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3. 8. 13(주일) -성령강림절후 열한째주일, 8.15광복기념주일- (2023년 33주)
제목; “흑암과 사망의 땅에 비친 생명의 빛”
성경; 마 4:12-17 (p4) (시 85:1-2, 320<350>, 552<358>, 621)
<예배의 부름> (시 85:1-2)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죄를 덮으셨나이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훈련의 달 8월 두 번째 주일, 1945년 8.15광복절 78주년, 대한민국 건국 78주년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에 한반도를 관통하여 할퀴고 간 6호 태풍 카눈의 생채기가 많이 남아있는데, 우리 하존 가족들과 가정, 흩어져 있는 자녀손들과 모든 가족들이 아무런 피해 없이 안전하고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저는 지난 한 주간 교회 휴가 주간을 맞이하여 매년 휴가 때면 방문하는 상주 필그림하우스 사회복지법인과 강릉 샬롬의 집을 방문하고 수요일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계속해서 전화 통화하며 기도 부탁드렸던 이용태 집사님께서 지난 10일(목) 새벽에 소천하시므로 어제 장례를 치뤘습니다. 저에게는 6호 태풍 카눈이 아니라 이용태 집사님께서 소천한 것이 더 큰 일이었고, 큰 충격이었습니다. 불과 2주전 항암 치료받고 계시던 이용태 집사님께서 교회 예배 출석하시고 안수 기도하며 치료 잘 받으시고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고 했는데, 이제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정말 건강하셨고, 운동도 열심히 하셨는데, ‘우째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시간(카이로스) 대로 이용태 집사님을 불러가셨지만,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아쉽기만 합니다. 남아있는 백선미 장로님과 자녀손들, 특별히 금년 96세 되신 모친 나란기 성도님의 건강과 평안을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마 4:12-17)은 세례 요한의 투옥 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17)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매우 중요한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마태복음에는 두 개의 산맥과 같은 구절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구절의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지는 부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중 하나의 산맥이 바로 오늘 본문 17절말씀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 다른 하나 : 베드로의 신앙 고백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마태는 예수님의 사역의 분수령을 이루는 산맥과 같은 중요한 말씀에서 “비로소”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기다리던 일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비로소” 이 땅에서 역사적인 사역에 들어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비로소”를 의미하는 헬라어 ‘에릌사토’(ἤρξατο)는 ‘시작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르코마이’(ἄρχομαι)의 부정과거형으로, 직역하면 ‘그가 시작하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가 갈릴리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시작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17절 이전까지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면, 17절부터는 회개와 천국 도래라는 위대한 메시지의 전달 사역이 전개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마땅히 유의해 보아야 하는 본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국의 메시지를 하필이면 갈릴리에서 선포하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요?
마태는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서도 그 점을 늘 강조하고 있지만, 저자는 예수님의 사역이 구약의 예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모습(18-22)과 천국의 도래를 선포(23-25)하시는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행하신 사역 세 가지를 압축해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23). “가르치시고”(교육), “전파하시고”(선교), “고치시는”(치유) 등 3대 사역은 이후 예수님의 활동을 잘 요약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가는 교회가 행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명백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굳이 수도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의 땅 갈릴리를 사역의 중심지로 삼은 역사가 주는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어부를 중심으로 제자를 삼으신 사건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 적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가르침과 선포와 치유에 걸쳐 있었다는 사실이 함의하는 바를 실천해 낼 책임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사역의 중심지로 삼았다는 사실이 주는 메시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생명을 얻게 하는 복음을 다시 생각하고 그 복음을 처음으로 증거한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곧바로 갈릴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 갈릴리 지방을 다니시면서 사역을 하셨을까? 왜 예루살렘이 아니었을까?” “예수님은 왜 중심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변방의 갈릴리에서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셨을까요?”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유대 종교의 발상지요 본산인 수도 예루살렘이 아닌 변방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1. 갈릴리는 흑암과 멸시받던 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사역의 근거지로 삼은 첫째 이유는 갈릴리가 흑암과 멸시받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5-16절(“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은 이사야서 9:1-2절을 자유롭게 인용한 말씀인데, 그 원형이 되는이사야 9:1절말씀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고, 사역의 중심이 되었던 가버나움과 벳새다 등이 있는 갈릴리는 고통받는 자들의 흑암의 땅이요 멸시받던 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고통받고 멸시받던 갈릴리에서 소위 말하는 ‘대갈릴리 사역’(the Great Galilean Ministry)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 갈릴리 지도 보며)
갈릴리는 지정학적으로 팔레스틴의 가장 북쪽에 있는 지방입니다. 헤롯 시대에는 사마리아와 유대와 맞먹는 행정구역명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후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때에 갈릴리는 아셀, 납달리, 스불론과 잇사갈 지파에게 주어졌습니다.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가 주전 732년에 갈릴리 지방을 병합하여 주민을 사로잡아가기 시작한 후 끊임없이 바벨론, 바사, 마게도냐, 애굽, 수리아에 정복당하여 혼혈 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정통파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런 갈릴리는 소망이 없는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선지자가 날 수 없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고 말했습니다.
멸시의 땅 갈릴리.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멸시의 땅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으셨습니다.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것이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기도 하고,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도시 선교에 집중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굳이 갈릴리를 그 선교의 근거지로 삼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땅이 바로 흑암의 땅이요, 멸시받는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철저하게 이방인의 갈릴리와 같이 사회의 비주류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자랐고, 그들을 대상으로 활동했고, 가난하고 병들고 눌린 자들과 같이 흑암에 묻히고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치료하고, 그들을 상대로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바로미터,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빛으로 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빛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는 더 이상 흑암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곳에는 더 이상 소외되고 멸시받는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 지금 우리가 거해야 할 가버나움,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2. 갈릴리는 메시아 예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사역의 근거지로 삼은 두 번째 이유는 갈릴리가 메시아 예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을 보면,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물러가시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물러가셨다’(아나코레센/아나코레오, ἀνεχώρησεν/ἀνεχώρέω)는,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다’, ‘있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다’는 의미인데, ‘물러가셨다’(개역개정)라는 번역을, 공동번역개정판은 ‘가셨다’로, 새번역은 ‘돌아가셨다’로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는 위험을 피해 이동하는, 곧 도피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등장인물들은 종종 악한 세력과 정면 대결을 피합니다(마 12:15, 14:13, 15:21.).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식이 늘 정면 대결일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러가서 피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기(12) 때문이요다른 하나는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14).
먼저 마태는 요한이 ‘잡혔다’(파레도데/파라디도미, παρεδόθη/παρεδίδωμι)라는 특징적인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고소당하여 법정에서 재판관에게 ‘넘겨지거나’(5:25. 그 외에도 10:17,19,21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아 ‘넘겨지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10:4. 그 외에도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을 의미할 때 17:22 외 다수). 하나님의 예언자인 요한은 이같이 분봉왕의 부당한 권력의 행사로 폭력을 당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후 26년 여름경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18개월이 지난 지금 요한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가 잡힌 이유는 마태복음 14:3절 이하에 나타납니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가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두고 요한이 그 일이 옳지 않다고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의 구금을 매우 좋아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헤롯뿐 아니라 그들도 거세게 비난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마 3:7)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많이 따랐기 때문에 시기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감옥에 갇혔으니 오죽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보다 6개월 뒤에 나타난 예수라는 사람은 요한보다 훨씬 더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체포로 한숨을 돌리는 줄 알았더니 오히려 일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요한의 체포 소식을 듣고 갈릴리로 물러가시기로 작정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갈릴리로 피하셨는가?”하는 점입니다. 갈릴리야말로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는 곳이니 예수님도 체포되기 쉬운 곳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도 체포되는 것을 두려워하셨다는 것입니까? 용기가 없고 당당하지 못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마태는 왜 굳이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길릴리로 물러나 가버나움으로 가신 이유는 14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말씀과 같이 예언의 성취를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가에 자리 잡고 있었고 갈릴리 전체 마을들을 육지로나 바다로 접근하기에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나훔의 동네’라는 이름의 가버나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갈릴리 바다의 북서쪽에 자리 잡은 현재의 ‘텔 훔’(Tel Hum)이 가버나움일 것이라는 데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 자신이 활동했던 곳이었고(9:9), 이 근처에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부르셨습니다(18). 그러니까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갈릴리 사역’의 사령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 회당에 들리셨고,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떡’ 설교역시 이곳에서 행하셨습니다(요 6:24이하). 마태는 이곳을 예수님 자신의 동네 - 우리말 성경에는 “본 동네” - 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9:9). 그러나 이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고 많은 은혜로운 말씀을 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마 11:23-24).
마태는 이런 가버나움에 예수님께서 자리를 잡으시고 사역을 행하신 것을 두고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말합니다. 그냥 어쩌다가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태는 이사야 9:1-2절을 비교적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을 비추고자 하는(16)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거처로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병행되는 이사야 9장을 계속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하게 된 것이 예언의 성취라는 사실을 더욱 더 확실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3-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6-7)
“지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나라”, “여호와의 열심히 이룰 나라”가 바로 갈릴리 사역과 상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시고 시종일관 그곳에서 활동을 펴신 것은 이 메시아 예언과 상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메시아 예언으로 유명한 이사야 선지자는 9:1절 이하에서 보는 대로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아 도래와 갈릴리의 영화를 연결시킵니다. 메시아는 결국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곳은 다윗의 고향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곁, 베들레헴은 큰 사역을 하기에도 좋은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셉이 살아온 갈릴리 나사렛으로 다시 가시도록 인도함을 받았고 거기서 활동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갈릴리가 요셉의 고향이었다는 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멸시받는 땅이 메시아 도래로 결정적인 변화를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메시아는 그야말로 멸시받는 자를 돌아보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가장 웅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구약의 예언대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예언을 성취하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3. 갈릴리는 예수님의 사역의 의미를 분명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사역의 근거지로 삼은 세 번째 이유는 갈릴리가 예수님의 사역을 분명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말이 그냥 문자 대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문자적 성취가 말하는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1) 멸시받는 자를 불러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약한 자를 불러 강하게 하신다’는 뜻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에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생을 어떻게 보내야 될 것인지 미리 아신 분으로 그는 시작부터 갈릴리를 사역의 중심지로 삼으셨습니다. 인간적으로 특별한 점을 가질 수 없었던 가난한 갈릴리 촌락 사람들을 불러 제자로 삼으시는 일도,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의 현장에도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만 남아있었다는 사실도,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 갈릴리 중심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오시자마자 제일 첫 번째 하신 일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뒤집어엎는 일이었습니다(3:13-22).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아버지의 성전을 도둑의 소굴로 만드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을 서슴없이 감행하였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기존 전통 종교가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갈릴리 시골 출신이 그 거대한 종교 세력인 예루살렘 성전을 뒤집었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멸시받는 갈릴리 사람들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을 갈릴리에서 살게 하시고 제자들을 부르게 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대를 뒤엎는 일을 즐겨 행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인으로서, 더욱이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으로 미국 최고위직에 오른 강영우 박사님을 알고 계신지요? 1944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나 중학교 재학 중 외상에 의한 망막 박리로 실명한 후, 온갖 실명의 고통과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신앙과 굳은 의지로 극복, 세계적인 재활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1968년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연세대 교육과에 입학, 1972년 문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졸업했습니다. 1972년 2월 결혼하고 그해 8월 한국 장애인 최초 정규 유학생으로 아내와 함께 도미,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 전공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므로, 1976년 4월 한국인 소경 최초 박사가 되었습니다. (☞ 사진 보며)
이 소경된 강영우 박사님을 불러 두 눈을 뜨고 사는 건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주님. 젊은 나이에 사고로 얼굴이 상해버렸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는 ‘지선아 사랑해’(☞ 사진 보며)라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이지선 양(교수)을 보며 우리는 날마다 갈릴리의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약한 자를 불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고전 1:26-28) 하나님을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6-28)
2) 변두리를 중심이 되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읽게 합니다.
갈릴리는 그야말로 변두리 땅입니다. 역사의 중심이 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변두리를 역사의 중심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반드시 갈릴리 바닷가에 앉아 베드로 고기를 먹고, 혼인 잔치가 열려 물로써 포도주를 만들었던 가나에 들러 성찬용 포도주를 한 병 사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황량한 시골길로 이어지는 자그마한 촌락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갈릴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일 수가 없습니다. 나 어느 날 꿈 속을 헤매며, 어느 바닷가 거닐 때, 그 갈릴리 오신이 따르는 많은 무리를 보았네…”라는 134장 찬송을 작사, 작곡한“ 로버트 모리스 여사의 찬송이 표현한 대로 갈릴리라는 이름은 얼마나 귀하게 들리는지 모릅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 그러합니다.
어떻게 하든 대도시, 대기업,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의 중심에 살아야 기분이 좋은 사람들. 잘났든 못났든 상관없이 중심에 서 있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바로 ‘집값, 전세값 대란’입니다. 사실 지방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집값, 전세값이 유독 서울과 수도권에서만 대란이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집값, 전세값이 그렇게 많이 오르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만, 그것도 강남에서만 살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름 휴가지 중 가장 인기 있는 곳 중의 하나가 부산 해운대입니다. 부산 해운대에서 해변이 보이는 아파트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서울 강남에서 35평 정도의 아파트 가격이 2-30억 정도 하는데, 부산 해운대에 가면 요즘 생겨나는 고층의 고급 아파트를 제외하고 보통 일반 아파트는 3-4억원 정도면 구입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해운대에서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에 사셨던 형님께서 강남에 살고있는 후배들에게 ‘서울 강남 아파트 팔고 부산 해운대 내려와서 아파트 한 채 사고 나머지 약 20억원을 은행에 맡겨두면 이자만 수천만원 나오니 그것 받고 편안하게 사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는데, 강남 집 팔고 내려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대학도 마찬 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 서울이 못되면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라도 들어가려고 안달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노회 수련회를 갔다오다가 한 목사님과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히 자녀들 이야기하다가 예천이 이야기가 나와서 안산동산고등학교를 나오고 한동대학교 다닌다고 하니, ‘아니 왜 그렇게 좋은 명문 고등학교를 나와서 서울에 있는 대학을 보내지 지방 대학을 보냈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산대학교 상대 경제학과 나왔다고 하니, ‘지방 대학이네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조차도 이런 사고를 하고 있으니 어떻게 지방이 소외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런 수도, 중앙에는 별 관심도 없이, 역사의 저만큼에 비켜 서 계시는 느낌입니다. 갈릴리에서 아무리 왔다갔다 하신들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그곳에서 주님은 생의 대부분을 보내셨습니다. 전혀 후회함 없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으로, 벳세다로, 데가볼리로, 갈릴리 호수가로 다니시면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요즘 같이 교통 통신이 발달해도 지방 사람들은 서울 못가 안달인데, 지금부터 2천 년 전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에서 행하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 누가 갈릴리를 의미 없는 곳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누가 갈릴리를 변방이라 할 수 있습니까? 갈릴리는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고향이 되었고, 세계 역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갈릴리를 메시아 사역의 중심지로 만드는 것을 예언하시고 우리에게 그것을 꿈으로, 간절한 소망을 갖게 하신 뜻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갈릴리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극동의 작은 나라, 분단국가 대한민국을 세계 제2위의 선교사 파송 국가로 만드신 것은, 오히려 너무 자연스러워집니다. 별 볼일 없는 변방의 갈릴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중심지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 되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세계 제2위의 선교사 파송국으로 만들어주신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이곳에 세우시고 ‘쪼개다, 깨뜨리다, 세로로 찢다, 심사숙고하다’는 뜻의 하존교회를 세운 이유를 기억합시다. 먼저 나를 쪼개고 깨뜨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존, 비전을 전하고 나눠주므로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끊임없이 메시아로 오신 주님의 사역을 따라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우리 교회의 중심을 갈릴리에 두어야 합니다. 멸시받는 자들과 변두리 인생을 중심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어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사람 낚는 위대한 어부들의 탄생 소식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 가진 자들만이 중심이 되는 세계는 주님이 그리는 세계와 너무 다릅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4대 강국 속에 갇혀있는 이 나라를 통하여 주님께서 그의 위대한 나라를 이루실 꿈을 꾸는 것은 결코 허황한 일이 아닙니다. 갈릴리를 거니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늘 새기며 새로운 꿈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파주에 와서 이전 금촌교회에서 위임받던 날 설교 제목이 “함께 갑시다. 비저니아(Visionia)로!”였습니다. 제가 이곳 금촌에 오니 여러 교우님들이 말씀하셨습니다. 거의 해마다 여름이면 물 난리를 당하면서, ‘목사님, 우리 동네는 아내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삽니다’ 하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파주는 북한과 접경지역이라 시의 98%가 군 작전지역이므로, 건물을 하나 지어도 군 부대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등 온통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임을 받으면서, “함께 갑시다. 비저니아(Visionia)로!”란 제목으로, ‘파주가 이제는 더 이상 버림받은 땅이 아니라고,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비저니아(Visionia), 비전의 땅(Vision Land)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파주가 대한민국의 중심으로, 통일이 되면 통일 수도가 될 것이라고, 따라서 이제 우리는 이 파주 땅을 버려진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비저니아(Visionia), 비전의 땅(Vision Land)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멸시받고 버림받은 땅이었던 갈릴리가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중심지가 되고,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희망의 땅이 되었듯이, 우리도 우리 교회를 통해 이 땅이 희망의 땅, 비전의 땅, 비저니아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귀한 성도님들 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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