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닻/변삼학-
동공의 유리창에 위생처리 되지 않은 엷은 커튼이
안개처럼 내려앉는다
신의 바람에도 꼼짝 않는 그 안개의 덮개, 진득이
뿌리내려 은근슬쩍 변장술을 부린단다.
TV를 보실 때면 0.5미터 가시거리의 시야 속으로
운무가 피어오르듯 화면 속의
등장인물들 몽환에 젖어 헤매는 듯 보이신단다
누구의 지시를 받은 형질인지, 자막을 보실 때면
단어의 아귀를 지우는 몹쓸 수완을 부린단다
자식을 지식으로 읽히는 눈에는
ㅏ,ㅓ가 l로 ㅗ,ㅜ는 ㅡ로 모음의 점자를 따먹는
안개의 덫에 어머니는 단단히 걸리셨다
생의 이력서가 불러들인 덫에 걸린 어머니
두 눈은 붉은 안개의 성(城), 그 성에 도래 갇히면
계기 일식에 눈동자는 곧 밀봉될 것이란다
그 단단한 성문을 열어 백내장 덫을 걷어낸 자리
유통기한이 모호한 인조 수정체를 갈아 넣어드린다
캄캄한 인공 개기월식을 치른 뒤
하늘이 열리는 순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선명한
가족들의 얼굴이 뜀박질로 달려온다고.
-안개수집법/장선희-
칠레의 한 어촌, 안개에서 물을 얻어 쓰지요
높은 곳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플라스틱 물 수집판을 걸어 놓으면
궁금한 안개가 눈망울을 만들어 자박자박 걸어나온다지요
오선지엔 침목(枕木)을 걸어놓아야 해요 음악은 몸을 관통하는 힘이 있거든요 때론 뭉클, 한
방울 눈물에 고이기도 하지요 땀방울에 스며 물항아리 받쳐들던 젖가슴에서 미끄러져 뱅글뱅
글 춤추기도 하지요 여객선 표식이 분명한 공기의 입자들 부드러운 처녀수(處女水) 그 긴 혀로
텅텅 되울림을 잣아올리지요 구멍, 벌거벗은 여자들이 나무로 자란 새벽, 투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안개가 발목까지 지워진 그림자를 끌고 나타나는 칠레의 한 어촌, 거기선 물방울도 알알
이 음악으로 맺힌다지요, 자박자박
-안개주의보/정푸른-
아무거나 삼키는 여자는 안개의 입을 가졌다 여자가 오후의 공원에
서 자신의 그림자를 구름에게 저당 잡히고 휘적휘적 걷는다 중얼거리
는 패설과 함께 입 속으로 나무가 빨려 들어가고 거리가 쓸려 들어간
다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는 과녘들이 여자의 입 속으로 들어간다. 씹
지도 않고 토해놓은 모든 사물은 여자의 침으로 윤색되어있다. 침은
오염되지 않은 여자의 깊숙한 내부다 파충류의 허물처럼 조각조각 떨
어진 여자의 시선이 공원을 갈라놓는다
시간이 여자에게서 흩어진다 오래 웅크리고 있었던 몸은 녹슨 동전
냄새로 덮여있다 퇴화된 울음이 여자의 허기를 채우는 동안 오후는 습
한 제 옆구리를 핥고 있다 입자로 흩어지기 전 여자는 단 한 번 사람의
눈으로 제 안을 지그시 돌아본다
바람이 쓸고 가는 공원 모퉁이 여자가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지상과 지하의 마지막 접점이다
-산안개/김금용-
산과 산 사이 하얀 그림자가 수상하다
지나가던 소낙비에 뒤집힌 치맛바람인가
산사나이 한바탕 샤워를 하는 것인가
두고 온 아랫동네 미련한 멀미에
후줄근해진 눈물바람인가
먹구름이 앞산 뒷산 얼룩진 그림자옷을
골짜기 아래로 툴툴 털어버리자
햇살을 기다리지 못한 산 속 생명부지들이
명치 아래 끝에 숨겨진 통증을 털고 일어선다
잎새마다 기다린다는 빗방울 쪽지를 매단다
-허리안개/허형만-
지리산 중턱을 에둘러 싼
저 안개 속으로
새 한 마리 빨려 들어간다
빈 하늘에
호르르 호르르
바람칼 나르던 소리만
물빛처럼 반짝인다
내 생애의
한 줄기 자드락길도
저 허리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참 이윽하다
-안개주의보/이송희-
새벽녘 안개는 골목을 빠져나와 그녀의 창문 앞에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질척한 시간에 깔린
눈물이 굳어간다
한 올 한 올 안개가 풀려 나간 자리마다 차바퀴에 짓이겨진 허벅지가 드러났다 울음이 빠져나
간 뒤 말들은 식어갔다
안개의 이빨에 물린 고독한 영혼 하나가 조용히 수증기처럼 사라지던 그날 밤, 껌 같은 알리바
이가 땅바닥에 달라붙었다.
-안개는 나의 요람/조영민-
아빠와 길을 가고 있었는데
안개들이 생쥐처럼 사뿐사뿐 걸어다니는데
그것들을 잡아 기르고 싶은데
아빠는 팔을 잡으라며 자꾸 성화인데
멀리까지 흩어진 자잘한 구슬을 다 주워
집으로 가고 싶은데
아빠는 등 뒤에서 어딨냐고 막 화내는데
어디선가 과자봉지처럼 부스럭 소리도 들리는데
집에 가면 혼낼 거라고 아빠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데
모퉁이를 돌자, 킬킬
나는 아빠의 손을 지우고 천천히 얼굴을 지우는데
지울 때마다 안개는 고양이고 패랭이꽃이고
때로는 오르간이 울리는 교회이고
사과들을 시커멓게 썩히는데
안개는 나의 요람, 나는 안갯속 깨진 길을
잘 찾아내는데
단숨에 사라지는 나무들의 여기저기에도 잘 뛰어오르는데
얼굴과 손이 지워져 너덜거리는 아빠는
안개에 걸려 넘어지는데
가지에 걸린 마른 안개를 찢어 상처를 싸매는데
유리병 속에 빠진 개미처럼 큰길만 뱅뱅 돌며 투덜대는데
하지만 내가 먹여 살린 아빠는 이 안개를 태울까봐
추워도 모닥불을 쬐지 못하고
대낮에도 랜턴을 켜들고 오는데
-안개/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 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 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 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라는 소리/이정란-
안개 속에서 햇병아리 같은 태양이 튀어나왔다
안개라는 양파를 까다 손바닥에 옮은 우주의 손금
말을 주워먹은 개들은 새가 되어 하늘을 날고
말을 주워먹은 따개비는 먼바다로 나가 향유고래가 되었다
안개 속에서 잘린 목젖들의 그림자가 몸을 부화시키며 떠돌았다
종이 인형에 입술을 떼어주고 떠도는 주름투성이의 흰구름
알 속에 들어 있는 벙어리 여자를 깨뜨린다
코앞의 너를 발음하기도 전에 증발해버린
소리의 말문이 한순간에 터졌다
흰 날개 가진 새들이 동시에 깃털을 뽑아 날렸다
폭설이다
맨발의 동쪽이다
-안개/이강하-
나는 푸른 갈퀴를 단 음유시인
간절히 말하는 것도
용암처럼 꿈틀거리는 불만도
참고 이겨내는
한 무더기
예술적 은유다
입이 긴 한 주가
꼬리가 잘린 한 주가
뱀의 형상으로 다가와 고민의 해결을 요구하면
너는 너일 뿐
나는 나일 뿐
예수 형상이었다가
부처 형상이었다가
푹푹 어둠과 새벽을 떠먹고
급기야 분명한 안개 속 언어들
우주의 기운으로 변하는 틈과 틈 사이에서
스스로 팽창함을 즐기다니,
서로 의견과 상관없이
한줄기 존재의 영원을 꿈꾸는
꽃잎들 절규로 환생한다
-안개/김재혁-
나는 그때 그 안개의 냄새를 기억한다
후텁지근한 생활의 목욕탕에서
도망치듯 뛰쳐나와 새벽의 바람을 맞으며
또 다른 생활의 방으로 향하던 그때
학교 담벼락을 따라 새로 깐
붉고 푸른 보도블록에 눈처럼 쌓이던 안개,
그 안개의 향취에 오이처럼 상큼해지던
보도블록의 따스한 숨결을 나는 기억한다
터벅터벅 시간 속을 걸어가던
내 발길에 와서 강아지처럼 매달리던
안개의 귀여운 표정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안개의 포근한 입김 속에
발목을 담근 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가을 나무의 그 쓸쓸한 얼굴을 나는 기억한다
길가 수양버들 나뭇가지 사이로
매끄럽게 빠져나가던 안개의 날씬한 허리와
커다란 배라도 몰고 올 듯한 안개 바다의
그 출렁임을 나는 기억한다
안개의 싱그러운 속살을
한 입 베어 먹은 나의 심장이
조금 부풀어 오르던 것도 나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날 제 살을 밟으며
새벽길을 걸어간 나의 모습을
안개는 기억할 것이다
-안개 개론/김여정-
옛날 수줍은 시골처녀다
부끄러워 세모시 수건으로 얼굴 가렸다
어머니 가슴 속이다
늘 자식들 근심으로 자욱하다
남녀의 사랑이다
상대의 마음은 항상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무지개다
아무리 좇아도 잡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인생이다
죽는 날까지 앞일이 안개 속이다
-안개바다/이애정-
내가 아는 어느 여자
회색 옷 입고 바다로 갔네
저무는 땅으로 갔네
바다는 나무 대문을 열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네
살아온 만큼 살아갈 순 없겠지
돌이키기엔 어제처럼 늦은 오후의 독백
시간의 소리는 파도에 묻혀 사라지고
그물처럼 얽혀있는 안개 바다에서
더듬어 안개를 보네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왔다고
밀물은
미련으로 넘나들고
병보다도 깊은
안개
바다
달마다 꽃이었던 여자
무인도에 홀로 남아
여자는 바다가 되었네
살아가겠네
-안개를 읽다/박주하-
본문이 견딜 만 하다면
비극은 비극인 채로 내버려 두세요
물을 얻으려면 집을 버려야 하고
집을 버리면 익사해버리는 게 내 운명이니까요
난 물방울로 뭉쳐낸 절벽
희망은 마음속에서만 완성하는 집이죠
다른 세계를 꿈꾸는 순간
반드시 미아가 되어버리고 마는
난 지상의 편견, 극단의 봉두난발
바닥으로 추락하는 핏기 없는 여행이
언제 끝나게 될지 알고 있으므로
끝이 보이는 미래를 자주 생각했으므로
걸음이 한없이 느려지곤 해요
아무리 느려도 과거는 절대 갖지 말아야
발 없는 생각들이 무상에 드는 순서를
제대로 이해하는 거겠죠
세상에 없는 나를 향해
세상에 없는 시간을 꾸역꾸역 게워나가는
한 방울의 욕망이
내 페이지의 신념이랍니다
목을 축일 시간은 결코 오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난 당신의 사랑이죠,
당신의 영원한 고독인 거죠.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