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네 차례 제주 여행을 했음에도 제주목관아는 기억에 없고, 관아 부속 건물인 관덕정만 떠오르며, 돌하르방은 기억에 없습니다.
어떤 목적을 가진 답사가 아니라 우르르 몰려다니는 단체 여행의 병폐와 가족 여행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위안 삼아 봅니다.
관덕정
1448년(세종 30) 안무사(安撫使) 신숙청(辛淑晴)이 창건한 후 1480년(성종 11)에 목사 양찬에 의해서 중수되었다. 이때 쓴 서거정(徐居正)의 중수기에 의하면 관덕정은 "이 정(亭)을 만든 것은 놀이나 관광이 아니라 본래 설치함이 무열(武閱)을 위한 것인 즉, 지금부터 제주의 사람은 날마다 이에 사습(射習)하되 과녁을 쏠뿐만 아니라 기사(騎射)를 익힐 것이요, 기사뿐만 아니라 전진법(戰陣法)을 익힘으로써 적변(賊變)이 있을 때는 삼읍 백성들이 상산지세(常山之勢)로 수군, 육군, 보병, 기병이 각각 나와서 사력을 다하여 싸워 적군의 목을 베어 이로써 부모처자를 구하고, 이로써 한 고을을 보전하며, 이로써 나라의 간성이 되어 역사에 공명(功名)을 세운다면 어찌 다행히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그 세운 바를 펼쳐 보였다.
그 후 1599년(명종 14), 1690년(숙종 16),1753년(영종 29), 1779년(정조 2),1833년(순조 33), 1851(철종 2), 1882년(고종 19) 방어사 박선양에 의해 보수되는 등 총 7차에 걸쳐 중수하였고, 이후 1924년 일본인 島司 前田善次가 보수하면서 15척이나 되는 곡선의 처마를 2척이나 줄여 보수하니 전통적인 멋은 사라졌으며, 1969년에 10번째 중수시 대대적으로 해체하여 새로 보수하고 주위에 문을 달아 흰 페인트칠을 하여 관덕정의 위용은 사라져 버렸다.
해방 후 1948년 9월에 관덕정은 제주도의 임시 도청으로, 1952년도에는 도의회 의사당으로, 북제주 군청의 임시청사로, 그리고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 문화원으로 사용되는 등 참으로 순탄치 못한 역정을 견디어 오다가 1959년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덕정 내부에는 관덕정과 탐라형승, 호남제일정의 현판이 걸려 있다. 실내 벽면에 그려져 있는 벽화는 작자 미상이나, 상당히 격조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내용은 두보(杜甫)의 취과양주귤만교(醉過楊州橘滿轎)ㆍ상산사호(商山四皓)ㆍ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ㆍ대수렵도(大狩獵圖)ㆍ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ㆍ홍문연(鴻門宴)ㆍ십장생도(十長生圖) 등이다.(출처.제주목관아 홈)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방어사 박선양朴善楊이 관덕정을 중수하면서 1882년(고종 19)에 쓴 글씨.
탐라형승(耽羅形勝)
방어사 김영수金永綏(재임.1778년 12월~ 1781년 3월) 글씨
이산해의 관덕정 현판은 왜 찍지 않았는지...
관덕정 돌하르방
모두 4기가 관덕정 앞과 뒤에 각각 2기가 있으며, 본래는 제주읍성 서문 밖 수호신이었다고 합니다.
돌하르방(옛 답사기에서 가져옴)
조선 시대 제주현, 정의현, 대정현 성문 입구에 세워져 있던 석상石像으로, 마을, 성 수호신, 벽사, 성주민들의 안녕, 풍농, 이정표 기능을 상징하고 있어, 육지의 마을 장승, 사찰 장승, 성문 장승과 동일한 목적으로 조성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돌하르방은 우석목, 무성 목, 벅수 머리, 장군석, 옹중석 등으로 지칭되었으나 해방 후에 돌하르방으로 불려지다가 1971년 8월 26일 지방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디지털 서귀포 문화대전에 의하면 제주에는 총 48기 돌하르방이 조성되었으나 제주성 돌하르방 1기가 분실되고, 2기는 1960년대 국립 민속박물관으로 옮겨져 제주에는 45기가 남아 있으며, 정의현성에는 12기가 있다.
돌하르방의 기원
어떤 연유로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역사적 유래에 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일반적으로 남방 기원설, 제주도 자생설, 몽골 유풍설 등 세 가지 설이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돌 하르방의 조성시기
김석익의 탐라 기년(1918년)
"1754년(영조 30년) 목사 김몽규 설 옹중석어 성문 외 牧使金夢奎設翁仲石於城門外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돌하르방을 세우다"
다른 의견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1754년 목사 김몽규가 제주성 바깥에 조성하였으며, 정의현 돌하르방도 동시대 작품으로 짐작된다.
제주의 돌하르방
http://제주의 돌하르방https://cafe.daum.net/_c21_/bbs_nsread?grpid=dRVf&fldid=MebK&contentval=0005R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337&searchlist_uri=%2F_c21_%2Fcafesearch&search_ctx=LrpNuZSucOsx.YncUoV2ej_tRpHqkOL1hFNwnK7pMwx2pUU9oYvq-CADq-lzJK_pvUKb7yb4c6zjTiqtpKnSCNifajP7gdnedVUvl41NBoCU-C.634PqdBf_BhqbsuaQ-pFrGhQkNdeb-seb-zWjlJwV8_2Au6PT9SG55J6mBk9XukuW4jJrNjfM7anwRQZA5_Xad5vN6RJW3ZQV36C5ICoAeAntYp1TlhD4_2XOFIMiKgVJ4nz8dLH9yWmGLFZjwFgN-Lk7hpywM7T-XLOJFLzpSfRaS5kmVYP3xmLyGSOmFIooR5gGkh-zzps-iSwqu288s79CsKxMdpJISfjMVg00
돌하르방(1)
관덕정 향 우측
돌하르방(2)
관덕정 향 좌측
관덕정 뒤
선덕대宣德臺(?)
앞쪽에 있었다는 월대(月臺)와 과 높이를 맞추려는 목적으로 선덕대를 조성했을까요?
宣德臺
돌하르방(3)
관덕정 뒤, 좌측
상석?
아니면 정료대?
관덕정 돌하르방(4)
관덕정 뒤, 우측
기능과 명칭이 궁금합니다
확실하지 않지만 야간에 불을 밝혔던 정료대 같습니다
관덕정
이번에는 돌하르방 답사가 목적인 탓도 있겠지만 관찰력 부재의 안목으로 인하여 내부 벽화를 놓쳤습니다.
다시 또 제주를 들려야 할 이유이겠지요.
2021.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