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8일 비상계엄 선포
전국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제주도에는 신현준 해병대령이 제주지구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계엄사령부는 관덕정을 사용한 관계로 도청직원들은 임시 사무실 대부분을 계엄사에 내주고 한쪽방에서 겨울 사무를 보았다.(도백열전 26)
7월 피난민 쇄도
제주항, 성산항, 한림항을 통하여 7월중에 1만여명의 피난민이 쇄도하였다. 이들은 공공시설에 분산 수용되었다.(도백열전 26)
7월 26일 개발단 도착
제주도개발단이 제주항에 도착 비전투지역인 제주도내 ECA사업 끌어오기 위한 계획
7월 제5훈련소 설치
육군제5훈련소가 7월말 제주주정공장에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제1교육대는 모슬포, 제2교육대는 한림, 제3교육대는 주정공장, 제5교육대는 제주농업학교에서 훈련을 실시하였다. 대부분 제주출신 장정들이었고, 일부 육지에서 온 피난민도 있었다. (도백열전 28)
7월 27일 공군 제주기지부대 창설
공군본부 작전명령으로 공군 제주기지부대가 창설되었다.(제주도지 2.112)
8월 3일 학도돌격대 결성
중고생으로 조직된 학도돌격대가 결성되었다. 대장에는 김호산이 추대되어 8월16일 출정식을 가졌다. 이들은 학도돌격부대의 명칭으로 독립부대를 유지시켜줄 것, 학생간부들에 의한 지휘통솔, 신병훈련 후 곧 전선에 투입시켜줄 것, 통일 후 지체없이 복학조치를 시켜줄 것 등 신현준 제주지구 사령관에게 요구하였다. 신 사령관은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겠다고 약속하고 학생들의 해병대 입대가 결정되었다.
8월 27일 해병3기 출정
제주도 청년들이 해병3기로 지원 출정하였다.(한라연감)
9월 1일 제5훈련소 입대
제주도 청년들이 육군제5훈련소에 입대하였다.(한라연감)
9월 17일 해병4기 출정
중고등 학도병으로 구성된 해병4기생이 출정하였다. 이들은 곧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였다.
10월 31일 해군병원 설치
해군병원이 광양에 위치한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되었다.(한라연감)
12월 16일 병사구사령부 설치
제주지구 병사구사령부가 설치되었다. 그후 62년 10월 15일 제주도병무청으로 발족하였다.(한라연감 840)(제주교육연혁지)
12월 27일 헤스대령 전쟁고아 수송
미 군목 브라이젤과 헤스 미 공군대력이 UN군 사령부로부터 수송기 7대로 16편에 걸쳐
서울거리에서 방황하는 전쟁고아 1천여명을 제주로 수송하여왔다. 이들은 제주농업학교의 천막과 교실에 연령별로 수용되어 사무실, 의무실, 창고, 취사장등을 임시로 마련하였다. 이어서 1951년 4월 황온순은 이들을 보육하기 위하여 제주농업학교 운동장에서 한국보육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한국보육원 고문이었던 최승만은 사회부장관 허정의 추천으로 제주도에 온 피난민 구호사업을 돕기 위하여 마련된 사회부제주도 분실장에 임명되었다. 사회부 제주도분실은 직원 6명과 함께 제주남국민학교에 사무실을 두어 피난민 구호사업 일체를 관장하였다.(제주도지 2 1278)(도백열전 28,29)
1951년
1월 13일 피난민 주택난/개발종합계획 수립
제주도 동부지구 피난민은 2만명이나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경가족과 일반 피난민인데 주택난으로 대부분 천막과 바락건물에 수용되어 있었다. 전도의 주택은 42,000동인데 인구수는 20만명으로 57,000세대가 잠자리를 구하러 허덕이고 있었다.
1월 25일 공군통합
모슬포 공군기지 및 제주공군기지로 이동한 공군 및 각 부대는 공군사관학교장 최용덕 장군이 통합.지휘하에 교육훈련이 시작되었다.
2월 8일 위생병원 개업
피난온 안식교회의 위생병원이 성산국민학교에서 개업하였다.(제주교육연혁지)
2월 19일 계엄령 해제
전시와중에 전국 비상계엄령이 제주지역에 한하여 해제되었다.
2월 22일 계엄령 해제
정부는 제주도지구 치안확보를 고려하여 지난 19일 국무회의에서 2월 22일 0시로부터 계엄령을 해제하기로 의결하였다.
3월 21일 제1훈련소 설치
모슬포에 육군 제1훈련소가 설치되어 소장에 백인엽이 발령되었다.
5월 15일 상이군경회 지회 결성
대한상이군경회 제주도지회가 결성되어 지부장에 양우종이 피선되었다.
6월 6일 피난민 협회 결성
관덕정 광장에서 피난민 협회가 결성되고 회장에는 김활빈이 선출되었다. 이때 제주에 피난온 사람은 5월 20일 현재 14만8천7백94명으로 집계되었다.
6월 17일 육군 특무부대 파견대 설치
제주읍내에 육군 특무부대 파견대가 설치되었다.
7월 5일 정전반대 궐기대회
정정반대 국토통일 도민 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한라연감)
8월 5일 해군기지 사령관 임명
해군기지 사령관에 김용호 소령이 임명되었다.
8월 17일 이승만 대통령 내도
제주도가 4.3사건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쟁피난민과 고아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있는데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린다
8월 20일 한국대학 졸업식
한국대학(국제대학 전신) 제1회 졸업식이 임시 교사인 제주향교에서 거행되었다. 문교부는 부산에서 2월에 “전시 하 교육특별조치 요강”을 제정하고 부산과 제주에 대학을 임시 운영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에 피난온 학생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한국대학 제주도분교가 설치되었다. 문리학부와 법정학부가 개설되었는데 이때 20명이 졸업하였다.
11월 상이군인 채용
상이군경회 제주도지부와 각 관공서 대표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각 직장에 상이군인 5명씩을 채용하도록 하였다.
1952년
1월 8일 제1훈련소장 취임
육군 제1훈련소장에 장도영 준장이 취임하였다.
2월 7일 대한군인 유가족회 결성
대한군인 유가족회 도지부가 결성되었다.
3월 9일 전몰장병 충혼묘지 안장
제주출신 전몰장병 3백61주가 무언 개선하여 충혼묘지에 안장되었다.
4월 15일
재향군인회 도지회가 결성되어 지회장 김상준이 피선되었다.
6월 15일 충혼묘지 결정/도로공사 반대 진정서
제주읍 충혼묘지를 사라봉 기슭으로 결정하였다.
7월 6일 전몰장병 합동위령제
제주읍 전몰장병 합동위령제가 사라봉 기슭의 충혼묘지에서 거행되었다.
7월 7일 모자원 설립
홍종임이 전쟁미망인을 위하여 용담리 358번지에 모자원을 설립하였다.
8월 14일 제1훈련소장 취임
육군 제1훈련소장 겸 제주지구 위수사령관에 오덕준 준장이 취임하였다.
10월 2일 포로수용소 폭동사건
제주포로수용소에서 폭동사건이 발생되어 포로 165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는 공산포로와 반공포로간의 격투로 10월 3일에도 폭동이 일어나 4명의 경상자를 내었다. 그 후 공산포로와 반공포로를 격리 수용하였다.
10월 7일 징집장병 출정식
징집장병들이 최초로 출정식을 거행하였다.
1953년
2월 10일 피난민 설화사건
관덕정에서 피난민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피난민 설화사건이 발생하였다.
3월 11일 노무징용 연령 연장
병사구 사령부는 노무징용 해당자의 연령을 50세로 연장 공포하였다.
4월 18일 휴전결사반대 궐기대회
제주도 애국단체 주최로 휴전결사반대 도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4월 26일 휴전 결사반대 도민 궐기대회
제2회 애국단체 주최로 휴전결사반대 도민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5월 5일 북진통일 총궐기대회
노총제주도연맹, 제주주정공장 공동주최로 휴전반대 북진통일 총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5월 23일 경찰유족회 도지부 결성
대한 경찰유족회 제주도지부가 결성되어 지부장에 김대홍이 선출되었다.
5월 24일 정양원 개설
상이군인을 위한 정양원이 개설되었다.
6월 11일 휴전문제 정부대안지지
북진통일추진위원회 주최로 휴전문제 정부대안지지 총궐기대회가 개최되었다.
7월 20일 전몰장병 개선
제주출신 전몰장병 226주가 무언의 개선을 하였다.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 성립
한국동란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50년 6.25동란 발발이래 3년1개월2일10시간만에 총성이 멎었다.
1954년
7월 8일 피난민 귀향
피난민 8백 여명이 귀향하였다.
7월 27일 제1훈련소장 취임
육군제1훈련소장에 이응준 장군이 취임하였다.
1956년
1월1일 육군 경비사령부 창설
육군제주경비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사령관에 김안일 준장이 임명되고 제주도 위수사령관을 겸직하였다.
7월 2일 군용지 해제
군용지로 징발한 37만5천5백46평을 해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