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겠죠. 사람들을 더이상 신뢰하지 못하신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보기엔 두려우신 것 같아요."
"두렵다니, 뭐가?" 애나가 물었다.
리처드 앞이라 그런지 확 까발려진 기분이 드는데다 목구멍마저 메마르고 따가웠다.
"외로움이죠. 알아요, 이런 말 좀 우습게 들린다는 거.
물론 아줌만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하느니 차라리 혼자 살기로 작정 하셨죠.
제 말은 그게 아니에요.
애나 아줌마는 삶에 관한 생각을 쓰기가 두려운 거잖아요.
그렇게 하면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고독한 처지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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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넌 우리가 내뱉는 말 거의 대부분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는 거 알고 있니?
방금 네가 한 말은 공산주의 비평, 그것도 최악의 부류들이나 하는 소리야.
만약 맑스주의가 뜻하는 게 있다면, 그건 감정이란 사회적 기능이자 산물이므로 감정에 관한 소 소한 소설 한편도 '진짜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그런 얘기…”
몰리의 표정을 알아차린 애나가 말을 멈췄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몰리. 그 얘기 해주길 원했잖아. 그래서 하는 거야.
사실 또 할 얘기가 있어. 우울하긴 해도 엄청 재미있는 얘기야.
지금, 그러니까 1957년 우린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잖니.
그런데 나로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종의 현상이 갑자기 영국에서 벌어지고 있단 말이지, 아주 많은 이들이, 그것도 당과 아무 관련도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들고일어나 자기들이 방금 막 그런 생각을 해냈다는 식으로 외쳐대는 거야.
감정에 관한 소소한 소설이나 연극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이야.
이 말 들으면 깜짝 놀랄 텐데, 그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게 경제 아니면, 새 질서에 반대하는 자들을 무참히 쏘아 죽이는 기관총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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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열권 이상의 책을 읽어대며 서평을 쓰던 석달간 깨달은 것이 있다.
그 책들을 읽을 때 가졌던 관심은 가령 토마스 만을 읽을 때 느꼈던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
만은 작가라는 단어가 지닌 고전적 의미에 부합하는 마지막 작가, 즉 삶에 관한 철학적 발언을 하고자 소설 형식을 차용한 작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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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쟁이 세계 다른 지역에서 촉발한 열의, 신념, 끔찍한 필요가 무엇이든, 우리가 살던 곳에서는 터진 그 순간부터 이중적인 감정을 유발한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전쟁이야말로 우리에게 정말 멋진 무언가가 되리라는 사실이 곧바로 분명해졌다.
이 점은 전문가들의 설명을 요하는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물질적인 번영이 중앙아프리카와 남아프리카를 눈에 띄게 강타했다.
갑자기 모든 사람이 훨씬 더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되었고, 심지어 아프리카인들에게도, 생명을 부지하고 일할 수 있을 만큼의 최소한만 소유하도록 설계된 그들의 경제구조에서도 전시의 번영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갑자기 생긴 돈으로 살 수 있는 물자가 심각하게 부족해지는 현상도 벌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삶의 즐거움을 방해할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전에는 수입되던 물품들을 지역 제조업자들이 만들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전쟁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음을 다른 방식으로 입증해 보였다.
가장 비능률적이고 후진적인 노동력에 기초한 누추하고 마비된 경제였기에 어떤 형태로든 외부로부터 충격이 필요했으니, 전쟁이 바로 그런 충격이었다.
냉소주의가 만연한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처음에는 수치스러워했지만 그 감정이 지겨워질 무렵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이 전쟁은 히틀러의 사악한 교리와 인종주의 등등에 맞서 싸우는 십자군 전쟁으로 제시되었으나, 사실 아프리카 전체 면적의 절반에 이르는 그 거대한 땅덩어리는 바로 그 인종적 차이에 의해, 즉 한 집단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는, 히틀러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대전제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대륙 전역의 아프리카인 대다수는 자신의 백인 나리가 인종주의라는 악마에 대항하겠다며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광경을 냉소적으로 지켜보며 비웃고 있었다.
적어도 약간의 교육이라도 받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랬다.
자신들의 땅에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쳐 지켜내려 했을 신조에 대항하여 어떤 전선에라도 나가 싸우겠다는 열의로 가득 찬 백인 나리들의 모습이 그들에겐 우스꽝스러웠다.
전쟁 내내 신문 특파원 칼럼은 아프리카인 병사의 손에 그토록 많은 싸구려 총을 쥐여주는 일이
과연 안전한가를 두고 벌이는 논쟁들로 채워졌다.
그 병사가 언제든 총구를 백인 주인 쪽으로 돌릴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유용한 지식을 나중에 이용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매우 타당하게도, 안전하지 않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발발한 순간부터 전쟁이 우리에게 유쾌한 아이러니를 선사하게 된 그럴싸한 이유로 다음 두가지를 들 수 있다.
(나는 다시 그 잘못된 태도로 빠져들고 있다.
그 태도를 증오함에도, 그리고 전쟁의 와중에 우리 모두가 여러달을, 아니 여러해를 그 속에서 살았고, 그게 우리 전부를 엄청나게 망가뜨린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그런 태도를 취함으로써 우리는 자기를 벌하고 감정을 가둬놓았으며, 어긋나는 것들을 맞춰 전체를 구성하는 일을 하지 못했거나, 하기를 거부했다.
아무리 끔찍해도 그 속에서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전체를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도, 파괴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개인의 죽음 혹은 궁핍화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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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채 못되어 우리 그룹은 여러 하위 조직과 배신자들, 한둘을 제외하면 끊임 없이 구성원이 바뀌는 충직한 강경파로 분열되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우리의 감정적인 활력은 소진되었다.
태생부터 자기파괴 과정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잘 알지만, 대체 언제 우리 말과 행동의 기조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뀐 것인지는 꼭 집어 말할 수 없다.
열심히 활동하고는 있었으나, 줄곧 깊어지는 냉소가 늘 우리를 따라다녔다.
공식적인 모임이 아닌 곳에서 우리는 신념으로 발언했던 내용과 어긋나는 농담을 즐기곤 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람들의 농담을 경계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약간은 악의적인 어조와 목소리에 실린 일말의 냉소가 10년 안에 한 사람의 인간성 전체를 파괴하는 암세포로 발전할 수도 있다.
정치조직이나 공산주의 단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을 나는 자주 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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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몰랐지만 내가 진정으로 알게 된 건, 누군가를 묘사할 때 이런 단어들은 모두 무의미하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을 묘사할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상석에 딱딱한 자세로 앉은 채, 빌리는 잠시 그의 둥근 안경알이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반짝이며 빛나도록 했다.
그런 다음 공식적인 어조로, 그러나 무뚝뚝하고 어색한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서 입을 열었다…”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요점은, 내가 집착하는 게 바로 이 점이기도 한데(그토록 오래전에, 향후 어떤 모습이 될지 짐작조차 못하는 상태에서 부질없이 작성한 그 반의어의 목록에 바로 이런 집착이 드러나다니 참 묘한 일이다), 착한/ 나쁜, 강한/약한 같은 단어들이 다 상관없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무도덕을 용인하고, 그저 나와는 상관없다는 이유로 '이야기'를, 그러니까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그 무도덕을 승인한다는 사실이다.
독자가 빌리와 메리로즈를 실제 인물로 느낄 수 있도록 묘사하는 일이 내겐 중요하다.
내가 좌파 내부에서 혹은 주변부에서 20년을 살았다는 건 예술에서의 도덕이라는 문제에 20년간 몰두했다는 뜻이고, 그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내게 남아 있는 건 그게 전부이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지금 인간의 개성이라는 그 고유한 불꽃이 내게는 너무도 신성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문제는 사소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게 의미하는 바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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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폴은 멋대로 공상의 나래를 펼쳤고, 이에 대해 우리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우리가 예측한 내용과 너무 달라서였다.
더구나 우린 그의 말투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지금은 그게 좌절된 이상주의임을 안다.
폴에 대해 내가 그런 표현을 쓰다니 놀랍다.
전에는 그가 그런 이상주의를 지닐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폴이 말을 이었다.
"다른 가능성도 있기는 해. 만약 흑인 군대가 승리한다면?
그럴 땐 현명한 민족주의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는데, 민족주의 감정을 강화하고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지.
동지들,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경우 진보주의자로서 우리의 책무는 민족주의 국가들을 지지하는 일일 텐데, 정작 그 나라들은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그 모든 불평등한 자본주의적 윤리를 장려하겠지?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난 그렇다고 봐.
내 수정 구슬에 그런 미래가 나타나거든. 어쨌든 그걸 우리는 지지해야 할 거야. 그럴 수밖에.
대안이라곤 아무것도 없잖아."
"너 술 한잔 해야겠다." 이쯤에서 빌리가 말했다.
도로변 호텔 술집들은 죄다 이미 문을 닫은 때라 폴은 그냥 곯아떨어졌다.
메리로즈도 잠들어 있었고 지미도 그랬다.
앞 좌석의 빌리 옆에 앉아 있는 테드만 깨어서 이런저런 아리아 곡조를 휘파람으로 흥얼대고 있었다.
내 생각에 그는 폴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가 휘파람을 불거나 노래를 부르는 건 언제나 못마땅하다는 신호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난 이런 생각을 했다.
끝없이 이어진 분석적인 논쟁의 시간 내내 단 한번이라도 우리가 진실 근처에 (물론 그나마도 턱없이 못 미치긴 했으나) 다가갔다면, 그건 폴이 분노에 찬 풍자의 정신으로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 순간뿐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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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숱하게 생각해왔던 이 문제에 관해 다시 생각하다가, 나를 사로잡아온 또 한가지 문제와 우회적으로 마주쳤음을 깨닫는다.
물론 바로 '개인성'의 문제다.
'개인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쓰인 소설 태반이 그 주제에 관한 것들이고 사회학자나 다른 학자들이 닳도록 다룬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앎이 가하는 압력으로 인간의 개성은 산산조각이 나 사라졌다는 얘기를 하도 자주 들어 서 이제는 나도 그 말을 믿게 되었다.
하지만 유칼립투스 아래 그 무리를 회고하면서, 내 기억 속에 다시 그들을 되살리면서, 그 말이 헛소리에 불과함을 불현듯 깨닫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메리로즈를 만난대도 그녀는 어떤 몸짓을 하거나 특정한 방식으로 눈길을 돌릴 테고, 바로 그 때문에 파괴될 수 없는 메리로즈로 남는 것이다.
혹은 그녀가 '파탄을 맞거나' 미쳐 버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녀는 자신을 구성한 부분들로 조각날 것이고, 연결 고리는 일부 사라졌어도 그 몸짓, 그 눈동자의 움직임은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개인성의 증발에 관해 지금까지 나온 이 모든 주장, 이 반휴머니즘적인 겁박도, 충분한 감정적 에너지를 발휘하여 기억 속에 내가 알던 사람들을 빚어내는 지점에선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는 가만히 앉아 그 먼지 냄새와 달빛을 떠올리며 테드가 조지에게 포도주잔 건네는 모습을, 그러자 조지가 지나치게 고마워하는 모습을 본다.
혹은 슬로모션 영화에서처럼 메리로즈가 끔찍하도록 참을성 있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방금 영화라는 단어를 썼다.
그래. 회화나 영화에서 미소, 표정, 몸짓이 절대적인 확실성을 담보하듯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이 그렇다.
그러면 내가 집착하는 확실성은 시각예술에만 존재할 뿐 소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걸까? 이미 소설은 해체와 몰락의 손아귀에 사로잡혔으니까.
소설가로서 그 이면에 놓인 복잡성을 그렇게 잘 이해하면서도, 그러한 미소와 표정을 기억하는 일에 이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렇지만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는 종이 위에 단 한자도 옮겨놓을 수 없으리라.
내 살갗에 내리쬐던 그 뜨거운 햇빛의 속성을 의식적으로 기억해냄으로써 이 추운 북녘 도시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애쓰곤 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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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폴은 빌리를 거부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지에게 진실을 전해주기로 작정했다.
그는 테드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테드를 바라보며, 가볍고, 장난기 어린 폴의 도전에 그가 과연 응할까 궁금해했던 기억이 난다. 테드는 망설였고 불편지 못한 가능성에서 비롯하는 보드라운 고통이리라.
연회장 옆 키 큰 자카란다 아래, 빌리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에 이르렀을 때 폴은 날 자기 쪽으로 돌려놓고 빙긋 웃었는데, 그 순간 그 달콤한 고통이 나를 거듭 관통했다.
"애나," 그가 말했다.
아니, 노래했다.
"애나, 아름다운 애나, 어이없는 애나, 정신 나간 애나, 이 황야에서 우리에게 안식을 주는 사람, 관대하고 즐거운 검은 눈동자를 지닌 애나."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동안 태양은 나무의 두꺼운 녹색 레이스천을 통과하여 예리한 황금 바늘로 우리를 찔러댔다.
그때 그의 말은 일종의 계시였다.
당시 난 늘 혼란스러웠고, 불만으로 가득했고, 불행했고, 걸맞은 능력이 없어 고통스러웠으며, 온갖 종류의 불가능한 미래를 하릴없이 갈구하며 지내고 있었기에, '관대하고 즐거운 눈동자'라는 표현에 담긴 정신과 태도는 내게 수십년 뒤에나 가능할 터였다.
정말이지 그 시절 난 사람들을 내 필요를 위한 부속품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돌아보면서 이제야 깨닫는다.
그럼에도 그 시절 난 환히 불을 밝힌 일종의 연무 속에 살면서, 내 욕망이 바뀔 때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깜박였다.
물론 이는 젊은 시절을 묘사하는 한가지 방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중 유일하게 '즐거운 눈동자'를 지닌 사람은 폴이었고, 서로의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들어설 때 나는 그를 바라보며 이토록 태연자약한 젊은이가 나만큼이나 불행하고 고통을 당한다는 게 대체 가능한 일인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내가 그처럼 '즐거운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면, 그건 무슨 뜻일까?
그 시절 자주 그랬듯이 몇초간 갑작스레 머릿속을 헤집는 날카로운 우울감이 엄습하여, 나는 폴의 곁을 떠나 혼자 내닫이 창 쪽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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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빌리를 객실에 남겨두고 베란다로 나갔다.
엷어진 안개 사이로 이제 반쯤 구름 낀 하늘에서 차가운 빛이 희미하게 퍼지고 있었다.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 폴이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 모든 도취와 분노와 비참함이 내 안에서 폭탄 터지듯 솟구쳤고 폴과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상관없는 심정이 되었다.
내가 그에게로 뛰어가자 그는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묵묵히 달렸다.
어디로 달리는지, 왜 달리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흙탕물이 튀는 아스팔트 위에서 미끄러지고 비틀거리며 동쪽으로 난 간선도로를 따라 줄곧 달렸고,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로 이어지는, 거친 풀이 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을 따라 처음 보는 모래 웅덩이를 통과한 뒤 다시 내리기 시작한 연무 사이를 뚫고 줄곧 달렸다.
어둡고 축축한 나무들이 길 양옆에 어슴푸레 솟아났다가 뒤로 사라지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뛰
어갔다.
숨이 가빠지자, 우리는 비틀걸음으로 초원을 향해 난 샛길에 접어들었다.
나지막하니 잘 보이지 않는 잎이 무성한 식물들로 가득 찬 길이었다.
우리는 조금 더 달리다가 젖은 잎사귀 사이에서 서로를 안은 채 넘어졌다.
가랑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가운데 위로는 낮고 검은 구름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달이 어둠과 씨름하며 빛나다가 완전히 사라지자 다시 암흑이 우리를 에워쌌다.
너무도 심하게 몸을 떠는 서로를 보며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가 달가닥거릴 정도였다.
나는 얇은 크레이프 드레스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였다.
폴이 군복 상의를 벗어 내게 둘러주었고, 우리는 다시 바닥에 누웠다.
나란히 누운 우리의 육신만이 뜨거울 뿐 다른 건 전부 축축하고 차가웠다.
심지어 이 순간에도 냉정을 유지하며 폴이 말했다.
"사랑스러운 애나, 이런 짓은 처음이다.
너 처럼 경험 많은 여성을 고르다니, 나 진짜 영리하지?"
그 말 때문에 난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 나나 전혀 영리하지 않았고, 그저 너무 행복했다.
시간이 꽤 흐르자 빛이 우리 위에서 또렷해졌고, 멀리 호텔에서 들려오던 조니의 피아노 소리가 잦아 들었다.
구름 걷힌 하늘에 별이 반짝였다.
우리는 일어나 피아노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왔는지 기억해내면서 호텔 방향으로 짐작되는 길을 향해 걸어갔다.
관목과 풀 사이로, 뜨거운 손을 맞잡은 채 비틀거리며 우리는 걸었고, 눈물과 풀이 머금은 물기 가 우리 얼굴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호텔은 나타나지 않았다.
춤곡 소리를 바람이 마음대로 비틀었던 게 틀림없었다.
어둠속에서 우리는 기어가고 올라가다가 마침내 작은 언덕 꼭대기에 이르렀다.
그곳, 회색빛으로 반짝이는 별들 아래 반경 수마일의 공간에 완전한 정적의 암흑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팔로 서로를 감싼 채 젖은 화강암 바위에 나란히 앉아 새벽이 오길 기다렸다.
너무 축축하고 춥고 지친 탓에 입도 열기 어려웠다.
차가운 서로의 뺨을 맞대고서 우린 그저 기다렸다.
내 인생 전부를 통틀어 그 순간처럼 필사적이고 거칠고 고통스럽게 행복했던 때는 결코 없었다.
그 행복감이 너무도 강력했기에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게 행복이다.
동시에 난 그 행복이 지극한 추악함과 불행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줄곧 마주 대고 있던 싸늘한 우리 얼굴을 따라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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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전쟁의 접경지대』의 소재이기도 했다.
물론 이 두 이야기에 공통점이라곤 없다.
소설을 쓰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을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달빛이 차갑고 단단하게 반짝이며 주위를 온통 밝히는 가운데 난 마쇼피 호텔의 객실동 계단에 서 있었다.
거기 유칼립투스 너머 철로 위로 화물열차가 들어와 멈춰서더니 쉭 소리를 내고 덜커덩거리며 하얀 증기 구름을 내뿜었다.
열차 옆 조지의 트럭 뒤에는 얄팍한 포장 상자처럼 갈색 페인트칠을 한 캐러밴이 있었다.
그때 조지는 마리와 함께 캐러밴에 있었다.
방금 그녀가 집에서 나와 그리로 올라가는 모습을 본 참이었다.
서늘하고 축축한 화단에서 식물이 생장하며 내뿜는 강렬한 냄새가 풍겼다.
연회장에서는 조니의 피아노 연주가 들려오고 있었다.
등 뒤로 폴과 지미가 빌리에게 말을 건네는 소리, 폴이 갑작스레 젊은이 특유의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토록 위험하고 감미로운 도취의 감각들로 가득 차 있었기에 난 곧장 계단에서 공중으로 걸어 올라가 취기의 힘으로 별들에까지도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도 알고 있었지만, 그 도취는 무한한 가능성에서 나온 무모함이었고, 위험, 곧 전쟁 자체의 은밀하고 추악하며 경악스러운 맥박인 그 위험에서 비롯한 무모함이었으며, 우리 모두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원했던 죽음에 대한 무모함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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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과 저녁을 먹었다.
우린 거의 만나지 않는데, 늘 정치적으로 불화의 언저리에 이르기 때문이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당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이상에 차마 작별을 고할 수 없어서야."
진부하기 짝이 없다.
한편 재미있는 점은, 그 말이 단지 공산당만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준다는 그의 믿음을, 그리고 나 또한 그런 믿음을 가져야 함을 암시한다는 사실이다.
그도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무엇보다 그 말은 그때껏 그가 말한 내용 전부와 모순되었기에 내게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나는 프라하 사건이 명백한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었고, 그는 당이 "실수"는 할 수 있을지언정 고의로 냉소를 보일 리는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입당했을 때 내 머리 뒤편 어딘가에 온전함에 대한 갈구,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이 분열되고 찢기고 불만 족스러운 삶의 상태를 끝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음을 상기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입당은 그 분열을 심화했다.
여하튼 모든 공식적인 신조가 우리 사회의 이념과 어긋나는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은 차원의, 아니 이해하기 훨씬 더 어려운 어떤 차원의 문제다.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자 머릿속이 소용돌이치며 멍해졌고 혼란과 극도의 피로가 몰려왔
다.
마이클은 밤늦게 돌아왔다.
생각해보려 애쓰던 내용을 들려주었다.
어쨌든 그는 정신과 의사이자 영혼의 치유자니까.
아주 담담하고 아이러니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더 니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친애하는 애나, 그 문제에 관해서라면, 부엌에 앉아 있든 이인용 침대에 누워 있든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 충분히 복잡해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그런데 당신은 세상이 뒤집어지는 와중에 인간의 영혼을 알 수 없다고 걱정하면서 그렇게 앉아 있는 거야?"
이 말에 난 그냥 그 정도에서 문제를 접어버렸고 그래서 기뻤다.
하지만 더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기쁨을 느끼자니 죄책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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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스딸린이 사망했다.
몰리와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으로 부엌에 앉아 있었다.
나는 계속 이렇게 말했다.
"이러면 우린 일관성이 없는 거다. 기뻐해야 마땅하잖아.
여러달 전부터 어서 스딸린이 죽어야 한다고 말해놓고는."
몰리의 생각은 달랐다.
"나도 모르겠다, 애나. 아마 그 사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은 몰랐을 수도 있어."
그러곤 웃으며 덧붙였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건 아마 겁을 먹었기 때문이겠지?
이미 알고 있는 사악함이 모르는 사악함보다는 낫잖니."
"글쎄, 더 나쁠 수 없겠지."
"어째서 그럴까? 다들 사태가 진전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니?
가끔은 우리가 독재와 공포의 새로운 빙하기로 접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누가 그걸 막겠어? 우리가?"
나중에 마이클이 왔을 때, 몰리가 한 이야기, 그러니까 스딸린은 몰랐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려 주었다.
우리가 그렇게도 위대한 인물을 원하며, 모든 증거에 맞서 거듭해 그런 인물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이클은 지치고 굳은 얼굴이었다.
놀랍게도 그가 이런 말을 했다.
"글쎄,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게 요점이겠지.
어떤 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진실일 수 있다는 거.
그 무엇에 대해서도 진실을 알 길은 결코 없다는 거.
뭐든 가능하다는 거. 모든 게 너무나 미쳐 돌아가는 상태라 뭐든 가능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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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에 가입한 많은 이는 사실 전혀 정치적이지 않으며, 그보다는 강한 봉사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외로운 부류가 있는데, 그들에게 당은 가족이나 다를 바 없다.
시인 폴은 지난주에 술에 취해 당이 아주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다.
하지만 1935년 입당한 그가 만약 당을 떠난다면 '자신의 인생 전부'를 떠나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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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 당신과 난 실패 한 자들이야.
우리는 위대한 인간들이 언제나 알고 있었던 진실을 우리보다 아주 조금 더 멍청한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려고 투쟁하면서 삶을 소진하고 있지.
수천년간 위대한 인간들은 아픈 사람을 독방에 감금해두면 상태가 악화될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
지주와 경찰을 무서워하는 가난한 자는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도.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지.
하지만 영국의 수많은 개화된 대중은 어떨까?
아직도 모르고 있어.
그래서 엘라, 당신이나 나 같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그걸 알려줘야 하는 거야.
위대한 인간들이야 귀찮은 일을 떠맡기엔 너무 위대하시니 말이야.
그 사람들은 이미 화성을 식민지로 개척하고 달 표면을 관개하는 방법을 알아내는 중이잖아.
우리 시대에 중요한 건 바로 그런 일들이니까.
당신이나 나야, 뭐 바윗덩어리를 밀어 올리는 사람들인 셈이지.
한평생 우린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산 위로 밀어 올리면서 기운과 재능을 전부 소진하게 될 거야. 그 바윗덩어리는 위대한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아는 진실이고, 산은 인류의 우둔함이지.
우리가 그 바윗덩어리를 밀고 있다고.
가끔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죽는 편이 오히려 나았겠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전에는 창조적인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직장 일은 어떠냐고?
닥터 섀컬리라고 있어.
버밍엄이 고향인, 키가 작고 늘 겁에 질려 있는, 여자를 사랑하는 법을 제대로 몰라서 자기 아내를 겁박하는 못난 녀석이지.
난 이자를 붙잡고 떠들어대면서 시간을 보내.
병실 문은 열어놓아야 한다고, 단추가 박힌 하얀 가죽을 덧댄 어둡고 비좁은 방에 불쌍한 환자들
을 격리하면 안된다고, 구속복은 멍청한 발상이라고.
그런 말이나 떠들면서 매일매일을 허비하는 거야.
멍청한 사회가 만들 어낸 질병을 치료하면서…
그리고 엘라, 당신은 주인보다 못한 게 없는 노동자 아내들에게, 그들의 속물근성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업가들이 고안해낸 유행하는 스타일과 인테리어를 소비하라고 권유하잖아.
또 모두의 우둔함이라는 굴레를 쓴 노예인 불쌍한 여자들한테,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머리에서 떨쳐내려면 집 밖으로 나가 사교 클럽 같은 데 가입하거나 이런저런 건전한 취미를 한번 가져보라고 충고하기도 하지.
그 건전한 취미가 약발이 별로 없으면, 약발이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그 여자들은 결국 나한테 외래 환자로 오겠지…
엘라, 난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어.
이런 삶이라면 그냥 끝내는 게 좋겠다고.
아니, 물론 당신은 이해 못할 거야, 이해가 안된다고 얼굴에 쓰여 있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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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률적으로 살지 않으면 내가 아니지." 그가 곧장 대꾸했다.
"집에 가선 모든 일을 다 처리해.
난방 기기며 전기 요금이며, 저렴한 카펫은 어디에서 살지, 아이들 학교 일은 어떻게 할지.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하고 있어."
엘라가 침묵을 지키자 그는 고집스럽게 덧붙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엘라 당신은 속물이야.
어쩌면 이게 아내가 원하는 삶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참지 못하지."
"그래, 참기 힘들어. 믿기지가 않아.
이 세상 어떤 여자가 사랑 없이 살고 싶을까?"
"당신, 참 못 말리는 완벽주의자야. 극단적이기도 하고.
모든 걸 당신 머릿속에 존재하는 어떤 이상에 맞춰서 재단하고는, 당신의 그 아름다운 이상에 못 미치면 경멸하며 아예 손을 떼버리지.
아니, 아름답지 못한 이상이라도 아름다운 척 스스로를 기만하는 건가?"
엘라는 생각했다. 우리 얘길 하는구나.
폴이 말을 이었다.
"가령 뮤리얼도 당신한테 똑같은 얘길 할 수 있어.
대체 왜 그 여자는 천연덕스럽게 내 남편의 정부로 사는 걸까?
하나도 안정적이지 못한데? 남들 눈에 번듯한 것도 아니고.”
"아, 그 안정적인 삶!"
"그래, 바로 그거야. 당신 방금 경멸하면서 아, 그 안정적인 삶! 이렇게 말했지.
아, 그 번듯함! 하지만 뮤리얼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거야.
그 여자한테는 정말 중요하니까.
거의 모든 사람에게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니까.”
지금 그가 화난, 심지어 상처 받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엘라는 문득 깨달았다.
그가 아내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으며(물론 엘라와 함께 있을 때 그가 드려내는 가치관은 아내와 달랐지만), 그 또한 안정적이고 남들 눈에 번듯한 삶을 중시한다는 생각도 불현듯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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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깼을 때 엘라는 울고 있었다.
폴은 결별을 원했던 여자, 그 여자 때문에 나이지리아로 떠났고, 그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헤어지고 싶어했던 여자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뇌리를 스쳤다.
자신이 바로 그 '제멋대로 구는 여자’였다.
아마도 폴의 편지에 있었을 어떤 구절 때문에 닥터 웨스트가 일부러 자기에게 그 얘기를 했다는 사실도 엘라는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닥터 웨스트가 자신의 번듯한 세상에 있는 다른 한 구성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엘라에게 내린 경고 조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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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며 밤마다 그녀는 그러고 서 있었다.
거기 그렇게 선 채 마음속으로 이건 미친 짓이야, 이렇게 미쳐가는 거구나 되뇌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했다.
비이성적인 행동인 줄 뻔히 알면서도 도저히 멈출 수 없다면, 바로 그게 미쳐가는 것 아닌가.
폴이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녀는 변함없이 옷을 차려입고 그 창가에서 매일 밤 기다리며 서 있었다.
거기 서서 스스로를 바라보다가 그녀는 이 광기가 폴과의 관계가 불가피하게 끝나리라는 걸 내다보지 못하게 만든 그 광기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때 비로소 자신을 그토록 행복하게 했던 그 순진함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그토록 어리석은 신의와 순진함과 신뢰를 갖고 사랑했고, 그랬기에 지극히 논리적인 결과로 지금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한 남자를 이렇게 창가에 서서 기다리는 거야.
몇주가 지난 후 닥터 웨스트는 득의양양한 악의를 감추고 겉으로는 별일 아니라는 듯 폴이 나이지리아로 돌아갔다는 말을 전했다.
“부인은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대요." 닥터 웨스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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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 상자를 내게서 가져가더니 열어보았다.
나는 보지 않으려고 몸을 돌렸지만, 그들은 기뻐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그것을 보았고, 상자 안에 뭔가 다른 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은 녹색 악어였는데, 조소하듯 주둥이를 벌렸다 다물었다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비취나 에메랄드로 만든 악어상이라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살아 있었다.
얼어붙은 굵은 눈물방울들이 뺨 위로 굴러떨어지며 다이아몬드로 변하고 있었다.
사업가들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큰 소리로 웃으며 잠에서 깼다.
마크스 부인은 아무 논평 없이 이 꿈을 경청했는 데 별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우린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나눴으나 그녀는 내가 그랬듯이 마음속으로 이미 거리를 두고 있었 다.
자신이 필요한 경우에는 "잠깐 들러 나를 만나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나는 속으로, 당신이 내게 당신의 상을 물려준 마당에 왜 당신이 나한테 필요하겠냐고 생각했다. 어려움에 처할 때면 언제나 그 풍채 좋은 어머니 같은 마녀의 꿈을 꾸게 되리라는 것을 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마크스 부인은 아주 작은 체격에 강단 있고 활력 넘치는 여자였지만, 내 꿈에서는 언제나 크고 힘센 모습이었다.)
빛을 차단한 그 엄숙한 방을 나는 빠져 나왔다.
반쯤은 그 안에 있고, 반쯤은 벗어난 채로 그토록 많은 환상과 꿈의 시간들을 보냈던 곳.
예술을 섬기는 제단과도 같은 그 방에서 나온 나는 차갑고 볼품없는 보도에 발을 디뎠다.
가게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이 보였다.
왜소하고 핏기 없는 얼굴, 무미건조하고 까칠해 보이는 여자.
내 얼굴엔 조소의 표정도 있었다.
꿈에서 본 수정 장식함 속 그 악의에 찬 작은 녹색 악어의 주둥이가 머금고 있던, 바로 그 조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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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게 여자들이 사람들을 보는 방식이긴 해.
특히 자기 자식을 대할 때 그렇지.
처음에는 아기가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는 채 아홉달을 보내잖아.
가끔 난 재닛이 아들이라면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정말 모르겠니? 아기들은 이런저런 단계를 거치잖니, 그러다가 어린이가 되고. 한 여자가 자기 아이를 볼 때 는 아이의 예전 모습과 지금 모습을 한꺼번에 보기 마련이야.
나도 이따금 재닛을 볼 때면 조그만 아기로 보이기도 하고, 꼭 내 배 속에 들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갖가지 몸집의 어린 소녀로 보이기도 한단다. 그 모든 게 한꺼번에 보이는 거야."
자신을 응시하는 토미의 눈에 비난과 냉소가 어려 있었지만 애나는 굽히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여자들은 사물을 본단다.
일종의 연속적인 창조적 흐름 속에서 모든 걸 본다고.
글쎄, 어쩌면 그게 당연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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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솔직하지 못한 거네요. 결국 뭔가를 주장하고 계신 거잖아요.
아닌가요? 제 말이 맞죠.
아줌마는 아버지같이 스스로를 틀에 가두는 사람들을 경멸해요.
그러면서 아줌마 역시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요. 똑같은 이유에서요.
아줌마는 두려운 거예요. 무책임하게 살고 있기도 하고요."
그는 보란 듯이 입을 삐 죽 내밀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최종 판결을 내렸다.
애나는 이 아이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녁 내내 그들은 바로 이 지점에 도달하려 애써온 것이다.
토미가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주 이 방 문을 열어두곤 했는데, 들어와서 공책들을 읽은 적 있니?"
"네, 어제도 왔었죠. 하지만 거리를 따라 걸어오시는 모습을 보고 마주치기 전에 떠났어요.
아무튼 전 아줌마가 솔직하지 못 하다고 생각했어요. 행복한 분이지만…”
"행복하다고? 내가?" 조소를 머금고 애나가 되물었다.
"그럼 만족하며 지내신다 정도로 해두죠. 맞잖아요.
엄마나 제가 아는 어느 누구보다 훨씬 더 그렇죠.
하지만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전부 거짓이에요.
여기 앉아 쓰고 또 쓰지만 아무도 그걸 볼 수 없으니까요.
그건 오만한 태도라고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죠.
게다가 아줌만 진짜 자기 모습을 그대로 인정할 만큼 정직하지도 않아요.
모든 게 분열되고 조각난 상태가 아줌마의 현실이죠.
그런데도 저를 애 취급하면서 넌 지금 나쁜 시기를 지나고 있어, 이렇게 얘기하시잖아요.
아줌마가 나쁜 시기를 보내지 않는다면, 그건 아줌마가 어떤 시기 자체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애써 자기 자신을 여러조각으로 나눠놓았으니까요.
모든 게 대혼란 상태라면, 현실이 그런 거죠.
어디에도 패턴 같은 건 없어요.
아줌마가 비겁한 마음으로 패턴을 만드는 것뿐이죠.
사람들은 조금도 선하지 않아요.
전부 다 식인종이죠. 따지고 보면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 쓰는 사람이 없거든요.
기껏해야 한명의 타인에게나 가족에게 잘하는 게 최선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이기주의일 뿐이지 선량하게 사는 건 아니잖아요.
정말이지 우린 짐승보다 하등 나을 게 없어요.
그냥 그런 척하는 거죠.
사실은 서로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이제 그는 애나가 아는 고집 세고 굼뜬 소년의 모습으로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다음 갑작스레 유쾌하고도 소름 돋는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 소리에서 번뜩이는 적의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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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나라에 가는 것보다 더 바라는 건 없지요. 하지만 어쩌죠?
입국 허가가 안 날 테니. 전 공산주의자라서요."
화들짝 놀란 그 푸른 눈동자가 구멍이라도 뚫을 듯 내 얼굴을 쳐다본다.
동시에 그녀는 호흡이 가빠지면서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자리를 황급히 뜨려는 무의식적인 동작을 취한다. 겁에 질린 게 확 드러난다.
나로선 좀 미안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다양한 이유에서 그 말을 꺼냈는데, 우선은 유치한 발상에서였다.
충격을 가하고 싶었던 것이다.
두번째 이유 역시 유치한데, 그 말을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일종의 직감 때문이었다.
나중에 누군가한테 "아, 그 여자 물론 공산주의자야"라는 말을 들으면, 이 여자는 내가 그 사실을 숨겼다고 생각하리라.
세번째 이유는 어떻게 나오나 궁금해서였다.
그녀는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이제 립스틱이 번져버린 분홍색 입술을 벌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음번엔 꼭 더 신중하 게 알아봐야겠어.
그녀는 스스로를 희생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날 아침 나는 반미위원회 등등에서 혹독한 심문을 당한 수십 명이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는 미국 신문 기사를 여러건 읽은 터였다.
그녀가 숨가쁘게 말한다.
"물론 여기 영국은 상황이 많이 다르겠죠. 그건 저도 알고 있지만요…”
세상 이치에 통달한 여자라는 가면이 빠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지자, 이제 그녀는 이렇게 내지른다.
“하지만 애나, 전 절대 짐작조차 못했어요…”
말인즉슨, 난 그대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대가 어떻게 공산주의자일 수 있냐는 거다.
이 말에, 이 말의 편협함에 난 너무도 화 가 나고, 이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언제나 느끼는 감정에 다시금 에워싸인다.
차라리 공산주의자인 것이,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실과 접촉하는 편이 낫다.
저렇게 멍청한 말이 나올 만큼 현실과 단절된 채 사는 것보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둘다 단단히 화가 난 상태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다.
2년 전 어느 러시아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보냈던 밤이 생각난다.
우리는 같은 언어, 즉 공산주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너무도 달라서 우리가 쓰는 문구는 예외 없이 서로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완벽한 비현실감이 엄습했던 그 밤이 깊었을 때, 아니 다음 날 새벽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 나는 안전하지만 비현실적인 상투어로 하던 얘기는 집어치우고 실제 일어난 일을 얘기했다.
모스끄바의 형무소에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는 잔에 관한 이야기였다.
공포심에 눌린 그 작가의 눈이 내 얼굴을 응시했고, 급히 달아나려는 듯한 무의식적인 움직임 역
시 똑같았다.
만일 그가 자기 나라에서 발설했다면 투옥될 수도 있는 어떤 사실을 난 입에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인즉 우리의 공통적인 철학에서 쓰이는 상투어들은 진실을 은폐하는 수단이었던 셈이다.
진실은 공산 주의자라는 딱지 외에 우리에게 어떤 공통점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미국인 여성의 경우, 우리는 밤새도록 민주주의의 언어를 쓰며 담소할 수 있을 터이나 그 언어들 역시 각기 다른 경험을 가리키리라.
그녀와 나는 거기 앉아 우리가 여자로서 서로에게 호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어떤 화제도 생각해낼 수 없었다.
그 러시아 작가 와 겪었던 그 순간 이후 더이상 아무런 나눌 말이 없었던 것처럼.
마침내 그녀가 말한다.
“그래요, 애나, 이렇게 까무러치게 놀란 적이 없네요. 도무지 이해가 안돼서요."
그 힐난하는 어조 에 난 다시 분노가 치민다.
심지어 그녀는 이렇게 덧붙이기까지 한다.
"물론 당신의 솔직함이 존경스럽긴 해요."
난 생각에 잠긴다.
글쎄, 만일 지금 이곳이 미국이라면 위원회들에 의해 난 토끼몰이를 당할 테고, 그런 상황에서 호텔 탁자에 보란 듯이 앉아 태연하게 공산주의자라고 말하진 못하겠지.
그러니 화를 내는 건 정직하지 못한 태도야.
어쨌든 분노를 느낀 나는 덤덤하게 이렇게 말한다.
"이 나라 작가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할 때는 미리 확인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꽤 많은 작가들이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 테니까요."
그러나 이제 그녀가 내게서 아주 많이 멀어졌다는 사실이 얼굴에 빤히 드러난다.
그녀는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범주상 공산주의자이고, 따라서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일 거라는 의심.
그러자 그 러시아 작가와 있었던 일이 다시 기억난다.
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하든지 아니면 거부하고 빠져나가든지 양자택일의 상황에서 그녀는 후자를 택하며 다 안다는 듯 비꼬는 표정으로
"글쎄, 조국의 동지가 적으로 변하는 걸 보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요"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당신은 자본의 편인 적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 미국인 남자가 우리 탁자 옆에 나타났다.
여자가 짐짓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자신을 의식하지 않자 평정을 잃은 걸까?
그게 사실인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다.
"이게 누구야, 제리잖아." 여자가 말한다.
"어쩌면 마주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런던에 있단 얘기 들었거든."
"오랜만이네." 그가 말한다. "어떻게 지내? 이렇게 만나니 좋네."
세련되고, 차분하고, 성격도 좋은 남자.
"이분은 울프 양이셔." 여자가 난처해하며 날 소개한다.
지금 친구에게 적을 소개하고 있구나, 어떤 식으로든 경고를 해야 하는데, 이런 기분이겠지.
"울프 양은 아주 널리 알려진 작가야." 그녀가 덧붙인다.
그 널리 알려진 작가라는 표현 덕에 그녀의 초조함이 좀 누그러진다.
내가 답한다.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일어나야 겠어요. 집에 가서 딸을 돌봐야 해서요."
안도의 기색이 역력하다.
우리 모두 레스토랑에서 나온다.
내가 작별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녀가 손을 남자의 팔꿈치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있다.
이런 말도 들린다.
"제리, 당신 만나서 정말 기뻐. 오늘 저녁은 쓸쓸히 보낼 줄 알았거든."
그의 대꾸. "친애하는 에디, 일부러 작정하는 날이 아니고야 당신이 하루 저녁이라도 쓸쓸하게 지낸 적이 있던가?"
여자는 그를 향해 담담하게 감사의 미소를 짓는다.
이 모든 것에도, 나로서는 우리 친교의 편안한 표면을 깨뜨린 순간만이 그날 저녁을 통틀어 우리가 정직했던 유일한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수치스럽고 불만스러우며 우울하다.
그 러시아인과 얘기를 나눴던 밤에 딱 그런 심정이었던 것처럼.
==
"부모님을 포함해 가족 중 일곱이 가스실에서, 살해되었어.
가장 친한 친구들 대부분도 죽었고.
공산주의자들 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살해당한 거지.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모두 낯선 나라 여기저기에서 난민 처지가 되었어
나 역시 절대 내 고향이 되지 못할 나라에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겠지."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 말의 의미를 상상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밖에 비가 내린 탓인지 빛이 둔탁하게 비쳐 들었다.
그의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이제는 여유 있고 차분하며 안심한 얼굴이었다.
침착하게 감은 눈과 그 위에서 부드럽게 빛나는 옅은 눈썹.
솔직하면서도 빈틈없는 미소를 지닌, 겁 없고 건방진 아이 시절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이 든 모습도 눈에 선하다.
쓰린 마음을 안고 살지만 지적인 고독 속에 갇힌, 까다롭지만 아는 게 많은 활동적인 노인의 모습.
나는 우리가, 아니 여자들이 아이들에 대해 갖는 감정에 젖어들었다.
강렬한 승리의 감정.
즉 모든 어려움에도, 죽음이 무겁게 내리눌러도, 이 사람은 여기 이 숨쉬는 육신이라는 기적으로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
나는 이 감정을 쓸어 올리고 힘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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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닛의 방에 들어서서 문을 닫은 다음, 검은 머리를 요정같이 풀어헤치고 작고 여린 얼굴(내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침대에 앉아 있는 딸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분한 마음은 극기의 습관 아래로 사라지며 그 즉시 애정으로 변한다.
6시 30분, 방은 아주 싸늘하다.
재닛의 창에도 회색 물줄기가 흐른다.
내가 가스난로를 켜는 동안 재닛은 밝고 다채로운 색상의 만화책에 에워싸인 채 침대에 앉아 내가 모든 일을 평소처럼 하는지 지켜 보면서 동시에 만화책을 읽고 있다.
애정 어린 마음으로, 나는 딸아이 크기만큼 몸이 움츠러들어 재닛이 된다.
커다란 눈망울 같은 거대한 노란 불, 뭐든 들어올 수 있을 그 거대한 창, 태양을 기다리는 회색의 불길한 빛, 비를 털어버릴 악마 혹은 천사.
이윽고 나는 다시 애나로 돌아온다.
큰 침대에 앉은 작은 아이 재닛을 본다.
기차가 지나가자 벽이 약하게 진동한다.
아이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고 따스한 살과 머리칼, 자는 동안 덥혀진 잠옷의 섬유에서 풍기는 좋은 냄새를 맡는다.
방이 데워지는 동안 난 부엌으로 가서 딸의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시리얼과 달걀 프라이와 차를 쟁반에 담아 방으로 들어가고, 딸애가 침대에 앉아서 먹는 동안 나는 차를 마시며 담배를 피운다.
집은 아직 고요하다.
몰리는 두어시간 더 자다 일어날 것이다.
토미는 어제 밤늦게 여자애를 데리고 왔다.
그들 역시 잠들어 있을 것이다.
벽 너머 아기가 울고 있다.
한때 재닛이 울었던 것처럼 그 아기가 울면 연속성과 휴식의 느낌이 밀려든다.
젖을 주면 곧 잠들, 반쯤 잠든 아기의 만족스러운 울음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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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혹은 말라버린 사유의 고갱이는 새로운 생명의 활기찬 싹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데, 동시에 그 싹들 역시 너무나 빨리 수액이 죄다 말라버린 죽은 나무가 되는 거야.
달리 말해 바로 나, '애나 동지’가 - 나를 부르는 뷰트 동지의 음성에 담긴 그 조롱의 어조를 떠올리자 두려움이 엄습한다 - 뷰트 동지를 존재하게 하고, 먹여 살리며, 때가 되면 나 또한 그런 모습으로 변할 테지.
이런 생각, 그러니까 애당초 옳고 그른 건 없고 오직 하나의 과정 혹은 그냥 바퀴가 계속 돌아가는 것뿐이라는 생각을 하자, 내 안의 모든 것이 그런 인생관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두려움에 황망해지고, 최근 수년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때면 어김없이 나를 감금하는 것 같았던 악몽 속으로 다시 돌아간 듯하다.
밤낮없이 나를 찾아오는 그 악몽은 실로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데, 가장 간단하게 묘사하면 이렇다.
한 남자가 눈을 가린 채 벽돌 벽에 등을 대고 서 있다.
죽을 만큼 심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다.
그의 맞은편에는 소총을 든 여섯 남자가 이미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지휘관인 일곱번째 남자는 손을 올리고 있다.
그가 손을 떨어뜨리면 총성이 울리고 포로는 사살되어 쓰러지리라.
하지만 갑자기 의외의 상황이 전개된다.
물론 그 일곱 번째 남자는 이런 일이 생길까봐 내내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다.
바깥쪽 거리에서 고함 소리와 싸우는 소리가 터져 나온다.
여섯 남자는 뭔가를 묻는 표정으로 자신들의 지휘관인 일곱번째 남자를 바라본다.
지휘관은 바깥의 싸움이 어떻게 될지 결과를 기다리며 서 있는다.
함성이 들려온다. "우리가 이겼다!"
그 말에 지휘관은 공간을 가로질러 벽으로 가서 포박당한 남자를 풀어주고 그 자리에 대신 선다. 지금까지 묶여 있던 남자가 지휘관을 묶는다.
한순간, 바로 이때가 그 악몽의 끔찍한 순간인데, 그 둘은 미소 띤 얼굴로 서로를 쳐다본다.
짧고 씁쓸한, 그러나 순응하는 미소. 그 미소로 그들은 형제가 된다.
바로 그 미소 띤 얼굴에 내가 피하고 싶은 끔찍한 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이 모든 창조적인 감정을 비워버리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이제 일곱번째 남자, 그 지휘관이 눈이 가려진 채 벽에 등을 대고 서서 기다린다.
조금 전까지 포로였던 사람은 여전히 사격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남자들 쪽으로 간다.
총성이 울리고, 벽 앞에 선 몸이 움찔하더니 쓰러진다.
여섯 군인은 경련과 메스꺼움에 시달린다.
그들은 살해의 기억을 잠재우기 위해 술을 마시러 갈 것이다.
하지만 이제 자유의 몸이 된 남자, 한때 묶여 있던 그 남자는 다른 군인들이 자신을 저주하고 증오하며 비틀비틀 사라질 때, 마치 그 저주와 증오가 자신이 아닌 방금 사망한 지휘관에게 쏟아진 것인 양 태연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무고한 여섯 병사에게 보내는 이 남자의 미소에는 사태의 진실을 간파한 끔찍한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이것이 나의 악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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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 이야기들 또는 소설들을, 단 하나라도 진실을 담은 단락이나 문장, 구절이 들어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읽으면서, 나는 진정한 예술이란 그게 무엇이든 깊고, 불현듯 드러나는, 가릴 수 없는 사적인 감정으로부터 번득이며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심지어 번역문으로 읽을 때에도 참다운 개인적인 감정의 번득임을 오인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단 한번이라도, 참다운 개인적인 감정으로만 쓰인 단편이나 소설, 심지어 기사를 발견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나는 이 죽은 책 들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역설이다.
나, 애나는 나 자신의 '건강하지 못한 문학’을 거부한다.
하지만 '건강한' 문학을 접할 때면 난 그것을 거부한다.
요점은 이런 글들이 본질적으로 비개인적이라는 사실이다.
그것들의 진부함은 몰개성에서 비롯한다.
마치 새롭게 등장한 20세기의 무명작가 한명이 그것들을 죄다 써놓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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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회피가 아니야.
왜냐면 역사를 통틀어 시대와 진정으로 의식이 합치했던 사람들은 다섯이나 열, 아무리 많아도
쉰명에 불과할 거야.
그리고 우리의 현실 인식이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해서 그게 뭐 그렇게 끔찍한 일이겠어? 우리 아이들이….”
"혹은 우리 손자의 손자의 손자들이."
내가 짜증스럽게 말한다.
“좋아. 우리 손자의 손자의 손자들이 돌이켜볼 땐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 틀렸다는 게 아주 분명해지겠지.
하지만 그들의 시대가 지나면 그들의 관점 역시 마찬가지가 될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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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폴은 이제 스딸린을 흉내 내며 말을 이었다.
"명명백백한 일이지. 말할 필요조차 없어.
사실상 말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그런데 왜 내가 굳이 이 말을 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뭔가를 말할 필요가 있느냐 없느냐는 지금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잘 알려진 것처럼 자연은 낭비벽이 심해.
채 몇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이 곤충들은 싸우고, 물고, 뜯고, 혹은 고의로 죽이거나 자살함으로써, 혹은 서툴게 짝짓기를 하다가 서로를 죽이게 될 거야.
그게 아니면, 우리가 얼른 물러나 당장이라도 잔치를 시작할 수 있기만을 기다리는 새들에게 잡아먹힐 테지.
혹시 우리가 다음 주말에 이 즐거운 쾌락의 유원지로 돌아온다면, 혹은 우리의 정치적인 책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다음 주말에 온다면 규칙처럼 이 길을 따라 산책을 할 테고, 아마도 이 사랑 스러운 빨갛고 푸른 곤충들 한두마리를 보게 되겠지.
그러면서 아, 참 예쁘다, 이렇게 생각할 거야!
그때도 주변 모든 곳에서 온통 자신들의 최종적인 쉼터로 가라앉고 있을 수백만의 사체에 대해 머리를 쥐어뜯을 필요는 없는 거지.
더 유익하진 않을 지라도 비교할 수 없이 더 아름다운 나비들, 만일 더 일상적이고 퇴폐적인 오락에 심취하지만 않는다면야 우리가 적극적으로, 심지어 열성적으로 그리워할 그 나비들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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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그 말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오래전 나는 정치 회합에서 진실은 보통 그런 연설이나 발언, 그 어조가 모임과 맞지 않는 까닭에 당시에는 사람들이 그냥 넘어가게 되는 말에 담겨 있다고 결론내린 적이 있다.
우습거나 풍자적이거나 성난 혹은 비통한 어조 말이다.
하지만 그게 바로 진실이고, 모든 다른 장광설과 추가적인 언설은 헛소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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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무너진 사람들이 한꺼번에 수십명씩 탈당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은, 그들이 이전에 충성스럽고 순수했던 것과 같은 정도로 가슴이 무너지고 냉소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환상을 거의 품지 않았던(우리 모두 약간의 환상을 가졌던 건 사실이고, 나 역시 반유대주의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허황된 믿음을 지닌 적이 있었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외려 영국 공산당이 아마도 아주 미미한 한 분파로 서서히 쇠락하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차분하게 새로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표현에 따르자면, '사회주의자의 입장을 재고 하는 일'이다.
오늘 몰리에게 전화를 받았다.
젊은 사회주의자들이 새로 결성한 그룹에 토미가 가입했다고 한다.
몰리는 한쪽 구석에 앉아 그들의 말을 경청했다.
자신이 처음 공산당에 들어 갔을 때인 "젊은 시절로 100년을 거슬러 간" 느낌이었다고 한다.
"애나, 정말 희한했어! 진짜 이상했다니까. 여기 이 아이들은 공산당에 눈 돌릴 시간은 고사하고 노동당에 신경 쓸 시간도 없거든.
얘들이 뭘 잘못하고 있다 해도 놀랄 일이 못 된다니까.
이런 아이들 몇백명이 영국 전역에 살고 있는데, 다들 아무리 늦어도 한 10년만 지나면 영국이 사회주의국가가 될 것처럼, 그것도 자기들의 노력으로 된다는 식으로 말들을 하네.
다음주 화요일이면 탄생할 그 새롭고 아름다운 사회주의 영국을 자기들이 꾸려갈 것처럼 말이야. 얘네들이 제정신이 아닌 건지, 내가 제 정신이 아닌 건지, 원 참…
하지만 중요한 건, 애나, 그게 딱 예전 우리 모습이더란 거야. 안 그러니?
어때? 게다가 우리가 오랫동안 비웃어온 그 지긋지긋한 표현들을 마치 자기들이 금방 생각해낸
것처럼 쓰더구나."
내가 대꾸했다.
"그런데 몰리 넌 토미가 다른 직업을 찾지 않고 사회주의자가 된 게 정말 기쁜 거야?"
"그거야 물론이지. 당연하잖아. 결국 중요한 건, 걔네들이 우리보다는 더 현명하지 않겠느냐는 거야. 그렇지 않니, 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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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자가 아닐까 싶어. 그게 뭐든 말이다.
아, 물론 너한테는 그런 게 아무 의미도 없겠지.
그럴 이유가 뭐가 있겠어.
난 이따금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게 된 순간이 있었어.
사막에서, 군대에서 말이다. 아니면 위험에 처했을 때나.
요즘은 가끔 밤에 그럴 때가 있어.
혼자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하지. 그게 중요하단다.
사람들, 인간들, 그런 건 그저 엉망진창이야.
사람들은 전부 혼자 있게 떨어뜨려놔야 해."
그가 위스키를 홀짝이며, 눈앞의 광 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딸을 응시한다.
"넌 내, 딸이지. 나도 그건 믿는다. 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물론 어쨌든 너를 도와줄 수는 있다마는.
너도 알겠지만, 내가 세상을 하직하면 네가 유산을 물려받겠지.
뭐, 많은 돈은 아니다만.
어쨌든 네 인생에 대해선 알고 싶지 않아.
여하튼 내 맘에 들지도 않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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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전 신경증이라는 단어가 고도로 의식적이고 계발된 정신의 상태를 의미한다는,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려는 모양이에요.
신경증의 본질은 갈등이죠.
하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일, 그것도 삶에 가로막힌 채로 머물지 않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일의 본질 역시 갈등이에요.
사실 전 이제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온전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런저런 단계에서 가로막혀 그저 포기하는 편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자신을 테두리 안에 가두고 제한하기 때문에 멀쩡한 정신으로 살 수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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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상담실로 돌아오셨군요. 물론 더 좋아졌죠.
하지만 그건 의학 용어일 뿐이에요.
신화와 꿈 속에서 사는 대가로 더 좋아지는 게 전 두려워요.
정신분석은 인간을 의학적으로 더 건강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존재로, 도덕적으로 더 나 은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 있느냐에 따라 성립되거나 무너지죠.
그러니 선생님께서 정말로 묻는 건 이런 게 아닐까요?
전보다 지금 더 편안하게 살아가고 있나?
갈등을 덜 겪으며, 덜 회의하며, 한마디로 덜 신경증적으로 살고 있나?
글쎄, 제가 그렇다는 건 선생님도 알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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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진술은 마흔명이 모인 아까의 모임에서 진술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가공할 폭력을 담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모두 질문을 해댔다.
해리의 대답에는 번번이 새롭게 끔찍한 내용들이 들어 있었다.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겪은 일들을 통해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로서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이 순간에조차도 소련에 관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티려는 것.
해리가 말을 마쳤을 때 조용히 앉아 있던 예의 남자가 일어나 열정적인 연설을 시작했다.
넬슨이라는 이름의 그 미국인은 아주 달변이라 말이 술술 흘러나왔고 얼른 듣기에도 여러해 쌓 인 정치적 경험에서 나온 견해가 분명했다.
게다가 힘이 넘치고 잘 훈련된 목소리까지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비난을 쏟아내고 있었다.
서방세계의 공산당들은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전 세계에 거짓말을 하는 오랜 습관 때문에 스스로도 더이상 진실과 허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망해 버렸으며, 남아 있는 것들도 모두 망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제 20차 전당대회와 공산주의의 현황에 관해 모든 것을 알게 되고도, 오늘밤 지도자급 동지이자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자신보다 냉소적인 사람들에 맞서 당 내부에서 진실을 위해 싸워온 사람 이 고의로 진실을 둘로 쪼개 하나는 마흔명의 공식적인 회합용으로 온건한 진실을, 다른 하나는 폐쇄된 그룹용으로 더 혹독한 진실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해리는 당혹스럽고 마음도 상한 모 양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발언 자체를 봉쇄하고자 그를 협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진실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가능한 한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라도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해리 동지는 말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맞서 싸우는 그 관료주의자들의 논리를 답습한 셈이었다.
그러자 넬슨이 갑작스럽게 다시 일어나더니 한층 더 격하고 자기비하적인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신경질적인 발언들이었다.
자리의 모든 사람이 신경질적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내 안에서도 비슷한 신경증 증세가 일어나는 것 같았다.
'파괴에 관한 그 꿈' 속에서 감지되곤 했던 분위기도 느껴졌다.
파괴의 형상이 나타나기 전 일종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느낌 내지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일어나 해리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쨌든 당원이었던 게 벌써 2년 전 일이니 난 비공개 모임에 남아 있을 권리가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보니 몰리가 부엌에서 울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넌 아무 상관 없을 테지. 유대인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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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후 그는 자신이 섹스에 대해 죽고 싶을 정도의 공포를 갖고 있어서 몇초 이상 여자의 몸 안에 삽입한 상태로 머물 수 없고, 늘 그런 식이었다고 고백했다.
초조하게, 본능적인 혐오의 태도로 서둘러 내게서 떨어져 급히 옷을 걸치는 모습을 보니 그의 두려움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최근 정신분석 상담을 시작했고 곧 '치유될' 거라고 했다.
(정신분석 상담, 그 치료를 위한 대화를 시작한 사람들이 마치 자신을 다른 누군가로 바꿔줄 절실한 수술을 드디어 받게 된 듯 들먹이는 이 '치유'라는 단어 때문에 어쩔 도리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중에 우리의 관계는 바뀌었다.
우정과 신뢰로.
그 신뢰 덕분에 우리는 계속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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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 내내 이 미국인들에겐 돈, 초조한 돈의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돈과 (언뜻 그들로서는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그토록 값비싼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딱히 정의하기 어려운 중산계급의 냄새가 났다.
난 그걸 정의하려 애쓰며 거기 앉아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의도적인 평범함, 말하자면 개인성을 쪼그라뜨리는 행위다.
마치 그들 모두 어떤 기대치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고 싶은 내재된 욕구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고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기에,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테두리를 치는 편을 택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
그 테두리는 돈의 테두리다.
(하지만 왜? 그들 중 절반은 좌파였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으며, 미국에서 생활비를 벌 수 없어 영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언제나 돈, 돈, 돈 얘기뿐이었다.)
그랬다. 돈에 대한 조바심이 손에 잡힐 듯했다.
마치 질문처럼 허공에 떠 있었다.
넬슨이 그 널찍하고 흉한 아파트에 사느라 지불하는 월세만으로도 영국인 중산계급 일가족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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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매력적인 여자다.
훤칠한 키에 너무 말라 거의 뼈만 남은 듯한 유대인 여자.
전반적으로 큼직하고 뚜렷한 생김새에 움직임이 눈에 띄는 커다란 입,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큼직한 코와 시선을 사로잡는 커다란 검은 눈동자, 이 모든 요소요소가 아주 매력적으로 이목을
끌었다.
게다가 화려하고 세련된 옷차림.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와(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 점으로, 난 시끄러운 음성이 싫다) 힘차게 터지는 웃음. 훌륭한 스타일과 스스로에 대한 확신, 나는 그런 면모가 부러웠다.
그러다가, 그녀를 지켜보면서 그게 표면뿐인 자기확신임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도무지 넬슨에게서 눈을 떼는 법이 없었다.
절대, 단 한순 간도. (반면에 그는 아내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는데, 두려워서인 것 같았다.) 그런 표면뿐인 자신감과 확신이라는 자질을 난 이제 여러 미국 여성들에게서 알아보기 시작한다.
그 아래엔 조바심이 있다.
그들 어깨에도 초조하고 겁먹은 표정이 어려 있다.
그들은 겁에 질린 상태다.
마치 우주 공간 어딘가에 혼자 나와 있으면서도 혼자가 아닌 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에겐 홀로 있는 사람, 고립된 이의 느낌이 서려 있다.
그러면서도 혼자가 아닌 척하다니.
그런 그들을 보면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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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누구도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 태연한 농담 따먹기에 낄 수가 없었기에 난 잔뜩 취한 채 자리에 앉아 그 사람들을 지켜보았 고,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무엇보다 내가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다음번 위기 상황이 터질 땐 그들이 적시에 서로를 덮어줄 수 없을 거고, 따라서 끔찍한 폭발이 일어나리라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여하튼 자정쯤 그런 일이 터졌다.
하지만 난 쓸데없는 걱정을 한 셈이었다.
어떤 교양의 영역에서 그들 모두는 내게 익숙한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저 멀리 앞서가 있었다.
그들의 자의식적이고 자기풍자적인 우스개야말로 진짜 상처를 입지 않도록 해주는 요인이었다. 말하자면, 바로 그게 어떤 폭력의 순간이 쾅하고 터져서 또 한번의 이혼이나 주사로 인한 파국이 벌어지기 전까지 그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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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그들은 자의식적인 사람들로서 매분 매초 스스로를 의식했고, 그들의 유머는 다름 아닌 이 자의식, 말하자면 자기혐오적인 의식에서 나오고 있었다.
영국인들이 애용하는 무해하고 지적인 언어유희와는 완전히 다른 유머, 그건 스스로를 고통에서 구하기 위한 일종의 소독제이자 해독제이며 '명명하기'였다.
악마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부적을 만지작거리는 촌부의 행동과도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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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별 키스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나는 사기꾼이 된 기분이다.
그들의 아파트에 가지 않고도 내 머리를 써서 미리 알았어야 했던 어떤 사실을 지금에야 깨닫는 것이다.
즉, 넬슨과 그의 아내는 원망에 찬 끈으로 엮여 있고, 그들 인생에서 그 끈은 절대 끊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신경질적인 고통을 선사하는, 온갖 구속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끈이 그들을 묶어놓고 있다.
고통에 찬 경험을 서로 주고받는 그런 관계.
고통이 사랑의 주요한 측면이 된 관계.
세상이 어떤 곳이며 성장이 무엇인지에 관한 깨달음으로서 고통을 이해하는 그런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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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냐고? 그걸 왜 물어? 그게 뭐가 중요해? 그냥 어떻게 될까 궁금했어, 그게 전부야."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일을 돌아보니 유쾌하고 재미있다는 듯, 다소 교활한 표정이었다.
그 미소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내 꿈의 핵심, 꿈에 나타나는 그 형상이 늘 짓는 미소였다.
그 방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난 생각했다.
바로 이런 특징,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 싶다'는 식의 지적인 궁금증, 그것이 공기 중에 만연하며, 우리가 만나는 너무나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고 내 안에도 들어 있는 그 무엇이라고.
그게 우리 됨됨이의 일부라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랑은 상관없잖아,
데 씰바의 이야기 내내 울리던 이런 말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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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사람 성자야. 금욕주의자고. 하지만 신경질적인 사람은 아니야.
아프리카 독립이 정시에 운행되는 버스나 말끔하게 타이핑된 사무용 서신의 문제로 바뀌다니 유감이라고 말해줬지.
그이는 자신도 그게 유감스럽긴 하지만 자기 나라 역시 그런 잣대로 판단될 거라고 하더라.”
애나가 울기 시작했다.
자리에 앉아 울면서, 동시에 그녀는 우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매리언은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궁금한 표정으로 애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물을 간신히 거두며 애나가 말을 이었다.
"우린 웨스트민스터에서 내렸어. 의회 옆을 지나갔지.
그이가 말하더군. 건물 안의 그 하찮은 정치꾼 들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아.
'난 정치인이 되지 말았어야 했어요.
민족해방운동에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우연히 연루되게 마련이죠.
회오리바람에 잎사귀들이 빨려들듯 말이에요.'
그런 다음 잠시 생각하더니 계속 말하는 거야.
'독립을 쟁취하면 난 아마 다시 투옥될 겁니다.
혁명의 첫 몇해에 적합한 인물이 못되니까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연설을 해야 하는데 난 그게 정 힘들어요.
분석적인 글을 쓰는 게 더 행복하죠.'
조금 뒤에 찻집에 들어갔는데 마트롱 씨가 이러더라.
'이런저런 식으로 난 삶의 대부분을 옥중에서 보내게 될 거예요. 딱 그렇게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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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물론 그렇지.
그 사람 친구만 해도 우레같이 고함을 치며 군중을 선동하는 유형인데, 술고래에다 오입질까지 하고 다녀.
아마 그 사람이 초대 총리가 될 거야.
모든 자질을 다 갖췄거든.
왜 있잖아, 대중적인 호소력 같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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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니까요. 그 모든 거창한 것들이 쓸모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토미가 가담했던 시위를 떠올리며 애나가 담담하게 물었다.
"매리언은 이제 너한테 신문 안 읽어주니?" 애나가 물었다.
토미는 애나와 마찬가지로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하지만 어쨌든 사실이에요.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아세요?
누구든 말이에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죠.
내가 정말 말을 걸 수 있고, 정말로 날 이해할 수 있는, 날 친절하게 받아줄 단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겠어.
진실을 털어놓자면, 그게 사람들이 정말 바라는 거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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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위층 재닛의 방으로 가 어둠속에 잠들어 있는 아이 곁에 앉았다.
언제나처럼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사랑의 마음이 솟아났지만, 오늘밤 애나는 이 감정을 비판적으로 되새기고 있었다.
불완전하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고, 싸우지 않는 사람은 없어.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역시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말이겠지.
그런데도 재닛을 만지면 곧장 이런 느낌이 들어.
어쨌든 이 아이는 다를 거라고.
하지만 다를 이유가 뭐겠어?
다르지 않을 거야.
그런 투쟁의 한가운데로 재닛을 내보내야 하겠지.
이 애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지금은 도무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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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한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 성인의 언어를, 즉 감정적으로 성숙한 이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 언어가 그의 머릿속에 있는 하나의 목적에서 나온 것일 뿐 그의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여자도 차츰 깨닫게 된다.
사실 남자는 감정적으로 아직도 사춘기 소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닫고도 여자는 그 언어에 감동하며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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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책의 서평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다.
“여러 불행 중 하나. 여자들, 심지어 가장 괜찮은 여자들마저 자기 자신에 비하면 정말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물론 이 서평은 남자가 쓴 것이다. 진실인즉,
'괜찮은 여자들’이 '별 볼 일 없는 남자들'을 사랑할 땐 언제나 이 남자들이 그들을 '명명'했거나, 아니면 '좋은' 남자들이나 '괜찮은' 남자들에겐 불가능한, 뭔가 애매모호하며 아직 창조되지 않은 어떤 자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남자들, 착한 남자들은 잠재적인 가능성이 결여된, 따라서 종결되고 완성된 부류들이다.
'괜찮은 남자'와 결혼한 '괜찮은 여자'로 중앙아프리카에 사는 친구 애니를 소재 삼아 이에 관한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공무원인 애니의 남편은 견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며 몰래 시를 쓰는 남자다.
애니는 폭음을 일삼는 바람둥이 광산업자와 사랑에 빠졌다.
조합 활동을 하는 광부나 경영자도, 직원이나 소유주도 아니었다.
대박이 터지지 않으면 언제나 적자를 내는 위태로운 작은 광산에 손을 대는 사람이었다.
파산하거나 큰 합자회사에 광산이 팔리면 즉시 손을 털곤 했다.
나는 어느날 두 사람과 함께 저녁을 보냈다.
그는 300마일이나 떨어진 산속 광산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조금 뚱뚱한 편인 애니는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꼭 중년 여성의 몸에 소녀가 파묻혀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가 애니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애니, 당신은 해적의 아내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그 도시 교외의 작은 방에서 해적이라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크게 웃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해적들, 반듯하고 착한 남편, 그리고 육체보다는 상상력의 소산인 이 떠돌이 광산업자와의 연애
때문에 그토록 죄의식에 시달리는 착한 아내 애니.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애니는 너무도 고마운 표정으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술독에 빠져 살다 몇년 뒤에 세상을 떴다.
몇년째 아무 연락 없다가 애니가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너 X 기억나지? 그 사람 죽었어. 내 심정 이해할 거야. 삶의 의미가 사라져버렸어."
영국적 상황에 맞게 이 이야기를 옮기면 괜찮은 교외의 한 아내가 커피숍에서 죽치는 가망 없는 백수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되겠지.
그 남자는 글을 쓰겠다고 하고 아마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이 백수 녀석의 매력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전적으로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남편 시점에서 써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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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빨갱이였던' 미국인이 런던에 온다.
돈도 없고 친구도 없다.
영화계와 방송사 쪽에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다.
런던의 미국인 공동체 혹은 '한때 빨갱이였던' 미국인 공동체는 자신들이 용기를 낸 것보다 서너해 앞서 이미 공산당 내 스딸린주의자들의 태도를 비판하기 시작했던 그 남자를 알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간다.
일어난 사건들이 자신을 정당화해준다고, 또 그들이 적의를 잊어주리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를 향한 그들의 태도는 여전히 그들이 성실한 당원들 혹은 공산당과 같은 길을 걷던 사람들이었을 때와 다를 바 없다.
그는 여전히 배신자다.
자신들의 태도가 달라졌고 더 일찍 당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걸 가슴 치며 후회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들 사이에 악성 루머가 돌기 시작한다.
전에는 교조적이고 무비판적인 공산주의자였으나 지금은 히스테릭하게 가슴만 두들기고 사는 남자, 얼마 전 나타난 이 미국인이 다름 아닌 미 연방수 사국 요원이라는 것이다.
루머를 사실로 받아들인 미국인 공동체는 그에게 우정과 도움을 일절 제공하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남자를 추방하면서 이들은 러시아의 비밀경찰과 반미 행동 위원회, 제보자들,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사람들의 행위 등에 대해 자기들 생각이 옳다는 식으로 떠들어댄다.
최근에 런던에 온 그 미국인은 자살한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죄의식을 잠재우고자, 모두 둘러앉아 과거의 정치적인 사건들을 떠올리며 그를 싫어할 이유들을 찾아내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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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슈거는 그 남자에게서 잘못된 걸 아 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 청년의 아버지더러 한번 오라고 했다.
그렇게 그의 가족 중 다섯명이 차례로 상담실을 찾았다.
그들 모두 멀쩡했다.
그런 다음 어머니가 왔다.
어머니는 얼른 보기엔 정상이었지만 실은 심각한 신경증 환자로 그 병을 가족들에게, 특히 막내
아들에게 떠넘기면서 겨우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마더 슈거는 그 어머니를 치료했다.
치료를 받게 하기까지 엄청난 어려움이 따랐지만. 맨 처음 부인을 찾아온 그 청년은 압박감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꼈다.
마더 슈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래요, 가족이나 집단에서 정말로 아픈 사람은 가장 '정상적인' 사람인 법이죠.
그들은 강한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살아남고, 대신 더 심약한 다른 이들이 그들을 대신해서 질환을 표출하는 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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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건 세상 도처에 널린 공포와 그것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 이상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회 속에 머물러 있음을 안다.
모든 감정의 끝에 재산, 돈, 권력이 있기에 그들은 감정을 거부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일을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경멸하고, 그래서 얼어붙는다.
그들은 사랑하지만 그 사랑이 절반의 사랑이거나 비틀린 사랑이라는 걸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얼어붙는다.
아마도 사랑, 감정, 따뜻함이 살아 있도록 하려면 이 감정들을 모호하게 느끼거나, 심지어 거짓되고 타락한 것, 또는 아직 하나의 관념에 불과한 것, 상상력을 동원해 억지로 만들어낸 그림자에 불과한 것에 대해서도 그 감정들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래,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 고통이라 해도 우리는 그것을 느껴야만 한다.
그 대안이 죽음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무엇이라 해도, 영악하고 빈틈없는 태도, 어정쩡한 태도, 결과가 두려워 주기를 거부하는 그런 태도보다는 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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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부엌에 앉아 방금 떠든 말을 곱씹어보았다.
나 자신은 물론 내가 잘 아는 사람들, 그들 중 일부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모두가 공산주의가 강요하는 순응 속에 침잠해 있었으며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거짓말을 했다. 게다가 '자유주의 성향의' 혹은 '해방된' 지식인들은 이런저런 종류의 마녀사냥으로 너무나 쉽게 떠밀려 갈 수 있었고, 실제로 그랬다.
극소수만이 실제로 끝까지 자유를 지키고 진실을 수호하고자 했다.
아주 드문 몇명만이. 그 소수의 사람들만이 용기를, 진정한 민주주의의 바탕이 되어야 할 그런 종류의 용기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 용기를 갖춘 사람들이 없다면 자유로운 사회는 사멸하거나 심지어 태어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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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친애하는 애나, 우린 생각처럼 그렇게 실패한 인생들이 아니야.
사람들을 우리보다 약간 덜 멍청한 자들로 만들기 위해 인생을 고스란히 바치고 있잖아.
위대한 인물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실을 보통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하려고 말이야.
독방에 감 금하면 인간이 광인이나 짐승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들은 수천 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지.
경찰과 지주를 무서워하는 가난한 자는 노예라는 사실도.
겁에 질린 사람들이 잔인하다는 사실도 말이야.
폭력이 폭력을 낳는다는 것도.
우리도 그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세상의 저 거대한 군중이 그 모든 걸 알까?
아니야.
그들에게 그 사실을 깨우쳐주는 게 바로 우리가 할 일이지.
위 대한 인물들을 귀찮게 해서는 안되니까.
그들은 벌써 금성을 식민화하는 방안을 강구하느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잖아.
자유롭고 고귀한 인간들로 가득한 사회의 비전도 이미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태지.
그러는 사이 보통 사람들은 두려움에 속박당한 채 그들에 비해 만년이나 뒤처져 있어.
위대한 인물들을 귀찮게 해선 안돼.
그들 생각이 맞아.
여기 우리가, 바윗덩어리를 산 위로 밀어 올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그들이 이미 자유롭게 산꼭대기에서 있는 동안 엄청나게 높이 솟은 그 산의 나지막한 경사면 위로 우리가 바윗덩어리를 계속해서 밀어 올릴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고.
당신과 나는 평생에 걸쳐 바윗덩어리를 산 위쪽으로 1인치쯤 더 밀어 올리는 데 우리가 가진 모든 에너지와 재능을 쓰게 될 테지.
그들은 우리를 믿고 있고, 그들 생각이 맞아.
따져보면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닌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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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죽고 싶다면, 한다스나 되는 혁명들이 지금 당신 주변에 일어나는 중이니까 아무거나 골라잡고 가담해서 죽으면 되잖아.”
"난 미리 정해진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못돼.
애나, 무슨 소린지 알겠어?
세상 모든 걸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 이상주의자 젊은이들 패거리로, 거리 구석에 서서 떠들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어.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했던 때가 그 시절이야.
그래, 당신이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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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노스 기억나?" 애나가 물었다.
“물론이지."
"그 사람 일종의 결혼 복지 센터를 여는 모양이야.
절반은 공식적이고 절반 정도는 사적인 센터로.
그 사람 말이, 심리적인 고통과 괴로움 때문에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 넷 중 셋은 결혼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래. 혹은 결혼을 못해서거나."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좋은 충고라도 나눠줄 생각이니?”
"뭐 비슷해. 그리고 노동당에 입당해서 비행 청소년 대상으로 일주일에 두번쯤 야학 교실도 열어볼까 싶어."
"그렇담 이제 우리 둘 다 뿌리부터 영국적인 삶에 편입되는 셈이네."
"그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으려고 아까부터 조심했는데."
"그러게. 근데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결혼 관련한 복지 활동에 종사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좀 그래서."
"다른 사람들 결혼 문제는 자신 있거든."
"아, 진짜 그렇지. 글쎄, 좀 지나면 네 맞은편 의자에 내가 앉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진 않을 거야."
"나도 같은 생각이긴 해.
그래도 자기 몸에 딱 맞는 침대의 치수를 정확하게 예측하기란 불가능한 법이니까."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는지, 몰리가 성가시다는 손짓을 하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애나, 넌 나쁜 영향을 주는 친구야.
네가 여기 오기 전까 지만 해도 이 모든 상황에 고분고분 따르자는 심정이었거든.
사실 그 사람과 내가 아주 잘 지낼 거라 생각하긴 하지만.”
"안 그럴 이유가 없잖니." 애나가 말했다.
잠깐의 침묵.
“그 모든 게 참 이상하지 않니, 애나?”
"아주 이상해.”
잠시 후 애나는 재닛 때문에 집에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친구와 영화관에 간 딸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두 여자는 작별 키스를 나누고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