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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 우리가 몰랐던 ‘진짜 해병대’
대한민국 해병대원은 상륙훈련에서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KAAV)에 오르기 전
해병대 군가 여러 곡을 목이 터져라 부른다.
전의를 불태우면서 두려움을 놓는 의식이다. 왜 그래야만 할까.
2024년 4월 25일 경북 포항에서 열린 합동상륙훈련에서 해병대원들이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KAAV)에서 나와 돌격하고 있다.
상륙작전은 지옥불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로 어려운 군사작전이다. 연합뉴스
상륙작전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변에 상륙한 미군은 독일군의 포화 속에서 전진해야만 했다.
상륙 5분 만에 전체 198명 중 2명만 살아남은 중대도 있었다.
실제로 상륙작전은 지옥불 돌격과 다름없다.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의 전략가인 손자(孫子)는
『손자병법』에서 아홉 종류의 지형(九地)을 늘어놓으면서 마지막에 사지(死地)를 언급했다.
말 그대로 ‘죽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면서 손자는 ‘사지에선 싸워야 한다(死地則戰)’고 강조했다.
해병대가 적진 깊숙이 상륙하는 바닷가는 사지다.
해병대의 뒤는 바다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배수의 진이 기본이다.
그리고 전방엔 모두 적이다. 적과 바다로 둘러싸였으니 사지에서 살아남으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만 한다.
‘우리가 해병이다’는 여러 해병대 부대를 소개해 왔다. 각론도 좋지만,
해병대의 과거·현재·미래를 다룬 총론도 필요하다.
우선 해병대가 왜 유별난지부터 설명한다.
해병대가 기수를 따지는 이유
해병대는 원래 아군의 기반이 전무한 적 해안에 포화를 무릅쓰고 상륙하는 부대다.
기본적으로 불리한 전황을 가정해 작전을 세운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래서 해병대만의 독특한 조직과 문화가 만들어졌다.
2022년 1월 20일 해병대 훈련병들이 경북 포항시 남구 해안에서 고무보트(IBS) 교육훈련을 받고 있다. 뉴스1
『대한민국 해병대 그 치명적 매력』 등 해병대에 대한 책을 여럿 쓴
김환기 작가는 해병대 문화를 이렇게 정리했다.
①유대감이 남다르다.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해병대는 모두 한 가족이다.
②기수와 상명하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③조직에 맹목적으로 충성한다.
④예비역이 해병대 문화에 강하게 집착한다.
⑤자부심이 대단하다.
⑥남성성을 숭상한다.
이런 특징들은 해병대의 장점이지만, 때에 따라선 단점으로 나타난다.
해병대에 낯선 이들은 눈살을 찌푸릴 수 있다.
하지만 해병대의 전쟁터는 언제나 사지다.
그래서 해병대는 악과 깡을 입에 달아야 한다.
겉으로 보기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지만,
사지에 뛰어들어 적의 총탄과 맞서려면 허세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신화는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좌익 성향 장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해군은 “상륙군 없이 반란군을 완전히 진압하지 못한다”고 인식하고,
해병대 창설을 지시했다.
해병대 창설령. 사진 해병대
1949년 2월 1일 해군의 신현준 중령이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김성은 중령이 참모장을 각각 맡게 됐다.
그리고 그해 4월 15일 해군 덕산비행장에서 380명(장교 26명, 부사관 54명, 병사 300명)
의 병력으로 정식 창설됐다. 해병대 380명은 창설식을 마친 뒤 완전무장을 하고
해발 500m의 천자봉(쌍투바위)을 구보로 올랐다.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천자봉 고지 정복 훈련의 전통이 이때 시작됐다.
그리고 1년 후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났다.
해병대는 무적상승 신화를 써 내려갔다.
1950년 8월 17일 해병대는 경남 통영 장평리 해안에 단독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해병대는 압도적 병력과 우세한 장비를 가진 적으로부터 통영 시내를 되찾은 뒤 지켜냈다.
전설적인 여성 종군기자인 마거릿 히긴스가 이 작전의 성과를 ‘뉴욕 트리뷴 헤럴드’에
전하며 “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그들은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격찬했다고 알려졌다. ‘귀신 잡는 해병’의 어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히긴스의 통영 상륙작전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해병대 관계자는 “히긴스가 나중에 김성은 중령을 만나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말했다.
1950년 9월 15일 해병대는 인천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인천을 확보한 해병대는 서울로 향했다.
해병대는 9월 27일 오전 6시10분쯤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당시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세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공훈’이라는
요지의 표창장을 해병대에 전달했다.
해병대는 1951년 6월 4일 강원 양구 해안면 도솔산을 미 해병대로부터 넘겨받은 뒤
17일간 공방전을 벌여 24개 고지를 북한군으로부터 빼앗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무적해병(無賊海兵)’이라는 휘호를 줬다.
같은 해 8월 21일부터 9월 21일까지 미 해병대와 합동으로 강원 양구
해안분지(펀치볼)를 점령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인이 경탄할 공로’라고 칭찬했다.
창설식을 마친 뒤 해병대 1기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해병대
1952년 3월 18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경기 파주·문산 일대의 장단·사천강 전투에서
해병대는 중공군의 네 차례 대규모 공세를 막아내 수도권 방어에 기여했다.
이만희 감독은 이 전투를 배경으로 1963년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
한국 전쟁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다.
시위대 돌에 피만 흘렸던 해병대
해병대의 전장은 베트남으로 옮겨졌다.
1965년 10월 3일 해병대 제2여단(청룡부대)은 베트남행 수송선에 올랐다.
청룡부대는 베트남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뒀는데, 그중 최고는 짜빈동 전투였다.
짜빈동 전투가 끝난 뒤 채명신 사령관이 11중대장 정경진 대위에게 훈장을 주고 있다. 사진 국가기록원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는 1967년 2월 14일부터 2월 15일까지 베트남 짜빈동에서
월맹(베트남민주공화국) 정규군 1개 연대를 맞아 혈전(血戰)을 치렀다.
방어선이 뚫려 백병전을 감행하고 진내사격까지 벌여 월맹군을 물리쳤다.
해병대가 확인한 월맹군 시체만 243구이며, 포로 2명을 붙잡았다.
아군은 전사 16명, 부상 33명의 손실을 봤다.
해병대는 전투 때 용감했지만, 양민을 돕는 민사작전에선 천사였다.
그리고 1972년 2월 29일 마지막 해병대 장병들이 귀국했다.
부마 민주항쟁 때 시위대를 배려했던 박구일 연대장. 사진은 해병대 사령관(1987~1988) 시절 모습.
그는 1973년 해병대 사령부의 해체 이후 14년 만에 재창설된 해병대 사령부의 첫 사령관(17대)을 맡았다. 사진 미 문서기록관
해병대의 진가는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부마 민주항쟁 때 드러났다.
당시 시위 진압을 위해 부산에 투입된 해병대 제1사단 7연대는 시민과 학생이 던진 돌에 맞아도 시위대를 밀어내기만 했다.
나중에 주변 시민들이 시위대를 말리기까지 했다. 당시 박구일 연대장은 “해병대는 국민의 군대다.
시민들이 때리면 그냥 맞아라”며 “절대 시민들에게 손대지 마라.
다만 총은 뺏기지 마라”고 지시했다.
짜빈동 전투 태극무공훈장의 군신 신원배 장군
신원배(81) 예비역 해병대 소장은 살아 있는 군신(軍神)이다.
짜빈동 전투의 영웅인 그는 최고의 무공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고희(古稀)를 넘어 머리가 희끗하지만, 눈매는 무섭고 눈빛은 날카로웠고 자세는 꼿꼿했다. 노병(老兵)은 아직도 해병이었다.
2010년 중앙일보 인터뷰 때 정복을 입은 신원배 예비역 해병대 소장.
지금은 당시보다 머리가 더 희끗하고 주름이 좀 늘었지만, 눈매와 눈빛은 변함이 없었다. 중앙포토
해병대에 왜 지원했나.
해군사관학교 20기 동기 75명 중에서 15명이 해병대를 지원했다. 내가 땅에선 펄펄 날아다니는데,
배만 타면 뱃멀미 때문에 고생했다. 그래서 해병대를 선택했다. 6·25 때 용맹을 떨친 해병대 선배들 얘기를 들으며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도 생각했다.
신 장군의 해사 동기 15명은 모두 베트남 전쟁을 치렀다. 그중 3명이 전사하고, 4명이 부상했다.
짜빈동 전투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참호 전방 70m쯤에 큰 바위가 누워 있는데, 월맹군이 그 뒤에 숨어
57㎜ 직사화기랑 75㎜ 무반동총을 계속 사격했다. 내가 직접 특공대를 이끌었다.
특공대는 소총 없이 양손에 수류탄 한 발씩을 쥐었다. 아군의 엄호 사격 아래 포복해 바위 앞 15m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일어나 수류탄으로 공격했다. 나는 오른손으로 수류탄 한 발을 투척한 뒤 왼손의 수류탄을 오른손으로 옮겼는데,
실수로 안전핀을 뽑았다. 다른 부대원이 다칠까 봐 수류탄을 재빨리 던졌는데, 수류탄이 적 진지 위에서 터졌다.
그래서 진지를 파괴하고 적 화기를 빼 왔다.
왜 지휘관(그는 당시 소위로 11중대 1소대장이었다)인데도 특공대를 맡았나.
베트남에서 장병들이 절명할 때 힘겹게 숨 쉬면서 피를 토하고 ‘소대장님’을 찾더니 마지막엔 ‘엄마!’ 하고
외친 뒤 세상을 뜬다. 그 광경이 정말 보기 싫더라.
무섭지 않았나.
월맹군이 120㎜ 박격포까지 끌고 와 아군 진지를 포격했다. ‘이러다 죽을 수 있겠다’고 느꼈다.
그런데 포탄을 많이 가져오지 못했는지 금방 멈췄다. 그리고 월맹군이 파상공격을 퍼부었다.
잔잔한 호숫가에 돌멩이를 던지면 물결이 일어 주변으로 퍼진다. 그런데 그 물결 뒤에 다른 물결이 바로 일고,
그 물결 뒤엔 또 다른 물결이 따르지 않나. 월맹군이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했는지, 물결처럼 끊임없이 몰려왔다.
그땐 아찔했다.
어떻게 극복했나.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라고 굳게 마음먹었다.
해병대 정신 때문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도성룡 일병이 안 보여서 포로로 잡혀갔는가 했는데,
전투 후 적군 시신 더미 아래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시체를 들어보니 자신이 쏘던 M1 소총을 3등분했다.
적군이 다시 사용 못 하게 한 것이다. 배장춘 분대장은 LMG 기관총 총열이 벌겋게 달아오르도록 사격하다가
백병전이 벌어지자 적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LMG 몸통과 총열을 분해해 어깨에 메고 나왔다.
손과 어깨엔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화상을 입었다. 이학현 상병과 조정남 일병, 송영섭 일병은
수류탄으로 적과 자폭했다. 정말 눈물겹도록 장한 이들이다.
짜빈동 전투 무훈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신원배 장군. 사진 신원배 장군
그는 짜빈동 전투 다음 해인 1963년 4월 귀국했다. 그리고 1969년 봄에 결혼했다.
그런데 1970년 9월에 다시 베트남 파병을 가게 됐다.
두 번째 참전 계기는.
대대장인 선배가 나를 지목했다. 아무래도 베트남 현지를 잘 알고, 베트콩 전술을 꿰뚫은 내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대목에서 잠시 마른 기침을 했다.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다 보니 두 번째 파병 땐 겁이 났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훤하니 더 두려워졌다. 짜빈동 전투 기억도 자꾸 떠올려졌다.
그도 전사(戰士)이기에 앞서 인간이었다. 그래도 “경험을 살려 부하들 희생 없이 잘 마쳤다”고 말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정부에 배상 책임을 물은 지난해 판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100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1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강조했다.
우리는 수색작전에 나설 때 양민 보호를 최우선으로 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은 전방과 후방이 없었다. 작전지역의 상당수 마을에선 남자는 베트콩이었고,
노인·여자·아이들은 베트콩 가족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베트콩은 낮에는 동굴이나 땅굴에 숨었다가,
밤에는 기어 나와 민가를 약탈했다. 그리고 정부 협조자를 사살하거나 성폭행도 저질렀다”고 기억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 일화를 꺼냈다.
수색정찰 때 동굴을 발견했다. 최루탄을 안으로 던지니 임산부가 아이 2명과 할머니와 함께 나왔다.
임산부는 이미 애를 낳고 있었다. 의무부사관을 보내 출산을 도왔다. 아들이었다. 그리고 중대본부 근처에 집을 마련해 줬다.
어느 날 가족이 사라졌다. 남편인 베트콩을 따라 나간 것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수색정찰을 나갔는데 그 가족을 다시 만났다.
이번에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랬더니 부인이 남편을 설득해 귀순시켰다. 남편은 베트콩에 대한 중요 정보를 알려줬다.
동굴에 숨은 임산부 가족을 구출한 뒤 해병대원이 아이를 보살피고 있다. 사진 신원배 장군
신 장군은 “수많은 작전 중 임산부 구출 작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시 나온 아이에겐 부대명인 ‘청룡’이라는 이름을 줬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에 가봤나.
재향군인회 사무총장이었던 2009년 베트남 향군 초청으로 방문했다.
처음엔 ‘짜빈동 전투에 대한 원한을 아직도 가지지 않을까’ 하며 긴장했다.
그러나 베트남 향군 측이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듯 극진히 대접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당시 수소문했지만, 결국 ‘청룡’이를 찾지 못했다.
신 장군은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너무 착잡하다”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순직 해병 사건 말인가.
그렇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해병대는 소수 정예이고, 현역과 예비역이 똘똘 뭉쳤는데…. ‘
누가 잘했니’ ‘누가 못했니’ 그런 판단은 하지 않겠다.
다만 숨진 해병의 명예를 높여주고, 유족을 위로하는 일은 뒷전이다.
이걸 먼저 해야 한다. 그리고 빨리 사태를 수습하자. 해병대 사기가 떨어지면 누가 좋아할까.
전 세계 3위의 전력…군 내부선 소수파
국군조직법엔 국군은 육·해·공군으로 조직하며,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고 돼 있다.
그리고 해군은 상륙작전을 포함한 해상작전을,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한다.
2024년 2월 15일 경북 포항시 해병훈련장에서 해병대원과 미 해병대원들이 공중돌격 및 복합적
상륙작전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이날 훈련은 KMEP 연합훈련의 일환이었다. 사진 해병대
해병대는 태생적으로 해군과 유기적으로 협조한다.
상륙 후 지상에서 작전하다 보니 육군처럼 포병과 기갑 전력을 갖췄다.
적진에 빠르게 침투하는 입체고속 상륙작전을 지원하는 항공 전력도 보유하고 있으며,
공정작전도 벌인다. 산악작전도 가능하다. 산전수전(山戰水戰)에 능한 부대가 해병대다.
최초의 해병대는 1537년 스페인에서 만들어졌다.
전 세계엔 해병대(海兵隊)·육전대(陸戰隊)·해군 보병 등 명칭의 상륙작전 부대가 활동하고 있다.
해병대는 육전대나 해군 보병과 비교해 다양한 병과와 전력을 갖춰 상륙작전 외
여러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병대는 미국 해병대,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육전대에 이에 세계 3위의 전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해병대는 군 내부에서도 소수이다 보니 목소리가 적고 힘도 약했다.
7대(강기천)·8대(정광호)·9대(이병문) 이후 해병대 사령관의 지위는 대장(4성)에서 중장(3성)으로 내려갔다.
1973년 10월 10일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돼 해병대 사령관 직책이 해군본부 제2 참모차장으로 바뀌기도 했다.
그러다 해병대의 끈질긴 청원 끝에 1987년 11월 1일 해병대 사령부가 재창설됐다.
1998년 해병대 사령관은 국군 중장 가운데 최선임으로 올라섰다.
2011년 6월 15일 해병대 사령관이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사령관을 겸하면서 육·해·공군 합동부대를 지휘하게 됐다.
2019년 군인사법이 개정돼 해병대 사령관이 4성으로 진급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됐다.
2022년 군기령이 고쳐져 해병대기가 각종 군 행사에 내걸릴 수 있게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후보 때 해병대 사령관을 대장으로 올리고 4군 체제로 전환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국방부나 합동참모본부가 생각하는 해병에 대한 전략적 가치가 높지 않기 때문에 공약이 이뤄지긴 쉽지 않다.
늘, 그리고 앞으로도 홀로 헤쳐나가 해병대는 작지만, 강한 군대로 거듭나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우선 해외 파병과 해외 훈련을 늘리고 있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 동의부대의 경비 임무에 26명을 보냈다.
2004년 이라크 자이툰 부대와 이라크 주재 한국대사관의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아이티 재건 지원단에도 병력을 보냈다. 인도·파키스탄·그루지아·수단·지부티·레바논·쿠웨이트
등에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옵저버를 파견했다
2024년 2월 26일부터 3월 8일까지 태국에서 열린 코브라골드 훈련에서 해병대원이 연합 정글 수색훈련을 뛰고 있다.
사진 해병대
대한민국 해병대는 쌍룡훈련·KMEP 등 형제 사이인 미 해병대와의 연합훈련에 열심이다.
미 해군이 짝수년에 여는 환태평양 합동 연습(RIMPACㆍ림팩) 외 호주의 탈리스만 세이버, 몽골의 칸퀘스트,
태국의 코브라골드, 필리핀의 카만닥 등 다국적 연합훈련을 적극적으로 뛰고 있다.
이들 훈련에서 인도적 구호 활동과 연합 상륙작전 능력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해병대의 앞길은 평탄하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우선 인구절벽 때문에 군대에 입대하는 장정의 숫자가 줄고 있다.
현행 병력 2만8000명을 유지하긴 힘들다. 김포나 서해5도에서 현행작전(경계작전)을 지속하는 게 문제다.
그리고 앞으로 전쟁에서 대규모 상륙작전도 어려워졌다. 적이 감시·정찰로 아군의 상륙전력을 파악한 뒤 이를 타격할
수단이 많아지고 강력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시 북한 후방에 상륙작전을 펼치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미 해병대가 중국과의 분쟁에 대비한다며 전차와 기갑병과를 없애고, 항공전력을 무인기로 재편하고 있다.
또 팔라우·인도네시아·파푸아뉴기니 같은 태평양 지역으로 병력과 장비를 넓게 분산하려고 한다.
김태성 전 해병대 사령관은 “대한민국 해병대는 규모가 작더라도 단독 상륙작전을 펼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하고,
유·무인 복합체계를 잘 갖추면 된다”며 “통일 이후 해병 전력이 충실한 주변국을 상대하려면 해병대가 필수적이다.
해병대는 해병대로 맞서야 하기 때문”이라고 제언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창설 이후 온갖 어려움을 홀로 헤쳐 나갔다.
그리고 21세기에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신화를 이어 나갈 것이다, 해병대의 저력 때문에.
잠시 호흡을 골랐다. 아직 다루지 못한 해병대 부대가 많다. 다음에 이 부대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찬란한 75년 해병대 역사에서 씻어야 할 과오들
‘우리가 해병이다’는 대한민국 해병대 찬가다. 그렇다고 해병대의 흑역사를 여기서 감출 생각은 없다.
해병대의 역사가 늘 자랑스러운 일로만 채워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5월 2일 국회 본회의에서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이 통과되자
방청석에 있던 해병대 예비역 연대 회원들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61년 5월 16일 당시 박정희 육군 소장이 이끄는 혁명군은 서울로 진입했다. 그 선봉에 해병대 제1여단이 섰다.
1여단은 한강 인도교를 건너려다, 이를 막는 육군 헌병(군사경찰)대와 총격전을 벌였다. 해병 6명과 헌병 3명이 부상했다.
겁을 먹은 육군 헌병대는 도주했고, 혁명군은 입성한 뒤 주요 시설을 접수했다. 5·16 군사정변의 과정이다.
6·25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7년도 안 돼 새벽녘 또다시 들리는 총소리로 서울 시민들이 놀랐다.
그런데 적군과의 교전이 아니라 아군 간 전투가 소란의 원인이었다.
해병대가 아군에게 총을 쏴 피를 흘리게 한 건 사실이다.
해병대는 남성성이 넘치는 집단이다 보니 병영 부조리로 악명이 높았던 때가 있었다.
특히 ‘기수 열외’가 심각했다. 해병대는 기수를 철저하게 따지는 문화가 있는데,
기수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왕따보다 더 가혹한 행위다. 아예 호적에서 판다는 뜻과 같다.
2011년 7월 4일 강화도에서 일어난 총격 사건에서 김모 상병이 생활관 안에서 K2 소총을 난사해
동료 해병 4명이 죽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기수 열외 때문에 일어났다.
평소 군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김 상병은 기수 열외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부대원들에게 해병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후임병들은 ‘고참’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병영 부조리의 피해를 봤던 정모 이병도 범행에 가담했다.
군사재판에서 김 상병은 사형, 정 이병에게는 징역 10년이 선고됐고, 이들에게 가혹 행위를 한 혐의로
4명의 선임 해병도 구속됐다.
고질적 병폐가 드러나자 해병대는 인성검사를 강화하고 병영 부조리에 대한 엄벌 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2022년 연평도에서 선임 해병 3명이 후임병을 때리고 성고문을 한 사건이 있었다.
많이 좋아졌지만, 해병대가 병영문화 혁신에 더 노력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지나친 경계근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로 일어난 사고들도 있었다.
2016년 6월 13일 대청도에서 근무 중인 해병 이병이 생활관에서 수류탄을 터뜨렸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건물 내부 일부가 부서졌다. 그는 군사경찰 조사에서 “섬 경계근무가 답답했고
주변 관심을 끌고 싶어 수류탄을 터뜨렸다”고 말했다.
해병대 관계자는 “현행작전을 담당한 부대에서 병영 부조리가 종종 일어난 편”이라고 시인했다.
해병대를 뒤흔든 사건도 있었다.
2023년 7월 19일 경상북도 예천군 내성천 보문교 일대에서 폭우 실종자 수색을 하던 해병대 제1사단 해병 1명이
물에 빠진 뒤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폭우로 물이 불어나 유속이 굉장히 빨랐는데도, 구명조끼나 안전대책 없이
무리하게 투입한 게 화근이었다. 소방 당국이 수색작전이 위험하다며 만류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죽음 앞에 두고 해병대는 갈라졌다. 사단장과 현장 지휘관은 수사 과정에서 서로를 탓했다.
누구 하나 순직 해병의 죽음에 책임지겠다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사망사건 조사 결과를 경찰에 이첩하려다 이를 보류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이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보류에 반발했던 해병대 수사단장은 ‘집단항명 수괴’로 낙인찍혔고, 결국 불구속 기소됐다.
일부 해병대 예비역은 해병대 수사단장을 지지하며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2023년 7월 22일 경북 포항 해병대 1사단 체육관인 '김대식관'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해병대원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이로써 끈끈함을 자랑하던 해병대는 안팎으로 흔들렸다. 그리고 정치권이 특검법을 논의하면서 사건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가해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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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도 훈련하고 싶습니다!" 尹 면전에 '빽' 요청한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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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엣가시’ 백령도 치려는 北…해병대는 지하요새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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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명찰’은 왜 그를 울렸나…‘해병 성지’ 천자봉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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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같이 침투, 불같이 타격"…해병 1% '녹색 베레모'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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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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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라를 위해 목숨도 두려워 하지 않는
귀신도 잡는다는 대한민국의 아들들 ~*~
멋지고 자랑스럽습니다.
어느 명문대학(서울대)과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명문대학인 해병대입니다.
억울한 사람 없는 대한민국이면 좋겠습니다.