던 이경자도 최승희의 고향은 서울이 아닌 '북쪽 어디'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승희 고향에서 다시 태어나다

  최승희 제자로는 유일한 생존 인물일지 모른다는 김영순씨가 증언하는 최승희의 숙청 전야사건은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소름끼치기도 했다. 그는 최승희의 숙청 죄목을 '개인숭배 대상'이라고 못 박았다. 당시 함께 끌려간 제자들은 개인숭배 및 아부와 아첨 죄에 해당됐다.

  "1967년도는 최승희 무대출연 30돌이 되는 해였다. 이때 제자들이 존경의 마음으로 닭 30마리를 잡았는데 문제가 됐다. 최승희에 대한 개인숭배로 아부, 아첨했다는 것이 죄(罪)다. 나보다 서너 살 많은 남자배우 오몽희가 앞장섰는데 끌려갔다. 당시 생각나는 제자로는 장추화(남한출신), 강천옥(협주단 안무가), 김현숙 부부 배우, 강옥채, 오영옥(자강도로 추방), 오몽희, 김창진(여자) 등이 있었다. 제자들 중 김현숙과 오몽희는 부부 배우였다. 특히 김현숙은 스승 최승희처럼 춤을 잘 추었다."

  최승희 무용생활 30주년 기념공연은 이미 1955년 가을 성대하게 개최됐다. 그해는 최승희가 무용계 제1인으로 인민배우 칭호 받은 해이기도 하다.

  그 보다 12년 후인 1967년을 '무대생활 30돌'로 정한 것은 이상하다. 역산하면 1937년을 기념한 셈이다. 그해는 미국 순회공연을 협의하고 12월 19일 요꼬하마에서 대망의 '도미 공연' 배를 탄 해다. 제자들이 마련한 '무대생활 30년'은 최승희의 세계진출 30년을 기념한 자리였던 것 같다.

  김영순은 스승의 숙청과 사망시기에 대해서 "1967년 평남 북창 정치범 수용소(18호 관리소)에 잡혀 있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1999년 10월 귀순한 김용(金龍)씨는 가장 환경이 열악한 평남 개천 수용소(14호 관리소)와 평남 북창 수용소(18호 관리소) 출신이다. 월간조선 2000년 05월호에서 김씨도 북창 수용소(18호 관리소)가 월북 무용가 최승희가 갇혀 있던 곳이라고 증언했다. 그가 죽어서 묻힌 장소는 500가구 집단촌이 있는 영등갱 주변이다. 김씨는 1년 동안 그 집단촌에서 자신이 목격한 죽은 사람만 70~80이라고 말했다.

  최승희,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의 고향에서는 그가 다시 태어나고 있다. 제곡리 일대에서는 최승희 가계에는 선대에 홍천 원을 지내 최홍천(崔洪川)으로 불리던 이,참봉을 한 이도 있었으며, 부잣집 토지를 위탁받아 소작농을 관리하는 사람인마름을 하던 이도 있었다는 얘기들이 한도 끝도 없이 굴러다니고 있다. 제곡리 이장을 지낸 최재두씨(崔載斗홍천군 홍천읍 상오안리)에 따르면 제곡리 부자 최승원, 최승조, 최승삼 등 4촌 또는 6촌 형제들은 해주최씨 31세손들이며 이들의 바로 윗대인 30세손, 즉 최준현의 형제이거나 그 윗대 중 누군가가 큰 마름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름의 윗대 중 누군가가 참봉 벼슬을 해 최승희의 집안을 최참봉네로 불렀다는 것이다. 변병덕씨는 최승삼의 만년을 기억하고 있다. "가산을 탕진한 승삼씨가 풍을 맞아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어려운 만년을 보내는 모습을 어려서 보았다."고 말했다. 홍천 남면 농협조합장을 지낸 최재철씨(崔載哲 홍천군 남면 용수리)는 과거 제곡, 용수리 일대 땅이 거의 모두 일인회사 삼정물산 소유였기 때문에 최준현 형제나 그 윗대 중 누군가가 그 토지를 관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제곡리 골짜기를 떠돌고 있는 그런 이야기들은 전설이 아니다. 역사인 것이다. 그 역사를 복원하라는 요구도 적지 않다.

  홍천군 남면노인회장 임병찬씨(林炳贊 · 84 · 홍천군 남면 양덕2리)는 명덕보통학교(현 명덕초교) 13회 졸업생이다. 당시 명덕보통학교를 다녔던 80대들은 몇 남지 않았다. 그들에게 최승희는 하나같이 '홍천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였다. 임씨는 수복직후 양덕원의 불탄 집을 복구 못해 제곡리 친구 집에서 산 일이 있다. 1941년 일본 해군군속으로 남양군도에 징용돼 가 있을 때다. 제곡사람 이수용이 최승희가 우리 동네에서 태어났다고 자랑을 하자 그는 나는 보통학교 다닐 때부터 최승희가 제곡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서로 아는 체를 하던 기억이 났다. 임씨는 최승희가 월북해 입장이 곤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승조에게 슬그머니 촌수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임씨는 그때 그가 작은 목소리로 4촌인지, 6촌인지 아주 가까운 동기간이라고 말하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임씨는 "최승희의 출생 사실이 시비가 될 줄 알았다면 어디다 적어놓을 걸 잘 못했다.""우리가 죽기 전에 아는대로 증언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홍용씨(朴洪容 · 81 · 홍천군 남면 양덕 1리)는 명덕보통학교 15회, 춘천고등학교 16회 졸업생이다. 그는 춘천고등학교 시절 최승희가 거명될 때마다 그가 우리 동네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가르쳐 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그의 4촌 누님 박부용씨(朴富鎔83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가현리)는 2살 위지만 명덕보통학교 동기생이다. 박씨는 "보통학교 시절 최승희는 당연히 홍천 남면출신으로 알고 있었다.""서울이 출생지라는 것은 누가 만든 말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커튼 뒤에 숨어있던 이들 증언이 이제 당당히 조명을 받으며 무대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최승희의 고향에서는 최승희를 추모하는 제사도 준비되고 있다. 홍천 내촌우체국장 김홍배씨(金洪培 · 53 홍천군 남면 양덕2리)는 1965년 양덕중학교 2학년 때 국어교사 김석희 선생을 만난다. 원주 출신인 그는 이효석과 경성고보 동기동창생이다. 그는 '평창에 이효석이 있다면 너희들이 사는 홍천 남면엔 최승희가 있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당시 양덕중학교  함건호 교장도 학생들에게 같은 말을 자주 했다. 스승의 후학들이 40여년 후 김씨를 중심으로  '최승희 추모 연구회'를 만들었다. 이들 회원을 40여 명이 오는 8월 8일 최승희 서거일에 제곡리에서 첫 제사를 올린다. 그 어느 것보다도 '최승희는 홍천 사람'이라는 확실한 증언이다. 그리고 최승희 역사 복원의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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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6.04.07 21:02

    첫댓글 글을 잘읽어 보았습니다. 함광복위원은 친구인데 최승희에 대해 쓴 글은 처음 봅니다. 최승희가 홍천 출생이라는 말은 들은 적이 있는 데 이 자료를 보니 더욱 확증이 갑니다. 뛰어난 예술가인데 남과 북의 분단과 이데오르기에 희생되어 묻혀 간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제 복원되어 고향에서 길이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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